어느 날 그곳에 인간이 나타났다. 원숭이들은 경악했다. 두 발로도 쓰러지지 않는 곧곧한 자세 빛나는 눈빛 의연한 걸음걸이는 경외감 그 자체였다.
아아, 저것이 뭬야? 두 발로 저케 잘 걷는단 말인가?
저 동물은 뭰가? 원숭이 짱이 소리쳤다. 그러자 쫄이 말하였다.
하늘에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권한을 준 특별한 동물입니다. 이름하여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아니 그런 무서운 자가 조용하게 잘들 사는 이 밀림에 우케 나타났단 말인가? 왜?
그렇다. 그 동안 金科玉條(금과옥조)로 지켜 온 율법의 밀림을 불태울 것만 같은 두려움의 존재, 슈퍼스타가 나타난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바라보는 눈이 원숭이들이 인간을 처음 보고 경악해 하는 것 보다 더 했다.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파괴할 그 무엇이었다. 이단 중에 이단, 괴수 중에 괴수였다.
우리는 물, 너는 기름. 하여, 너를 퍼내야만 우리가 살고 그것만이 영원히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 할,
솔직히 우리끼리 하는 말로 와서는 안될 메시아의 神話(신화)를 지키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選擇(선택)받은 민족임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矛盾(모순)임을 그리고 잘못된 逆說(역설)의 삶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메시아는 영원히 이 땅에 오지 말아야 함은 그가 옴으로서 우리의 존재 이유는 一瞬(일순)에 鐘(종)치는 것이니까~
하여, 예수 당신은 우리의 메시아가 될 수 없음이다, 당신이 우리의 메시아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행하는 피의 代價(대가)를 우리 자손에게 돌리더라도 당신을 죽여야 우리가 살 수 있음이며,
오늘 비로소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당신도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를 씌울 터이니 제발 걸려서 이 슬픈 소모전을 마감케 하라. 하면서 내던진 올가미가 간음한 여자였다.
아, 참으로 교활 뻔뻔한 그 사악한 마음이 그 방향에서 공든 탑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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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그들이 그랬다. 예수를 스승으로 생각해서 참 지혜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여자는 어차피 돌에 맞아 죽을 소모품이고, 소모품을 올무로 하여 예수라는 전리품을 취하자는 수작이었다.
율법은 떡바위였고 여자는 날계란처럼 가련하구나. 여자를 살려주라고 감히 떠들자 누구냐? 손에 손마다 계란을 깨뜨릴 돌이 쥐어져 있구나.
예수는 들은 척도 본 척도 않는다. 빛나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전에 앉아 있는 모습조차도 원숭이들에게는 경외감 그 자체였다.
저 경외감에 꿀리면 밀린다 어서 끝장을 내자. 초반 승부가 판가름 난다.
원숭이들은 진득한 맛이 없다. 그래서 한 사내가 여자를 내동댕이치며 말한다.
""선생아,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의 율법에 돌로 치라 명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소?""
선생이라고 下待(하대)를 한다. 그들은 이미 금과옥조 모세의 결론을 내렸다.
예수와 같은 분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 율법의 사회구조가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생각해보라.
모세가 반딧불이라면 태양 같은 그리스도를 눈앞에 보면서도 그들은 볼 수 없었다.
너무 큰 角(각)은 각으로 보이지 않듯이 너무 밝은 빛은 보지 못함과 같음이다.
(2)
예수는 여자가 엎어져 돌무덤이 되거나 말거나 묵무부답이다.
어린애처럼 그저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쓸 뿐이다.
예수는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우주를 거닐고, 보지 않는 것 같아도 군중의 마음을 보고 있었음을 그들은 모른다.
그들의 살인과 모함의 잔혹한 마음을 그 너머에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음을 모른다.
그저 자기들의 영토를 지키려는 것일 뿐.
예수는 천천히 일어나 여자를 끌고 온 사내에게 두 눈을 멈춘다, 네 놈이 사실 제일 간음하고픈 킹 오브 킹콩이더냐?
그리고는 손에 바나나 아니 슈류탄을 든 웬수이들을 휘 돌아보신다
"너희 웬수이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던져봐라"
예수의 이 말씀을 모세가 말했다면 수많은 돌들이 그 순간 여자에게로 날아갔었음이라.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음에 그 돌이 원숭이들의 마음으로 날아가 스스로 돌에 타박을 입은 것임이었다.
그것을 일러 교훈과 사랑이라 함이다.
수천 방패보다도 예수의 사랑의 방패 하나가 그들이 던진 돌팔매질을 되받아쳤음이라.
하늘에서 쓰는 말과, 땅에서 뒹구는 말에 있어서 해석을 잘 해야 함이 여기에 있다.
같은 말이라도 땅에서 뒹구는 모세의 말은 율법이 되어 돌들이 여자를 죽이고,
예수의 말이면 용서와 사랑이 되어 날아가던 돌도 되돌아간다.
예수의 말씀은 이처럼 명쾌하고 간단하다. 寸鐵殺人(촌철살인)이다.
예수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다 뭔가를 썼다.
이제 야구 경기가 끝났으니 집에 가서 냄새 나는 이나 닦고 자거라 그런 것임이다.
아, 간단한 한 방이로구나, 한심한 원숭이들아 어쩌다 人子(인자)를 우습게 보고 꿱꿱거렸느냐?
죄 많은 늙은 것들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가지고 온 돌만큼의 타박을 입고 모두 돌아섰다.
그리고 예수와 여자외에 아무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거기엔 12명의 제자들도 없다. 왜 그 자리에 제자들이 없었는가라는 미스테리가 남는다.
다만 요한만이 어디선가 숨어서 이 살벌한 모습을 보고 후에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는 요한과 다름 아니다. 율법과 타협하고 간음한 제자들.
이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생존하여 늙은 요한이 눈물로 쓴 신랑 예수에 대한 思美人曲(사미인곡)이며 주님께 바친 자신의 참회록이다.
어쨌거나, 여자와 예수의 그 靜的(정적)인 모습이 그립구나.
성경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다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간음했다는 여인. 흐느끼면서 예수라는 남자에 대한 경외적 사랑. 도둑처럼 이를 숨어보는 나약하고 열등한 요한.
여자를 바라보는 주님의 인자함. 아침 햇빛 찬란한 성전의 뜨락.
여자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은 사내. 죽음과 삶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저 사내는 누구인가?
여자는 운다. 참회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동안 나를 지배한 죄의 그물을 한 순간에 걷어 내는 주님.
여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다.
예수는 다시 일어나 천천히 여자에게로 다가가 말한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교부들의 번역은 늘 교만하다. 여기에도 남존여비가 있구나.
"아주머니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주머니를 정죄한 그들이 없는가요?" 예수님은 불쌍한 백성들에게는 천성적으로 겸손함이다.
"주님,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교부들의 상상의 번역은 또 이 모양이다.
"저도 아주머니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힘이 드시더라도 그런 일로 돈을 벌어 살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정작 예수님이라면 이 정도의 겸허함이 있었음이라.
그리고, 예수는 삶이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어떤 삶이라 할지라도 그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었음이라.
죄를 범하면 그 죄가 너를 스스로 정죄할 것임을 일렀음이라.
성경에는 요한복음 외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