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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인동초의 반란
하륜(1105)
하륜 진영
하륜(河崙)은 고려 말 흥부사 하윤린(允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晋州)다. 1360년(공민왕 9) 열네 살 어린 나이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고, 1365년에는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에게서 배운 하륜은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색 정몽주 같은 당대의 거유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일찌기 비주류가 되어 변방을 떠돌며, 학벌 없음의 설움을 톡톡히 받아야 했다. 오늘 날 상고 출신으로서 독학하여 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일류대학 출신 법조인들에게서 느껴야 하는 소외의 설음과 유사한 망국적 학벌 다툼이 이미 이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출사한 후 몇 년 만에 겨우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된 하륜은 젊은 혈기로 신돈의 비호를 받던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 파직된다. 신돈의 실각 후 복직된 하륜은 후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시절, 최영의 요동 정벌이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양주로 귀양 보내졌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성공하자 풀려났지만, 하륜은 이성계파와 정치행로를 같이 하는 것을 거부한다. 같은 해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이 옹립된 직후 여흥(여주)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가 들통이 난다. 하륜은 이때 이색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한 것으로 밝혀져 다시 유배당했다.
하륜은 고려 말엽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에 속했으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가담하지 않고, 이색 편에 줄을 서는 선택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험난한 정치 역정을 걷게 된 것이었다. 신망은 어느 정도 쌓았지만 일국의 개조가 되기에는 이론이 빈약했다고 여겨지는 무장 출신인 이성계보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대학자 이색을 더 존경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때 이색은 문화시중이었다. 잠깐이지만 주류였기 때문에 거대한 흐름을 보는 안목이 없으면 이색이 더 출세를 보장해 줄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어쩌면 하륜의 이색 추종은 정치적 소신보다 학벌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륜은 뒤늦게 이인복의 양해를 얻어 이색의 문하가 된 바 있었다. 이색이 이성계에 밀려 곧 정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을 감안할 때 이것도 자충수가 되었다.그리고 하륜이 원했던 바가 아니지만,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1392년, 조선은 마침내 건국되고야 말았다. 이때부터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반면, 하륜은 언제나 개국 공신파들에게 견제 당하여,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변방을 떠도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속도 없는 짧은 주류에 몸담았다가 긴 비주류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하륜은 절취 부심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는 젊었을 때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유학으로 정상에 오르지 못하자 풍수지리설과 관상학 같은 역학을 통해 활로를 모색한다. 자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고려가 망하는 것과 이색의 말로가 비참해 지는 것 등을 알아 맞추지 못한 점으로 볼 때, 그의 역학에 대한 성취도가 높은 것이었다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어째튼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확연하게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유학은 자칫 고루할 수 있는데, 역학을 익힌 하륜은 현실을 보는 다양한 시야만은 어느 정도 갖추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393년(태조 2년) 3월 계룡산 천도(遷都) 움직임이 대두되자 하륜은 계룡산은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금의 신촌 일대인 무악(毋岳)에다 대궐터를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정도전은 술수하는 자들의 말 따위를 믿고 새 왕조의 기틀을 만들 수 없다며, 하륜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폐기처분했다. 조선의 새대궐은 정도전의 생각을 쫒아 현재의 북악산 자락에 자리를 잡게 된다. 천도에 따른 대역사를 주관하는 일은 권력의 향배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사안으로서, 주류인 정도전이 비주류인 하륜에게 그런 주도권을 넘겨 줄 리가 없었다. 술수하는 자로 낙인찍힌 하륜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의 좌절을 경험한 하륜은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반전의 카드를 준비한다.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閔霽)를 찾아가서 은근한 목소리로 청하였다.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처럼 만인이 우러러 볼 상을 타고난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대군을 만나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때는 아직 세자가 정해져 있지 않았었다. 사위가 태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기를 은근히 기대하던 민제는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하륜의 시나리오는 정도전이 무시했던 술수를 동원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지략이 뛰어났던 사람이 이방원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계의 장자(長子)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야망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정도전도 이방원의 편이 아니었다. 하륜은 관상을 이용하여 이방원에게 접근한 다음 그의 야심을 충동질했고, 지모를 발휘하여, 이방원이 왕위를 찬탈할 수 있도록 진두지휘함으로써 인생 역전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방원에게 야망이 있다는 것은 역술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 수 있었던, 널리 알려진 비밀이었다. 하륜은 관상을 잘 보았다기 보다 그것을 반전의 카드로 활용한 용력이 뛰어났던 것 뿐이다. 잘못 되었으면 요망한 모사군으로 낙인찍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왕자의 반란이 성공함으로써 지략가가 된 것이었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하륜을 평가할 때 이방원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발탁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는 하륜이 왕이 될 재목이라 여겨 이방원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정도전이 한나라의 장자방(張子房)이라면 하륜은 송나라의 치규(稚圭)에 비유된다.
이성계는 야심 많은 이방원이 대권을 장악하면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을 경계했음인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이 일에 관여했던 정도전은 주위의 반발을 우려하여 경계심을 강화시켰다. 감시망에 하륜과 이방원의 잦은 접촉이 감지되자,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정도전은 경기도 관찰사였던 하륜을 한양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던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 낸다. 좌천되어 충청도로 내려가는 하륜을 위해 지인들이 환송연을 베풀어 주는 자리에 이방원도 참석했다. 이때 하륜은 짐짓 취한 척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았다. 이방원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가자 하륜은, ‘정안군에게 사과를 해야겠다.'며 뒤따라 나가, 독대의 기회를 만들었다. 이때 이방원에게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결정적인 책략을 진언했다. 하륜이 내놓은 계책은 골육상잔(骨肉相殘)도 불사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무리들을 없애는 것뿐입니다.”
기습을 감행하여 정도전 일파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부왕 이성계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리는 것이었다. 행동파 이방원도 불효 앞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그러자 하륜은 은밀하게 말했다.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시더라도 필경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고도 이때 정도전은 권신들이 소유했던 사병들을 몰수하여 고려 말엽에 중단했던 요동정벌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 상태였다. 사병을 빼앗긴 이방원으로서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도전을 상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李叔蕃)에게 잘 훈련된 군인들이 있습니다. 대군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오도록 해놓았으니 기습을 감행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입니다.”
『용재총화(慵齊叢話)』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킹메이커 하륜이 주도면밀하게 이방원 ‘왕 만들기’를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지(任地)인 충청도로 부임했던 하륜은 1398년(태조 7년) 거사를 앞두고 한양으로 잠입하여 이방원을 도왔다. 앞장서서 직접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막후에서 기획하고 지휘한 사람은 하륜이었다. 칼을 직접 휘두른 사람은 행동대장 이숙번이다. 하륜과 이숙번의 눈부신 활약에다, 이방원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힘을 보태, 이방원이 마침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 후 정종을 왕으로 삼게 한 것도 하륜의 작품이다. 하륜은 이방원을 대신해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이방원이 뜻을 펼 수 있도록 길을 텄다. 덕분에 하륜은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후 정종에게 선위를 종용한 사람도 하륜이다.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안했던 정종은, 하륜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방원에게 보위를 내주고, 상왕이 되어 물러났다. 마침내 이방원이 조선 3대 왕에 등극한 것이었다. 그것은 킹메이커 하륜의 인생에도 일대 변혁이 찾아온 것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지방을 맴도는 관찰사가 아니었다. 마침내 중앙 무대에 우뚝 선 하륜은 조선의 통치 제도를 정비하는 일부터 착수한다.
하륜은 ‘필경 어쩌시겠느냐’고 했었지만 태상왕 이성계의 진노는 태종이 즉위한지 몇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왕위를 빼앗기듯 내주고 뒷전으로 물러난 이성계는, 소요산으로 들어갔다가, 고향인 함흥으로 옮긴 다음,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이성계는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함흥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 가면 돌아올 수가 없었다. 이때 함흥차사(咸興差使)란 말이 생겨났다. 이성계는 살아서 다시 이방원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뜻을 정면으로 배반한 불효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돌리는데 동원된 사람이 무학대사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힘을 보탰던 왕사였다. 동거동락했던 왕사께서 친히 찾아와서 권하니,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태조는, 슬그머니 마음을 돌려 한양으로 돌아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하륜은 이때 태종의 마음속에서 아들에 대한 노여움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태종에게 친히 납시어 마중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 놓는다. 태종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었다.
“아바마마께서 한양으로 돌아오시는데 어찌 궁궐에 앉아서 맞이하는 불효를 범한단 말이오.”
태종은 한양의 북쪽 의정부 근처까지 친히 어가(御駕)를 이끌고 나갔다. 하륜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간곡하게 태종에게 권했다.
“하옵시면, 태상왕 마마를 맞이할 막사 차일(遮日)을 세울 때 중간 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
태종은 하륜의 말대로 이성계를 맞이하여 잔치를 열 차일을 칠 때 아름드리나무로 지주를 세웠다. 행사장에 먼저 도착하여 아버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태종은, 태조의 행렬이 시야에 들어오자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거리는 대략 3백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겨 놓으려는 아들을 보자, 참았던 노기가 부지불식간에 충천한 태조 이성계는, 늘 가지고 다니는 궁을 들어올려 활을 장전한 다음, 발작적으로 시위를 당겼다. 이성계 자신도 조금 전까지는 예상치 않았던 돌출행동이었다. 태종은 황급히 몸을 피했다.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구나.”
화살 하나를 쏘아 오랑캐 한 명을 반드시 죽였던 신궁 이성계의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지주에 가서 꽂히자, 이성계는 그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 들이고, 더 이상 아들을 죽일 생각을 단념한 것이었다. 태종이 태조를 맞이하는 행사를 했던 곳의 현지명이 ‘살꽂이’이다. 살은 화살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륜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 태종 이방원은 더욱 하륜을 심임하고 중용하였다. '필경 어쩌시겠느냐'가 이렇게해서 증명된 것이었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한 사람이라면 하륜은 도편수였다. 정도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라면 하륜은 주어진 도면에 따라 못질을 하고 흙을 발랐던 사람이다. 정도전이 동북아에 조선을 등장시킨 사람이라면 하륜은 조선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태평성대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한 사람이었다. 조선 왕조 5백 년의 틀 잡기와 기반 마련은 대부분 태종의 책사 하륜의 손을 거쳐 만들어 졌다. 그럼에도 그는 교만하지 않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태종의 성정을 잘 파악한 다음 철저하게 뒤로 물러나, 결코 튀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잘 마무리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하륜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업고 신생 조선의 제도와 법질서, 행정의 체계적 운영을 마련하고 정착시키는데 혼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하륜은 먼저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업무를 직접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는 등의 정치개혁, 관제개혁에 관여하였다. 군제개혁, 호패법 시행, 조세제도 정비 등의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한 것도 하륜이다. 정도전의 어머니와 부인이 서녀 출신이다. 이방원은 서자 출신 이복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아픔을 가지고 있다. 조선 왕조에서 서자의 출사를 엄격하게 막고, 과부의 재가를 원천봉쇄하는 법을 만든 사람이 하륜이다. 태종이 찬성하고 정도전에게 원한이 있던 하륜이 만든 이 법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악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인권을 유린 하는 그런 법이 5백 년 동안 조선을 지배하였으니 정도전에게 당한 하륜의 원한이 깊고 깊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도전과 하륜 이방원을 돌아볼 때, 정도전은 기획과 추진력을 겸비한 혁명가적 정치가였고, 하륜은 구상과 실천력을 겸비한 행정가적 정치가라고 볼 수 있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상통하지만 상생하지 못한다. 혁명가와 행정가는 상이하지만 상생한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만나면 부딪치는 상극관계다. 때문에 혁명가 이방원과 정도전은 극(剋)했고, 이방원과 하륜은 상생(相生)했던,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사이였다.
하륜은 신문고를 설치하여 언로를 열었는데, 이때 신문고를 함부로 칠 우려가 있다는 반대 주장이나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비판이 제기되자 '이 제도는 백성이 신문고를 직접 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는 관리들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도록 하는 상징성에 더 의미가 있다'는 말로 이 비판들을 반박했었다.
하륜은 태종의 뜻에 따라 고려사와 동국사략 등의 역사서 편찬을 감독했으며 태조실록의 편찬 주체가 되어 이를 실행시켰다. 그래서 태조실록은 태종과 하륜 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집필되었다. 정도전은 간신이자 비굴한 인물로, 태조는 태종의 총명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도전 같은 간신에게 휘둘린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한 후 수년간 6~7월이면 장맛비가 내리면서 인왕산이나 북한산에서 내려온 빗물과 도심 개천물이 합쳐지며 물난리를 겪는 일이 번번했다. 해마다 발생하는 홍수 때문에, 개성에서 시작한 조선 왕도를 기가 쇠한 곳으로 이전하여,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느니 어쩌니 하는 불평들이 터져 나왔다. 물길을 안정시키지 않고 정국의 불안정을 해소할 수 없다고 본 하륜은 골머리를 앓고 있던 태종에게 개천 준설을 제안한다. 왕명으로 개천도감이 설치되었다. 장위동 어귀부터 종묘 어구까지 문소전(殿)과 창덕궁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을 만들었다. 대소광통(大小廣通)과 혜정(惠政)및 정선방(貞善坊) 동구, 신화방(神化坊) 동구 등의 다리를 만드는 데는 돌을 쓰는 대규모 토목 사업 끝에, 1412년 2월 15일 치수정책의 표본인 청계천이 완성되었다. 동원된 인력이 6만 2,800명이나 되는 대역사였다.
하륜은 조선에 부족한 것 중 하나로 물자수송을 꼽았다. 한 나라의 경제가 수도에서 지방으로 잘 흘러가고 각 지역의 특산물이 또 수도로 원활하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곧 경제력이라고 보았던 하륜은, 청계천 준설 경험을 살려, 태종 12년 11월 충청도 순제 안흥량에다 운하를 파자는 계획을 내놓았다. 안흥량은 지금의 태안반도다.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쌀과 피륙을 실은 조운선이 이곳에서 침몰되는 일이 잦아지자 하륜이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해당 지세가 암반으로 되어 있어 뚫기 힘들다 하여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200년 후 대동법의 선구자 김육에 의해 운하가 일부 준설되어 하륜의 꿈이 영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하륜은 다시 1413년 태종 13년 7월 20일 1만 1천 명의 인력을 징발하여 양어지(養魚池)를 파고, 숭례문(崇禮門)밖에 운하를 만들어 선박을 통행하게 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운하를 팠다가 땅에 물이 스며들 것을 염려하는 반대파들의 의견을 쫒아, 태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하륜은 실망하지 않고 그 후로도 평생을 태종의 치수와 정국 안정시책을 보필하였다. 하륜이 주창한 운하 건설을 강행하여 성공시켰다면 조선의 경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운하를 만드는 것이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느니, 환경 파괴니, 정당의 입장에 따라 갑론을박하고 있다. 아득히 먼 6백 년 전에 삼남지방과 연결하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던 하륜은 성패 여부와 상관없이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던 선각자라는 생각이 든다.
현장을 발로 뛴 하륜은 전형적인 불도저 타입으로 일처리가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이런 스타일은 태종의 장인인 민제까지 화나게 했던 것 같다. '저러다가 정도전 꼴 난다.'는 민제에게 하륜은 '어차피 생사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라고 받아 쳤다. 나중에 민씨가는 멸문지화를 당했고, 하륜은 천수를 누렸으니, 민제는 하륜의 처세술을 너무 뜨문뜨문 본 것 같다.
1416년(태종 16년) 하륜이 노환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자 태종은 극구 만류한다. 끝내 물러날 뜻을 급하지 않자 이를 윤허하며, 태종은 친히 교서를 써서, 진주의 전세 100결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하륜은 성상께서 주신 것을 어찌 감히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느냐며, 따로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교서를 모셔두고, 전세는 동리 노인들을 위해 쓰게 하였다. 이때 향사당에는 태종의 친필 편액 '벽오당(碧梧堂)'이 하사되었다.
그해 늦가을 하륜은 자청하여 함경도의 조선 왕가 조상묘역을 살피러 갔다.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침을 순찰한 다음 11월 6일 한양으로 되돌아오던 도중, 정평군 관아에서 돌연사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륜은 죽기 직전에, 태조가 몹시 화를 내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난 후부터, 발병하여 죽었다고 한다. 사실 태조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 조상의 묘를 돌아보러 왔으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하륜의 나이가 그때 꼭 70세였으니 당시로서는 천수를 누린 셈이다.
이때 태종이 직접 조사를 지어 애도했다.
"동북면은 왕업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고자 했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없을 때, 경이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 수고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이 중하기 때문에 경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슬프다. 죽고 사는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무엇을 한(恨) 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것을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
태종은 예조좌랑 정인지를 보내 영전에 사제(賜祭)토록 하였다. 슬픔에 잠긴 태종은 3일 동안 신하들의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고기가 들어있는 음식을 들지 않았다. 임금으로서 신하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집을 떠난 객사자는 집에 들여오지 않는 것이 당시의 상례(喪禮)였지만, 태종은 그것을 깨고, 하륜의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라 명했다. 태종은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로 있던 하륜의 사위 이승간에게 한양에 올라오도록 허락했다. 군인은 장졸을 불문하고, 군법으로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던 때였다.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게 하고, 군인 사위를 불러올려 장례에 참여시킨 것은 모두 파격이었다.
하륜의 유언에 따라 장례는 국장이 아니라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선영이 있는 진주 미천면에 묻혔다. 저서에 호정집 (浩亭集), 삼국사략 (三國史略)등이 있고, 가사인 도인송도지곡, 수명명 등이 전하며, 스승 이색의 묘지명이 역작으로 꼽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현재의 청계천. 청계천은 하륜이 토목공사를 하여 처음 만들었다.
하륜은 1347년 음력 12월 22일 생이다. 그의 바이오코드는 1105다. 1105는 겨울 코드로써 대기만성형에 속한다. 초년부터 40대 중반을 넘을 때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던 하륜이 50줄에 들어서면서 늦게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1105가 실리적이고 뛰어난 집중력을 지녔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번 먹은 마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있어 1105는 비록 늦지만 원하던 바를 꼭 이루고 만다. 융통성 없다는 비난을 들을지 몰라도 자신이 세운 원칙에 따라 못 먹어도 고다. 원칙을 고수하며 긴 인고의 세월을 넘기면 대개의 경우는 크게 먹는데 성공한다. 같은 1105인 인동초 김대중은 하륜보다도 더 늦게 마침내는 대통령에 당선되고야 말았다. 김대중의 학력도 다른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보잘 것이 없는 목포상고 출신이다. 정도전에게 늘 밀렸으나 그를 제거하고 올라선 하륜은, 역성혁명에 가담하지 않고도, 조선 건국기에 부침하던 여러 별들 중 가장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었다. 학벌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원동력이나, 최후의 승리자가 될 때 까지 참고 견딘 힘이 바로 1105에서 나온 것이다.
1105를 무력이나 완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매우 힘이 든다. 자존심이 무척 강하기 때문이다. 조선 개국 직후 천도 문제를 두고 정도전과 대립했을 때, 정도전은 하륜의 무악천도설을 술사의 의견으로 치부하여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폐기했었다. 지방관으로 돌리며, 중앙 정계 진출을 차단한 것보다도, 자신을 술수하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한 것이 더 견디기 힘든 상처였을 것이다. 자존심을 건드렸기 대문이다. 언젠가는 꼭 갚아 주리라 다짐했던 하륜은 절취부심, 정도전이 술수로 폄하한 관상술을 동원하여, 이방원에게 접근한 다음, 1, 2차 왕자의 난을 진두지휘한 것이었다. 1105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반드시 되갚는다.
1105는 건설 현장의 불도저만큼 과감하다. 하륜이 아니었다면 청계천은 만들어질 수 없었다. 1105는 다른 사람이 도움을 호소할 때 결코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배신한 사람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없으며, 한번 적이 된 사람을 향해 미소를 보이는 법도 없다. 1105는 놀라울 정도로 교양이 있으며, 항상 지식을 습득하고자 노력한다. 하륜은 비주류로 오랫동안 변방을 떠도는 동안 유학에서 눈을 돌려 역술에 전념했고, 이것을 통해 인생 역전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겨울의 항성코드인 G11은 추위에 대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뭐니뭐니해도 갖은 것이 없으면 춥고 배고프다. 그렇기 때문에 추위에 대한 대비는 짠돌이 구두쇠가 되거나, 이재추구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하륜은 물물 교환적 상행위를 탈피하여 화폐를 유통시킬 필요성을 주장한 다음 저화를 발행 했었다. 사대부들이 상업을 천시하는 풍조가 대두되던 때 하륜은 돈을 버는 일을 늘 염두에 두었었다. 그런 1105는 아무리 참는 것에 이골이 난 인동초라도 돈에 관한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금전 거래에 있어 지불 조건 따위를 불합리하게 제시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폭발하고 말 것이다.
신덕왕후의 능이 도성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능 백 보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해서 가장 먼저 노른자위 땅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요즘말로 하면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것이다. 그런가하면 친인척들과 함께 무단으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간척을 한 다음 그 땅을 사유화해서 탄핵당하기도 했었다. 노비들에게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1105코드가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일화들이다. 국가의 중대사를 대체적으로 훌륭하게 처리했던 하륜이지만 1105의 재물욕에 대한 집착 부분만은 초월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하륜에게 관대했던 태종이 이 모두를 불문에 부쳤기 때문에 하륜은 명예롭게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1105는 무슨 일에든 한번 집중하면 좀처럼 발을 빼지 못한다. 은근하고 은밀하고 치밀한 지도자형이다. 분석력이 뛰어나고 공정하다. 매우 깊이 있고, 분석적이며 방대하다. 어떤 것이라도 맡기면 언젠가는 해낸다. 그리고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하륜의 바이오코드가 1105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모든 법적 제도적 행정적 기틀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다. 지도자나 경영자가 되면 너무 꼼꼼해서 아랫사람이나 직원들을 숨쉴 틈 없이 몰아붙인다. 하지만 그 자신은 위대한 업적을 세울 수 있다. 그처럼 끈질기고, 오래 참아낼 사람은 별로 없다.
1105는 법규와 규칙을 준수한다. 끈기 있게 일을 하며 열심히 공부한다. 역관이 되기 위해 독학으로 중국말을 익힌 임상옥은, 누명을 쓰고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인고의 세월을 보낸 다음,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이재에 밝았던 점이나 오랜 시간 복수를 준비하여 완성시킨 것, 반드시 원하는 바를 이룬 점 등이 하륜과 흡사하다. 임상옥의 벼슬은 비록 부성군수에 머물렀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한 목민관이었다. 임상옥의 바이오코드도 1105다.
고집이 세고, 전통주의자인 1105는 조심성이 많다. 예의를 중시하고, 따라서 대중 앞에서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한다. 1105는 자아를 뽐낸다. 그를 겁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1105는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결국 성공한다. 책임감이 강하고 어떤 곤란한 상황도 인내심으로 견딘다. 하륜이 대기만성할 수 있었던 것은 1105의 이런 요소들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혹은 즉흥적으로, 대략 일을 추진하면 1105는 힘들어 한다.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는 불안해한다. 풀리지 않는 과제라도 안겨주면 그는 해결될 때 까지 고민에 빠져들 것이다. 그를 비난하거나 모욕해도 당장은 참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보복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옥죄어 온다. 따라서 그를 공략해야 한다면 완전하고 철저하게 해야 한다. 정도전은 하륜을 경계했었지만,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치명적인 반격을 당한 것이었다.
첫댓글 역사 인물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바이오 코드상의 성격이 많이 이해가됩니다.
자기의 코드를 알고 잘 다듬으면 누그든 크게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바이오코드로 풀어보는 역사인물이야기. 성격이 사주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격이 사주다.공감이 가는 말이군요.
하륜에 대한 이야기 새롭네요
항시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걸 일깨주는 교훈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