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이니까 1959년도 무렵이다
동무를 따라 처음으로 마실이라는 것을 갔었다
가파른 재를 두개 넘어 어린 나이에 헐떡거리며 동무네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동무의 누나와 나의 누님과는 친한 사이였고 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이었다
두개의 재를 넘어 또 한 고개를 넘어 산기슭에 동무네 집이 있었다
동무네 집에 들어서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조그마한 집이지만 마당은 넓은 집이었다
마당에는 옹당샘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데 옹달샘에는 붕어가 돌아다니고
우렁이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동무가 감자를 삶아먹자고 하면서 감자와 수저를 가져왔다 .나는 감자를 수저로 벗겨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만 가지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이에 동무는 감자바구니에 들은 감자를 모두 수저로 껍질을
벗기는 것이엇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똑같은 또래인대도 감자 껍질 하나 제대로 벗길줄 모르는 내가
고개를 넘으면 그리운 사람들이 산다
내가 사는 금산은 산악분지이기 때문에 유난히 고개가 많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고개를 넘어야하고 장에 갈 때도 고개를 넘어야한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왕복 40리길 성황당 고개를 넘어 학교를 가고
고개를 넘어 집에 돌아왔다
6년간 걸어서 학교를 다녔으니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삶의 일부인 셈이다
외가집은 무주에 있었는데 이범선 선생이 쓴 소설 “학마을 사람들”에 나오는
듯한 태산준령을 3개는 넘고 강을 건너야 가는 길이었다
50년대 무렵 외삼촌 등에 업혀서 할아버지의 회갑에 간적이 있다
강 기슭에서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내 목소리는 산에 부딛혀 메아리가 되어서
돌아오고 큰 외삼촌께서 저어서 온 나룻배에 오르면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간 싸암닭이 꼬꼬거리며 푸드럭거리는 것이었다
뒤돌아보니 나는 수 많은 고개를 넘어왔다
나이 50대 중반기 살아오는 동안 삶과 죽음을 넘나들기도 하였고 별 재주없는 가장으로
굼벵이처럼 힘겹게 고개를 오르기도 하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개를 넘어야하는지 .......
내가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아마 세상의 모든 그리움을 안고 세상을 떠나는
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지난 재미난 학창시절의 이야기가 친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