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창2:7~8
오늘은 첫번째 아담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 볼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른것은 경전의 진리가 개념이나 교훈이나 사상과 논리가 중심이 아니라 행동하는 삶과 사건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시작도 천지 창조라는 창조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홍수심판, 바벨탑, 출애굽, 가나안 정복 심지어 에스더서 같은 책은 그저 사건만 기록하고 있읍니다.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이 많이 있지만 주님의 삶의 행적을 기록한 생활의 기록을 더 많이 남기고 있읍니다.
어떤 곳에는 주님이 가르쳤다고 만 하고 그 가르침에 대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주게된 배경과 장소 그 때에 어떠한 사건이 있었다는 기록들은 남기고 있읍니다.(막1장21~27, 막2장2절, 13절 ,막6장34절)
여러분 사건이 중요할까요 설교가 중요할까요 우리 생각에는 설교말씀이 더 중요할것 같은되 왜 성경은 사건들을 더 많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까요?
그것은 기독교 진리가 교훈이나 사상이나 논리보다 실제적인 삶과 실천적 생활을 더 중요시
하는 살아있는 생명의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읍니다.
참 진리는 이론과 논리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가시적 열매가 있고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하여서 삶으로 살아 질때만 생명을 가진 참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만이 아닌 삶으로 시인 되어져야 합니다.
삶이 되지 않고 행동되어 지지 않는 말은 단순한 소리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다바르) 라는 단어는 말, 일, 사건이라는 세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읍니다.
[미드바르(광야)에서 하나님의 다바르(말씀)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바르(사건)가 되었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베리트(언약)가 있었읍니다.
하나님은 그 베리트에 대하여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그 베리트 속에 살고 있읍니다.]
히브리어 어근은 동사로부터 시작 됨니다.
사랑이라는 명사가 어근이 아니라 사랑했다 완료시제의 동사가 어근입니다.
사랑의 열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므로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므로 생명의 열매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메시야에 대한 말씀이 실제적 사건이 되어 육화 강생하신
주님이 오셨서 사랑의 삶을 살아가신 결과로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 같이 수 많은 생명의 열매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창22:17)
우리도 그 열매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성경속에 기록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곧 말씀이고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격게 되는 영,육의 싸움 선악의 싸움 정의와 불의의 싸움 가운데서 일어나는 갈등과 고난과 고통과 기쁨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곧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어떠한 아담은 승리하여 영생의 길로 또 어떠한 아담은 패배함으로 영벌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성장의 출발점에 서게될 창2장7절의 아담에게 있어질 사건에 대한 의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읍니다.
첫째 그가 빗어진 환경과 때에 대하여 살펴보면 1장 26~27절 나오는 아담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수가 있읍니다.
1장의 아담은 천지 만물이 다 창조된 마지막에 창조되었서 부족함이 없이 잘 갖추어진 환경을 누리며 또 그것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면서 왕 같은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지만 2장의 아담은 건조하고 메마른 텅빈 허허 벌판에 서서 삽과 곡갱이로 땅을 일구며 작물을 가꾸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시작에선 개척자로서의 모습입니다.
창2장5절을 보세요 그가 왜 그와 같은 위치에 서야 하는가는 5절에 말씀하고 있읍니다.
5절에 보시면 식물이 나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아담이 만들어 져야할 목적도
함께 말씀하시고 있읍니다.
그르고 보니 1장의 아담과 다른점이 창조의 목적이 다르군요 1장은 다스리게 할려고 2장은 경작하고 지키게 할려고 두 목적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앞에 쓴 글에 이야기 했읍니다.
식물이 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았고 경작할 아담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그 원인을 말씀하셨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를 당황케 하는것은 1장에서는 땅에게 식물을 내라 말씀하시므로 그 땅이 말씀에 순종하여 식물을 냈는데 2장 5절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잘못하면 오해하기 쉬운 것은 비가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1장의 아담가 2장의 아담이 다른 존재로서 살아가야 할 삶이 다르기 때문이요 그가 할 일과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장의 아담은 모든것이 잘 갖추어진 환경에서 태어나 그것들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며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영적인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비를 흡수하여 엉겅퀴와 가시를 내지 말고 풀고 채소가 나오도록 자신을 갈고 경작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인하여 살라가기 위해 그 출발점에 서 있는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함니까 자신들을 잘 가꾸어서 좋은 채소와 열매들을 맺어가고 있읍니까
둘째 그가 만들어진 재료 입니다(2장7절)
본문은 아담마가 아파르의 과정을 거쳐 아담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아다마나 아담이나 다 똑 같은 단어 입니다.
기본적인 뜻은 붉다는 뜻과 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읍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하나는 땅으로 하나는 사람으로 번역 했을 뿐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땅이라는 단어에는 히브리어 (헤)라느 여성어미인 방향사,소망사가 접미되어
있읍니다. 그래서 아담마로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뜻이 달라지거나 의미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레쯔의 땅: 창1장 1,10, 11,12 ,15,20,24,25,26,28,30,2장4,5(땅에는,땅에),6(땅에서)
아다마의땅: 2장5(땅을 갈), 2장6(지면), 2장7(땅의)]
에레쯔 땅에서 온 아다마의 땅이 아파르(먼지 티끌)의 과정을 거치고 여호와 하나님의 야짜르( 누르다, 괴롭히다, 곤경에 처하다. 곤란하다, 압착하다, 주조하다 흙으로 만든, 빚다, 형성하다,만들다, 토기장이)
지으심으로 아담이 되었지만 그것또 흙입니다.
아다마의 땅이 아담인 땅이 되었다는 것은 즉 아다마가 아담이 되었다는 것은 여성어미가 떨어져 나가고 남성 명사가 되었다는 것인데요 그 여성어미는 곧 방향을 나타내는 방향사 이기도
합니다. 즉 여성은 남편을 사모하여 남편을 향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는데요 그것은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심판의 내용 중에 있읍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게 될것이다.(창3:16)
아다마가 땅이라고 했는데요 땅을 향하여 마음이 기울어져 사모 하므로 썩고 없어질 세상적인 것에만 모든 가치를 두고 그것들만 추구하고 있는 그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요
생명없는 흙과 같은 사망의 존재인 그가 하나님의 손(능력)안에서 먼지와 티끌 (뱀의식물
창3:14,디도서1:12) 같은 가루가 되는 과정에서 세상을 향한 속성이 떨어져 나가고 그 분의 손에서 빚어져서 생명을 받으므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64:8 하나님은 토기장이 우리는 진흙아라고 하거나 티끌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읍니다. 지금부터는 흙을 향한 속성 땅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받은 생명으로 천국을
향한 속성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영생을 향하여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재료인 생기와 아담을 살아 움직이게 한 생령이란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기는 성령이고 생령은 영적인 존재가 되었으나 선악지식 나무 사건으로 인하여 영이 죽고 육적 존재가 되어 사망의 길을 가게되었다는 것인데요 과연 그는 영적인 존재인가 먼저 이 부분에 대한 다른 번역들을 보도록 하겠읍니다.
공동번역: 야훼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자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현대인성경: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시자산 존재가 되었다.
원어번역 성경: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취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된지라.
개역 개정판 외에는 사람, 산존재, 생명체로 해서 영적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론을 내기에는 좀 애매 한되요 다행히 우리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석을 가지고 있다.
고전15:45절을
개역성경은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같은 영이라 분간이 안됩니다.
개역개정은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공동번역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첫 아담은 퓨쉬케(호흡)로 마지막 아담은 퓨뉴마 (성령)로.
kJV는 첫 아담은 living being 마직막 아담은 a life sprit ,
70인역도 퓨쉬케로 분명이 영적인 존재가 아닙을 말씀하시고있다.
그러면 생기와 생령이라 무엇이냐?
생기: 생(하이) , 기(니쉬마)라는 두 단어입니다.
생(하이): 산, 생, 생명(창1:24, 25, 30(짐승), 28(생물)
기(니쉬마): 생명의 호흡, 기운 (24회), 영 , 바람, 영감(창1:2의 영과 다름)
생령: 창1:20(생물), 21(생물), 24(생물), 30(생명), 2:19(생물),
령: 호흡하다, 생물, 생명력, 영혼, 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들의 호흡을 받아서 살아가는
단순히 산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안에서 경작해야 할 동산과 거기서 얻어지는 열매를 먹고 영적 존재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는 창1:26~28절의 아담 처럼 모든 열매를 먹을수 있고 모든 만물을 정복고하고 다스리며 누리며 살아가는 온전한 영적 존재가 아직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짐승 가장 간교한 뱀까지 다스릴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을 경작해야 하는 아담인 것입니다.
즉 자신을 열심히 갈고 경작해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그것을 먹고 성장해서 1:26~28절 아담의 자리에 이르러야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여정이요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여정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