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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당산에서 본 양동면 일원
양동楊東
영춘英春 이복재李福宰
민족民族의 젖줄 한강漢江 동東쪽, 서기瑞氣 어린 넓은 땅,
택당澤堂 이식李植도 이곳에 터 잡아 큰 학문學文이루고
동계팔경東溪八景 노래했네.
착하고 순한 사람들 대대代代로 여기 사는
을미의병乙未義兵 일으킨 의향義饗의 고장이요.
쌍학雙鶴 석곡石谷 매월梅月 고송高松
금왕金旺 계정桂亭 삼산三山 단석丹石 여덟 마을
이름 또한 향기香氣롭다.
북北은 높고 남南 낮으니 제일봉第一峰이 저두猪頭이며
성지지맥聖地之脈 서西로 벋고 제이봉第二峰이 당산堂山일세
저두발원猪頭發源 석곡천石谷川이 가운데로 흘러가고
동東에서 계정개울
매월개울.단석개울이 서西에서 흘러 드네
산줄기 정기精氣받고 물줄기 슬기모아
두고두고 웅비雄飛할 희망希望의 땅이로다.
솔향기 그윽한 대.소송치大.小松峙 고개넘고
유난히도 둥그런 봉 건지산建指山 바라보며
장대場垈와 부연釜淵거처 섬실들 가로질러 주막 있던 월은月隱지나
구둔치九屯峙로 넘어가는 고붓한 평해로平海路는
서울에서 관동關東(평해)잇는 다른 이름 관동대로關東大路
선조先祖들 넘나들던 애환哀歡서린 옛길이네
골 따라 계중옥토溪中沃土 벌 따라 넓은 옥토沃土
비 안와도 가뭄 없고 큰비와도 홍수洪水없네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쳐도 포근하기 그지없고
태풍颱風은 불어오다 여기와 순풍順風되니
해마다 시화연풍時和年豊 복福 받은 땅 여기로다
친환경농업특구親環境農業特區
부추.씀바귀.오디.한우 특산물特産物이 다채多彩롭고
온 나라 방방곡곡坊坊曲曲에 더 없이 유명有名해져
살림살이 재게 늘고
복선전철複線電鐵에 고속도로高速道路 어딜 가나 한 나절 안
넓은 땅 이곳저곳 산업입지産業立地 적지適地이고
터 잡아 온 기업企業마다 승승장구乘勝長驅 커가네.
경기京畿의 동단東端에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중앙正中央
이 땅의 도약기운跳躍氣運 온 나라에 퍼져가니
국운國運.국격國格 드높이는 진원지震源地가 이 곳일세.
<해설>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동계팔경東溪八景:1584(선조 17)~1647(인조 25).조선 중기의 문신.당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로 문풍을 주도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정구·신흠·장유와 더불어 한문4대가(漢文四大家)로 꼽혔으며, 여한9대가(麗韓九大家)로도 꼽혔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좌의정 행(荇)의 현손이며 좌찬성에 증직된 안성(安性)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실정(失政)을 논박하다가 여러 번 좌천되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뒤 대사헌, 형조·이조·예조 판서를 지냈다. 문장의 짜임새를 정교하게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았고, 고문다운 문장이란 한문이 지닌 표현능력을 최대한 살리면서 간결하고도 품격이 높고 꾸미지 않은 것 같은 데서 우아한 흥취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5언율시를 가장 잘 썼다. 소설배격론이 대두되었을 때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문풍을 바로잡는 책임을 절감하며 소설의 폐단을 강경하게 지적하고 허균을 공격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계산지는 택당이 백아곡(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2리 안골마을)에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의 묘소를
옮기고 택풍당을 짓기까지의 과정과 백아곡의 위치,지형,산세,선대묘 등에 관한 내용을 글로 정리해 놓은 책으
로 유명한 택풍당지(澤風堂志)도 계산지안에 들어있다.
동계기는 택풍당의 동계(東溪,동쪽에 있는 개울)2십 여리 중 노닐어 볼 만한 곳 8경을 골라 기록해 놓은 글이
다.
◆을미의병乙未義兵:을미사변을 계기로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운동.우리 고장 양동출신의 이춘영.안승우의병장이 창의했다.
◆저두(산)猪頭(山) :성지지(산)맥의 양동 땅 첫 봉우리이며 제일 높은 산으로 지금까지 변변한 산이름도 없이 ‘도토머리봉’으로 전해 내려오는 정도였다.산에 얽힌 전설과 구전하는 이름을 살리고 웅비하는 양동면 제1봉으로서의 이미지를 심어 필자가 지은 산이름이다.
◆성지지맥聖地之脈: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한다.
백두산에서 남으로 맥을 뻗어 낭림산·금강산·설악산·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 뒤 다시 남서쪽으로 소백산·월악산·
속리산·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한국 산의 큰 줄기를 망라한 산맥을 이르는 말이다. 즉 한반도 산계의 중심이
며, 국토를 상징하는 산줄기로서 함경도·평안도·강원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 걸쳐 있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 되는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이기도 하다.
산경표(山經表,우리나라 산줄기[山脈]의 흐름, 산의 갈래, 산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해놓은 지리서로서 저
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에 보면 한국의 산맥은 1개 대간(大幹),
1개 정간(正幹), 13개 정맥(正脈)의 체계로 되어 있다.
기맥(岐脈)과 지맥(枝脈)이라는 말도 쓰지만 위 산경표에 나와 있지 않아 현대인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으로 보이는데
근래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 기맥 중 하나가 한강기맥이다.
백두대간의 오대산 두로봉(1,422m)에서 서쪽으로 갈래를 쳐 큰 산들을 두루 섭렵하고 금물산을 거쳐 용문산을 지나
양수리에가 가라앉는 산줄기를 말한다.
양동의 산들은 이 백두대간이나 정맥에는 물론 한강기맥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강기맥에 속한 금물산은 갈기산(685.4m)과 성지봉(787.4m)으로 가지를 치는데 갈기산은 한강기맥으로 이
어지지만 성지봉은 성지지맥이란 이름으로 가지를 치고 이 성지지맥이 우리 양동 땅을 거쳐 가는 것이다.
이 성지지맥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하자.
멀리 강원도 오음산(930m)에서 양동쪽을 향해
삼마치고개-금물산(791m)-성지봉(787.4m)-덕갈고개-도덕고개를 지나 우리면 산인 614m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다.이 능선은 614m봉에서 다시 가지를 친다. 즉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계속 경기도와 강원도계를 이루며 남진하는 능선은 590m봉에 이르러 우리면 계정리와 횡성군 경계가 시작되어 원주시의 방면으로 이어가 여맥을 섬강에 가라앉힌다.
또 다른 한 가지가 바로 성지지맥으로 서쪽 모른고개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불감시탑이 설치되어있어 전망이 좋은 555.9m봉을 지나 벗고개~턱걸이고개~삼각산을 거쳐 다시 계속 남진하여 중앙선 매월터널을 지나 서화고개에서 가라앉았다가 우리면의 남쪽 끝인 단석3리 완쟁이마을의 406봉을 거쳐 보금산(367m,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을 빚어 놓고 계속남진,당고개(여주~원주를 잊는 42번국도)를 지나 영동고속도로를 지난 다음,남한강과 섬강에다 여맥을 모두 가라앉힌다. 성지지맥의 도상거리(圖上距離)는 약 55Km이며 그 중 필자가 휴대용GPS를 활용하여 실측한 양동면구간은 27Km정도이니 총 지맥의 절반정도가 양동면 땅에 걸쳐있는 것이다.
◆당산堂山:양평군에서 내 세우는 아름다운산 중의 하나,해발541m높이의 양동면 삼산리와 여주군 강천면,원주시 지정면과 경계를 이룬다.곰지기골계곡과 맞은편 웅덕산과 함께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고 진입로와 주차장 등이 잘 정비되어있다.주변 풍광이 아름답고 깨끗하며 등산로가 험하지 않아 가족단위 등산객이 즐겨 찾는다.
◆대.소송치大.小松峙:강원도 원주에서 문막을 지나 섬강을 건너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도계를 이루는 고개를 대송치,양동면에 접어들어 솔치와 솔치모랭이 사이에 있는 두 번째 고개를 소송치라 한다.
◆장대場垈:지금의 양동면 단석1리의 한 마을이름.옛날에 장이섰던 곳 즉 장터라는 뜻에서 장대라 한다.
◆부연釜淵:부연의 지금 주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1리이다.양동면은 조선시대에 지평현에 속한 상동면이라 하였는데 석곡리(石谷里).부연리(釜淵里).죽장리(竹杖里)의 3개리가 있었다고 하여 부연이 마을이름으로 까지 불리웠다.
부연은 ‘가마소’와 같은 뜻으로 산골의 개울에는 흔히 만들어 지는 자연못이어서 가마소란 소의 이름은 매우 흔하다. 양동의 부연은 ‘현연(玄淵)’으로도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소전체가 검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택당 이식의 동계기에 나오는 부연으로 인해 후에 이 마을이 ‘부연리’라는 지명으로까지 쓰였고,후일에는 그 이름이 ‘귀거연(歸去淵)’으로도 불렸다.부연은 개발로 인하여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한때는 양동의 상징으로 불리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구둔치九屯峙:양동면 매월리 월은마을과 지평면 일신리 구둔마을을 잇는 고개이름이다.뒤에 설명할 평해로(관동대로)중 양동을 지나는 길목에 붙은 고개이름으로 ~~령(嶺),또는 ~~치(峙)라 붙였는데 주로 높은 고개이름에 붙였던 것 같다.양동과 관련해서 치(峙)라는 이름이 붙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붙여야할 것 같다.
◆평해로平海路(관동대로關東大路):경북 평해에서 서울을 잇는 옛길 이름이다.평해에서 시작되는 길이라하여 평해로로도 불리우나 관동을 있는 길이라하여 흔히 관동대로로 불리운다. 양동의 관동대로 구간은 대송치~소송치~장대~부연~석실~월은~구둔치이다.
관동대로는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 중 제3로로 수도 한양과 경기 지방의 동부와 강원도를 이어주는 길이다. 길이가 구백이십 리이고, 걷는 데 열사흘이 걸린다. 영남대로, 삼남대로 등의 다른 옛길과는 달리 자연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강바람과 산내음을 즐기며 걸을 수 있다. 또한 율곡과 신사임당, 허균과 허난설헌, 김시습, 정철, 이색 등 우리 역사를 수놓았던 인물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영남대로와 삼남대로는 아스팔트가 옛길을 뒤덮어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하지만 관동대로는 서울을 빠져나가자 딴 세상이다. 서울에서 종착지 평해에 이르는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바다까지 가는 길이다.
대관령 넘어 영동 지방은 관동팔경과 금강산, 설악산, 두타산 등 빼어난 경치로 수많은 문객들이 답사한 곳이다. 이승휴, 이곡, 이색, 김시습, 남사고, 김창협, 허균, 허난설헌, 허목 등 역사적 인물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관동대로가 지나는 길목인 관동지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의 이름난 유배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특히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이야기는 관동대로 전체에 걸쳐 있다. 신사임당의 시댁이 파주의 율곡 마을이고, 평창군 봉평에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이 함께 살았으며, 강릉은 사임당의 친정이자 율곡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계중옥토溪中沃土:필자가 만든 신조어이다.양동은 전체의 80%정도가 산이다.이 산들이 만들어 낸 계곡을 떠나서는 지역을 이야기하기 힘들어 진다.계곡(溪谷)마다 계류를 따라 만들어진 좁거나 혹은 약간이나마 넓은 땅들이 비옥하고 여러 가지 곡식을 길러내는 터전이 됨은 두말할 나위없다. 따라서 ‘계곡따라 달린 논밭이 기름지다’는 뜻으로 만든 신조어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중앙正中央:우리가 살고 있는 양동이 대한민국의 정중앙임을 처음 부르짓게 되었다. 경기(京畿)의 참뜻이 수도를 감싸서 보호한다는 데 있다면 수도 서울을 감싸고 보호하는 경기도, 그 중에서 동단(東端)이긴 하지만 경기의 땅 안에 대한민국 땅의 중앙이 있음이 더 의미있고 이는 현대문명이 만들어 낸 구글어스를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북위 37도22분11초,동경 127도 48분 37초에 양동면사무소가 들어 서 있다.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이야 말로 실로 대한민국의 정중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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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진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포즈가 느껴지는군요
이복재 조합장께서 대한민국 <양동>(양동에 사는 사람들 모두 이곳을 '양동면'이라고 부르지 말고 당당하게 이름 그대로 '양동'이라고 부르고 양동면이 아닌 '양동' 그 자체로 우리 고장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도처에서 느껴지는군요.
감동적입니다.
고장의 마을 이름과 향토 자료를 활용해 시도 잘 지었네! 당신만큼 양동에 잘 아는 사람은 없을 듯한데!
양동을 고풍스럽고 멋지게 표현해 주셔서 참 좋습니다. 양동을 다시 한번 생각 하게 합니다,
해박한 지식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그 구둔치는 양평역이나 용문역 대합실에 비치된 양평군 관광지도에 보면 연결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현장에 가보면 길이 막혀 있더군요.
구둔치가 차도로 연결된다면 지평과 양동이 좀더 가까워 지지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