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라쉬모르’는 생명나무의 길로 와서 그와 하나 되라고 그 길을 잘 안내하는 것이다.
2) 그러면 어떻게 생명나무로 향하는 그 길을 알 수가 있는가?
3) 바울의 제자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4) 원죄의 이야기는 아주 유치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속이는 내용일 뿐이다.
나. 본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나라(창 3:24).”
1) ‘라쉬모르’는 생명나무의 길로 와서 그와 하나 되라고 그 길을 잘 안내하는 것이다.
개혁 성경 번역은 “그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보존하여)지키게 하시려고(칼동사) 에덴의 동산 해 돋는 데로부터 그 그룹들과 두루 도는(사방으로 도는)그 칼의 불을 두셨다.”다.
마치 생명나무로 가지 못하게 그룹과 화염검이 지키고 있는 것처럼 번역하였다.
‘지키게 하시니라’로 번역한 ‘리쉬모르’는 전치사, 칼동사로 ‘지키다, 보호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세심히 보다, 주시하다, 보관하다,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다’의 뜻을 가진다.
선악과를 먹고 여호와 하나님과 단절된 아담과 이솨가 생명나무로 향하여 가는 길을 가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 번역을 잘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상반되며 크나큰 오해를 가져온다.
‘라쉬모르’는 생명나무의 길로 향하여 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길로 와서 생명나무와 하나 되라고 그 길을 잘 안내하기 위하여 잘 보이게 보존하여 지키는 내용이다.
선악지식나무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그 길을 가고자 하여도 자신의 마음 상태로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단절된 사망이 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들어오는 것마다 과거의 마음에 지배를 받아 왜곡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 그러면 어떻게 생명나무로 향하는 그 길을 알 수가 있는가?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와 하나 된 체험이 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생명나무와 하나 된 하아담과 하잇솨로 있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생명과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기는 해도 생명 과와 하나 되어 있었던 체험을 가지고 있어서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 과와 단절되었어도 생명과가 보이는 것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ㄲ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바티파카나 에네 세네헴 바예데우 키 에룸밈 헴 바이트페루 알레 테에나 바야아수 라헴 하고 로트)
‘그리고 그들의 눈들이 열려서 그들이 벗을 줄을 알았다.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들을 위하여 치마(옷)를 만들었다.’
하나님과 단절된 아담과 이솨는 깨달음을 다시 회복하려 애쓰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다. 무화과나무 속으로 들어가 하나 되지 못하고 무화과나무와 단절된 그 잎으로 옷을 해 잎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생명나무와 하나 되고자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임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마음을 넘어서있기 때문이며 마음을 초월하여 그 마음을 지켜보기 때문이다. 다시는 마음으로 끌려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뱀의 유혹으로 마음 안으로 끌려들어가게 되면 몸과 마음의 노예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창 3;6에 그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에서 ‘그 여자가 본즉(바테레 하잇솨)으로 번역하였다. ‘하잇솨’가 보았다. 이다. 그런데 칼동사를 쓰고 있다. 하잇솨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이다.
‘나무가 눈에 탐스러우며(소망스러우며) 지혜롭게 하는데 사랑하게 될 만 하였다(라에나임 베네마드 하에츠 레하시킬).
눈으로 보았는데 탐스럽고 사랑스럽고 소망이 있으며 지혜롭게 사랑하게 될 만한 나무로 보였다.
생명 과와 하나 되는 경험을 가지면 바라는 것이 없게 된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이 됨이다. 그런데 원하는 마음이 들어왔다. 이것이 큰 문제다. 사도 바울도 이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기록에 등장한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와 하나 되는 체험을 하였으나 슬그머니 마음 안으로 죄가 들어왔다.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가 놓치는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롬 8:1에 이르기까지 이십여 년 간의 많은 고난을 겪고 다시 깨달을을 얻게 된다. 그 경험을 통해 다시는 깨달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3) 바울의 제자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
사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데마, 그레스게, 디도는 이 세상(뉜 아이온)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 무슨 뜻인가?
바울과 데마, 그레스게, 디도, 모두는 겉 사람의 아이온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속사람의 아이온에 함께 있었으나 마음(카르디아)에 유혹되어 겉 사람의 아이온으로 되돌아갔다. 깨달음을 잃어버린 내용이다. 여기 등장하는 아이온을 세상으로 번역하여 크나큰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 아이온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속사람의 아이온을 잃어버리고 겉 사람의 아이온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속사람의 아이온을 경험한 자들은 마음공부를 계속하여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말씀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속사람의 아이온을 잃어버렸어도 속사람의 아이온과 함께 하였던 경험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깨달음을 놓친 이들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4) 원죄의 이야기는 아주 유치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속이는 내용일 뿐이다.
창세기 2장 이하에 등장하는 하아담과 하잇솨는 깨달음을 얻었다가 놓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길을 가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 다시 하나님과 하나 되는 큰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원죄의 이야기는 아주 유치한 이야기이며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속이는 내용일 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생명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를 실천하시고 가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라고 하는 내용이지 오지 못하게 막는 내용이 아니다.
성경의 의미도 모르고 종교인들이 이렇게 번역하여 원죄가 있는 것처럼 번역을 하여 이를 읽고 따르려고 하는 자들을 모두 종교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이를 읽고 따르려 하는 순박한 자들은 하나님이 몹시 두려운 것이다. 원죄는 없다.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지성소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려면 우선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장대)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을 통과해야 생명나무와 하나 될 수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자신의 하아다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사 떨어져야 하는 지경까지 가야한다. 육신적으로 조금이라도 있으면 생명나무의 길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