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인 전주이씨는 122개파가 있다.
전주이씨 분파 중 가장 번성한 파는 세종의 열세번 째 아들 이침(李琛)을 파조로 하는 밀성군파이다.
세종대왕과 신빈김씨 소생인 밀성군파는 3대 연속 문형, 6정승 9판서를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이다.
밀성군은 강력한 왕권을 추진한 세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밀성군 아들 운산군은 실덕한 연산군으로는 종묘와 사직을 수호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과감하게 임금교체를 추진하고 성공시켰다.
조선의 마지막까지 정국의 중심에 서 있던 이 집안의 가업 중 하나는 청나라 정벌이었다.
북벌 추진 1세대인 영의정 이경여는
북벌을 실행하기 위해 10만 정예병을 양성하는 방안을 죽는 날까지 효종과 논의했다.
북벌 2세대인 이조판서 이민서는
이순신 김천일 김덕령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영웅들의 일생을 재조명하고 민족영웅을 발굴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국방력을 키웠다.
북벌 3세대인 병조판서 이사명은
기마전술 위주인 청과의 결전을 위해 숙종에게 12만 화기병 육성안을 올렸고,
동생인 좌의정 이이명은 사행사로 간 청나라에서 기밀문서를 입수하여 가로 6.64m, 세로 1.44m의 만주와 북경으로 가는 성과 군사적 주요 거점이 그려져 있는 초대형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작성해 숙종에게 바쳤다.
이사명과 이이명은 북벌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상민은 물론 양반에게도 파격적인 세금징수를 주장했다.
또 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헌구는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평안감사 시절 국경 요지에 산성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고 특별 무과시험을 실시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이경여 가문은 남인이 득세한
기사환국(1689년) 때 서인이었던 이사명이 사사되고,
소론이 승리한 신임사화(1722년)때는 노론4대신인 이이명과 이건명이 죽음을 당하고 이관명이 관노비로 전락해 유배되었다.
대대로 서인과 노론의 사상가였던 이 집안은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십명이 사사되거나 유배를 가는 치명상을 입어 북벌을 추진할 동력을 잃고 말았다.
이경여의 아내 풍천임씨는 손자들을 스토리텔링으로 교육해 3명의 정승과 1명의 판서로 만들었다.
그녀가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려주던 손자 중에 이사명이 병조판서, 이이명과 이관명, 이건명이 각각 좌의정에 오른 것이다.
또 3대 연속 문형(文衡)을 만들었다.
아들 이민서, 손자 이관명, 증손자 이휘지가 3대 연속 문형에 오르는 청사에 빛날 업적을 남겼다.
문형은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제학이라도 문형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성균관대사성이나 지성균관사를 반드시 겸임해야만 했다.
전주이씨 중 으뜸이라는 의미로 '일밀성(一密城)'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약 260만 명에 이르는 전주이씨 중에 밀성군파는 불과 1만9천여 명. 그만큼 초정예 엘리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족은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출세가 쉽지 않다. 왕권에 위협이 될 왕족의 정치참여를 막는 제도 탓도 있었고, 세도정치를 하는 외척의 견제도 심했다.
왕족인 밀성군파가 출세를 했던 것은 의외에 가깝다.
그런데 밀성군파는 세종 때부터 순종 때까지 500년 동안 조선의 역사를 주도했다.
그래서 이들의 역사는 조선 상류층의 역사이고 이 가문의 역사는 바로 조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도서 “세종대왕 가문의 500년 야망과.
교육”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