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배에서는 내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WCC의 충격적인 실체에 대하여)"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란 세계의 기독교 교파 간의 연합기구를 말합니다. 한국교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의 명의로 W.C.C.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현재 N.C.C.K.에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 구세군 대한본영,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정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까지 8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비록 교단 차원으로 가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8개의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 역시 W.C.C.에 대한 태도는 찬성과 반대로 확연하게 갈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 다원주의에 기반을 둔 W.C.C.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W.C.C.를 지지하는 목회자들은 대체적으로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의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W.C.C.를 반대하는 목회자들은 “옳은 것이 좋은 거다.”라는 신앙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관용을 빙자한 ‘타협’과 편협이라는 누명을 각오한 ‘절개’의 차이입니다.
물론 타협을 거부하는 목회자들의 다수도 W.C.C.에 얼떨결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객관적인 증거에 기초하여 W.C.C.의 정체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두 권의 책부터 소개합니다. 먼저 소개할 책은 『W.C.C. 운동 비판』(박영호/기독교문서선교회)입니다. 이 책에서는 W.C.C.가 어째서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한 교회들의 연합기구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W.C.C.의 신학적 기반은 종교다원주의이며, W.C.C.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한 교회통합이 아니라 모든 종교들의 통합입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고 기독교 역시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기독교는 구원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인 셈입니다. 실제로 W.C.C.는 무속종교와 아프리카의 토착종교, 마녀들의 마술과 점성술,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수용하고 있습니다. W.C.C.는 무당의 푸닥거리조차 성령의 역사로 보며 영지주의를 정당한 기독교로 승인합니다.
W.C.C.는 선교를 복음전파를 통한 영혼구원의 사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사회복지 증진과 정치적 민주주의 구현 등을 선교의 목표로 상정합니다. W.C.C.는 이웃 사랑을 우상화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종보다 앞세웁니다. W.C.C.는 하나님께서 가증한 죄악이라고 정죄하신 동성애를 오히려 지지합니다. 인권을 빙자한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척하고 하나님을 가르치려 들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이런 일을 합리화하려면 경전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려야 하는데, W.C.C.는 역사비평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의도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최덕성/본문과현장사이) 역시 W.C.C.의 위험성과 그 실체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W.C.C.가 얼마나 종교다원주의와 뉴에이지 신학에 오염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며 실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오직 성경에 바탕을 둔 신앙고백의 일치와 진리 안에서만 연합운동의 정당성이 성립됨을 역설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W.C.C.의 총회는 실로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탈기독교화 되고 있습니다.
19세기까지의 세계선교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수행하는 복음 전도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선교협의체로 출범한 W.C.C.는 시간이 갈수록 복음전도를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암스테르담 총회(1948년)는 기독교적 고백에 입각하여 모였습니다. 하지만 웁살라 총회(1968년)부터는 개 교회와 지역 교회의 보편성을 인류의 보편성과 관련시키면서 사회참여와 사회정의 실현을 교회의 선교과제로 천명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복음전도에 따른 영혼구원은 뒷전이며 생태, 환경, 복지 등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쟁점들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타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는 나이로비 총회(제4차, 1975)부터는 본격적으로 혼합주의의 경향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뱅쿠버 총회(1983, 제5차)에서는 힌두교, 불교, 유태교, 이슬람교, 시크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공석에서 연설을 들었습니다. 이 총회의 지도자들은 인디언 토템 주상을 세웠으며 신학자들은 타 종교의 예배 의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에는 바아르 선언문을 통해 종교 다원주의를 공식적으로 천명했습니다.
괄라룸플 대회(1990)에서는 성령님께서 온 세상에 내재해 계신다고 선언했으나 이는 성령님의 편재성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이 대회에서 성령은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로 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단지 하나의 능력 정도로 치부하는 이런 관점은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적인 교리이기도 합니다.
이듬해에 열린 캔버라 총회(1991)에서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의 종교 대표자들까지 초청했습니다. “오소서 성령이여”라는 주제로 회집된 캔버라 총회에는 약 2,000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예배, 발표, 토론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은 죽은 영들을 불러내고 그들에게 기도를 올리는 초혼제로 시작되었으며, W.C.C.는 이를 20세기의 오순절 사건으로 평가했습니다. 경악스럽게도 이 초혼제를 집행한 장본인이 한국의 정현경 교수였습니다.
그 당시, 정현경 교수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이름이 적힌 소지를 불태운 뒤 그 재를 하늘로 뿌리며 초혼제를 진행했습니다. 그는 원혼의 음성을 못 들으면, 성령의 음성도 못 듣는다고 주장했고, 한 맺힌 영들은 정의를 세우기 위해 떠돌아다닌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명백한 이단사설로 규정된 ‘귀신론’의 내용과 진배없습니다. 조금의 흠집만 있어도 정죄를 못해서 안달인 이단사냥꾼들은 어째서 여기에 대해서는 잠잠한 것입니까? 게다가 정현경 교수는 단순히 이단사설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체 총대들이 모인 자리에서 무대에 오른 정현경은 강연을 종교적 퍼포먼스로 진행했습니다. 일단 호주 원주민 두 사람과 호주 한인교회의 청년들을 동원하여 토속 춤을 추게 했습니다. 연이어, 객석의 불이 꺼지고 호주 원주민 악사가 무대에 등장해 전통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원주민 무용수가 나와 땅을 축복하는 춤을 추었고, 한국인 풍물패가 나와 징과 괭과리를 치면서 굿판을 벌였습니다. 그런 다음, 초혼제 제단을 만들고 상, 촛대, 향, 초혼문 등을 무대 중앙에 놓았습니다.
세팅이 완료되자, 정현경 교수는 상복을 연상케 하는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와 창호지에 쓴 영문 초혼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한 맺힌 영들과 피조물들의 영들의 내림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 맺힌 성령이여, 오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정현경의 초혼문 원고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소서, 우리들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버림 받은 검둥이 여종, 이집트 여인 하갈의 영이여, 오소서! 그의 아내 밧세바에 대한 다윗 왕의 욕정 때문에 다윗에 의하여 전쟁터로 보내져 죽임을 당한 충성스런 군인, 우리아의 영이여, 오소서! 전쟁에서 승리 한다면, 자신을 마중 나온 첫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한 아버지 입다의 믿음의 희생물이 된 그의 딸의 영이여.”
이를 시작하여 정현경 교수는 헤롯의 군사들에 의해 살해당한 남자 아이들의 영, 잔 다르크의 영, 미녀사냥으로 화형당한 여인들의 영, 십자군 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의 영, 식민주의 시대에 학살당한 토착민들의 영을 차례로 불러들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접신의 사술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단사설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적인 언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에서는 이에 대해 극찬하며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과연 이런 내막을 알고서도 W.C.C.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를 일독하시기 바랍니다. 방금 소개한 두 권의 책 이외에도 예총총회 총회신학원의 논문자료인 《W.C.C. 및 W.E.A.에 관하여, G.C.F.란 무엇인가?》 역시 W.C.C.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이하에서는 이 자료의 내용을 요약 ? 발췌해보았습니다.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기본 명제를 전제로 합니다. 이에 따르면 기독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뭐든지 잘만 믿으면 천당도 가고 극락도 가기 때문에 구태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당위성이 사라집니다. 천주교(로마가톨릭, Roman Catholic)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결정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불교나 원불교, 유교 등 다양한 종교와 함께 의식도 진행하면서 서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W.C.C.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장하여 자유, 공전, 평화, 환경, 인권, 화합 등의 듣기는 좋지만 애매모호한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정통 기독교에 반하는 反성경, 反기독, 反교회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인본주의 성경관, 세속적 구원론, 선교 무용론 등을 내세우고 있는 W.C.C.는 실로 기독교라는 이름의 정치적인 탈을 쓰고 있는 반기독교 세력입니다. W.C.C.는 심지어 이단사설이라고 불러주기도 어려울 정도로 적그리스도적인 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W.C.C.의 신론과 기독론은 ‘종교다원주의’이고, W.C.C.의 성령론은 ‘종교혼합주의’입니다. 또한 W.C.C.는 영혼구원이 없는 사회구원만 말하고, W.C.C.는 선교무용론에 따라 선교사 철수령을 내렸으며, 성경은 단지 해방신학의 도구로 남용할 뿐입니다. W.C.C.는 천주교와도 적극적인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습니다. 천주교가 주장하는 교황의 절대무오설이나 마리아 승천설 등도 모두 인정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개신교를 연합시킨 다음 종교개혁 이후로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천주교 속으로 함몰시키고자 합니다.
1. W.C.C.의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상입니다. 이를테면,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 샤머니즘 등에도 나름대로 구원의 빛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식입니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는 자연스럽게 선교무용론으로 직결됩니다. 기독교의 엔진과도 같은 대위임령이 원천봉쇄 되는 셈입니다. 천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종교다원주의를 채택했으며, W.C.C.는 제4차 총회에서 수용하고 제6차 총회에서 실제로 적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W.C.C.가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에딘버러 선교대회(1910)에서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있었고, 예루살렘 선교대회(1928)에서 ‘확대된 선교’의 개념으로 종교다원주의가 배태되었습니다. 그러나 탐바람 대회(1938)에서 헨드릭 크레머(Hendrik Kraemer)가 특수계시와 일반계시와의 불연속성을 주장함으로써 종교다원주의는 한동안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총회에서 재차 수용되었고 제6차 총회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의 채택 이후 종교 간의 대화라는 선교방법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전도를 대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W.C.C.의 종교다원주의는,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 중심적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이 역시 종교다원주의의 한 갈래로 각 종교에서 부르는 신은 명칭만 다를 뿐 사실상 동일하다는 사상입니다. 즉, ‘하나님’이나 ‘알라’나 ‘부처’나 명칭만 다를 뿐 결국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이러한 신 중심적 종교다원주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배제되고 하나님만 강조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핵심적인 복음 진리는 철저하게 해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W.C.C.의 웁살라 총회(1968)는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적 근거가 되는 ‘사람 사이에 걸어 다니시는 하나님’의 신론과 ‘교회 밖의 그리스도’의 기독론을 수용함으로써 세속화 신학의 강조와 함께 종교다원주의의 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이웃 사랑을 철저하게 우상화함으로써 하나님 사랑조차 이 안으로 함몰시켜버린 것입니다. 밴쿠버 총회(1983)에서는 테일러(John V. Taylor)가 종교다원주의에 기초한 종교 간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드디어 선교 무용론을 펼쳤습니다. 이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선교를 중지하고 타종교와 대화하여 세계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W.C.C.는 1984년,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천주교의 입장인 《다른 종교인에 대한 교회의 태도 : 대회와 선교에 대한 반성과 방향》이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언문을 정식으로 수용했습니다. 1989년에는 미국의 산 안토니오에서 타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선교 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 대회에서의 최고의 이슈는 기독교와 타종교 간에 관계성이었습니다. 결국 1990년, 스위스 바아르에서 선언문을 통해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선포했습니다.
2. W.C.C.의 기독론과 종교 간의 대화
평신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까지도 W.C.C.가 강조하는 종교 간의 대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도를 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W.C.C.에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도를 폐기처분하고 전도 무용론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습니다. W.C.C.에서 말하는 종교 간의 대화란,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하여 복음전파 등의 선교를 하지 말고 세계평화와 협력을 위해서, 그리고 서로의 종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대화하자는 것입니다. W.C.C.에 의해 전도는 개종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종교를 잘 믿게 하는 것으로 대치되었습니다.
뉴델리 총회(1961)에서 요셉 시들러(Joseph Sittler)가 제시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과 웁살라 총회(1968)에서 홀렌베거(W. Hollenweger)가 제시한 ‘교회의 담장 밖에 계시는 그리스도’라는 논문이 종교다원주의와 종교 간의 대화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우주적 그리스도’란 모든 문화와 종교에 그리스도(구원자)가 나타나는데, 유대교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고, 석가에게는 석가 그리스도로, 마호메트에게는 마호메트 그리스도로, 공자에게는 공자 그리스도로 나타난다는 이론입니다. ‘교회의 담장 밖에 계신 그리스도’ 개념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담을 넘어 모든 종교에 현현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는 로마가톨릭 신학자인 라너(Karl Rahner)가 제시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이와 같은 기독론의 재해석은 타종교에도 그리스도의 활동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가능하다는 종교다원주의로 귀결됩니다.
웁살라 총회 이후 종교 간의 대화는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W.C.C.가 시작한 종교 간의 대화운동은 1967년 스리랑카의 캔디 모임을 효시로 하여 레바논의 알잘톤 회의,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인도의 낙돔 회의(1971), 레바논 회의(1972), 콜롬보 회의(1974)를 거쳐 나이로비에 이르렀습니다.
1973년에는 토마스(M. M. Thomas)가 힌두교인은 종교를 바꾸거나 새로운 종교 공동체로 이동해 갈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그 자신의 문화 공동체로 그대로 속해 있으면서 소위, ‘기독교 힌두’(Christlicher Hindu)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77년 W.C.C. 대화국은 ‘공동체에서의 대화’라는 주제로 태국 치앙마이에서 회의를 가졌고, 대화 지침서에 “신이 타종교 안에서도 결정적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신학적 명제를 근거로 타종교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위한 종교 간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1983년 W.C.C.는 밴쿠버 총회에 타종교인 15명을 초청하였고, 그 중 4명은 정식으로 발표에 참여시켰습니다.
1989년 미국의 샌안토니오에서 타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한 선교대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스위스의 바아르에서는 마침내 W.C.C. 중앙위원회가 모여 타종교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했는데 이것이 그 악명 높은 ‘바아르 선언문’(Baar Statement)입니다. 이 선언문은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 다는 신학적 틀에서 벗어나 포괄주의를 거쳐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W.C.C.가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는 커밍아웃 선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 W.C.C.의 성령론과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를 근거로 종교 간의 대화를 주장하는 W.C.C.는 더 나아가 보편적인 성령을 강조합니다. W.C.C.에 논리대로라면, 성령의 역사는 온 우주에 미치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편파적으로 왜 기독교에만 역사하실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랑의 하나님은 성령의 빛을 모든 종교에게 비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런 맥락에 따라 각 종교에 나타난 영적 능력과 신비현상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논지를 펼칩니다.
이런 궤변에 근거하여 W.C.C.는 이슬람의 ‘수니파’나 힌두교의 ‘쿤달리니’ 집회에서 나타나는 신비적 체험이나 무당들의 영적 현상을 성령의 역사와 동일시합니다. 쉽게 말해, 이는 범신론에 기초한 혼합주의 사상으로 기독교적 상식으로는 일말의 여지도 없는 이단사설입니다. 만약 W.C.C.가 아닌 개교회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가는 대번에 이단으로 정죄더어 교계에서 매장당할 것입니다. 개교회 목쇠자들은 쥐 잡듯이 잘도 잡는 이단사냥꾼들이 어째서 W.C.C.를 향해서는 제대로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는지 참 의아합니다.
정리하면, W.C.C.의 성령론은 범신론에 기초한 종교혼합주의입니다. 1928년의 예루살렘 대회는 ‘확장된 선교’ 개념을 제시하면서 조심스럽게 종교혼합주의 문을 열었습니다. 1932년에는 대표적인 프리메이슨 가문인 록펠러 재단의 지원 하에 호킹(W. E. Hocking)이 지난 100년 동안의 선교를 조사했습니다. 그는 ‘선교의 재고’라는 보고서를 통해 종교의 보편성과 혼합절충주의를 주장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혼합절충주의는 1961년의 뉴델리 총회에서 인도 신학자 데바난단(P. Devanandan)에 의해 거듭 강조되었습니다. 그는 타종교를 성령의 창조적인 사역으로 설명함으로써 타종교의 빛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웁살라 총회(1968)와 밴쿠버 총회(1983)를 거쳐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종교다원주의는 캔버러 총회(1991)에서 보편적인 성령의 강조를 통한 종교혼합주의로 발전했습니다. 여기서 이화여대의 정현경 교수는 무속 신앙적 혼합주의의 형태를 띠면서 초혼예식(위령제)을 거행한 바 있습니다.
4. W.C.C.의 구원론과 사회구원
W.C.C.에서 말하는 구원론은 전통적인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론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구원론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죄 사함 받고 영생하는 진리에 대한 신앙고백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W.C.C.가 말하는 구원론은 세속화 신학과 해방신학에 근거한 정치적인 해방과 경제적 착취로부터 해방, 그리고 구조적인 악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은 영적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 해결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W.C.C.에서는 선교의 목적을 ‘인간화’라고 역설합니다. 1975년의 나이로비 총회 역시 ‘정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구조적인 불의로부터 해방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영적 구원은 사회문제 해결로 대치되었습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필요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책임감을 가지고 구조적인 악과 싸워 사회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면 그것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W.C.C.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진리인 구원론을 철저하게 비틀어버렸습니다. 기독교의 본래적인 선교개념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때로는 사회복음을 동시에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복음이 영적구원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반면, W.C.C.의 선교개념은 복음전파가 아닌 사회참여를 뜻합니다. 세속화 신학에서는 사회참여와 정의실현을, 해방신학에서는 구조적인 악으로부터 해방,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종 차별로부터 해방 등을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선교는 이러한 사회적 구원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또한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독교의 정체성은 내려놓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합니다. 즉, 대화를 통해 이룩한 세계평화가 곧 선교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W.C.C.의 선교는 복음전파가 아닌 세상문제에 대한 인간적인 해결에만 집중합니다. 그래서 1973년의 방콕 대회에서는 ‘오늘의 구원’을 다루면서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빠진 W.C.C.의 선교용어를 복음주의 선교용어와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형적인 용어혼란전술이기 때문입니다.
화란의 선교신학자 호켄 다이크(J. C. Hoekendijk)는『흩어지는 교회』(TheChurch Inside Out)를 통해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고, 웁살라 총회(1968)에서는 세속화 신학에 근거한 사회 참여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제2분과 위원회에서는 복음을 사회복음으로, 구원을 인간화의 해방으로 발표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1973년의 방콕 대회에서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오늘의 구원’을 다루면서 오늘의 구원을 ‘해방’, ‘인간화’, 그리고 ‘자기정체성’이라고 발표 했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을 해방자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서구선교가 제국주의 선교를 했기 때문에 피 선교지를 억압했다고 평가 하면서 선교사 철수령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공식적인 선교사 철수령은 20세기에 두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선교사 철수령은 하버드 대학의 호킹 교수에 의해서입니다. 호킹의 보고서는 사방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으나 그의 보고서를 받은 록펠러 재단은 선교사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미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심취한 상태에서 선교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결국 록펠러 재단은 선교비 지원을 중단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돌아오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두 번째 선교사 철수령은 W.C.C. 방콕 대회의 여파 때문이었습니다. W.C.C.는 1971년 중남미의 바르바도스 섬에서 인종차별 투쟁사업 회의를 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선교사들은 종교적 가면을 쓰고서 인디언 문화를 배척하고, 인디언을 선교의 대상으로 굴복시키고 또 다른 식민주의를 자행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입에서 나올 소리입니까? 이는 전형적인 안티 기독교 세력들의 논리입니다.) 결국 W.C.C.에 의해 선교사 철수령이 또다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에게 돌아갈 선교자금은 마르크스 식 해방운동의 활동자금(무기 구입 등)으로 전용되었습니다.
5. W.C.C.의 성경관
W.C.C.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역사책에 불과하고 인간이 저술한 하나의 책으로 간주합니다. W.C.C.는 곧잘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마치 하나님의 주권을 대단히 강조하는 척합니다. 하지만 W.C.C.의 이러한 명제는 신본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바 오히려 철저한 인본주의에서 비롯되는 논리일 뿐입니다. 특히, ‘웁살라 대회에서 이러한 입장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고, “세상이 선교 사업 목록을 제시한다.”는 논리에 따라 세상의 문제들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즉, 선교사업은 성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W.C.C.는 성경 역시 수많은 역사책 들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에 따라 그것의 해석에 있어서 역사비평을 전면적으로 도입했습니다. W.C.C.에 따르면 성경 역시 인간이 저술한 하나의 역사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철저한 역사적 비평을 통해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해석법에 따라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은 모조리 거부되었고 구약의 많은 사건들도 단순한 신화로 치부되었습니다. W.C.C. 내의 많은 자유주의 교회 지도자들은 경전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죽음, 부활, 승천, 재림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들도 믿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그들은 성경이 가장 강력하게 성토하는 죄악 가운데 하나인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옹호합니다. 아울러, 소돔과 고모라 기사 등 동성애를 금지하는 내용들은 아예 다루지 않습니다.
1. W.C.C.를 조종하는 배후세력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 기간(1917-1947) 동안 러시아는 자기민족 약 5000만 명을 희생시켰는데 다수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이러한 살인집단이 색깔을 바꾸어서는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때(1958.3.18) 느닷없이 평화공존, 핵무기 제한, 핵실험 금지 등을 주장하며 소위 위장평화 전술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처럼 공산당이 반대자에 대한 숙청정치가 여의치 않자, 궤휼정치로 색깔을 바꾸어 나오면서 적극적으로 이용한 대상이 바로 W.C.C.입니다.
W.C.C.가 발족되기 전, 소련의 스탈린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평화연맹’을 조직했습니다(1947. 9). 이 단체는 주로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과 그 위성국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세계교회 침투를 위한 세계적화 사령부였습니다. 소련 공산당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제3차 W.C.C. 총회에 대비하여 1958년 11월 체코 프라하에서 ‘세계기독교평화회의’를 조직하였고, 이 회의에 서방교회에서만 60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이는 흐루시초프의 ‘동서공존’이라는 ‘위장평화 전략’이 먹혀든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이 흐루시초프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흐루시초프는 서기장이 된 다음에 다음처럼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련의 모든 기독교인들을 다 없이하고 마지막 한 사람을 전국 모든 사람이 TV로 볼 수 있게끔 한 다음에 죽여 버려 소련 땅에서 교인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리겠다.” 이와 같은 악마적 인물이 W.C.C.의 조직 과정에 깊이 연루되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한결같이 참된 기독교의 박멸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전략과 전술이 있습니다. 전략은 요동치 않은 거시적 목표이며, 전술은 그것을 이루어 내는 다양한 방법들입니다. 지금껏 변하지 않은 그들의 영원한 목표는 바로 ‘세계적화’이며, 이를 위한 가장 기발한 아이디어가 “교회 속으로 침투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세계적화전략을 달성하고자 선택된 기만전술의 주 무대가 바로 W.C.C.입니다. 이러한 은폐된 진실은 W.C.C.의 발자취를 추적하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1) 제1차 총회
1948년 8월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44개국 147교회 351명이 모여 제1차 총회를 가졌습니다. 그 당시의 세계는 제1, 2차 세계대전의 쓰라린 전쟁의 고통이 분열된 교회 때문이라는 책임을 통감하고, 세계교회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로마가톨릭과 러시아 정교회를 제외한 모든 개신교파가 참석한 총회였으나 외형적인 연합을 강조하여 막대한 영적 희생을 가져 왔습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은 아니며, 구원의 보편화를 인정하고, 회개는 일종의 인식이며, 구원은 지상에서의 평화를 뜻하며 정치적 ? 사회적 문제를 필수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을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1947년 9월 바르샤바에서 서방교회 침투전략의 일환으로 조직한 평화연맹에 소속된 약 60-70여 명의 동유럽 공산국가의 정보요원을 W.C.C. 1차 총회에 침투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또한 체코 출신의 흐루막카와 폴란드 출신의 나즐로 패트가 W.C.C. 중앙위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소련정부의 ‘세계교회 침투’와 ‘자본주의 적화야욕’이라는 궤휼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죽기 3년 전(1950. 4), 바르샤바에서는 ‘세계평화회의’(W.P.C.)라는 공산권 교회기구가 조직되었습니다. 여기에는 68개 교단 98명이 참가하여 W.C.C. 2차 총회 잠식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1953년 6월, 스탈린 사망 후,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종교궤휼정책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그 조직을 ‘세계기독교평화회의’로 확대했습니다(1958. 11). ‘평화공존 정책’으로 유명한 그는 겉으로는 위장 평화전술을 펼치면서도 실제로는 서방 침투전략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흐루시초프는 1967년 3차 회의 때 소련 정보국 K.G.B.의 보스인 니코딤을 세계기독교평화회의 의장에 임명함으로 세계교회 침투를 준비했습니다. 종교계를 이용한 공산주의 궤휼정치는 1975년 1월 ‘아시아기독교평화회의’와 같은 관련기구들의 확대로 더욱 탄력을 받았으며, 이로써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W.C.C. 내로 침투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제2차 총회
1954년 8월,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렸으며 ‘현대의 정치적 정의는 공존’이라는 모토를 내세운 대회입니다. 여기서 그리스, 유고, 터키의 정교회가 정식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우리나라의 N.C.C.K.도 이때 가입신청을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갈라지기 시작한 분기점이 된 것입니다. 그 당시, 보수교단 대표들은 반대연설을 하고 퇴장했으나, 기장, 기감, 예장(통합), 측은 N.C.C.K.의 이름으로 W.C.C.에 가입했습니다.
이 총회에서는 “세상의 모든 악을 퇴치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건설이 W.C.C.의 지상목표”라는 신앙고백을 선언함으로써 스탈린의 평화공존 결의안을 지지했습니다. 스탈린을 격하시키는 연기를 하며 서방세계를 완전히 속여 넘긴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제3차 총회에 대비하여 1958년 11월, 체코 프라하에서 ‘세계기독교평화회의’를 조직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서방교회에서만 600만 명이 참가했는데, 이는 흐루시초프의 ‘동서공존’이란 위장평화 전략이 절묘하게 먹혀든 결과였습니다. 흐루시초프의 평솨전술에 전 세계의 기독교계와 서방세계가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던 것입니다.
3) 제3차 총회
1961년 11월,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정식회원국이 된 것도 이 3차대회 때입니다. 복음전파에 대한 선교 추진보다는 독재정권, 인종차별, 여성운동, 노동문제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토의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집단적이고 국가적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과 오는 세계의 한 시범적인 단체이며, 교회의 사명은 단지, 사회의 봉사라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을 주장했습니다. 더군다나, 총회의 대표들은 ‘세계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어 아래서 타종교들도 세계에 빛을 발하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 기독교와 이방종교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보편구원설’을 W.C.C.의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으로 채택함으로써 발족된 지 13년 만에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3차 총회에는 소련의 K.G.B. 요원이자 ‘세계기독교평화회의의 의장이었던 니코딤이 소련교회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와 함께 정식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니코딤은 W.C.C. 중앙위원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W.C.C. 회장으로 당선되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니코딤은 흐루시초프의 공산당 노선을 선전했으며,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필수이념임을 운운하는 성명서를 채택했습니다.
W.C.C.는 창설 당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병폐를 다 같이 지적하면서 대화로서 평화공존을 꾀하자는 그럴듯한 모토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공산권의 병폐보다도 서방세계의 병폐를 지적하는 데만 훨씬 치중했습니다. 이러한 때 니코딤이 회장에 당선됨으로써 그 용공성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공산주의 선전기관으로 변질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들은 산업선교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 노동운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일으켰습니다. 1966년 제네바에서는 ‘혁명을 위한 개혁’이랑 주제 아래 산하교회와 사회분과 위원회가 개최되어 “보다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파괴원리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공개 성명서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4) 제4차 총회
1968년 7월, 스웨덴 웁살라에서 개최되었으며, “만물을 새롭게 하라”는 주제 하에 그리스도 외에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인정한 적그리스도적이요, 반성경적인 총회였습니다. 특히, 이때부터 다른 종교에 대하여는 ‘다른 신앙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4차 총회에서는 타종교를 향한 열린 태도를 가지고 함께 궁극적 진리를 파악하자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가 주창되었습니다. 또한, 인종차별 투쟁 사업으로 무기를 지원하며 기독교 박멸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에 대한 지원이 합법화되어 물질적인 원조까지 하는 등 복음적 선교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필립 포터 총무는 1969년 5월 25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에 “W.C.C.는 만일 폭력이 정치적 ? 경제적 독재를 전복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면 그 폭력을 지원해야 한다.”라고 기고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마26:52)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사상을 선포했습니다. 《기독교 사상》1972년 11월호에서는 “폭력 혁명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기독교의 봉사를 말할 수 없는 시기가 왔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공산혁명 과업을 교회가 본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에큐메니칼 리뷰》지에는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군사원조를 끊어야 한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W.C.C. 총무의 발언들은 하나같이 참된 기독교와는 상극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제5차 총회에 대비하여 1975년 1월 인도 곧다암에서 ‘아세아 기독교 평화회의’를 설립했습니다. 이때 북한까지도 ‘조선인민공화국 기독교 연맹’이란 거짓된 이름으로 참석했습니다. 북한이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국임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여지도 없는 진실입니다. 이런 북한에서 정상적인 기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4차 총회에서는 남한으로부터 미군 철수, 미-일의 남한 군사 원조 반대, 남한 기독교인 중심의 민중 옹호 투쟁지지 및 투옥자 석방 등의 내용이 결의되었습니다.
5) 제5차 총회
1975년 11월,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에서 ‘해방의 신학 :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개최되었습니다. 이 총회에서는 구원의 복음과 선교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해방’이라는 말로 재 정의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해방자로 묘사하여 해방신학자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W.C.C. 총무가 말하는 해방이란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고 자본주의와 서구사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W.C.C.는 서구와 미국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공산주의 국가의 인권유린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침묵했습니다. 이처럼 해방신학이란 설탕으로 포장된 마르크스주의일 뿐입니다.
아울러, 이 총회에서는 이방 종교들과 마르크스주의까지도 진리의 범주에 포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회의 대변자인 로버트 브라운은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교(무슬림), 힌두교, 불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도 들을 수 있는 때가 왔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실제로, 이 총회에는 로마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이 참석하여 본격적으로 혼합주의의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같은 것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은 아예 없이 모든 종교를 수용했습니다. 특히, 로마가톨릭과 아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5차 총회에서는 K.G.B.의 보스이자 평화연맹 의장인 니코딤이 드디어 W.C.C.의 의장에 당선되었고, 마르크스주의자인 필립 포터 목사가 총무에 당선되었습니다. 미국대표인 로버트 브라운 교수는 기조연설에서 ‘해방을 위한 의식화 고취’를 연설한데 이어 ‘아세아 기독교 평화회의에서 북한이 주장한 내용을 제5차 총회 성명서 내용에 포함시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총회 신앙고백서는 마르크스 게릴라 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자본주의 와 인종차별주의 및 식민주의의 불의한 모든 구조를 파고하지 않는 한 어느 국가나 민족도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사회주의는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는 첩경”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에 1975년 11월 24일자 타임지는 나이로비 총회 소식에 대해 “W.C.C.는 세계 크리스챤을 연합시키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어 신학적인 차이점들을 감소시키는데 주력해 왔으나 사회적 ? 정치적 해방의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1977년, W.C.C. 필립 포터 박사는 중앙위 기조연설에서 “공산주의가 베트남에서 승리한 것은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해방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이 위대한 베트남의 승리는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전 세계 인민을 고무시키고 있다.”라고 발언했습니다. W.C.C.회보 E.P.S '77.6.9. 기사.
6) 제6차 총회
1983년 7월 24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100개국 300개 교파에서 3,000여 명이 모여 정의, 인간존엄에 대한 투쟁, 환경오염, 하나 됨을 향한 진일보, 공동체를 통한 삶의 치유와 공유 등을 논의했습니다. 레닌이나 스탈린처럼 총칼로 까부수는 정책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사상적인 독소입니다. 제6차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생명”이었으나, W.C.C.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범세계적인 사회주의 질서를 위해 죽으셨다는 의미로 변질시켜버렸습니다.
한국에서도 40명의 대표가 참가하여 2명이나 W.C.C.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대표단은 “제6차 총회는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용공단체라고 오인하게끔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총회 주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인사들의 발언이 온통 미국을 비방하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세계적인 악에 관한 문제들의 화살을 미국에 몽땅 따돌림으로서 소련으로 하여금 어부지리를 얻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W.C.C.의 활동을 연대적으로 분류해보면 1948년~1965년까지는 ‘책임 사회구현’, 1965년~1968년까지는 ‘급진주의 추구’, 1969년부터는 ‘해방신학의 승리’였습니다. 창설 당시에는 대화와 평화공존을 강조하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함께 지적하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1961년 3차 총회에서 소련 K.G.B 요원이 회장에 피선된 것을 계기로 그 진면목이 본격적으로 드러났습니다.
1966년 제네바에서 해방신학 원칙을 채택하여 “혁명을 위한 폭력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공개성명까지 발표했으며, 1977년에는 나이로비의 제5차 총회에서 공산주의 사상의 게릴라 활동을 공인했고, 자본주의 타파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를 실제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침투하여 자유주의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에까지 그 마수를 뻗혔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제6차 총회에는 소련 및 동구 공산권 대표들까지 참석하여 막시즘적인 사회주의의 비전을 더욱 드높이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강화하며, 타종교도 역시 하나님께로 가는 또 다른 길임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W.C.C.에 참가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의 다수는 막시즘과는 무관하지만 그 지도부는 이렇듯 뼛속까지 참된 기독교의 박멸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입니다. 따라서 본인의 의도가 아무리 신실하더라도 이와 같은 W.C.C.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불법에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것이요 이용당해주는 격이 됩니다.
7) 제7차 총회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오소서 성령이여 -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개최되었습니다. 이 총회에서는 전 지구를 구원하는 문제에 있어서의 성령 현존의 중요성, 또는 영성(Spirituality)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이때 중공교회 이외의 6개의 교단이 새로 가입습니다. 정회원에 가입된 교단은 필리핀 성공회, 침례자유 오순절교회, 남아공 화란개혁교회이고, 준회원에 가입된 교단은 볼리비아 루터교회, 엘살바도르 침례교회, 산살바도르 루터교회였습니다. 북한도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 4명이 세계교회협 사상 처음으로 업저버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이 총회에서는 이화여대 정현경 교수가 착취당했다는 하갈과 광주, 천안문 등에서 죽은 영혼들을 불러내는 초혼제를 진행하고 이를 성령의 강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와 토착종교와의 융합이 시도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이외에도 점술가, 심령술사, 마술사, 무당 등을 포함한 세계의 15개 종교지도자들을 초청하는 대규모 종교혼합집회를 갖고, 세계종교의 통합과 단일성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혼잡주의와 종교다원주의의 극치를 보여준 총회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8) 제8차 총회
1998년 12월 3~14일까지 아프리카 짐바브 하라레에서 개최되었습니다. W.C.C.가 창립 된지 50년이 되는 희년총회로 진행된 이 모임의 주제는 “하나님께 돌이켜라 - 희망 중에 기뻐하라”로서 인류는 그의 문제를 씨름하는 중 삼위일체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궁극적 방법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남북한 교회 대표자들이 공동예배를 드리고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9) 제9차 총회
2006년 2월14일~23일까지 브라질의 남부 도시 포르토 알레그레의 폰티피? 카톨릭 대학교에서 개치되었습니다. 이 총회에는 348개 회원교단에서 691명의 총대를 포함한 약 4천명 이상이 참석했습니다. 주제는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혁 하소서”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변혁이란 범세계적 사회주의 체제로서의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프리메이슨의 캐치프레이즈와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또한 이것은 바티칸의 캐치프레이즈와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결국 다 한통속입니다.
10) 제10차 총회
제10차 W.C.C. 총회가 2013년 한국 ‘부산’ 벡스코(BEXCO)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역사상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바티칸(히틀러의 배후에 바티칸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및 단기간에 수천만 명을 죽인 소련공산당, 그리고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북한정권과 결탁된 W.C.C.와 짝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임을 기억하십시오.
*결론 : W.C.C.가 종교다원주의 및 용공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호박에 줄을 그어놓고 수박이라고 우기는 것만큼이나 어불성설입니다. 실로 눈가리고 아옹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