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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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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1989년
건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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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재(五土齋)는 고려 태자첨사 김용비(金龍庇)의 묘각을 겸한 사당이다. 의성김씨 문중에서 2년여에 걸쳐 건립한 곳으로, 의성군 사곡면 토현동 오토산에 자리하고 있다. 오토산은 의성읍에서 남쪽에 있는 명산이고, 그 아래에 토현지가 있어 찾아가기 쉬운 곳이다. 오토산을 알리는 표지판과 김용비 신도비각이 서있는 입구부터가 오토재의 영역이다. 여기에서 위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문루(門樓)를 고쳐 만든 사경당(思敬堂)이 위용이 있는 모습으로 서있는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전사청이 꾸며져 있다. 다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중턱에 오르면 후손들이 모여 재숙(齋宿)하고 강론하는 오토재가 있다. 오토재는 넓은 강당이면서 문을 단 대실(大室) 형태이다. 또한 정면 5칸, 측면2칸의 건물이지만 그 기둥 간격이 3.3m로 여타의 건물에 비해 대단히 크다. 담장을 나서면 언덕으로 다시 계단이 이어지고 그곳에 1868년에 의성읍 중리에서 옮겨온 진민사가 서있다. 진민사는 김용비의 공덕을 기리고자 고을 사림들이 세운 사당으로, 의성 읍내에 있는 옛터에는 진민사유허비각이 세워져 있다. |
건축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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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재와 진민사는 건물이 장대하고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다. 또한 조경도 잘 되어 있어 재실의 경건함뿐만 아니라 공원의 넉넉함까지 품고 있다. 오토재 묘역의 계획적인 조성은 씨족의 추원(追遠)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
건축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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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산에 도착하면 우선 넓은 주차장에서 한숨 돌려야 한다. 좁은 농로를 지나 산속에 들어왔고, 묘역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걸음을 옮기면 오토산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 맞은편에는 오토산 신도비각이 단청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고, 오르막길 좌측에는 사원지(思源池)라는 연못이 있어 눈을 맑게 해준다. 본격적인 건물은 사경당에서 시작한다. 사경당은 대청과 방 3칸이 갖춰진 정면 5칸․측면 3칸의 팔작기와집이다. 그 가운데 좌측 방은 전사청 역할을 하고, 재실에 필요한 살림도구가 갈무리되어 있다. 현재 유사 한 분이 기거하고 있다. 사경당을 지나 외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오토재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오토재는 강당인 동시에 문을 단 방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그 기둥 간격이 3.3m로 여타의 재실 건물에 비해 대단히 큰 편이다. 이곳에서 문중 회의 및 강론을 한다. 마지막으로 오토재 뒤로 사당인 진민사가 고요하게 서 있다. 진민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퇴칸을 둔 맞배기와집 형태이고, 오토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져 있다. |
문중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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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재(五土齋)와 진민사(鎭民祠)는 의성 김씨 문중이 조상을 추모하는 |
오토재(五土齋)와 진민사(鎭民祠)는 의성 김씨 문중이 조상을 추모하는 근거지이다. 그리하여 사당과 오토산 묘역(墓域)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유지 보존하는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517년(중종 12)에 모재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에 의성 고을 사람들은 김용비의 사당을 지키고 제향을 받들었다. 김안국은 그 일에 감격하고, 그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조세를 면제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또한 사당에 진민사라는 편액을 걸고 해마다 봄․가을로 중월(仲月)에 제수를 관에서 보내어 제향을 지내게 하였다.
1576(선조 9)년에는 청계(淸溪) 김진(金璡)이 오토산 입석문(立石文)을 경향 각지의 족친들에게 보내어 정목(正木) 한 필씩 거두어서 묘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577년 9월에 동강 김우옹(金宇顒)이 비문을 짓고,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주관하여 묘 앞에 비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묘소에 상석은 퇴락하고, 진민사는 길가에 위치하여 소란스러웠다. 이에 1656년(효종 7)에 안응창(安應昌)이 의성현령으로 부임하여 묘소에 상석을 갖추고 재사를 세워서 10월 초하루를 묘사일로 정하고 제수를 관에서 지급할 것을 결정하여 집행하였다. 그리고 진민사도 의성읍 청사(廳舍) 뒤편에 있던 것을 동쪽으로 옮겨서 중건하였다.
그 자리는 현재 의성 읍내 유허비가 있는 곳이며, 사당에 딸린 재실과 주사의 시절도 갖추고 위답도 마련하여 제수를 넉넉히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기술한 「진민사이건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진민사는 1749년(영조 25)에 한차례 중수를 거치게 되고, 1807년(순조 7)에 임술보(壬戌譜)를 간행하고 남은 예산으로 다시 한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이로부터 61년 후인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진민사도 헐리게 되었는데 지금의 오토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읍내에 진민사가 있었던 자리에 1890년(고종 27)에 유지비와 비각이 세워지고, 1904년에 비각에 단청을 하였고, 1911년에 비각을 중수하였다.
오토재사가 화재를 만나 모두 타버렸는데 1770년(영조 4)에 옛 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추원당(追遠堂) 4칸, 사경당(思敬堂) 2칸, 승실(僧室) 8칸, 나머지는 부엌과 창고를 중수하여 오토산재사로 일컬었다. 그 뒤에 또 화재가 나서 중건을 거듭하다가 오토산 추원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에 오토재․사경당 등을 다시 세울 것을 의결하고 추원사업회를 조직하였으니 1987년에 일을 시작하여 1988년에 일을 마무리하였다. 가장 윗자리에 진민사를 세우고 아래쪽으로 오토재, 그 아래에 사경당을 세워 지금과 같은 장대한 모습을 갖추었다.
오토재에서는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는데 봄에는 양력4월5일, 가을에는 10월3일 개천절로 날짜를 맞추었다. 묘사를 지낼 때는 전국 각지에서 약 2백여 명의 문중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
관련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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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비(金龍庇) |
김용비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왕자인 석(錫)의 후손이다.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 의성군이니 묘소는 의성 오토산 동향의 산등성이에 있다. 고을 사람들에게 커다란 공이 있어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서 향사를 지냈는데 묘호(廟號)를 진민사(鎭民祠)라고 하였다는 것이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외손 이숙(李潚)이 지은 족보 서문에 “홍건적을 토벌한 공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괴산보(槐山譜)에서는 “관직은 요동성 참지(參知) 정사(政事)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부여 김태손(金兌孫)의 집에 소장하였던 문서에 “김용비는 고려 명종조의 인물로 관직은 정승에 이르렀으며 추성보절(推誠保節) 공신으로 의성군에 봉하였다. 부인은 영동정(令同正) 강후주(姜后柱)의 딸이다.”고 되어 있다. 이 밖에 전하는 문헌이 빈약하여 기록에 자세한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
김용비는 아들 세 분과 사위 다섯 분을 두셨다. 장남은 김의(金宜)인데 상서(尙書) 좌복시(左僕寺)이고, 차남은 김굉(金紘)인데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이고, 삼남은 김영(金英)인데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이다. 김의의 아들 김서지(金瑞之)는 내영소윤(內盈少尹)이고, 김서지의 아들 김태권(金台權)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문예부(文睿府)좌사윤(左司尹)이고, 김태권의 아들 김거두(金居斗)는 봉익대부 공조전서(工曹典書)이며 김거두의 아들은 선략장군(宣略將軍) 도만호(都萬戶)인 김유(金洊)이고, 김유의 아들은 현감(縣監)인 김영명(金永命)이고, 김영명의 아들은 승문지사(承文知事)인 김한계(金漢啓)이다. 김한계의 뒤로 삼세에 성균생원인 김진(金璡)에 이르러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김극일(金克一)은 통훈대부(通訓大夫) 밀양부사(密陽府使)이고, 김수일(金守一)과 김명일(金明一)은 모두 생원이다. 김성일(金誠一)은 이조좌랑(吏曹佐郞)이고, 김복일(金復一)은 성균학록(成均學錄)이니 문유(文儒)가 한 집안에 모였다.
김용비는 홍건적을 물리쳐 민생을 보살핀 공덕으로 진민사에 배향되었는데 진민사 상향축문(常享祝文)에서 그의 역할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시대에 덕이 높았고 德尊當世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쳤고 澤在斯民 고을에서 높이 사모하였고 鄕邦景慕 수년 동안 새롭기만 하네 曠百維新 |
의성 > 중부권 > 토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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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산. 금성산. 오토산으로 둘러싸인 토현리 |
사곡면(舍谷面)은 의성군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동쪽은 높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청송군 현서면과 접하고, 북쪽은 산악지대로 길게 옥산면과 연접된다. 남쪽은 춘산면과 접한다. 서쪽은 다소 개방되어 의성읍과 경계를 이룬다. 남대천이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사곡면을 관통하나 평야는 빈약한 편이다. 서쪽 하류 지방의 용수고갈을 해갈하기 위해 사곡면 전체를 댐의 저류지로 거론된 바가 있다.
오토재가 있는 토현리는 서쪽으로 구리산이 둘러서 바람을 막고 토현못이 있으며, 남쪽으로 금성산이 우뚝 섰고, 북쪽으로는 오토산이 높이 솟았다. 토현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삼종손이자 그의 문인인 이희정(李希程)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또한 금성면 만천동과 접경하는 고개에 흙이 많이 쌓여 있어서 토현(土峴)으로 불린다. 마을에는 진성 이씨와 신주 강씨 등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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