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성지순례 20주년』
‘소팔가자’ 그 은혜의 땅 아름다운 동행
- 여행 순례기 -
이현오(수필가, 칼럼리스트)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룡정 성당 앞, 우리들 일행은 들녘을 가로질러 저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산마루 정자를 바라보며 뱃구레에서 우러나오는 힘찬 울림을 토하며 하나의 마음으로 가곡⟪선구자⟫를 열창했다. 100여 년 전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이역만리 낯선 타국 광야를 휘달리며 설움에 설움을 곱씹으면서도 일제 총칼 앞에 의연히 맞섰던 그 날의 주역, 위대한 선열의 장쾌한 기상을 가슴 저 아래로부터 부둥켜안으면서 <본문 중에서> -
전 날(8. 22) 저녁 우리 집 좁다란 거실이 무언가로 가득 찬 채 부산하다. 몇 개의 가방과 옷가지들이 펼쳐지고 이것도 저것도 들었다 놨다 반복되자 마늘님 잔소리가 이내 거실을 울린다. “무얼 가지고 갈 것인지 생각하고 선택하면 되지 그렇게 들었다 놨다만 반복하다 짐은 언제 쌀 건데, 오늘 밤 새울 거냐?며 곧장 핀잔이 날라 온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얼마 만에 나가는 해외 나들이인데. 이럴 때 예전 마누라 해외여행 갈 때 조금이라도 관심 갖고 눈여겨봤더라면 단숨에 가방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련만..... 지나간 초등학교 어린 시절, 소풍을 앞두고 ‘하마 비가 오면 어떡하나’ 근심걱정 노심초사 심정으로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누려 마당에 나가 밤하늘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던 그 때 마냥 들뜬 설렘이 가슴을 지배하는데, 창밖엔 어느새 짙은 어둠이 밤하늘을 질끈 물들여 간다.
24절기의 하나로 더위가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게 된다는 처서[處暑]인 8월23일 아침 7시30분, 우리들 일행은 인천공항 3층 대합실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들었다. 도합 16인. 중국 장춘 ‘소팔가자’ 행을 위한 그 이름도 거(巨)한 ‘김대건 성인 성지 순례단’(자칭)이다.
필자가 성지 순례를 답사할 정도로 신심(信心)이 두텁거나, 정의구현사제단이 기승을 부리는 가톨릭 신봉자도, 그렇다고 개신교 신자로서 하나님 말씀에 깊이 있는 신앙인도 되지 못해 성지 순례에 임하는 신앙심 두터운 분들 앞에 주눅이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동행 할 수 있게 됨에 감읍(感泣)의 심정으로 첫 인사를 나누고 출국 길에 나섰다.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하늘 · 땅과 산과 바다, 강과 호수. 발아래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점점이 흩어진 대지의 구릉들, 들녘과 호수가 한데하고 두둥실 흘러가는 뭉게구름, 변화무쌍 변신을 거듭하는 하늘 아래 비행체 주변의 모든 것들은 그 스치는 동선의 흐름마냥 아득한 심연으로 빠뜨리면서 자연과 내가, 전체 물상 속 하나로 만들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일까, 그것은 또 다른 세상의 연속이기도 했다. 하늘을 나는 날개 단 천사의 기분이 이럴까 할 정도로 또 하나의 신비 속에서 대자연의 흐름을 체감하기에 바쁠 수밖에 없었다. ‘더 날아야(飛翊) 하는데’ 하는 찰라 이국(異國)의 하늘아래서 힘찬 역주를 벌인 비행기(아시아나항공)는 금방 착륙에 들어간다고 기내 방송이 전한다.
드디어 중국이다. 세계 4대문명의 한 발상지이자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한반도에 다양한 문화를 전파했던 황하문명의 중국, 그 중국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오래 전 대만을 방문한 바 있지만 필자의 본토 방문은 처음이다. 그러기에 기대도 설렘도 커 이 가방 저 가방 펼쳤던 것은 어쩔 수 없던 초보 여행객의 심회였나 보다.
가자, ‘장춘’에서 ‘소팔가자’로 (1일차, 8.23)
대한민국 서울이나 중국의 장춘 하늘이나 하늘은 매일반 이었다. 여름에서 초가을로 접어드는 하늘은 쾌청, 높고 푸르르며 차창으로 파고드는 땡볕은 이 계절의 햇볕도 머지않아 새로운 햇살로 옷을 갈아입고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설레는 마음을 삭히면서 마중 나온 소팔가자주임 팡희봉 신부님, 멋쟁이 중국청년 이효걸(동국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유학중) 군과 함께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혼이 스민 역사의 성지 ‘소팔가자’로 힘찬 시동을 걸었다.
사전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예상은 했지만 상상 초월이다. 물론 그 감흥은 이후에도 쭉 이어진 예고편에 불과했지만. 옥수수를 말함이다. 드넓게 펼쳐진 도로 좌우 들판엔 지천으로 널린 게 옥수수요, 수수밭 향연이다. 벌써부터 입안으로 군침이 맴 돎은 비단 필자 본인만 이었을까? 나중 안 사실이지만 어찌 그리도 옥수수 팬들이 많던지. 어쩌면 그래서 내 몫이 한 개 반은 더 줄어들었을 런지도 모를 일.
시골 길 도로변은 전형적인 농촌풍경이자 고요와 평화가 함께하며 잘 정리 돼 있어 초행 길손들에게도 정겨움과 아늑함을 전해주며 정갈한 이 고을 주민들의 마음 씀씀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였다.
오후 1시30분 우리들 일행을 태운 차량이 내리 쬐이는 태양을 돌파하며 씽씽 달려 1시간여가 지날 즈음 최고 우두머리이자 이번 행사를 계획 섭외하고 최선두에서 이끄는 김종두 스테파노(이하 김종두 대장)님께서 돌연 하차를 명한다.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로(路)’ 초입이자 명비(名碑)가 새겨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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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김대건로는 중국 길림성 농안현 합륭진 인민정부와
한국천주교 가락동교회(주임신부 최선웅)가 양국간의
우호증진을 위하여 함께 건설하다.
1999년 7월12일 성역화 추진위원회 위원장 김현욱(돈보스코)
아담한 크기에 김대건 도로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은 이 도로가 한국인에 의해, 김대건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온 김현욱 박사님을 위시한 서울 가락동성당 천주교인들의 정성에 의해 소팔가자 주민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한 묵은 과제 였다고 하니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가로수 사이 일직선으로 이어진, 두만강 가에서 채굴돼 현 위치에 자리잡은 암석(비석)의 존재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오고 온다.
▪ 최고의 중국 판 마당놀이, 그것은 축제의 場 이었다
다시 차에 올라 몇 분을 달렸을까. 갑자기 피리소리며 장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버스 안이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스카프를 매라는 목소리가 전해진다. 순간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몸놀림처럼 일사불란하게 바삐 손을 놀리며 서로의 목에 스카프 매듭을 매주며 차에서 내린다.
하나의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음악과 춤사위가 한데 얼렸다. 남녀노소 가림이 없다. 햇볕에 그을린 전형적인 우리네 시골 구릿빛 얼굴 할아버지에서 할머니 아저씨며 아주머니, 심지어 초등학생쯤 보이는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계층 구분 없이 200여 명의 환영 공연단이 우리를 맞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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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족(漢族)의 전통 복색인가 보다. 한바탕 잔치마당이다. 울긋불긋한 차림새에 손에는 TV에서 봄직한 넓다란 부채를 활짝 펼쳐 흔들거나 소고(小鼓)에 우리의 농악 류 모자를 쓰고 춤사위를 펴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는 우리 집에 찾아온 손님에 대한 진정어린 접객과 무한한 애정, 정성이 가득 들어 보였다. 성 김대건 소팔가자 성당이 위치한 마을 입구까지 족히 300, 400미터는 될 듯 싶은 거리를 한참 더운 땡볕아래 땀 뻘뻘 흘리면서도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광경은 이미 경험한 일행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는지 모르지만 필자와 같이 초행자에게는 가슴 울컥거리며 눈시울을 붉게 할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첫인상이었다. 그 강한 여운은 지금 이 순간도 잊지 못할 기억이며, 아마도 오래오래 잊혀 지지 않을 명품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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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에서 신명나는 음악에 맞춰 너도 나도 한바탕 춤을 춘뒤 김종두 대장의 인사말씀으로 마무리하고 소팔가자 입성 깃발을 꼽았다.
늦은 점심시간,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 전통 중국술과 맥주, 필자가 앉은 식탁에는 중국인 팡희봉 주임신부님을 비롯해 인근성당에서 환영오신 두분 신부님이 좌우로 합석해 잔이 비어질 때마다 술잔이 채워 놓아 첫날부터 잘 마셔보지 못한 중국술에 흠뻑 젖어드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으니, 필자만의 호사였다면 이실직고 더불어 사(赦)함 받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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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정부터 무척 빠듯해졌다. 5층 건물의 김대건 기념관 4, 5층에 여장을 정리하기 바쁘게 오후 4시, 우리들을 환영차 인근 지역 길림성 장춘, 심양, 하얼빈 등지에서 오신 조선족 신자 대표 교우들과의 만남의 시간이 이어졌다. 서울에서 함께 간 일행도 서울 부산 대구 계룡대 등에서 온 분들이기에 초면인 경우도 많아 서로 인사를 교환하고 간증과 말씀 증거로 은혜를 나누며 교감하는 감사와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윽고 다시 맞은 저녁식사 시간, 만남이 있고, 정겨운 이들과의 대화자리에는 맛깔스런 음식과 술이 있음은 당연지사 아닌가. 중국 식단 특유의 고기가 빠지지 않는 식탁엔 저녁에도 전통주와 맥주가 빠지지 않은 가운데 오리훈제와 특별히 잘 여문 알갱이가 맛깔스럽게 다가온 옥수수가 푸짐하게 놓여 군침을 돌게 했다. 강원도 옥수수와는 또 다른 미감을 일으키며 일행의 대환영을 받기에 충분했던 장춘의 명물 옥수수. 어디 옥수수뿐이었으랴. 첫날 장춘의 밤은 깊어가고, 여독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이국(異國)에서의 첫 밤은 깊어 가는데 창문을 통해 반짝대는 별빛이 미풍(美風) 사이로 마을 곳곳을 곱게 물들이고 있었다.
별밤에 잠 못 이루는 풀벌레의 습격일까, 나방에서 방아깨비, 풍뎅이에 이름 모를 하루살이까지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 하룻밤 유숙을 갈망하니, 8월 한여름 장춘 소팔가자의 밤은 고요 속에 깊어가고 있었다.
한 마음 첫 미사, 그리고 최고의 환대 ‘가무성회’ (2일차, 8.24)
잠자리가 바뀌었음에도 신체 시계 바늘은 어김없나 보다. 5시 눈이 떠진다. 옆 침대에 누운 5박6일 여정의 우리 방 대장이신 방장(강종호 스테파노) 아제도 아직은 꿈나라. 살며시 일어났다. 역시 전직(前職)은 어쩔 수 없는가, 일어남과 동시에 침대를 네모 반 듯 각을 잡고, 정리한 뒤 밤새 치열한 전투(?)로 사망한 풀벌레들을 치우고 밖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 동네 어귀를 돌다 때마침 만난 ‘왕 르’(한국외대 박사 과정 수학) 마리아 이끌림에 창졸간 그 네 집으로 들어서니 마침 식사준비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따뜻하게 맞아 주심에 반겨 인사를 나누고 내어준 과일에 입을 대고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다.
오전 8시 임박, 성당엔 꼬마 손님부터 많은 마을 신자들이 자리해 미사시각을 기다리고 있어 함께 한 자매님들께서 준비해간 머플러를 돌리며 아이들 목에 매어주는 만남과 나눔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기념관 내 강의 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전 미사는 주민들의 일상 미사요, 20주년 기념 미사는 오후 5시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강당에서는 어제에 이은 2탄 체험 증거 말씀이 이어졌다. 마이크를 잡은 문정2동 성당 김진오 안드레아께서는, 소팔가자와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을 소개하는데, 첫 방문은 김대건 성지 성역화 2차 방문단 요원 자격이었다고 했다. 김 안드레아는 현재의 본당이 건축되기 전인 1998년 방문했을 때는 성 김대건 로(路)가 도로포장 이전으로 비만 오면 완전 진흙탕으로 지나는 차량이 수렁에 빠져 무척 어려운 상태였다고 당시 정경을 전하기도 했다.
퇴직 직후인 그때 퇴직금 중에서 일부 거액(당시 1천만원)을 성역화 사업에 희사하고 이듬해 1999년 7월 도로 포장 준공기념식에 초청을 받아 참석해 뜻 깊은 시간을 함께 했던 사실들을 증거 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그 때 제가 그 퇴직금을 기부하지 않았다면 어디 술 먹는데 쓰거나 아니면 도박해서 날리거나 엉뚱한 곳에 썼을지도 모릅니다. (성역화 사업을 위한 기부금이) 보람 있게 쓰이고 주보 등에 알려지는 한편으로 덩달아 무명의 신자에서 크게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돌이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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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진행되는 시각에 소팔가자 ‘팡희봉’ 주임신부님과 수원에서 유학중인 이홍은(이후 장춘공항 마지막 배웅까지 함께 함) 신부님, 허 야고보 신부님, 주장우 신부님이 방문해 서로 소개 인사와 안부를 전하고, 찬송과 말씀으로 은혜를 나눈 감사의 시간이었다.
▪ 옥수수는 내 친구
장춘공항에서 소팔가자로 오는 길옆 지천으로 널려 푸른 초원을 형성했던 길림성의 명물 옥수수 밭, 보기만 해도 군침 돌게 할 정도로 잘 여문 옥수수가 눈을 자극하고 있어서 ‘아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를, 그것도 소문 자자한 중국 옥수수를 직접 대할 기회가 있겠구나’ 소원 했는데, 드디어 옥수수를 직접 접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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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점심식사시간, 식탁위로 눈이 가는 순간, 보기에도 눈이 풍요로워지는 옥수수가 식탁을 장식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매 끼니 정성을 다해 맛있는 식탁을 준비해 거의 모든 음식이 우리들 일행의 입맛을 돋워 주었지만 이 날 옥수수는 또 다른 별식(別食)이었다.
『中 韓 신앙우의 20주년 迎貴賓 가무성회』
소팔가자 문화관 무대에 올려진 환영 현수막 내용이다.
소팔가자 성당 바로 근처에 있는 지역 문화관에서 열린 공연장에는 지역주민이 모두 했다. 20년 전 처음 김현욱 국제외교안보포럼 이사장 등 한국 천주교 교우들과 인연을 맺은 20주년을 기념하는 이 날 공연은 당시 여기 성당 주임신부를 맡고, 지금은 길림성 지역 주교급 신부로 시무하는 주장우 신부님의 우리말 “사랑합니다”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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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신부님께서는 “지역교구장으로 10만 신도를 대표해 한국의 신자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며 “오늘 공연을 비롯해 방문기간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소팔가자 신도와 더불어 또 한국천주교회와의 우정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기원 드립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감사 합니다”며 환영해 자리를 함께 한 객석에서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우리들 일행 모두가 일어나 객석에 머리 숙여 인사하는 따뜻한 장면도 이어졌다.
이어 방문단 대표자인 우리들의 호프 김종두 대장께서는 김현욱 박사님을 대신해 지난 20년을 한결같이 우의를 나눠온 양국 양진영에 대해 벅찬 감회를 전하면서 소팔가자 성당의 발전과 마을 주민에 대한 감사의 마음 전함을 잊지 않았다. 대독한 김 박사님의 인사말씀 속에는 지난 20년에 대한 감사와 감격, 애정이 올올이 함축되어 그가 얼마나 이곳 김대건 성지에 대한 관심이 짙게 배어 있는가를 여실히 느끼게 했다. 또 이어 방영된 영상에서도 박사님의 말씀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사진을 통해 하나하나 돋보여지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놀라운 문화마당을 지켜보게 됐다. 그것은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다. 예로부터 황하문명을 일으키고 중화문화권을 형성한 중국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고대 문화를 전파했던 것처럼 중국 문화의 맥이 얼마나 크고 빛나게 이어지는가를 작은 시골마을 소팔가자 ‘가무성회’ 공연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한중문화교류의 장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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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충격’ 이었다. 충격이란 말로 표현을 빌린다면 필자 자신이 너무 문화예술에 둔감하단 격이 될까? 계획보다 조금 늦은 2시부터 시작된 공연은 1시간이 조금 넘게 진행되었는데, 그 다양하고도 다이내믹한 준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유치원생부터 초·중·고교생, 수녀님도 포함된 14명이 마치 무희(舞姬)를 연상케 한 현란한 춤사위까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끔 때로는 현란하게, 때로는 우아함과 박진미가 가미된 공연은 우리와 주민 3백여명 등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의 환호와 박수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축제의 장이었다.
상하의를 모두 붉은 색 옷을 입고 현대무용을 펼치는 여학생 팀, 앙증맞은 율동으로 엉덩춤을 추는 유치원생, 소림 무술과 태권도를 선보인 유치부와 초등생, 조선족 어머니의 고향을 그리는 노래 가창 등 전체 13개 팀의 공연은 그대로 가슴 찡해지는 감동의 무대였다. 누가 안무를 하고 지도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내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금방 가늠할 수 있었고, 저토록 자신감 넘치는 무대를 만들 수 있었을까, 감사의 마음과 진한 감동 함께 공연팀을 초청해 서울 어느 곳에서 보여준다 해도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멋진 작품이 될 것이라는 탄성이 절로 배이게 했다.
공연을 이끄는 사회자 중 한 사람은 왕 르 마리아 언니라고 했다. 자주 행사 진행을 맡는다는 말에서처럼 남자 진행자와의 호흡을 맞춘 사회는 멋진 조화를 이루며 전체 진행을 더욱 깔끔하고 돋보이게 했다. 어쩌면 이 날 우리 일행들에게 펼친 공연내용은 자기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내 고장을 찾아 온 외국손님에게 나라를 대표해 ‘우리 것을 보여 준다’는 당당함이 그대로 묻어나 보였다. 참으로 고맙고 감동이 물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한팀 한팀 공연이 끝날 때마다 손부채를 부쳐가면서도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공연이 끝나고서도 그 감흥이 한동안 이어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으니 이 지면을 통해 함께 했던 그 친구들에게 ‘최고였다’는 찬사를 전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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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관람 후 다음 일정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을 즈음, 필자는 한 분을 만나고 싶었다. 길림성 교회 회장을 역임하신 박창호 전 회장님이었다. 연로하심에도 처음 우리가 도착한 순간부터 모든 행사에 함께 하시며 순박함 그 자체로 맞아 주신 분. 필자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김현욱 박사님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빼먹지 않았다. 건강과 빠른 쾌차를 빌며 어떤 역할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박사님을 위해 다 하시겠다는 말씀을 빠트리지 않았다. 정(情)이 그만큼 깊음을 알 수 있었다. (#1. 박창호 전 길림성 성당 신도회장 인터뷰)
▪ 본당성당, “여러분 환영해요 사랑해요”
한중 소팔가자 성당 교류 2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미사가 20년 전 이곳 성당 주임신부이셨던 주 신부님의 집례로 시작됐다. 맨 앞으로 어린 꼬마 친구들을 위시해 우리 일행들이 자리하고 계속해서 지역 어르신들이 함께 하면서 미사는 시작됐다. 정성들여 준비한 예물을 봉헌하고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간직한 서정숙 루시아님의 특송은 참석자들의 마음을 환하게 장식해주는 또 다른 봉헌 이었다.
주 신부님은 강론을 통해 “1998년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다음 다시 돌아와 (발전한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며 “김 박사님을 이번에 만날 수는 없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같이 있다고 믿습니다. 는 말로 보고픈 마음을 대신 전하기도 했다. 주 신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김대건 신부님 성역화 사업이 20년 됩니다. 성령님 은총과 하느님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믿습니다. 앞으로 이 사업을 진행하려면 어려움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에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며 어떤 어려움이나 난관이 있더라도 김대건 성역화 사업의 지속성과 교류의 마당이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선물 증정이 이어지고 미사 참석자들에게 전원이 한마음으로 감사 인사를 전할 때는 전 참석자들이 일어서 기립박수로 환영해 비록 언어로서 소통은 하지 못해도 가슴과 가슴으로 뜨거운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역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야 하고, 흥을 돋우는 술과 음악이 있어야 함은 불문가지 사실 아니던가. 김대건 기념관 앞마당에서 열린 환영만찬은 바로 이를 대변해 주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아래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냄새, 맥주에 순도 높은 전통주, 한국과 중국음악,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우정어린 만남 속에서 이틀째 밤도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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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만찬은 오랜 시간이 가도 쉬 잊지 못할 것 같다. 주임신부님이 특별히 동네 원로분들이 함께 한 자리에 앉히고 통역까지 배석케 하면서 “(아마도) 이 친구 기자인데 술을 잘해요, 술 많이 많이 먹게 해?” 특명을 준 탓인지 7순이 다 되신 어르신들이 내 잔에 조금이라도 술이 떨어질라 치면 쉼없이 술을 부어 중국 술을 제대로 음미하는 감격(?)을 크게 누려야만 했다.
그 분들과 함께 하면서 나는 그 분들이 연세 그윽하신 촌로(村老)분들이시만 자국 역사에 얼마나 긍지를 갖고 있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현대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한 직후여서인지 양국 간 미래에 대한 논평을 청하기도 했다. 중국 삼국지에 대한 나의 관심도도 묻는 등 서로가 질문을 주고받으며 한편으로 채워지는 술잔을 비우랴, 질문에 답하랴, 노래하랴 거기에 더해 자주 우리 좌석에 색다른(?) 음식을 내와 술까지 권하는 또 다른 분과도 대화를 이으랴 즐거운 비명이 쏟아지며 깊어가는 한여름 소팔가자 향기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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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행사 끝나고 숙소에 들어와 누웠지만 조금 전 감흥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잠이 오지 않는다. 거기에 한여름 밤 후텁지근한 열기도 동반해 바람이라도 쏘일 겸 숙소를 빠져 나와 어두운 밤거리를 천천히 걸어 성당 인근 4거리 탑 주위에 이르자 한 무리 남녀청년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곁을 지나치려 하자 갑자기 우리말이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아마 오늘 저녁 환영행사에 참석했던 한 친구인 듯하다.
그 말을 받아 활짝 웃으며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이 멀리 중국 시골마을에서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우리말 인사를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 흡족해 지며 한동안 거리를 걷다 이내 기념관 숙소로 향했다.
▪ 빗줄기는 폭우 되어 쏟아지고
간 밤 멋진 파티에 취해 흐뭇한 미소를 간직한 채 잠이 들었다가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세차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단잠을 깨운 것이다.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자 어슴푸레한 가운데 굵은 소낙비가 줄기차게 쏟아진다.
“아, 오늘은 장거리 이동인데 비가 계속 오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창밖을 보는데 빗소리로 봐 쉬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쩌랴.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구름 끼면 구름가는대로 자연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 피조물 아니던가. 하느님의 섭리와 은혜 속에 역사가 되고 일정이 되는 것을.
날이 밝자 빗발은 다소 누그러졌다. 밤새 함께 유숙했던 풀벌레들의 사체를 털어낸 뒤 군 내무생활을 떠올리며 이부자리를 정리한 후 밖으로 나왔다. 또 하나 하루의 시작이다.
연변을 향해 부산한 아침을(3일차, 8.25)
아침 6시30분. 쌀죽에 오리고기, 마늘쫑에 고기가 버무려진 찬과 나물, 빵과 옥수수, 수박(화채) 등 여기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정성 가득 차려져 식욕을 돋군다. 전 날 마신 술에 숙취는 없어도 해장삼아 배를 든든히 채우고 기념관에 올라 충실한 짐꾼 노릇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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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변이다. 9시 출발예정인 버스가 오는 도중 펑크 나 차량을 교체하는 바람에 계획된 시간보다 45분여가 지체된 가운데 출발해야 했다. 하지만 차량 출발이 지연됨에도 우리를 환송코자 동네에서 나오신 연세 지긋한 어르신 등 환송객들은 비가 계속 내리는데도 떠나지 않고 작별인사를 전하는 우리들을 포근하게 안아주고 손을 맞잡아 주었다.
어떤 분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면서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며 이별의 아쉬움을 전해 짧은 이틀의 시간이었음에도 그만큼 오가는 마음의 깊이가 더했음을 전해 주기도 했다.
버스 안에서 알았다. 우리들의 멋지고 아름다운 친구 왕 르 마리아의 부모님께서 간식으로 집에서 가꾼 옥수수와 과일 등을 한 보따리 싸와 일일이 인사를 전하며 따뜻한 나눔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내년 한국을 방문한다는 멘트가 있어 추후 다시 만날 기약을 하며 차는 부슬부슬 비 내리는 소팔가자를 출발, 김대건 도로를 지나 힘찬 주행을 시작했다. 이 날 아침 동북3성에서 오신 지역 성당 대표 분들도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원하며 앞서 길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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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함, 그것은 부러움과 경외감 그 자체였다
중국, 중원 대륙을 알기 위해선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었다. 그럼에도 난 게으름으로 일관했었다. 전체 여정의 도상연구와 간단한 인사말도 배워야 했고, 길림성을 비롯한 동북3성도 공부해야 했다. 1백여 년 전 말(馬)달리며 광야를 누빈 외로운 선각자의 내면세계도 살폈어야 했다.
거기에 영웅 중 영웅인 유비와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와 기원전·후의 가림 없이 세기적 불세출의 지략가이자 충의의 상징이기도 한 제갈량에 조조, 동탁, 여포, 조자룡 등 풍운의 주역들이 자웅을 겨룬 삼국지도 섭렵해야 했고, 그 시대 연해주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준 박경리 著 토지(土地)도 한번 뒤적여봐야 했다. 그 뿐인가 시간을 조금만 더 낸다면, 서시(西施.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 미녀.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접근하여 오나라가 멸망하게 함)와 왕소군(王昭君. 전한 원제<元帝>의 후궁이었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보내짐. 그녀에 얽힌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많은 소재 제공), 초선(동탁<董卓>과 여포<呂布>의 후처 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고 전해질 정도의 미인. 여포가 동탁을 죽인 뒤 초선을 첩으로 삼았지만, 또 다른 야사에는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는 설도 있음)과 양귀비(본명 옥환으로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의 비로 현종의 며느리였으나 현종의 애첩, 사랑 독차지. 미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기도 함)와 같은 ‘중국 4대 미인’의 족적쯤은 찾아봐야 했다.
비록 여산에서 황산, 화산까지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경관에 공자 맹자의 유학이나, 당태종의 사내다운 기상에서 현종의 호사까지는 아니라도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만주지역을 내달리며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제 암흑기 우리 선조들의 아픈 역사는 훑어보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길림을 향한 글쟁이(?)의 도리요, 최소한의 예의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면을 통해 갈구(渴求)함은 현지를 돌며 귀동냥에 눈으로만 알려고 했던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스러웠음을 고백 하는 수밖에 없음이 못내 죄스럽지만 이실직고라도 통해 사(赦)함 받고 싶다면 너무 뻔뻔한 소치는 아닐는지.
본격적인 옥수수 밭의 시작이었다. 5박6일 내내 옥수수는 우리와 함께 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은 마치 비운의 한 하운 시인이 노래했던『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의 ‘전라도 길’처럼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 위의 모든 것은 옥수수요, 옥수수로 무장한 황홀한 벌판이 전부였다. 13억 인구의 광활한 영토가 바로 이것이구나! 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왕러 어머니께서 싸준 옥수수로 배를 채워 가는데 저 멀리 길 한복판에 커다란 황금잉어 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1미터 급 잉어가 오늘 점심메뉴라고 대장께서 강조를 해 기대를 잔뜩 하고 들어가는데, 정말 엄청난 잉어란다. 원탁에 푸짐한 밥상이 차려지고, 이내 커다란 쟁반에 1미터(?) 급 잉어가 들어왔는데 각설하고 이 날 난 날카로운 가시만 연속 골라내고 국물 몇 번 뜨는 걸로 그 장대한 황금잉어를 대신 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배를 채우면 차에 오르고, 오르면 달리고 달리면 눈에 보이는 천지는 온통 옥수수 밭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옥수수 밭이 한순간 눈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번엔 녹색 삼림이다. 도로 좌우측은 완전한 숲이다. 조금은 눈을 감고 싶어도 이 장대한 자연을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언제 또 볼 수 있으랴 하는 마음에 졸고 싶어도 졸수가 없다. 눈에 가득 담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3시27분. 휴게소가 저 만치 보이는데 아니, ‘안도’? ‘안도복무구역’이란 한글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아하, 연변이 멀지 않았구나’ 감을 잡는다. 어쩌면 그 옛날 고구려, 발해의 광개토대왕, 대조영, 고선지 장군과 같은 우리 선인들이 말발굽소리도 드높이 울리며 호령호령 채찍을 가했던 곳이리라. 다만 아쉬움은 이곳으로부터 집안현 광개토 대왕비가 있는 곳까지 100km 남짓이지만 빠듯한 일정상, 또 최근 광개토 대왕비와 관련한 이유로 제약이 있다하여 그냥 통과하는 게 필자로서는 무척이나 아쉬운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부터 연변자치주다. 도로변 안내판도 우리글이 위쪽이고 그 아래로 한자가 병행 표기된다. 연변은 2개현에 6개시로 구성되고 그 중앙에 우리에게 익숙한 연길시가 위치한다. 우리들 가이드에 나선 연변과학대학 4년의 연극배우 지망 왕지연(조선족 4세)양은 이 지역 인구가 210만으로 전체 인구의 36%를 차지한다고 했다. 나머지는 한족. 조선족 자치주 임에도 한족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니 언젠가는 이 지역도 한족 중심으로 변하는 것 아닌가 울적해지는 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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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지만 이곳에서 조선족이 줄고 있는 이유의 하나로 주민들 다수가 Korean Dream을 위해 서울로 향하거나 광주, 상해, 청도 등으로 일자리 찾아 떠나고, 아이들만 남아 조부모 슬하에서 외롭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과 흐름을 같이 해 울컥해지는 심사를 피할 길 없다.
시계를 보자 4시44분, 힘차게 달려온 버스는 이내 연길시 톨게이트를 곧장 통과한다. 저녁식사는 류경호텔 북한 식당이다. 여기에서도 ‘남남북녀’라는 말이 어느 정도 통용되나 보다. 여자는 역시 북한여자(? 이 대목에선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면서). 서빙과 공연하는 모든 여성들이 TV에서 봐왔던 북한 배우 모습 그대로다. 북한 산 ‘들쭉술’에 잠시 기분을 내며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한국 사람들에, 공연 여성들에게 꽃다발 안기고 사진 찍기에 급한 모양들이다. 왕 르, 이효걸과도 나눈 대화의 한 토막 이지만 이들 여성들이 해외에 나와 그 스스로의 꿈을 이루고 미래를 설계하기보다 누군가를 위하고, 그 체제를 위한 외화벌이 일꾼으로 혹사당한다는 연민의 정이 솟구쳐 가슴을 알싸하게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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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반가운 분을 만났다. 국제외교안보포럼 회원이자 천주교 신자로 길림성 조선족 동포들에게 20년여 정신적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기도 한 연변과학기술대 양대언 교수님이 마중오신 것이다.
반가운 인사와 더불어 식사가 끝나자 이곳의 빼놓을 수 없는 곳이라는 발마사지 업소에 전원 함께 했다. 마사지는 난생 처음이다. 가격은 50위안, 우리 돈 8500원이라는데 받고 나서도 어디가 좋은 것인지 느낌이 와 닿기 보다는, 그 돈이면 생맥주가 3잔인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면 ‘어디가나 못 말리는 주당(酒黨) 티낸다’ 바로 질책 대상이 될까 하면서도 미소는 절로 입가에 걸린다.
마사지로 다소 느슨해진 몸을 풀어주는 건 역시 시원한 맥주 한 잔, 해결사는 우리 방 방장 강종호 스테파노님, 맥주 한 캔씩을 전부 안기고 돌아오는 길, 연길시민의 에너지 발산구역이라는 진달래 공원으로 향했으나 밤 9시가 넘은 시각이라 파장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연길에서의 밤은 깊어가고 내일은 또 다른 명물 새벽전통시장 구경이다. 안가면 후회라니 일직 잠자리에 들고자 기대를 안고 지정된 방으로 들어섰다.
도문과 룡정 개산툰 공소에서 강 건너 북녘까지(4일차, 8.26)
▪ 전통시장에서 대륙의 풍물을 보다
내일에의 기대감인가, 아니면 긴장해서일까, 정확히 4시에 눈이 떠졌다. 그런데 이 소리는? 어딘가를 타고 ‘쐐애’ 물 흐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객실 커텐을 걷어 올린다. “새벽부터 비가 내려 전통시장 구경은 끝이구나”하며 밖을 내다보지만 아직은 사위(四圍)가 어슴프레 어둠에 잠겨 있어 분간이 되지 않는다. 다만 물소리가 계속돼 아쉬운 마음 품은 채 다시 침대 속에 몸을 뉠 수밖에.
설핏 잠이 들었는가 싶은데 ‘전화벨’ 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수화기를 드는데 “아참! 아니, 비 오는데 모닝콜?” 창문 커텐을 걷자 웬걸 비온 흔적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곧장 나갈 차비를 하며 머리를 굴려 추론하자 앞 건물 물받이 홈통으로 내려가는 물소리를 빗줄기로 착각했던 모양?
5시30분 전 날 곤한 일정으로 일어나지 못한 몇 사람을 제하고 전통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1km까지야 되지 못하겠지만 노천 시장은 그야말로 먹거리 천국에 풍년 지상이다. 농산물에서 높고 깊은 산골에서 채취했을 법한 식재류는 한국산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크기를 비교하기 무색할 송이버섯이며, 더덕 같은 산채에서 양념, 즉석 구이, 올망졸망 오밀조밀한 장신구는 물론이거니와 군용침대를 펴놓은 간이 마사지 방에 나와 근육이완을 시키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장(場)도 장이지만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칠 정도로 새벽바람을 쐬러 나온 부지런한 사람들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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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또 보며 눈 안 가득 새벽 장 풍경을 담고 차에 오르자, 최종환 엘리사벳 수녀님을 비롯해 여러 분들이 먹을 것을 바리바리 손에 들고 와 나눠주기에 얼굴엔 환한 웃음 가득 피어오른다. 엿과 사탕, 마른안주에 선물용 혁대 등을 서로 구경시키는가 하면 특별히 김민규 바오로 부부께서는 ‘전병’을 한 아름 사와 나눠주는 재미에도 푹 빠진 것 같다. 역시 인간사 즐거움 중 하나는 받는 즐거움이요, 그도 좋지만 나눔(授)의 즐거움은 더 풍요롭고 크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연길 전통시장에서의 새벽 장보기는 우리네 시골 시장에서 보는 재래시장과는 또 다른 멋과 맛, 흥취를 전해준 기분 좋은 아침을 여는 청량제이기도 했다.
▪ 도문-개산툰-룡정, 그리고 ‘일송정 푸른솔’
- 연길성당 거쳐 압록강변 도문까지 버스는 쉬지 않고 달리고 달려
새벽 전통시장에서의 지체된 시간으로 바빠지기 시작한다. 08:00시 연길성당 미사 참석이 예정됐으나 출발도 늦은데다 도로 사정으로 성당 도착 시는 15분이 지난 시각에 미사는 한참 진행 중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뒤쪽에 조용히 자리해 신부님의 한국 방문단 환영 인사말씀에 이은 김 대장님의 답례 인사, 본당 앞에서의 기념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8시45분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돌아보면 연길성당은 우리네 지방 여느 성당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여러 면모를 갖춘 잘 지어진 건축물로 보였다.
이제 다음 기착지는 도문 시. 필자 개인적 입장에서 본다면 어쩌면 이번 여정에 또 다른 의미로 머리에 떠올린 지역이기도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지역 어디이건 선인의 숨결과 역사의 흔적이 서리지 않은 곳 있으리오 만 도문 또한 조선 숙종 당시 국경선을 확실히 획정(劃定)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정계비에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서쪽은 압록강과 동쪽은 토문강<土門江, 두만강이 아닌 다른 지류 강, 이후 18세기 유럽열강의 각축 와중, 청과의 영토분쟁에서 중이 토문강을 지금의 두만강으로 해석, 위압>으로 한다는 내용을 표기하고 서명까지 했음)를 세웠으나 해석의 차이에 의해 크게 변질, 터부시 되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 또한 명확한 고증을 통해 밝혀져야 할 날을 고대하고 있기도 한 때문이다.
연길에서 도문으로 이동하는 약 1시간30분, 양 교수님은 지난 20년 동안 김현욱 박사님과 함께 소팔가자에 애정을 쏟았던 당시와 천주교 전도 사업에 힘쓰면서 이 지역 공산당 공안과의 숨바꼭질, 대학에서의 일화 등을 전해 우리들의 코 끗을 찡하게 하기도 했다.(#양대언 교수님 말씀 별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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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교수님에 의하면 연변 자치주 중에서 가장 낙후된 도시가 도문시라고 한다. 인구는 약 10만여명. 돌이켜 보면 오래 전 일이지만 고교 국사시간 간도와 우리 땅임을 구획하는데 있어 도문강은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점유했고, 도문강을 중심으로 청나라와 조선 간에 치열한 영토 논쟁이 이어지기도 했었다. 이는 아직도 물밑에서 치열한 연구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을 지니 이 지역 푸르른 옥수수 드넓은 벌판이 언젠가 두만강 푸른 물과 더불어 대한의 영토로 재 편입될 날이 다가올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하면서 그저 지나는 여행객의 감상어린 넋두리 아닌 한민족의 비원으로 유유자적 흘러가는 두만강에서 눈길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북한을 바라보면 함경북도 최북단 꼭대기 지점이다. 이런 아이러니도 있을까. 대한민국 최남단 섬마을 바닷가에서 자란 필자가 한반도 최북단 호랑이 머리가 될지, 귀부분이 될지도 모를 그 지점 가장 가까이에 서있기 때문이다. 절개와 충신의 호랑이 장군으로 기개가 장대했던 김종서 장군이 개척한 4군6진 중 온정과 남양이 바로 지척이다. 강 건너 행정구역은 ‘함경북도 남양군 음성시’라고 적혀 있다.
9시38분 우리들은 이번엔 도문성당으로 들어섰다. 성당 입구 녹슨 철대문 앞에서는 여성 신도 세분이 시멘트 섞는 일을 하고 있다 바지에 손을 쓱쓱 문지르며 수줍은 미소를 지은 채 반갑게 환영인사를 건넨다. 시멘트일 장면을 서울에선 볼 수도 없겠지만 지방에서도 그 장면을 본다면,.... 남자들은 다 무얼 하고 여자들이 힘든 시멘트 일을 하는지, 서둘러 화장실을 찾는데, 여기 화장실도 어쩌면 그 옛날 용정 그 시대 화장실을 재연해놓았나 보다. 남여 칸막이 사이에 어른 키 정도의 담을 쳐 막았는데, 왁자한 소음은 바로 현장 중계방송 급인데, 화장실 바로 앞 작은 공지에 활짝 핀 봉숭아가 자연스럽게 눈길을 자극한다.
그렇게 기막힌 장소에 어울리게 피어난 봉숭화를 본 적이 없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가 ‘측간(화장실)에 핀 봉숭화’ 꽃이 돼 눈시울을 아리며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킴에 연신 찰칵 찰칵 사진으로 남기다 성당으로 뛰어드니 예배가 한참이다. 비록 겉으로는 낙후해 보이지만 내부는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정리된 성당을 보면서 “아, 여기서 집무하는 신부님이나 형제자매 분들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을까”하는 생각도 품어 보지만 한편으로 사람냄새 가득한 성당이란 느낌이 함께 듬은 그 소박한 정경들에서 바로 어울리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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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주임신부님이 이곳에서 시무한 지 3년째라고 했다. 일행을 소개한 양 교수님께서는 “베드로 신부님이 한국에서도 조금 있었고, 남산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일화도 남긴 바가 있다”고 전해 모두가 한바탕 웃으며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김 대장님께서 미리 준비한 격려금을 전해드리고 한 컷 기념촬영 후 시내 관광을 위해 성당을 벗어났다.
얼핏 차를 타고 돌아 본 도문시는 국가 대 국가의 접경을 이루는 어딘가 모르게 을시년 스럽고 썰렁한 국경 마을(도시) 모습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조선족의 억양을 통해서도 ‘북한풍’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의 느낌은 훨씬 더했다. 이후에 본 룡정도 그렇지만 특히 이곳에서 들어본 조선족(북한인?)의 말 속에서는 더 억센 북한의 언어적 정취와 상가 상호(商戶)에서 도 엿보이는 ‘남새상회’ ‘인민병원’과 같은 별로 익숙지 않은 어휘들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어 우리는 접경지 북-중 연결지역인 ‘도문대교’ 인근을 찾았다. 1941년 준공된 ‘도문대교’는 많이 노후된 상태로 중국지역에서 물자를 실은 트럭이 드믄드믄 통과를 하고 있었다. 다리 관광비용으로 20위안을 내고 안쪽 북한 방향으로 들어가자 중국 쪽에서 약 70여 미터 북한과 국경선이 교차되는 지점에 붉은 선과 하얀 선이 그어지고 그 선을 연해 ‘여기서는 변경선’이란 한어(韓語)와 한어(漢語)가 길을 막아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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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6·25한국전쟁 중 포로교환으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운명의 다리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경계선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아 가슴을 시큰하게 하고도 남았다. 중국인은 자유롭게 넘나들어도 되지만 한국인은 돌아가야만 한다며 두 눈을 번뜩이며 지켜보는 중국 공안원의 시선이 찐득하게 느껴짐은 분단 민족만이 감지하는 애환이었을까.
눈을 들어 전방을 살펴보자 도문대교 아래 강폭 약 30~40미터의 황토 물과 노란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아름답게 장식되지만 강 건너 북측 마을은 짙은 어둠으로 비춰지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은 더해만 간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기념사진 몇 장을 남기고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돌아오는 길, 한 곳에 이르자 그 곳은 지난 2009년 3월 탈북자를 취재하던 미 케이블 ‘커런트(current) TV’의 한국계 유나 리, 중국계 로라 링 기자 2명이 북한군에게 붙잡혀 간 곳이라고 양 교수님이 설명해준다. 강폭은 채 10미터가 안 돼 보이고, 바지만 걷어 올리면 한 순간 달려 넘어갈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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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남으로 무심히 흐르는 두만강 물줄기와 강 건너 나무 한그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양군 한 마을을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낮게 깔린 노래가 흐르자 이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그렇게 모두가 한데 얼려 말없는 가운데 흘러간 민족의 고뇌를 짚어 보기도 했다.
다시 이번 방문할 곳은 개산툰 공소. 쉼 없이 달리고 있음에도 지치지도 않은 모양새들이다. 두만강을 왼쪽으로 끼고 힘차게 달리는데 이 지역은 항일 유적지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라고 한다. 여기로부터 불과 40여리 지점에서 우리 의병독립군이 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일망타진한 봉오동전투가 1920년 전개됐던 곳이자 최진동 장군이 일군 헌병대를 기습 타격하고 청산리전투와도 연계가 된 곳이라 하니 고래(古來)로부터 이 지역은 대한민족의 발자취가 서리서리 맺힌 곳이다. 도로 우측에 위치한 마을이름이 ‘마패’ 동네로 조선시대 ‘암행어사 출두야’의 대명사 격 어사 박문수가 어사 상징인 ‘마패’를 잃어버렸다 찾았대서 마패마을로 이름 붙여졌다고..
▪ 이리 가슴 시린 곳 그 얼마일까, ‘개산툰 공소(公所)’에서 내일을 보다
중간 지체된 시간이 있었지만 개산툰 공소 도착이 11시10분.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가슴 시큰거림이 있었다. 기도에 이은 통곡의 울음도 이어진다. 눈시울이 붉어짐은 어쩔 수 없는 상황. 가는 곳마다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이홍은 신부님은 개산툰 공소에서 더 큰 기도와 안수로 힘들게 교세를 이어가고 있는 개산툰 공소 신도 분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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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산툰 공소』. 소팔가자와 첫 인연을 맺을 당시 김현욱 박사님과 양대언 교수님이 주축이 돼 개척한 곳 또한 이곳이라고 했다. 대문에 걸린 작은 십자가와 ‘룡정시 개산툰 천주교회’라 창틀위에 부착된 표지판이 이곳이 천주교회임을 알려준다. 지금은 우리 어느 시골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겉모습은 낡고 초라하게 보이지만 내부만큼은 깨끗하고 정갈하게 가꾸어진 공소가 오르막길 언덕 위에 가파르게 서서 북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보인 공소. 집도, 채소류도, 건강이 여의치 않는 신자 분들도, 가난하고 소외된 변경지역에 위치한 탓일는지, 보여 지는 대개의 것들이 여리게만 보인다. 얼기설기 엮인 울타리를 연해 수세미와 오이가 열려 있지만 땅으로부터 받는 지력이 약해서일까, 왕성하게 크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상태로 열려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 애잔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예전 신자들이 30명이 넘을 정도로 근방에서는 가장 활발한 천주교 강세 지역에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곳일 뿐 아니라 한국 순례단이 중국 방문 시 빠지지 않고 들려간 곳도 여기요, 이곳에서 놀랍게도 82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귀띔해 주니 놀랄 수밖에. 지난 2002년 1월 룡정시 공산당에 공소로 정식 등록된 기록증도 보관된 이곳은 지난날 크게 번성된 지역이기도 했지만 지척에 있는 국영 제지공장의 쇠락과 함께 지역경제가 빈곤해지면서 교세도 덩달아 현저하게 쇠퇴해졌다니 그저 마음이 애잔해 진다.
세상을 열어 가면서 울고 웃는 일상은 늘 반복되지만 이번 개산툰 방문에서의 가슴 시린 순간들은 20주년 기념 방문 소팔가자에서 은혜의 시간과 더불어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을 여정이기도 했다. “밤늦은 시간이면 가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요. 나가보면 북한에서 넘어 온 동포들이에요. 우리도 없이 살지만 배고프다고 해 옥수수며 감자를 주면 먹지 않고 들고 나가요.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애써 말하는 그 분의 눈망울에도 한 방울의 눈물 맻힘과 처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공소 앞으로 옅게 바라보이는 두만강 너머 북한 지역으로 향하자 길게 뻗은 철로를 따라 목재와 짐들을 실은 보기에 따라선 피난열차와도 같아 보이는 3량의 화차가 어딘가를 향해 느리게 이동 하고 있었다. 화보로만 보던 북한의 실제 움직이는 기차를 보게 된 것도 기회라면 기회였을까.
떠나야 할 시간, 마무리 기도가 이어진다. “이곳 개산툰 공소는 한동안 빛을 봐왔지만 지금은 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들딸들을 보면서 주님께서 예전처럼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아주 선하고, 신중한 이들입니다. 강 건너엔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굶주림에서 해방돼 당신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한국에서 온 형제자매 가정에도 축복 함께 해 주시고, 고생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게 해 주소서”.
내려오는 길, “내년에는 반드시 건강을 되찾은 김 박사님과 더불어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겠다”며 온화한 눈빛으로 헤어짐을 못내 서운해 하며 흔들어주는 손길을 뒤로 우리는 개산툰 공소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 윤동주 생가를 향해 또 다시 차에 올랐다.
▪ 詩 낭송가로 변신한 민족시인 윤동주 생가, 그리고 룡정에서
개산툰 지역은 지역 명에서도 느껴지듯이 과거 여진족들이 살던 지역이다. 4군6진을 개척한 세종대왕 대 이 지역은 조선 강토였다. 이 지역 평정을 위해 홀로 파견돼 진(陣)을 구축하던 김종서 장군과 여진족 부족과의 피를 부르는 싸움. 그 전투의 와중에 싹튼 아리따운 여진족 낭자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절절이 배긴 개산툰을 뒤로 우리는 윤동주 생가를 향해 힘찬 기세로 진군을 계속해 나아갔다.
잠시 눈길에서 벗어났나 싶었는데 다시 정겨운 옥수수 밭이 이어진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지금은 세계적인 감독이자 여배우가 된 중국의 ‘장이모우’와 ‘공리’가 함께 한 영화 ‘붉은 수수밭’ 생각이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 되지 않지만 20년도 훨씬 넘은 것으로 보인다. 그 때도 배경은 끝없이 펼쳐진 수수밭이었다.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검게 그을린 건장한 사내들과 등짐지게, 가난한 집안의 예쁜 여자, 그리고 수수밭에서 그려진 아픈 사랑 나눔과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과의 치열한 항일 전투.
당시 시대적 배경도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모든 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인력에 의존했다면 지금 수수밭은 헬기까지 동원된 기계에 의해 일사천리로 씨앗이 뿌려지고 수확도 이뤄지고 있다고 하니,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문명의 이기, 선악까지 모든 것을 다 바꿔놓았다고 하겠다.
『윤동주』. 요절했음에도 우리민족의 자랑이요 민족정기를 크게 불러일으킨 애국시인. 그의 생가는 출생지 명동촌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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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부끄러워했다....<중략>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
윤동주 생가는 잘 정비돼 있었다. 이 지역 공산당에서도 윤동주 시인에 대해 각별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생가 입구 거대한 바위 표지석에 새겨진 ‘윤동주 생가’ 알림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표지석이 설치되기 전에는 나무 말목에 간단히 표시를 했지만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만큼 시인의 위상이 어떤가를 알려주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 공산당은 윤 시인을 조선족으로 만들어놓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의 소중한 우리 역사 문화유산들이 알게 모르게 변색 왜곡돼가고 있음에 자칫 이렇게 가다간 오래지 않아 그도 중국화, 한족화 되지 않을까 우려, 필자만의 생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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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는 부모님 고향 함경북도에서 기와 등 자재들을 직접 가져와 지어졌다. 기와지붕에 넓직한 집은 용정 그의 집안이 어렵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양 교수님 설명에 의하면 윤 시인의 민족애, 구국을 위한 기치는 만주지역에서의 교육을 통한 민족의 깨우침, 독립운동에 앞장선 외삼촌 규암 김약연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불현 듯 윤 시인의 ‘서시’가 낭독하고 싶어 일행의 양해를 얻어 목청을 가다듬자 어느새 시 낭송자로 탈바꿈해 몇 편의 시를 더 낭송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 또한 또 다른 추억으로 아로새겨야 할 판.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으로 태어나(1917. 용정 명동촌) 문학을 통해 민족의 설움, 아픔을 노래하며 일제에 항의한 대표적 저항시인인 윤동주는 일본 유학 중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돼 일제의 고문을 받다 해방 6개월을 앞둔 1945년 옥중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 날 우리는 윤동주 시비 앞에 서서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를 음미하며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 그가 겪어야 했을 울분과 뼈저린 고뇌, 마음의 고통을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가에서의 기념촬영, 시비(詩碑)들을 돌아보며 가슴으로 낭송을 다 마친 우리들은 다시금 길 떠나는 시인의 심경을 가늠하며 생가를 나서야 했다. 시침은 어느새 훌쩍 오후 1시를 가리킨다. 이젠 금강산도 식후경(金剛山, 食後景)이다. 그래서 이번엔 용정이다.
돌이켜 연변이 암울하던 1900년대 전반(前半)부를 아우르는 실지라면 용정은 그 시대를 유랑하던 우리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함축하는 대표 지명은 아닐는지?
용정시내 식당을 찾아가면서 나는 잠시도 눈을 쉬게 두지 않았다. 용정시내 상가와 지나치는 거리 풍물 한 가지라도 더 담고자 했다. 건물구도에서 진열된 물건, 물건을 사고파는 주민들 표정, 그들 사이 대화에 스민 방언과 맛깔스럼 등을 눈에 담으면서 메모 까지 빠트리지 않고자 했다. 풍성하게 차려진 오찬장에서도 동일했다. 양 교수님으로부터 어제와 오늘의 중국, 향후 10년후 까지를 고려한 변화 예측을 주고받으면서 중국 전통주까지 쓸어 담아야 하는 자리는 식(食)과 지(知), 화(和)가 함께 어울리는 좌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식도락과 이야기 삼매경에 빠질 수만은 없는 노릇, 지난날 민족교육의 요람이요, 독립일꾼 배출의 산실인 대성중학과 용두레우물도, 일송정과 푸른 솔도, 해란강도 어서 굽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2시20분 대성중학교로 들어섰다. 아, 여기가 바로 그 대성학교. 책에서만 봐오던 역사의 현장이다. 두 귀를 쫑긋해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세월을 거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하나하나에서, 설명 한마디, 한마디가 바로 역사이며, 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이 빼곡히 차있는 곳 때문이다. 다시한번 체험학습의 소중함, 현장 순례가 참교육의 장임을 되새긴다.
아뿔싸, 한데 난 놓치고 말았다. 용두레 우물을. 바로 지척에 두고도 ‘이슬비에 속적삼 젖는다’는 말에 이끌림인가, 살포시 내리는 빗방울에 겁먹어 그만 버스에 몸을 싣고 말았으니, 이를 어쩌랴. 오호 통재로다. 오호 애재로다! 결국 사후 인터넷을 뒤져 사진으로 대신할 밖에. 땅을 치고 두고두고 후회한들 지난 일에 어이할꼬!
『룡정 성당』. 우리를 반겨 맞아 주는 수녀님과 엷은 미소의 신자 두어 분 모습이 참 싱그럽다. 성당을 중심으로 꽤 넓게 보이는 안마당은 밭으로 일궈져 옥수수며 고구마, 여러 종류의 꽃들이 활짝 피어나 보는 이들의 마음을 한층 화사하게 만들어 준다. 물과 거름을 주고 보듬고 살피며 알뜰하게 가꾸는 분들의 맑은 마음을 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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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 성당은 신부님이 안 계시고 조선족 수녀님이 책임지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잠시 머문 뒤 성당 현관 앞에 모두가 섰다. 들판을 가로질러 아스라한 산마루, 소나무 한 그루에 정자(亭子)까지도 보이는 것 같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비암산(琵岩山)이니 이제 ‘선구자’를 불러야 할 타임(Time)이다.
그 얼마나 그리워하며 애타게 부르던 노래이던가. 1백여년 전 그 시점으로 들어가 만주 벌판을 내달리며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신의 영달과 가족들의 안위를 다 접어야 했던 선각자들의 한(恨)과 이역 땅에서 설움을 곱씹으며 헐벗고 굶주리던 그 임들을 떠올리며 양 교수님의 요청 따라 우리의 영원한 소프라노 서정숙 루시아님의 지휘·선창아래 가슴을 후비며 절규하는 심정으로 힘차게 부르고 부르니 우리들의 염원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비암산 정상으로 달려가는 것만 같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일제치하 비암산 일송정은 독립운동과 항일선구자들의 상징으로 조선인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나 이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한 일본헌병대에서는 일송정을 과녁으로 박격포연습을 매일같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웬 영문인지 맞추지를 못하여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후추씨를 밀어 넣고 대못을 박아 넣어 흔적을 없앴다고 한다. 결국 시들은 소나무는 1938년에 말라죽고 말았다고.
현재 보이는 팔각정자는 1990년에 신축을 하였으며 바위에서 살 수 있는 작은 소나무도 옮겨 심었단다. 그 후 소나무가 여러 사정으로 죽고, 베어졌으며 또 계속 심어져왔으며, 지금도 일송정에 가면 자그마한 소나무를 볼 수 있다고 설명이 이어졌다.
이제는 또 헤어져야 할 시간, 만남과 이별은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사, 따끈하게 삶아 준 옥수수를 한 다발 품에 안고 양대언 교수님과 수녀님의 환송을 뒤로 우리는 또 다시 차에 올랐다. 이제는 백두산이다.
아! 민족의 성산 백두산 천지여(5일차, 8.27)
전 날 쉼 없이 차창을 때리는 장대비와 안개 속을 뚫고 우리는 백두산을 향한 숙박지 이도백하에 도착, 몸을 풀었다. 고지대라서 인가 코끝에 스미는 공기마저 예사 공기가 아닌 듯, 상큼하기 그지없다. 오는 내내 굵은 빗줄기의 연속이어서 다음날 기상에 마음 졸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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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7일 아침 7시.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날씨는 쨍쨍했다. 호텔을 출발해 송림 우거진 산길을 거쳐 15분 만에 광장에 안착하니 ‘長白山’이라 표기된 우뚝 솟은 안내판이 압도한다. 역시 ‘중국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할 계제에 민족의 성산 백두산(白頭山)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임에 설레게 하지만 한편으로 ‘백두’가 아닌 ‘장백’ 표기가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한민족의 한 구성원임을 자각케 한다.
날씨는 청명했다. 허나 순간순간 정상을 휘감았다 스러지기를 반복하는 안개가 세계적 자연의 보고(寶庫) 해발 2750m 백두산을 더욱 성스럽게 해주는 것만 같다. 일개 범부, 필부가 어찌 감히 말로 글로 표할 수 있으리오만 장백의 멧뿌리, 백두산 천지의 그 장엄함은 단 한번 바라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해버리고 만다.
대자연의 숨결 대 평원이 한없이 펼쳐지고 이어지는 백두성산. 한걸음 한걸음 나무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걸음 속에서, 몸 상태가 여의치 않는 빈객(賓客)을 태우고 1천4백4십2개 계단 구슬땀 뻘뻘 흘리며 오르내리는 가마꾼의 모습과 함께 자연에 함몰되는 미세한 한 인간의 부침을 보게 되는 것도 성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느끼게 된 진귀 장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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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백두 정상 천지와 함께 했노라’ 한 장의 사진에 귀한 모습을 담고 ‘올랐으니 이제는 내림순서’다. 잠깐 길 잃은 양을 찾아 내려오는 길, 이번엔 또 다른 신비와 아찔함을 간직한 대협곡을 돌며 천지백두성산의 끝이 어디까지인가를 새삼 절감하며 최종 목적지 돈화시를 향해 고삐를 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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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화에서의 마지막 여정
돈화, 1300여년 전 대조영 장군의 발해 문화가 숨 쉬고 있는 역사의 땅이다. 가는 도중 멀리에서도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엄청난 규모의 불상이 뭐냐는 질문에 옆에 이효걸 군이 재빠르게 인터넷을 검색해 발해 불교문화의 한 상징이라고 알려준다. 그 위용에 벌린 입 다물지 못하게 됨은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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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45분 도착한 돈화시는 무척 깨끗하고 정결하게 보이는 도시였다. 도시구획도 잘 돼 보이고 건물들도 현대식에, 성당도 이를 뒷받침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질주하는 차량들의 운전 교통법규는 서울이나 돈화시나 매일반인 것 같았다. 반가운 사실의 하나는 여기 돈화성당에 음성 꽃동네에서 지원하는 장애우 거주 시설이 건립돼 앞으로 활발한 지원 사업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누구보다 먼저 준비 중인 건물을 돌아본 이재영 4·19공로자회 경기도지부장께서 귀띔해 준다.
이곳 중국인 유청춘 주임신부님과 동행한 이홍은 신부님이 공동 집전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는 유 주임신부님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해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추억속에 아로새기며 흥겹게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장춘에서 인천, 아듀 ‘2014 장춘 소팔가자(6일차, 8.28)
- 숨 가쁘게 달려온 힘찬 순간들을 여미며
새벽녘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4시50분. 체크아웃 시간이 얼마 남지 않다. 서둘러 꾸러미들을 한데 모아 정렬시키고 객실정리에 나선다. 이럴 때 어김없이 발휘되는 게 옛날 옛적 군대에서 내무생활을 훌륭하게 마친 모범군인(?)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침대모포, 베개, 타올, 물 잔에 슬리퍼, 샤워장 물기제거에 이르기까지 사용한 모든 흔적을 지우도록 닦고 개고 다듬은다. 자고로 군인은 전장에서 부대가 머문 흔적을 완벽하게 제거함으로써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첩보 자료제공을 최대한 막아 차기 작전을 펼칠 아군의 활동을 편안하고 용이하게 해주어야 할 책무도 있기 때문이다.
5시35분 체크아웃, 이젠 장춘공항이다. 로비에는 전 날 우리를 위해 한턱을 거하게 쏘신 유청춘 신부님과 교우들 몇 분이 벌써 나와서 떠남을 아쉬워하며 환송해 준다. 가슴이 환해짐을 느낀다.
다시 시작되는 대평원. 옥수수 밭 푸르른 잎사귀들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타고 마치 귀한 시간 함께 해 주었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 마냥 ‘안녕히 잘 가시라’며 손을 흔들어 주는 것 같아 짧은 5박6일의 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며 9시45분 장춘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나니 이제 여기서도 짧은 이별을 고해야 할 시간. 함께 동행 하며 미사를 집전하고 사진 촬영과 밝은 미소, 유머로 웃음을 유도한 이홍은 신부님, 청년의 미소가 아름답고, 젊음이 왜 낭만을 품는가를 보여준 왕 르 · 이효걸, 예쁜 미모에 배우로서 성장 잠재역량이 풍부하면서 일정 내내 몸을 사리지 않고 안내해 주던 조선족 4세 왕지연 양과의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전했다.
- 그 날의 소중했던 추억을 접으면서 감사를
이제 전체의 장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감사하고 잊지 않을 분들이 있다. 바로 우리 일행의 안전을 담보하고 소팔가자로부터 전 과정을 함께 한 버스 승무원(기사)이다. 새벽녘이건 야간시간이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단 한번의 시간 어긋남도, 짜증도, 잔소리도 없이 묵묵하게 최상의 상태로 여정을 이끌어 준 중국의 기사 분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쁜 일정이 많았음에도 현지에서의 민족혼과 역사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앞으로 더 크게 발전시켜나갈 한중 문화역사관계를 새롭게 접목시켜 주신 고가 높은 안내 첨병 양대언 교수님, 상큼한 미소와 항상 상큼한 인상으로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움직임을 편안하게 해 준 가이드 왕지연 양께 김종두 스테파노 대장님을 대신해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더불어 2014년 소팔가자 성 김대건 성지 순례 순례 행사에 함께 하며 기억에 오래 남을 시간들을 나눈 현지 천주교 신부님과 수녀님, 교우님, 서울과 부산, 대구, 계룡대 지역에서 함께 해주신 선배님과 자매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
첫댓글 이현오 기자님 기억하고 곱씹으며 잘 정리하신 글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와우!~~캄솨아~~!~
정말 감동입니다. 중국 소팔가자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사랑, 중국 이 나라에 대한 뜻깊은 감상을 감격스럽게 써주신 이현오기자님께 깊은 감사와 경의를 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다녀왔던 이번 성지순례는 저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열심히 하고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한중천주교회의 문화교류를 비롯해 한중관계의 무한한 발전에도 도움되는 사람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현오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수고많으셨어요.
그래 마리아!~~든든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