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는 말한다.
바다는 잔잔할 때가 흔하지 않다.
새벽에 일어나 바닷가엘 나가보면 바닷물은 찰랑 찰랑 모래사장에서 장난치듯 들고나기를 계속한다.
어떤 날 날씨라도 흐리고 바람이라도 불기 시작하면 바다는 하얀 거품을 잔뜩 어깨에 둘러메고 모래언덕으로 달려 와서는 마치 아이들이 장난하듯이 확 내뱉고는 달아난다.
달아날 때의 파도는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다가도 마치 부부싸움을 했다가 해해하고 금방 돌아서는 줏대 없는 신랑처럼 마음을 바꿔 방금 전처럼 거품을 내뿜다가는 달아난다.
어떤 때 파도가 밀려 올 때는 바닷속의 미역도 딸려 나오고 조개도 쓸려 나오기도 한다.
바닷물이 파도를 일으키며 밀려들 때에는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들다가도 갑자기 모래 언덕에 와서는 맥도 없이 스르르 자자들고 만다.
5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 작은 항구 남호 마을의 사람들은 대부분 작은 목선 한 개씩은 가지고 있는 어부들로서 고기가 많이 잡힐 때에는 동네가 시끄럽도록 흥겨울 때도 있지만 여름에 장마라도 지면 배가 바다로 나갈 수가 없어 때를 굶을 때가 많다.
아버지가 돈을 잘 벌어 오시면 학교에 납부할 돈이 생겨 아이들도 신이 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결석을 할 때도 있다.
마을이 바닷가다 보니 외지 사람들이 여름방학이면 바다가 보이는 솔밭아래 천막을 치고 야영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난다.
바닷가를 끼고 초등학교가 하나 있는데 아이들은 특히 대외행사인 글짓기대회나 미술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타오기 때문에 교장선생님은 항상 아이들을 보면 싱글벙글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어떤 때 길가에서라도 만나면 솔밭이나 해변 모래사장으로 데리고 가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교장선생님이 어린이들과 가깝다 보니 학부형들과도 잘 어울리시고 아이들이 있는 집이면 은 불쑥 들어가셔서는 숙제도 풀어주시고 혹 부모님이 고기잡이를 나가셨으면 데리고 나오셔서는 밥도 사주기도 하셨다.
그중에도 교장선생님이 잘 들리시는 집이 하나 있었으니 한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황선자네 작은 가게 방이었다.
선자네 아버지는 마을에서 오랫동안 이장을 맡아 보시며 마을의 궂은일은 다 맡아서 하시는 관계로 집안의 살림은 선자 어머니가 도맡아 하였다.
선자 어머니는 매일이다 싶이 새벽이면 포구에 나가서 고깃배가 들어오는 대로 해물을 떼어다가 시장에 나가서 팔아오는 것이 일과인데 아버지가 선자 어머니를 거들어준다는 게 한껏 차부까지 해물함지를 날라다가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겟방에는 동네에서 필요한 일용품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한시도 비울 수가 없어 엄마가 새벽시장에라도 나가시면 다섯 살이 겨우 된 선자를 깨워 가게 방을 보게 하였다.
선자는 어릴 때부터 바지란 하여 엄마가 시키는 심부름이면 무슨 일이든지 잘 하여 동네에서는 어쩌면 그렇게 엄마를 돌보는 예쁜 딸을 두었느냐며 부러워들 할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은 선자네 형편이 그런 줄 알기 때문에 선자 엄마가 집을 비우고 간 사이에도 가게 방에서 물건을 살려면 물건 값을 돈 통에다 넣고는 가져갔던 것이다.
이렇게 동네 사람들이 선자네 사정을 잘 봐주다보니 선자 어머니는 1년에 한번 동짓달이 되면 팥죽을 쑤어서 잔치를 벌였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다 보니 하루 종일 선자네 집은 물장구 소리가 울리고 관광객들이 지나다가도 막걸리 병을 들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어 함께 흥을 돋우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마을사람들이 이날 해물을 짝으로 선물을 하기도 하였는데 얼마나 선물이 많이 들어오는지 그날의 비용을 빼고도 남는 형편이어서 선자 아버지는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코가 땅에 닿도록 하였다.
남정네들도 그렇지만 집집이 바닷가에서 해물을 파는 여자들이다 보니 놀 때에는 남정네 못지않게 춤을 추면서 노래들을 잘도 불렀다.
선자는 아래로 동생 둘이 있었는데 엄마가 항상 바쁘다 보니 두 동생들의 뒷바라지는 선자의 몫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선자는 학교의 숙제도 해야 되고 동생들을 돌보며 가겟방까지 보게 되니 어떤 때는 숙제도 제대로 하질 못해서 속이 상해 울기도 하였지만 한 번도 표현을 하지 않아서 엄마는 그것을 무심히 지났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선자네 집엘 들리셨다가 선자 어머니를 만나자 딸이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등교를 한다는 말씀을 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이다.
“교장선생님 그럼 어떻게 해면 좋지요”
선자 어머니가 걱정을 하자 교장선생님은 선자는 숙제를 비록 하지는 않았지만 교실에서 하는 공부는 다른 아이들 보다는 더 잘 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이르시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선자 어머니는 선자 아버지가 저녁 늦게 집으로 들어오시자 조용히 딴방으로 불러가지고는 교장선생님께 들은 말을 다 했던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부부가 딸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견을 처음으로 나눈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선자 아버지가 앞으로는 이장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가겟방은 그가 전적으로 맡기로 하였다.
선자는 아버지가 집안일을 보시는 바람에 한결 여유가 생겨 중 고등학교를 편하게 졸업을 하였는데 그 다음의 진학문제가 부모님의 골머리를 않게 한 것이니 선자가 교대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동생들이 둘씩이나 있는데다가 가까운 전문학원의 유아교육과를 지망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부모들이 반대를 하는 것은 교대를 가려면 유학을 보내야 하고 또 학비를 대는 것도 그렇지만 하숙비를 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으로는 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형편상 무리를 하지 말자는 것이 부모의 공통된 생각이어서 그렇게 결정을 하였는데 딸이 이 일만은 부모와 반대로 나가니 큰 걱정거리였다.
딸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것은 선자 아버지보다도 어머니가 더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오셨기에 선자 어머니는 그동안의 말씀을 드리자 교장선생님은 선자가 그동안 얼마나 모범적으로 집안일을 도우며 동생들을 뒷바라지까지 하였는데 학비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게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입하금만은 교장선생님이 대시겠다고 까지 나오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자 선자 어머니는 어떻게 하던지 남편을 설득해서 교대를 보내야겠다는 마음을 다 잡았던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말씀마따나 선자 어머니가 생각할 때 선자는 맏딸로서 지금까지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사실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결심을 하게 된 이면에는 그동안 가겟방도 스라브집으로 지었고 동네에선 그래도 잘 사는 집으로 꼽히게 된 것이 맏딸을 잘 두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미리부터 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후 교대를 입학한 선자는 4년동안 아르바이트며 가정교사를 열심히 하면서 그 어려웠던 과정의 교대를 졸업하게 되었던 것이니 어촌 마을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으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을 생각하면 선자로서는 지나간 일이 꿈만 같이 생각되었다.
선자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일기쓰기를 계속해서 쓴 것이 소문이 나서 교장선생님의 상장까지 받았고 그것이 게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학교에서 글짓기 행사 때에는 줄곧 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대외행사에 뽑혀 나갔는데 그때마다 상을 받게 되자 선자 는 작가의 꿈까지 꾸게 되고 동화며 동시 또는 소설공부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자가 교대를 졸업하고 바로 발령이 날 것으로 예상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는데 그때 각 도에는 교대 졸업생이 너무 많이 배출되어 2,3년을 기다려야 겨우 발령이 난다는 것이었다.
선자는 할 수 없이 졸업 후 당분간 새벽에 어머니를 따라서 어장에도 나가고 어머니가 맡아하시던 고기를 받아오는 일이며 시장바닥에 나가서 팔기도 하였으니 그로서는 색다른 인생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자부심까지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교단에 섰을 때 어린이들에게 좋은 지도 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장차 작가로서 성장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욕이 생기는 것이었다.
발령이 쉬 나지를 않을 것 같아서 도인사부서에 편지를 해서 자신의 근무 희망시군을 알리기도 하고 또 한 번은 외람되게도 도교육위원회까지 찾아가서 장학사님을 뵙고 집안 사정을 말씀 드리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3개월 후에 마침내 고향 집에서 좀 떨어진 6학급 학교에 정식으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니 어촌의 여학생이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 너무도 꿈만 같기도 하고 자랑스러웠다.
그가 시교육청에서 발령장을 받던 날 교육청에서는 신규로 발령 받는 선생님들의 발령장 교부 식을 성대하게 한 후에는 환영식까지 겸해 점심까지 주시는 것이었다.
이날 선자 어머니는 처음으로 딸이 발령장을 받는 모습을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것은 자칫 잘못하였더라면 교대를 보내지 않을 번 하였기 때문이다.
선자가 발령을 받은 학교는 오지의 학교였지만 학교는 아담하고 마침 관사까지 선자가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그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온후하신 분이고 직원들은 모두가 경력이 풍부하신 남자선생님들뿐이라서 선자로서는 마음의 부담이 여간 가는 것이 아니었다.
3월 입학식과 더불어 학년 담임 발표가 있었는데 선자는 1학년을 담임하게 되었다.
1학년이야말로 처음으로 학교에 입학하는 어린이들이기에 재미있게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어린이 하나하나의 개인 신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를 하다 보니 부모님들이 개별지도 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선자는 방과 후에 관사에 아이들을 불러놓고는 개별지도를 하였으며 그것이 어린이들의 사기를 돋구어주는 계기가 되다보니 모든 어린이들이 잘 따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부임하고 일주일이 되던 날 선자에게 축하 화분 하나가 배달되었는데 이름을 보니 초등학교 동기생으로서 6학년 때에 한자리에 앉고 친하게 지나던 경덕팔이가 보낸 것이었다. 덕팔이는 같은 지역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 후에는 자주 만날 수가 없었고 선자가 교대를 간 후에 덕팔이는 서울의 모학교로 진학을 한 것만 알고는 소식을 몰랐던 사이였다.
선자는 화분을 받으면서 왜 화분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리고 얼마 후에는 편지가 왔는데 그 내용을 읽어 본 선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던 것이니 덕팔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선자를 좋아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선자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초등학교 때에는 그와 장난도 심하게 한 적이 있었고 어떤 때 선자가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을 때에는 공책을 빌려 준 생각도 나는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졸업식을 며칠 남기지 않고 어느 날 덕팔이는 선자 책상 밑에다 종이에 싼 것을 넣으면서 지나가는 말로 “ 집에 가서 풀러 봐” 하는 것이었다.
선자가 다른 아이들의 눈에 띌까봐서 집에 가서 끌러보니 거기에는 동그란 거울이 하나 있고 그 밑에는 “ 너를 사랑하는 경 덕팔” 하고 써있었던 것이다.
선자는 그때는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축하 화분을 받고 보니 그때의 생각이 나는 것이다.
“ 나를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선자는 그런 생각을 잠시 해 보았지만 그는 덕팔이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고 그가 좋아 하였다면 양짓말에 살 고 있던 웅변을 잘 하던 김 영길이었다.
남 앞에 나가서는 씩씩하게 말을 잘 하던 그가 그때는 그렇게 멋져 보였는데 그는 6학년 때 경상도로 이사를 간 후에는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경 덕팔이를 생각하다 보니 잠시 그의 소식이 궁금해지긴 하지만 선자는 지금 학교일이 바빠서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선자는 교대에서 어린이 심리학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였는데 하면 할수록 공부가 재미가 나서 앞으로 심리학 전공교수가 되어 봤으면 하는 생각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려면 학교를 고만두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되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를 않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였다.
선자넨 학교는 워낙 시골이라 어린이 수는 한반에 20여명밖에 되지를 않아서 개별지도를 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선자가 생각을 해도 그가 초등학교엘 다닐 때만 해도 아이들의 수가 40명은 넘어서 숙제검사를 해도 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숫자가 반이 되다보니 수업을 하는 데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학부형들을 계도하는 면에서 주일마다 서한문을 보내고 어떤 때에는 자녀들의 성장 과정을 일일이 지적해서 가정통신문을 보내다 보니 차츰 학부형들이 학교와 거리를 가깝게 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었다.
학부형과 교사가 가까워진다는 것은 어린이교육을 함께 연구해 나간다는 의미도 되어 선자는 더욱 이런 기회를 많이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부모가 학교를 방문하여 어린이의 교육을 참관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커리큘럼의 안내는 처음에는 주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서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전 학교의 어린이들의 학력이 돋보이게 향상이 되는 것이었다.
선자가 발령을 받고 나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 결에 1학기 종업식을 하게 되었고 종업식이 끝나자 교장선생님은 선생님들이 너무 수고하였으니 선진지 시찰이라도 한번
다녀오라고 해서 선생님들은 2박3일간에 걸쳐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온 것이다.
선자는 이번 여행이 교단에 처음으로 선 이후의 여행이라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다.
더구나 난생 처음으로 제주도를 갔다 왔기 때문에 너무도 많은 것을 보고 온 것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아서 선자는 그것을 소재로 해서 소설을 쓰기로 하였다.
이번 여행지에서 선자에게 뜻밖에 일이 한 가지 생긴 것은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맥주 한잔을 돌아가며 권하던 중에 학교에서는 선자와 별로 말도 하지 않던 6학년 담임 성 기원선생님이 유난히 선자에게 접근을 하는 눈치였다.
그는 선자보다 1년 먼저 이 학교로 발령받은 5년 선배의 총각 선생님으로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던 과묵한 분이었다.
역시 술이라는 것이 때로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인지 그는 그날 직원들을 향해 유모아를 써가며 웃기기도 하였지만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노래방엘 갔을 때 그는 느닷없이 선자의 귀에다 대고 바닷가나 거닐자는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직원들은 한창 신이 나는 판에 두 사람이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있는 것처럼 자리를 벗어난다는 것이 선자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를 않아서 머리를 흔들었더니 이게 웬일인가 그는 갑자기 선자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래, 얼마나 잘 났어 엉, 선배 말이 그렇게 말 같지 않단 말이지.”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성 선생이 큰 소리를 치는 바람에 분위기는 금방 싸늘해 졌는데 한참 후에 그래도 나이 드신 교무선생님이 간신히 수습을 해서 그날을 그렇게 넘어가고 말았다.
선자는 그날 이후 성 선생이 왜 그런 돌출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돌아온 후 선생님들은 각종 연수를 받기 위해 출발을 하였는데 성 선생도 한 달간의 연수를 떠나는 바람에 서로 얼굴을 대할 시간이 없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선자는 맨 처음으로 1주일간의 일직배당을 받게 되어 모처럼의 방학을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책이나 많이 읽겠다는 생각으로 아침 일찍 출근을 하였다.
출근이래야 관사에서 하게 되니 멀리서 출근하는 선생님과는 구별이 되었지만 어찌 되었던 사무실에 일찍 나와서 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당번 아이들이 서너 명씩 매일같이 교대로 나왔다.
선자는 당번아이들에게 하루 독서량을 정해주고 읽은 다음에는 검사를 맡게 하였고 학력미달이 된 아이들은 개별지도를 하고 돌려보냈다.
그러고 보니 당초에 일직 때 독서를 하려던 계획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매일같이 공문이 쏟아져 나와 그것을 처리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라 어떤 때는 집으로 가지고 가서 처리를 해서 이튿날 교육청으로 보고를 하였다.
일주일간의 일직생활이 바쁜 가운데 지나게 되어 아쉬워하고 있던 마지막 날의 일이다.
그날은 조금 늦게 출근을 하고 사무 정리를 하고 있는데 아침부터 낯선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하자 그는 처음에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않더니 자기는 인근중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인데 언제 초중학교 선생님들이 모여서 배구대회를 할 때에 선자를 한번 본 선생님이라면서 시간이 있으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전화였던 것이다.
선자는 그 전화를 받자 공연히 가슴이 뛰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많은 선생님들을 보긴 하였지만 이 선생님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선자는 너무도 의외의 전화인데다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하다가 일단은 이웃학교 선생님이라니 만나보자는 생각에서 다음 주 토요일이 좋겠다는 대답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로서 덕팔이가 편지를 보내 왔는데 그 토요일에 만나자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떡줄 놈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격으로 덕팔이가 화분을 보낸 후에는 이렇다 저렇다 일언반구도 없더니 일방적으로 날짜까지 박아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선자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미 해놓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중학교 선생님부터 만나자는 결론을 내리고 덕팔이게는 사정이 있어서 이번에는 만날 수가 없다고 연락을 한 것이다.
그 선생님이 정한 장소는 바닷가에 위치한 횟집으로 이층으로 올라서니 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인데 이미 그 선생님이 문지방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쎈터보드 안광영입니다”
그제야 선자는 배구경기 때 센터보드를 보며 날렵하게 공 처리를 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날 선자는 그 사람이 꽤 핸섬하다는 생각만 하였을 뿐 별다른 생각은 하지를 않았는데 그 사람이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네, 안녕하세요.”
선자도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그와 점심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소주 몇 잔을 마시더니 술김에 솔직한 말을 해도 되겠느냐며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선자 또한 솔직한 것을 좋아하는 타입으로 그렇게 하라고 하자 안 선생은 정색을 하더니 선자 앞으로 다가 와서 착 꿇어앉더니 어깨를 추수리며 말을 하는 것이다.
“ 선생님을 그날 처음 뵙고 첫눈에 반해서 몸을 달구다가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구애를 청합니다.”
그는 그 말을 하고는 엎드려서 일어나지를 않는 것이다.
선자는 그 모습이 얼마나 웃읍던지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지만 한편으로 생각을 하니 이럴 때에는 어떻게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언듯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실 선자는 지금까지 자기의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바도 없으려니와 특별히 예쁘게 생긴 사람을 부러워해 본적도 없었다.
교대에 다닐 때에도 과에 납자 친구들이 많고 흉허물 없이 지날만한 사이의 남학생도 있긴 하였지만 선자에게 접근하려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신 앞에서 앞으로 사랑의 대상자가 되어달라고 간곡하게 희망을 하고 있는 것이니 참으로 알 수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란 말인가.
그 일이 있은 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결혼이야기까지 오가고 있던 차인데 하루는 교감선생님이 불러서 갔더니 성 기원 선생님이 선자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한번 만나 보라는 것이어서 선자는 그제서야 제주도에 갔을 때의 성 선생의 행동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선자는 모처럼 교감선생님의 말씀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어 생각해 보겠노라 하고 돌아나왔지만 성 선생의 그 행동이 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이 다 끝난 후에 느닷없이 성 선생이 노크를 하고 들어오는데 만면에 웃음을 띈 모습이 마치 어느 귀족의 황태자가 방금 말에서 내려서 서서히 걸어오는 착각이 생길 정도로 그날의 모습이 너무도 멋이 있어서 선자 자신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 내 마음이 왜 이러지?.”
선자는 마음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일어서서는 성 선생을 맞아 의자를 권하였다.
“어쩐 일로 저의 교실엘 다 오셔요?”
선자는 다른 아무 뜻도 없이 반갑게 말이 나오는 대로 한마디를 하였다.
“ 미안합니다 , 제주도의 일을 진작 사과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술이 그랬다고 믿어주시고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세요 .”
“ 원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선자는 마침 커피 포드에 물을 끓인 것이 있어서 얼른 커피 한잔을 따라서 성 선생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때 약속이나 한 듯이 교감선생님께서 창문을 드르륵 열고는 들어오셨다.
“ 음 성 선생이 여기 와 있었군.“
선자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교감선생님께 자리를 권하였다.
“아니요. 난 교실 순회를 하는 중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교실환경이 전보다도 더 환해 진 것 같지요, 마치 벚꽃이 한창 피어날 때처럼 화사한 분위기이니 어린이들이 너무 좋아서 공부도 잘 하겠어요. 역시 우리 학교의 최고 선생님이에요.”
교감선생님은 잠시 자리에 앉으셨다가는 서둘러서 나가시며 한 마디를 더 하시는 것이었다.
“ 거 뭐냐, 우리 학교 처녀 총각 두 분 선생님에 대해서 학부형들의 칭찬이 자자해요.”
성 선생은 교감선생님이 나가시자 곧바로 선자에게 말을 거는데 선자는 그 말 한마디에 나가자빠질뻔 하였다.
“ 네 무슨 말씀이라고요.”
“ 항간에 중학교의 안 선생과 황 선생이 연애를 한다는 말이 도는데 그 말이 맞는가를 물었습니다.”
선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다.
“ 듣자 하니 안 선생의 어머니는 바람둥이랍니다”
성 선생은 무슨 일을 작심한 듯 눈을 똑바로 뜨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선자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는 가운데 선자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느꼈던지 성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공연한 말씀을 드린 것 겉아 미안합니다” 하고는 교실을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 선생이 노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선자는 성 선생이 나간 후에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앉아서 여러 가지 있었다.
사실 선자는 교감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성선생도 결혼대상자로서는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은 들었으나 이미 안선생과의 사이가 너무 깊게 빠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성 선생의 날이 선 듯한 말을 듣자 그만 정남이가 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성 기원선생이 선자가 발령이 난 즉시 낚아챘다면 이미 선자인들 성 선생의 시야에서 벗어나나지를 못하였을텐데 그러나 이미 기차는 떠나가고 기적소리만 멀어져가는 처지가 아닌가.
사람이란 기회가 오면 지체말고 그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진리중의 진리라고 할 것이다.
쇼펜하웰은 기회는 달아나기 쉬우니 기회가 오면 바로 잡으라는 말을 한바 있다.
그런데 성 기원선생은 워낙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서 혹시 좁은 바닥에서 불미스런 소문이라도 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움이 시간을 지체케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니 그로서는 두고두고 외지 사람에게 보물을 빼앗겼다는 모멸감이 그를 몹시 괴롭게 하였을 것이다.
안 선생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자고 독촉을 하는 것이어서 선자는 어차피 마음을 굳힌 이상 빨리 할 준비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식 날 직원들이 다 나타났는데 성 선생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고 선자가 막 식장엘 들어갈려는데 앞을 잠시 가로막는 사람이 있어 바라보니 덕팔이었던 것이다.
“ 결혼 축하해.” 그는 한마디를 하고는 돌아섰는데 그렇게 뒷모습이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신랑이 웃으라고 한마디 할 때까지 선자는 줄곧 덕팔이를 생각하느라 주례님이 무슨 말을 하였는지 한마디도 기억에 없었다.
결혼식 날 특히 마음에 걸렸던 것은 어머니가 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기 때문이다.
맏이라고 해서 항상 의지하시던 친정어머니의 일을 앞으로 누가 돌봐 들일 것인가를 생각하니 선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둘의 살림은 우선은 선자네 관사에서 시작을 하게 되었으니 신랑의 학교가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신랑각시가 깨가 쏟아지게 산다는 말이 있지만 이 부부야말로 좁은 관사의 신혼살림이었지만 2년 동안을 아무 걱정 없이 재미있게 살았다.
그때 맏이인 신랑에게는 부모님과 두 동생들이 있었는데 지금까지의 모든 살림살이를 맏이가 다 책임을 졌던 것이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병환 중에 있던 상태에서 시어머니와 이혼을 하였던 것이니 안 선생이 결혼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시아버지는 웬만하면 이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나 선자가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시어머니는 아들이 장성하였음에도 그 전부터 외간남자들과 놀아나는 바람에 시아버지는 벌써부터 이혼을 하려 하였으나 아이들 바람에 하지를 않았는데 병이 나자 더 환장을 하는 것 같아 그 꼴이 보기 싫어서 결국은 집에서 내쫓은 셈이었던 것이다.
성 선생에 대해 들은 소문이 현실로 닥아 온 것이다.
시어머니는 이혼을 당하고도 아들네 집 관사엘 와서는 며칠 동안 있다가는 돌아갔는데 그런 와중에 시아버지가 떨꺽 돌아가신 것이다.
시아버지는 당신이 살아계실 때에 가지고 있던 재산인 집 한 채를 처분할 계획으로 이미 계약금까지 받은 상태였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자 안 선생은 장례를 치른 다음 계약한 집에 대해서 잔금을 알아보니 받아야할 돈이 2천 5백만 원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혼한 시어머니는 그 집값을 받으려고 아들네 집에 와서는 그 돈을 몽땅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호주가 죽으면 자식들이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싸움을 한다더니 이 집은 어머니와 아들 간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잠잠히 있던 해병대에서 제대한 시동생까지 돈을 달라고 하자 집안에는 덤불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 되자 지금까지 거동만 보던 선자가 이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에서 시어머니를 붙잡고 이혼한 출가외인이 무슨 말씀이냐며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벋혔던 것이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네 깐년이 뭔데 남의 재산에 대해서 감 놔라 콩 놔라 하느냐면서 도리어 선자의 머리채를 끄들어서는 개골창에다 내팽개치는 바람에 선자는 허리까지 다치게 되었던 것이다.
웬만하면 그런 때에 신랑이 선자의 역성을 들어주련마는 신랑은 어머니라고 한마디 제지도 하질 않는 것이었으니 선자는 그것이 너무도 야속하고 분해서 집안이 떠나가도록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마음이 약한 신랑은 선자와는 한마디 의논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니에게는 5백만 원을 주고 둘째 도령에게는 자기가 미리 사놓았던 아파트 한 채와 현금 1천3백만 원을 준 것이다.
선자는 지금 중학교 3학년 도령의 학비며 숙식비는 어떻게 하라고 다 주느냐고 악을 썼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과 같이 신랑은 막무가내로 그 재산을 다 처분하고 말았던 것이니 선자는 이리 되자 신랑과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정 물러가라며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제서야 신랑이 와서는 선자의 손을 붙들고 그래도 어머니이니 어떻게 하느냐며 울먹이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선자는 시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좋은 옷도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구형만 입고 생활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였고 더구나 출가한 후에는 변변히 친정어머니도 돌봐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도 분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들으니 둘째 시동생이 형한테서 받은 돈 천만 원으로 당구장사업을 시작한지 두 달 만에 아무 이득도 없이 4백만 원 보증금만 떼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6백만 원을 가지고 나와서 또 다른 사업을 기웃하고 있을 때에 또래의 친구들이 스포츠용품 판매를 하면 이득을 많이 볼 것이라는 꾐에 빠져 아파트까지 덜컹 팔아서 천육백만 원을 다 투자하였는데 그 친구들이 그 돈을 몽땅 가지고 도망가는 바람에 시동생은 하루저녁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생이 똑똑해서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형은 그리 되자 맥이 빠져서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선자는 정이 똑 떨어져 본채도 하지 않은 채 몇 주일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염체가 없어도 이리도 염체가 없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니 다름이 아니라 이혼한 시어머니라는 사람이 하루는 선자네 집으로 오더니 태국으로 여행을 가려는데 돈을 또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선자는 남편으로 해서 화가 나 있는 판에 돈 5백만 원 집 판돈을 가져간 지 며칠이 되었다고 또다시 손을 벌리는 것이 너무도 가증스러워서 시어머니가 마루에 앉기도 전에 이 집에 드나드는 것이 창피하니 발걸음도 하지 말라면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 당신네 집안에 들어와서 나는 옷 한 가지 제대로 사 입지를 못하고 당신의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더구나 시아버지가 병환 중에 학교에 근무하느라 약 한 첩 을 제대로 달여들이지 못한 것이 가슴에 한이 맺혔는데 뭐 대낮에 서방질이나 다니더니 이제 와서는 또다시 태국원정을 간 다구요. 아이고, 못살아 .그게 짐승이나 할 짓이지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네 집에 와서 할 소리냐고요.”
선자는 역겨운 중에도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올 정도로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때의 선자의 모습은 악에 바친 한 여인이었고 너무도 부도덕한 여자를 꾸중하는 춘양과 같은 어진 여인기도 했다.
선자는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세간이란 세간은 다 집어 내던지고 발로 지지 밟았다.
“ 아이고 내팔 자야 . 내 팔자야. ”
네 활개를 벌리고 선자는 까무러쳤다가는 다시 악을 썼던 것이다.
그러다가 선자는 더 이상 이런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일어나 차에 시동을 걸고는 쏜살같이 길이 생긴 대로 차를 몰았다.
얼마를 달렸는지 어디로 차가 방향을 틀었는지 조차 분간이 안 된 상태에서 보얗게 눈앞이 흐려져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모래사장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이 너무도 많이 쏟아져 앞도 잘 보이지를 않았지만 오른쪽으로는 작은 해수욕장인 듯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 가운데 파도가 하얀 거품을 내뿜으며 달려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선자는 차를 급히 세우고 차에서 내려서서는 모래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 바다로구나! 너는 내 마음을 알아줄 수나 있겠니?”
“ 나는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다시는 신랑이라는 사람을 보기도 싫으니 어찌 하면 좋으냔 말이야?.”
선자는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한옹큼 집어서는 바다로 힘껏 내던지며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파도는 선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쉬지 않고 모래사장으로 밀려왔다가는 다시 밀려나가고 있었다.
문득 신랑과 함께 데이트할 때의 즐거웠던 순간이 필름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다시 흰 파도가 모래사장으로 밀려드는데 갈매기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가고 붉게 노을 지는 서녘 하늘을 등에 지고 배 한척이 가물가물 들어오고 있었다. (83매)
金 斗 洙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