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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바람』
그림자 없는 방
1
달이 여인의 눈썹같이 한 입 물어뜯은 듯 싹둑 잘려나간 몰골이었다. 쭈그러진 할망구 볼처럼 이지러졌다. 컴컴하지도 않고 아주 밝은 것도 아닌 어슴푸레 달이 산등성이 허리께 쯤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초승달은 가장이(나뭇가지의 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시르죽어 힘담 없는(기가 죽다) 얼굴이었다. 달빛이 희끄무레 사내의 발끝에 걸리어 넘어졌다 일어섰다 거듭한다. 사내는 어느새 나지막이 입속으로 뇌까리고 있었다.
베일 듯 날이 선 눈썹,
독부毒婦의 눈썹보다
더 앙칼진 날을 세워
잿빛 밤하늘에 황갈색 울음을 흘리네
시린 벽공碧空을 가를 듯 서슬 퍼런
생채기 하나 붙박이고,
벽공을 날던 바람마저 독부의
눈초리에 움찔하네
구부러진 허리,
오목한 뱃살,
버커리(늙고 병들거나 또는 고생살이로 쭈그러진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같은 몰골로
가슴을 할퀼 듯
바짝 웅크린 채
대지의 만물을 도영倒影한
쓸쓸한 몸부림이네
체신은 겅중 뜨고 깡마른 한 사내가 달 아래 어디론가 휑한 밤길을 더듬고 있다. 밤새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더듬어 고샅길을 가는 장님의 행색이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차림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휘적휘적 걷는다. 휑뎅그렁한(넓은 곳에 물건이 아주 조금밖에 없어 잘 어울리지 아니하고 빈 것 같다) 들판을 지팡이 하나에 몸을 부축하며 간다. 걸싼(일이나 동작 따위가 매우 날쌔다) 발걸음도 아니고 축 늘어진 모습이다. 이따금 짊어진 바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한다. 휴! 하며 숨을 가쁘게 뱉어내기도 하며 바랑의 무게에 벋대보려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들을 거듭 지나며, 강을 건너며 야트막한 고갯길을 허위허위(힘에 겨워 힘들어하는 모양) 넘는다. 작은 숲을 지나며 나뭇가지나 삭정이가 얼굴을 후릴 적마다 손사래(어떤 말이나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에게 조용하라고 할 때 손을 펴서 휘젓는 일)를 치기도 하고 분지르기도 한다. 나무와 나뭇가지 그리고 삭정이를 꺾고 분지르는 일련의 몸짓으로 여울과 고갯길과 야트막한 고갯마루를 넘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한 발짝 바투(두 사물의 사이가 꽤 가깝게) 가늠하여 건널 수 없는 도랑을 만나면 그의 얼굴에는 여린 근심의 빛이 일렁거리며 힘담없이 주저 안기도 한다.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 도랑 쪽으로 걸싸게 달음박질친다. 철버덩! 물에 빠진다. 서생원의 몰골이다. 후줄근히 젖은 몸과 바랑에 발자국은 더없이 소걸음이다. 그는 지금 숲을 보려고 이 밤길을 애오라지 터덕터덕! 물 먹은 행주와 같이 늘어진 몰골이다.
어느새 그는 숲의 초입에 성큼 들어선다. 긴장이 풀리고 잠이 맹렬히 덤빈다. 가로누울까. 아니다, 라고 이를 앙다문다. 곧 희붐하던 하늘이 열리고 새벽의 여명이 다른 아침의 것보다 동뜨게(다른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밝아온다. 미적이生物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벽녘이다.
석규는 꿈을 꾼 것이었다. 엄동설한에 이빨이 딱딱거리고 사지가 오들거리는 한밤중이다. 10년 전의 일이다. 쥐새끼가 부엌과 방을 드나들며 방고래에 구멍을 내었다. 방구석엔 온기 하나 없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이 골방 구석에서 원고를 집필하였다. 소 덕석을 껴입을 만큼 추운 날이 이어졌다. 얼어 죽는 줄 알았다. 혹여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지는 않는지 더럭 겁이 나기도 하였다. 그 해만큼 오지게 추운 때가 있었던가. 한동안 기세를 부리던 동장군이 수그러드니 좀 추위가 누그러지는 듯했다. 차츰 처마 밑에 봄볕이 시나브로 굼실거리며 몰려들었는데 이때가 원고를 탈고할 무렵이었다. 겨우내 얼었던 냉가슴을 햇볕에 녹이느라 처마 밑 양지 바른 곳에서 옷을 뒤집어 벗어 가슴팍을 꺼내어 볕에 말리기도 하였다. 냉가슴이 반색을 하며 두근두근하며 이내 활짝 웃었다. 볕뉘를 들이마신 냉가슴에선 푸석! 샛노랗게 묵은 호흡이 터져 나올 듯하였다. 그 날 마침 그의 어머니가 왔다. 희멀건 그의 얼굴을 보더니 울었다. 그렇게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왜 그리 하늘은 희붐한지 꼭 사흘 굶은 시어미 낯짝 같았는데 조금 사이에 허연 햇빛이 날아들었다. 어린아이 아늠(볼을 이루고 있는 살)만한 부엌엔 수도꼭지가 얼어 터져 물이 질질 흐르고 방구석은 아주 얼어 죽을 정도로 시퍼런 한기를 여전히 뱉어내고 있었다. 차라리 개처럼 털이라도 있으면 추위는 타지 않을 터인데 개가 아니니 더 춥지 않으려 곡차를 들이부었다. 희멀건 낯짝으로 해를 보니 햇뉘가 그를 피하려 무진 애를 쓰듯 보였다. 곧 쓰러질 듯 현기증이 일었다. 손바닥만 한 정원의 푸릇한 새싹을 보니 막 생기가 돋는 듯 움을 틔우고 있었다. 새싹들이 곧 그에게 옅은 연두색 얼굴로 달려들 듯 하였고 허연 얼굴에 화사한 연두색 그림이 그려지는 듯하였다. 이내 푸른 물감을 엎질러 놓은 듯 얼굴이 연두색으로 물드는 느낌이 일었다. 설핏 보이는 화초의 연두 빛깔이 그의 가슴팍에 들러붙을 듯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그의 가슴은 곧 생동감을 띠며 샛노란 기운을 걷어내며 차츰 푸른빛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 해 여름과 겨울을 나며 그는 이런 푸념을 속으로 쏟아내었다.
가슴이 뜨겁던 날
그날은 내 가슴이 단풍처럼 붉게 물들고
땀으로 뒤발한 삼복더위 무렵이었지
오후 네 시 무렵 불기둥 같은 볕뉘가
작렬하는 동안 내 몸은 아스팔트 위를 흐느적거리며 기어가는 버러지 같은 육신을 바들거리며 꿈틀대던 막일꾼이었지
밥은 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었어
장(늘) 습관처럼 수저를 휘두르는
살기 위한 머저리 같은 오랜 관습이었지
먹고 나면 금세 뱃가죽을 뚫고
뱃속에선 천둥소리가 들렸지
아마 허기진 영혼을 달래는 진혼곡이었을 게야
또 어느 봄날 처마 밑엔 겨우내 대문이 부서져라 처깔하며(굳게 닫아 잠가 두다) 웅성거리던 바람이 잦아들고
가랑이 사이로 기세 좋게 훈훈한
봄바람이 오지랖 넓게 덮쳐오더군
나는 겨우내 가슴이 냉동고만큼이나
얼어붙었지
어느 누구도 내 가슴 잘 있냐고
이바구 한마디 안 하더군
그렇게 처마 밑을 기어드는 봄날 볕뉘가
고마운 줄 몰랐어
그 날 봄 화사한 볕뉘에 내 가슴은
히죽! 웃더군
그때 난 봄의 진실한
얼굴과 따뜻함을 느꼈지
문득 시래기처럼 마르고 버석한
내 얼굴에 화기가 돌았지
가슴팍이 후끈 달아오르더군
아마 그게 춘정春情이었나봐?
3년 만에 원고를 탈고하던 그해
봄날에 난생 처음 오르가즘을 느꼈어
그 해 검숭한 겨울의 무거운 구름이 내려앉은 새벽이었다.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 장 그랬던 것처럼 그는 글초원고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를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소리에 개의치 않고 글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따금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위를 기어 다니는 쥐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서까래를 갉아먹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못으로 널빤지를 긁는 소리와 흡사했다. 귀의 신경돌기가 곤두서기가 일쑤였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젠장, 왜 이리 시끄러운 거야.“
그의 신경돌기는 벼린 날과 같이 가슴팍을 비집고 들었다. 부엌과 방은 겨우 된바람을 막아줄 벽만 있을 뿐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낮 동안에도 매서운 바람이 서까래 사이의 널빤지와 보꾹(지붕 밑과 천장 사이의 빈틈)을 훑고 지나는 소리에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그는 어느 집 행랑방을 세를 얻어 지내고 있는 터였고 돈 버는 게 시원찮아 터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글을 읽고 쓰는, 그야말로 남들이 보면 한량에 지나지 않는 깜냥이었다. 아니 그런 깜냥도 되는 위인이 아니었나한다.
방이라곤 모 틀어진 구석에 쥐구멍이 휑하니 뚫려있었다. 닭울이 무렵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다 잠에 들곤 하였다. 쥐가 설쳐대는 방구석이었다. 잠결에 머리맡으로 쥐가 뛰어다닐 정도였다. 조그마한 부스럭거림에도 쥐는 곧장 숨기 일쑤였다. 그럭저럭 한숨 자고 나면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햇살은 바깥문 근방만 비추다 하루를 넘기는 것이었다. 집이라고야 해봤자 그저 비바람만 막아줄 터수였으니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지은 지가 오래되었다. 지붕은 서까래를 걸치고 그저 보꾹을 판자로 겨우 가린 것이었다. 보꾹과 판자 사이에 늘 쥐가 들끓었다. 바깥 출입문은 섀시로 만들어 위로는 유리를 끼웠는데 빛이 조금 들어올 뿐이었다. 그것도 오전 10시나 12시까지 잠깐 동안이었다. 부엌이라야 수저 몇 개와 밥그릇 몇 개에 냄비와 냉장고 하나 덜렁 놓여있었다. 싱크대 하나 없고 부엌 시멘트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식기를 씻어내곤 하였다. 무엇하나 푼더분한(여유가 있고 넉넉하다) 게 없는 애옥살이(가난에 쪼들려 애를 쓰며 고생스럽게 사는 살림살이)였다. 그래도 그는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삶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왔다. 그날도 장날이었다. 그녀는 느닷없이 방바닥의 장판을 뒤집어 보았던 것이다. 방 모퉁이에는 어른 주먹이 들어갈 만한 쥐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었던 것이다. 순간 그녀의 안색이 싸늘히 바뀌며 노기 서린 말을 쏟아내었다.
“이놈의 여편네가 셋방 사는 사람이라고 방을 이따구로 놔두면 되나! 망할 놈에 여편네 같으니! 쥐구멍을 막아줘야지. 쇡기奭奎야 그러다 병들면 어떡허냐?”
주인집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벌써 거품을 물고 발악하듯 버럭 역정을 내었다.
“엄니! 그만 둬유. 제가 흙을 개던 시멘트를 개든 해서 쥐구멍을 막아버리면 될게 아니요! 그만 둬요!”
“저렇게 크게 구멍이 났으면 빨리 뭘로 틀어막아야지. 우째 그래 태평세월이냐! 참 너두 엥간하다.”
어머니가 집으로 올라간 뒤에도 석규는 쥐구멍은 틀어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그냥 놔두려는 심산인지 몰랐다. 며칠 뒤 무싯날(장이 서지 않는 날)에 그녀가 다시 와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갔다. 시멘트를 개어서 바른 것이었다. 감쪽같이 쥐구멍이 없어졌다.
아들인 석규와 이런 언쟁을 벌이기 전에 그녀는 주인집 여자에게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주인집 여자는 칠십을 넘긴, 칠십대 중반의 여자였다. 주인집 여자는 얼렁수(얼렁뚱땅하여 교묘하게 남을 속여넘기는 수단)와 후림대수작(남을 꾀어 후리느라고 늘어놓는 말이나 행동)에 능한 세상물정을 손금 보듯 하는 여자였다. 그녀와 주인집 여자는 안면을 트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서로 소 닭쳐다 보는 듯 팽팽한 긴장이 맴도는 것을 석규는 알아차렸다. 닭이 소를 쳐다보는 건 없다. 소는 닭을 쳐다본다. 서로 무심한 건 마찬가지나 사실 닭이 더 무심한 편이다. 닭은 소에게 덤빌 깜냥도 못된다. 그녀는 그렇듯 주인집 여자를 닭으로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닭이 소에게 덤비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누가 봐도 우스꽝스런 일이었다. 멀끔히 바라다보는 소에게 닭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말이 될 법이나 한 것인가? 무심했던 닭이 부리를 치켜세워들고 덤비는 것이었다. 냅뜰성(명랑하고 활발하여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수줍어하지 않는 성질) 있는 주인집 여자가 한마디 툭 던졌다.
그 집 아들은 어째서 장가도 못가고 혼자 사누? 예날 같으면 그 나이에 손자라도 봤을낀데. 저걸 워째!”
“이 여편네가, 댁이 내 아들 장가를 가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오? 쓸데없이 왜 남의 일에 참견이야!”
주인집 여자가 한 술 더 떠,
“오죽 못났으면 장가를 못갈까. 우리 아들도 아직 못가긴 하였지만. 쯧쯧!”
“이 여편네가 뭐라 하는겨!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겨!”
주인집 여자의 아들도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 그 말을 핑계 삼아 변죽을 울려대었다. 이게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인내에 한계를 느낀 것이었다. 그녀는 눈에 핏발이 선 채 삿대질을 해가며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주인집 여자도 매미 마빡 같이 반질반질하고 툭 불거져 나온 이마를 들이대며 주먹다짐을 할 참이었다. 이에 그녀도 팔을 걷어붙이며 막 싸움이 벌어지려는 찰나에 주인집 여자가 그만 기세를 꺾었다. 그녀의 기세등등함에 기가 질렸던 모양이다. 사실 주인집 여자의 키가 더 컸다. 완력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인집 여자는 그녀의 눈빛에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상대를 제압하는 매서운 눈초리와 강렬한 눈빛 때문에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단이 나기 전에 이미 주인집 여자는 장날마다 오는 그녀를 씹곤 하였다. 왜 아들 집에 오면서 청소도 안 해주고 가냐는 등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을 떠벌리고 있던 터였다. 그걸 그녀가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결국 알아버린 것이었다. 소난 장에 말 난 듯 생뚱스런 이야기가 그녀의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하여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서로 간에 더 큰 난장질(아무데나 마구 때리는 짓)이 벌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태의 자초지종을 들은 석규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집 뒤란으로 난 창이라곤 판자를 덧대어 낸 봉창과 같은 게 있을 뿐이었다. 낮에는 그래도 약간의 훈기가 돌았지만 해가 지고 노루꼬리 만 한 겨울 햇살이 문 사래에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우중충한 방안에서 이를 탁탁! 부딪치며 덜그럭거리기 일쑤였다. 방은 보일러를 놓지 않았다. 주인이 돈이 없어서인지 아닌지 몰랐다. 방바닥에 장판만 깔아놓은 허름한 집이었다. 대충 보아도 한 서 너 평 바투의 낡고 오래된 집이었다. 석규는 겨울이 올 무렵부터 다음해 따사로운 볕이 드는 봄까지 그렇게 비루먹은(피부가 헐고 털이 빠지는 병에 걸리다) 개처럼 삭신을 웅크려 스산하고 음산한 겨울나기를 했다.
여름에는 그냥 견뎌내지만 겨울에는 전기장판 하나 덩그러니 놓고 지내는 터수였다. 부엌에는 뜨거운 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겨울이면 꼼짝없이 추위를 그대로 맞으며 지내야 했다. 방안은 마치 동굴과 같이 어둠침침하고 스산한 기운이 돌았고 아주 한 겨울이면 입김이 서리곤 했다. 시린 손을 불며 그렇게 지내야만 했다. 된바람이 극에 달하고 허름한 부엌에 있던 수도꼭지가 얼어터질 정도로 기온이 급강하는 날이 며칠째 지속되었다. 산비탈에 강대나무(서서 말라죽은 나무)처럼 뻣뻣하게 서있던 수도가 금방 얼어붙을 기세로 한데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집 뒤란으로 난 작은 창에 난 작은 구멍은 바깥바람을 여지없이 투과시키며 한껏 입김의 농도를 더욱 하얗게 질리도록 뿜어내고 있었다. 글초를 다지다 한기가 맹렬히 덮쳐오면 진동한동(급하거나 바빠서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서두르는 모양) 소주 한 병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워냈다. 석규는 거의 곡기穀氣를 넣지 않고 글을 쓰는 게 일상이었다. 어떤 때에는 하루에 한 끼도 먹지 않고 주야장천晝夜長川 글만 읽고 썼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소주 한 병에도 얼굴이 불콰해지며(술기운을 띠거나 혈기가 좋아서 불그레하다) 해닥사그리하여(술이 얼근하게 취하여 거나한 상태) 거나하게 되기가 일쑤였다.
가끔 5일장마다 석규의 어머니가 왔다. 무싯날(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거의 오지 않는 그녀였다. 혹여 방해가 될까 해서였다. 장에서 무언가를 잔뜩 사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답답한 심사로 그녀는 한숨을 내쉬곤 하였다. 석규는 내심 어머니가 오는 게 반가웠다. 싸늘한 방안에 입것을 본 그녀는 잔뜩 무겁고 음산한 한숨을 방바닥에 쏟아내었다. 한숨소리에 짙은 눈물자국이 묻어나는 게 설핏하니 어리고 있었다. 좀체 내뱉지 않는 말의 무더기가 와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야야! 니 우째 이리 살고 있냐? 우쨌든 돈을 벌어야 할 게 아니냐. 대체 뭘 먹고 살려고 이러냐.”
그녀의 말에는 결기가 바짝 서려 있었고, 그의 가슴팍을 비수와 같이 후려 파는 것이었다.
“······”
그녀의 타박은 그리 방안에 자디 잔 파열음으로 문과 창을 뒤흔들며 그의 고막 안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그녀는 늘 그런 석규를 보며 가슴에 못이 박히는 심정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는 고개를 외틀어 아무 말 없이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직수굿이 방바닥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가 그리도 역정을 내고 성화를 부린 것은 아마도 그의 어릴 적 삶에 집안에 드리운 어두운 가난이란 덕지덕지 붙은 더께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가난한 시절의 기억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어서 그녀는 그에 대한 몸서리처지는 내면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이따금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부유물 같은 것이었으리라. 없는 살림에 구메농사(작은 규모로 짓는 농사)를 짓는 산골 벽촌으로 시집을 왔으니 말이다. 주름이 죽죽 떠는 옹색한 살림살이였다. 석규의 아버지는 늘 장에 가서 몇 일만에 집에 들어오곤 하였으니 그녀의 마음이 오죽이나 찢어졌겠는가 말이다. 모주꾼과 어울려 몇 날 몇 밤이고 지새우며 술을 낚아 올리곤 하였다. 남편이라고 결곡지지(얼굴의 생김새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야무져서 빈틈이 없다) 못해 늘 외양간의 소는 말라 큰 눈망울만 껌벅껌벅 대고 있었다. 다른 집 소들은 잘 먹여 번지르르 기름이 흘렀다. 그녀의 집소만 주름을 죽죽 떨며 마른버짐이 나 있었다. 병든 기계병아리처럼 외양간 바닥에 엎디어 앞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니 아들놈과 애비가 똑같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석규의 옛살라비(고향)는 30여 호가 채 되지 않는 동네였다. 모든 집이 구메농사로 기껏 입에 풀칠이나 하는 동네였다. 그나마 보릿고개를 넘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반이었으니 밥을 굶는 집은 없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이밥을 먹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논이라야 한두 마지기가 고작인 동네였다. 여름과 늦봄은 구메농사로 거둔 낟 곡으로 배불리 밥은 먹었지만 늘 보리곱살미(꽁보리밥)가 밥상에 올라오고 있었다. 툭하면 감자나 옥수수 찐 것으로 밥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석규는 어릴 적 젖배를 굶어 그의 어머니는 대신 죽을 쑤어 먹였다. 아주 산골짜기라 겨울철 오후 네 시만 넘기면 해가 산등성이를 너울거리며 넘어갔다. 동네는 자그마하여 누구네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논이라 봐야 동네를 통틀어 몇 마지기 되지 않아 아예 쌀밥은 명절 때 아니면 할아버지 생신 때 겨우 보리반지기(쌀과 보리가 반반 섞인 밥)나 쌀밥을 볼 수 있었다. 보리곱살미를 먹고 나서 어른들 앞에 앉은 이내 방귀가 비집어 나오는 것을 참다보면 쌍 바위 골에서 나오는 장탄식長歎息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사면이 바다 한 자락 볼 수 없던 충청도 두메산골 늘 밥상에는 푸성귀만 올라왔다. 저녁에는 칼국수를 물리게도 먹었다. 논이 2%, 밭이 98%였던 동네였다. 봄이면 진달래 따먹고 이른 봄 무른 소나무순 벗겨 단물 빨아먹고, 원추리 돌나물 질경이 쑥 비름나물 온갖 야생풀은 거의 다 먹었다. 물론 나물 반찬을 만드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때로는 잡살뱅이(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이 뒤섞인 허름한 물건) 나물반찬도 상에 올라왔다. 여름과 가을은 무지 바빴다. 소꼴 베러 지게지고 온 산허리를 헤매며 가시에 찔리고 뱀을 무던히도 보며. 깊은 산골이라 뱀이 지천에 널려 어린 그는 그만 자지러질 뻔하였다. 매년 여름이면 늘 뱀에 물리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해마다 물렸다. 고추밭 담배 오이 밭, 소꼴 베다 물리던 그녀였다. 전생의 무슨 업이 있던 것일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밭으로, 소꼴 베러 다녔고, 겨울이면 아궁이에 지필 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눈 쌓인 산을 휘젓고 다녔다. 유독 가시나무를 많이 베어 왔다. 가시나무로 군불을 때면 방이 더 따뜻하다고, 그게 이유였다. 공부는 뒷전이고 먹고 사는 게 힘든 날의 초상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여지없이 부지깽이, 도리깨 아니면 지게 작대기 타작이었다. 눈물을 쏙 빼고 나면 저녁밥은 없었다. 대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쇡기야, 사람이 일을 해야 밥을 먹는기라!”
지독히도 춥던 어느 겨울날 그는 모처럼 장작을 지핀 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봉당까지 눈이 가득 쌓였다. 그는 일어나 바지게(싸리나 대오리 따위로 만든 발채를 얹어 놓은 지게) 망태를 벗겨들고 눈 쌓인 밭에 새덫을 놓았다. 참새가 들락거리다, 그만 바지게 망태에 걸려 옴짝달싹도 못한다. 참새를 집어 들고 집안으로 쑥 들어선다. 방안에는 화로의 잉걸불 (활짝 피어 이글이글한 숯불)이 혀를 날름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석규는 어머니가 나무를 해오라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그저 따라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만 어머니의 비위를 건드리고 말았다. 나무를 해오라는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따라 눈이 많이 내려 무릎까지 덮이기에 더욱 나무하기가 싫어 산에 가질 않은 것이었다. 문풍지에 다다른 바람소리에 눈을 뜨니 밤새 흰 눈이 봉당을 오르는 계단이며 마당에 수북이 쌓였다.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은 청초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날의 정적을 일깨우는 건 참새 몇 녀석일 뿐 고요에 휩싸였다. 고개를 들어 앞산이며 뒷산을 보니 봉우리마다 흰색의 옷을 입었다. 채 뽑지 않은 배추와 무가 말라 비틀어져 널브러진 채로 밭에 누워 겨울의 앙상함을 보여주고 있었고, 집 뒤란의 늘 푸르던 측백나무는 흰 고깔을 쓴 듯 머리는 세어 수척해진 노인을 연상케 하였다. 겨우내 눈은 봄, 여름, 가을에 약동하던 숨 탄 것을 사라지게 한 것에 대한 진혼곡鎭魂曲인 양 그 차고 희디 흰 서러움을 토해내고 있는 듯하였다. 집 오른쪽의 미끈하게 쭉 솟은 향나무는 마치 석가탑을 떠올리게 하였다. 석규의 아버지가 늘 전지가위로 손질을 하여 켜켜이 층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층층마다 쌓인 눈 밑은 상록常綠의 푸름을 안고 위는 백설기를 얻은 듯하였다. 집 앞 실개천은 여름날의 장맛비를 거두어 먹은 것을 토해내 듯 흐르더니 이 겨울에는 배고픈 듯 바닥을 드러내어 자갈과 돌부리만 보이며 여윈 몸을 고스란히 누이고 있었다. 온 동네가 흰 비단을 덮어씌운 듯 하늘과 땅이 같은 색의 톤이고 눈으로는 가릴 수 없는 피안彼岸의 정토淨土에 온 느낌을 주었다. 눈이 오기 전 날의 그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황록의 빛깔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구름과 바람을 따라 눈발을 오르내리게 하며 어떤 것에 닿으면 모양을 지어내고 땅에 이르면 사물에 따라 그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눈이 지닌 미학美學이다. 더러움을 좇으면 더러워지니 본연의 마음을 따라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은 눈 내리는 밤에 더 확연히 보이는 듯하였다. 인간사의 흥망과 어두움과 게염(욕심)도 눈의 그 희디 흰 고결함을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념에 젖은 채 하루를 보내고 보니 틀림없이 야단맞을 것이 걱정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석규는 어머니한테,
“오늘 저녁 굶어라.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아니 서러웠다. 어찌나 서러운지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꺼이꺼이! 목구멍으로 삼키는 눈물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귓전을 타고 박힌다. 두 살터울인 동생은 그녀에게 밉보이질 않아 꾸역꾸역 보리곱살미를 삼키고 있었다. 동생이 밉살스럽고 부아가 치민 석규는 대꾸도 못하고 눈을 흘기곤 하였다. 심성이 착한 동생은 그래도 어머니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들었다. 그날 밤새도록 꼬르륵! 소리를 들으며 새우등처럼 오그려 잠을 잤다.
2
석규가 고향에서 산지는 겨우 열두 해였다. 나고 열두 해를 채울 무렵이었으니 고향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는 편이다. 겨우 고향 산천이 눈에 익을 무렵이었으니 말이다. 1970년대 중반 무렵에 본바닥을 떠난 것이었다. 산간오지 마을인 고향에서 그래도 도회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족 전체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본바닥을 떠났던 것이다. 경상도 땅 도원道源이었다. 말이 이사였지 실은 고향을 도망치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야반도주인 셈이었다.
어느 해 늦가을이었다. 곤히 자고 있던 그를 깨우던 것은 어머니였다. 그때가 밤 11시를 훨씬 넘어 자정쯤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초가지붕 아래 흐리마리한 석유 등잔불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쇡기奭圭야, 일어나라.”
“………”
눈꺼풀이 잘 떨어지지 않은 그를 대이구(자꾸)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가자!”
“………”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느닷없이 서둘러 깨우는 게 내심 짜증이 났고 갑작스런 어머니의 침통한 목소리가 귓전을 흔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뭔가 결기가 서려 있었다. 석규는 그 낌새를 세월이 얼마간 지난 뒤에야 그녀의 그때 표정을 어렴풋이 읽었다. 가물거리는 등잔불 아래 비친 그녀의 얼굴에는 침통함과 비애감이 서려 있었다.
그날 밤 석규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새벽 12시가 넘어 집을 나섰다. 11월 말이라 무서리가 내린지 오래였다. 새벽하늘이라 차디찬 하늘엔 별들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니 어디로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석규는 어렸다. 뭐가 뭔지,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어림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단지 밤에 잠을 못자고 새벽길을 나선다는 게 야속하기에 몽니를 조금 부렸을 뿐이다. 석규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아버지가 있던 없던 어린 석규에겐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집안에 맴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서 외지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본바닥을 떠나기 전의 일을 회상해보니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지며 시나브로 눈두덩이 붉어짐을 느낀다. 그해 봄부터 늦가을까지 석규의 어머니는 농투성이 여느 동네 아주머니들과 똑같이 밭을 오가며 알곡과 푸성귀를 심고 가꾸었다. 봄에는 노가리(씨를 여기저기 흩어서 뿌리는 일)를 하고 가을에는 늦사리(제철보다 늦게 농작물을 거두어들임)를 하는 그때 그 시절의 풍속화에 나오는 그런 범부凡婦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억척스럽게 밭을 일구고 김을 매며 자식들을 건사하기 바빴다. 앞산에 참꽃이 지천으로 피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여느 집처럼 밭으로만 내달았다. 아지랑이 피는 봄날 뻐꾸기가 그리 꾸우꾹! 울어대어도 쌩이질(남이 한창 바쁠 때에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는 짓)로 여기며 살림을 건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듯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듯 말이다.
석규 아버지는 본바닥을 떠나던 그해 여름에도 집안에 그림자 하나 들여놓지 않았다. 무심한 것이었을까? 무슨 일인지 바깥으로만 겉돌고 있었던 것임을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름이면 어머니는 늘 바빴다. 6월 말부터 시작하여 7월 초 무렵이면 들깨 모종을 하는 때이다. 들깨 모종은 비가 내리는 중이나 비가 내린 뒤에 곧바로 옮겨 심어야 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들깨 모를 비료부대에 담아 밭두둑에 옮겨 심는 것이었다. 후텁지근한 날에 비에 옷이 젖지 않으려면 비료부대 뜯은 곳의 반대편 아래에 팔이 들어가고 목이 들어가게끔 구멍을 내어야 했다. 우비 삼아 이를 덮어쓰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밭이라야 대부분이 비탈진 것이었고, 비가 내리거나 그인 뒤에는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고무신을 신은 채로 비탈진 밭두둑을 따라 모종을 하자면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강산 보지 말고 얼릉 해라. 해 넘어가겠다. 흥뜽거리지 말구”
“알았구만유.”
“땅을 파봐라, 밥이 나오니.”
“······”
그녀는 본디 손이 유별나게 빨라 들깨 모 심는 속도가 빨랐기에 석규는 지청구(까닭 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짓)할 겨를도 없었다. 옆도 돌아보질 않았다. 석규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의 말에 대꾸도 별로 하지 않은 채 들깨모를 건네주기를 해동갑 (어떤 일을 해 질 무렵까지 계속함) 할 무렵까지 하였다. 쉴 틈이 없을 만치 일을 헤쳐 나갔다. 앞산이 거뭇거뭇해질 때까지 노량으로(한가롭게 놀아 가면서 느릿느릿하게) 중동무이(하던 일이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중간에서 흐지부지 그만두거나 끊어 버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건성으로 일을 하다간 그녀의 불호령이 떨어질 판이었다. 어린 그에게는 고단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한 기색이 곁눈질로 가늠할 수 있었다. 그 해 여름에는 유독 비가 자주 내렸고 억수장마가 질 때도 있었다. 때로는 흙비가 내리기도 하였다. 여름에도 가끔 내리는 흙비, 토우土雨였다. 흙비는 드물게 내리는 편이었다. 여름철이면 늘 세찬 장대비가 아니면 는개(이슬처럼 내리는 가는 비) 정도의 비가 내리던지 장대비가 쏟아질 때도 있었다.
그해 가을은 유난히도 추웠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집 뒤란 멀리 밭가엔 이미 늦가을이어서인지 감이 여느 해보다도 붉었다. 측백나무 울바자를 한 초가집 뒤란에는 가을색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왜 그런지 집안 분위기는 음산하고 스산한 느낌이 돌았다. 감이라야 산골짜기에서 나는 재래종이라 어린아이 불알 크기만 한 것이었고 왜 그리 떫은지 모를 지경이었다. 석규가 기억하기로는 그해 가을에는 유독 서리가 자주 내렸다. 그리고 많이도 내렸다. 마치 눈이 내려 눌리어진 것처럼 반들반들하게 더욱 차디찬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집이라야 거우듬한(조금 기울어진 듯하다) 산중턱에 걸려 있었고 마당이라야 겨우 멍석 두어 장 깔면 그만이었다. 그 작달막한 지붕에 그처럼 된서리가 내린 것을 거의 못 보았는데 그해 늦가을은 눈이 내린 듯 많은 서리가 듬뿍 내린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마당 모퉁이에 쌓아놓은 두엄더미 위에 서리가 듬뿍 내려앉았고 이엉을 얹은 뒷간 지붕도 60대 노인의 희끗한 머리칼처럼 설핏 보였다. 마당 끝에서 내려다보면 표주박처럼 생긴 밭이 있었다. 수수 대궁을 베어내 세워놓은 곳에도, 자리개(짚으로 만든 굵은 줄)로 들깨를 묶은 더미며 온통 서릿발에 오죽잖은 몰골을 보일 뿐이었다. 거뭇거뭇하니 거우듬하게 금방이라도 내쳐 앞으로 쏟아질 듯 산이 에워싼 집은 더욱 어린 그를 겁먹게 하였다. 시커먼 산자락에도 여전히 화수분 같이 쏟아지던 볕뉘는 온데간데없고 음울하고도 가끔 볼때기를 후리는 바람과 한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집은 덩그마니 동네에서도 제일 꼭대기에 거기에 더하여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 뒤란을 벗어나 조금만 오르면 양지바른 곳과 집 옆으로도 여인네 젖가슴처럼 봉긋한 무덤이 아마 10여기가 넘었던 같다.
포장이 되어있지 않은 새벽길을 걸었다. 고무신짝이 벗겨질 정도로 10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중이었다. 찬 밤공기가 귀때기를 도려낼 듯하였다. 집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니 거뭇한 산자락이 보였다. 별이 총총한 늦가을의 하늘을 올려다보니 시린 낯빛을 머금고 있었다. 아, 이제 고향을 뜨는가 싶었다. 동네를 둘러보니 집들이 모두 불빛이 꺼져 있었고 이따금 옷섶으로 늦가을의 찬 기운이 배어들고 있어 걸을 때마다 오금이 저리고 사타구니 사이로 바람이 하냥 스치고 지났다. 십리 길을 걸어갈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그녀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앞만 보며 휘적휘적 걸어간다. 발바닥과 발등이 시려왔다. 새벽에 길을 나선다는 것은 아낙들로서는 여간 힘들고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저만치 앞서 가던 그녀가
“강산 보지 말고 얼릉 걸어라.”
“엄니, 어디로 가는겨?”
“아부지 찾아가는 길이라.”
“아부지는 워디 있어유?”
“잔말 말고 따라 오너라.”
“………”
새벽 12시를 훨씬 넘긴 자정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갔는데, 다만 면소재지까지 가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 깊은 밤중에 왜 집을 나서는지 몰랐고 다만 아버지를 찾아간다는 말만 던진 그녀가 그리도 바삐 걷는 것은 처음 보았다. 깜깜한 오밤중이라 길도 잘 보이질 않았다. 달빛도 없는 밤이었다. 길은 비포장이라 툭하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기도 하였다. 칠흑 같은 밤중이라 겁이 나고 또 넘어질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경 일만큼 밤길이 무섭고 두려웠다. 길가에는 도랑이 있었는데 고요한 밤중에 졸졸! 흐르는 소리만 귓등에 우레와 같은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이따금 풀숲에서 자던 새가 깃을 치는지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이라야 70년대 당시 대강 닦은 신작로이지만 돌닛길이어서 발부리에 걸려 몸이 기우뚱하였다. 한기가 야금야금 옷섶을 헤치고 들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할 뿐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석규는 그저 면소재지에 가면 아버지를 볼 수 있으리란 기대만 있었고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본바닥은 물론 이웃 마을에도 원래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5일 장이 서면 늘 걸어서 장을 보기 위해 10여 리를 발품을 팔아야만 하였다. 시골 장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농투성이들이 모이는 그런 곳이어서 집에서 바심(타작)한 곡식들을 내어다 파는 곳이었다. 당시는 누구나 네 남 없이 보리, 밀, 고추, 수수, 서슥(조), 감자, 옥수수 등을 내어다 팔아 끼니를 잇는 게 고작이었다. 10리 길을 곡식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발이 붓도록 늘 다녔던 것이다. 10리 길을 한참을 가다보니 한 절반은 온 듯하였다. 집에서부터 한 오 리는 걸어 나온 셈이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길옆에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게 보였다. 등골엔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늦가을의 오싹한 기운에다 더하여 식은땀이 날 정도로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이었다. 되레 오던 길로 집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아가리를 벌린 것이 되똑하니(쓰러질 듯이 한쪽으로 가볍게 기울어지다) 그날 밤에는 몹시도 커보였다. 시커먼 아가리에서는 허연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깥의 찬 공기와 음산한 굴에서 나오는 따뜻한 기운이 어우러진 안개와 같은 것이었다. 자정이 넘은 새벽에 허연 연기가 새어나오다니? 석규는 앞서가던 어머니 쪽을 잰걸음으로 달음질치듯 옆에 바싹 붙었다. 늘 장에 갈 때마다 보아오던 그 아가리가 아니었다. 눈자위가 좁좁해져(공간이 꽤 좁다) 옴을 느끼며 그 아가리를 보지 않으려 애써 외면하였지만 여전히 눈에 밟혔다. 아니 숫제 눈을 감는 것이 나을 성 싶었다. 하지만 밤길에 눈을 감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잘못하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에 억지로 눈을 뜨고 걸었다. 그 아가리에서는 마치 물을 끓이면 가마솥 테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런 수증기와 같이 허연 입김을 불어내고 있었다. 그날 밤 보았던 광경은 지금까지도 회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짐을 지울 수 없다. 그 아가리는 예전에, 아마 일제 시대 때 광물을 캐던 곳이라는 말을 동네사람들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광산이었던 셈이다. 그 광산은 여름에는 서늘해서 따가운 햇볕을 피해 땀을 식히기에 좋았고 겨울에는 온기를 머금은 그리 수증기를 내뿜었던 것이다. 광산은 늘 사시사철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한여름에도 사람들은 그 앞에 서있지를 않으려고 하였으니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광산을 섬뜩한 곳으로 여겨 그 앞을 지날 때는 보통 때와는 다르게 잰걸음으로 지나치곤 하였다. 그도 그 연유를 알았기에 어머니 곁으로 바싹 몸을 붙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날은 새벽이라 더욱 모골이 송연하였고 빨리 그곳을 벗어나기를 바랐지만 어린 석규의 걸음은 그리 약빠른 게 아니었으니 답답하고도 무서운 느낌이 평소보다는 갑절 이상은 되었다. 본바닥을 뜨기 훨씬 전에 이웃 마을에 처녀가 있었는데 그녀가 광산에서 농약을 마시고 자진自盡을 하였다는 소문이 고향 마을과 이웃 마을에도 파다하게 번졌던 것이다. 그녀가 왜 죽었는지는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들리는 말에 따르면 신세를 비관하여 죽었다는 말밖에 알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그녀의 마을에서 한 오 리는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자진을 한 것일까? 농투성이의 딸로서 시골 생활이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말 못할 곡절이 있었을까? 석규는 지금도 그녀가 죽은 연유가 궁금하기도 하다. 자신의 일은 아니나 여전히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연유가 알고 싶은 심정이다. 장에 갈 때면 늘 그 앞을 지나야 하는 것이기에 석규의 의문은 그렇게 세월이 한참을 흐른 지금에도 장늘 뇌리에 머물러 있다. 당시에는 이웃 마을에 누가 목을 매달아 죽거나, 그녀와 같이 농약을 마시고 죽었다느니 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보릿고개를 간신히 넘겨 그래도 조금은 살만한 때였으나 농사일은 여전히 버겁기만 하였던 모양이다. 아마 다른 이유가 있었으리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 하나 뉘일 자리 없겠냐만 그녀는 그리 빨리 세상을 등졌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본바닥에서 십여 리를 고무신을 신고 터벅터벅 걸어 나와 중식당을 하는 친척집에 머물렀다. 밤이 아주 이슥한 새벽녘이었다. 내남없이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은 시골 면소재지였다. 석유 등잔에 심지를 올려 불을 붙인 어둑한 불빛 아래 친척이 내어주는 늦은 저녁, 아니 아침을 먹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새우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친척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단양으로 갔다. 거기서 다시 어딘가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단양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듯 어두컴컴한 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게 기차 터널이었다. 꽤 긴 터널을 지나니 저 아래 마을이 보였다. 그가 살던 두메산골보다는 훨씬 너른 들판과 사과나무가 빼곡 들어선 과수원도 보였다. 11월말인지라 사과나무엔 겨우 까치밥 정도만 남은 듯 듬성듬성 열매가 보였다. 겨우내 날짐승들을 위해 벌려놓은 성찬 아닌 소찬素餐이었다. 나뭇가지엔 이미 상고대가 열려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터라 들판은 온통 된서리가 내려앉아 서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밤새 내린 서리가 얼어붙어 나뭇가지를 허옇게 뒤덮고 들판을 덮어 숙살肅殺의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낮선 곳의 가을은 만물이 죽은 듯 시나브로 허연 영혼이 널브러진 늦가을의 스산함이 더욱 부르터나고 있었다. 본바닥 집 뒤의 산자락에서 묻어나는 숙살의 기운보다 더 살기등등한 기세로 다가왔던 것이다. 기찻길 옆 뭇 나무들은 서리를 맞아 허연 몰골로 축 처졌고 노란 은행잎과 멀리 보이는 단풍나무만 붉게 눈 안에 들어올 뿐이었다. 하늘은 더욱 푸른빛을 내며 높아 보였고 이따금 보이는 흰 구름만 둥실 깃털처럼 얇게 퍼져 있었다. 그해 가을의 공기는 어느 때보다 찼던 기억이 난다. 두메산골에 살던 석규는 그날 처음으로 비록 작은 읍이었지만 이 낮선 곳에서 더욱 스산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물설고 낯 설은 동네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탓일까? 모든 것이 낯설고 어지러운 영상으로 그의 눈과 뇌를 짓쳐들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낯선 동네의 풍광은 그리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생판 모르는 들판이며 산이며 뭇 나무들이며 모든 게 새로웠고 이상하리만치 그의 본바닥에서 보던 것과는 동뜨게 보였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낯선 동네의 들판엔 인삼이란 것이 심어진 것이었고 난생 처음 보는 나무는 사과나무였던 것이다. 사과는 그래도 본바닥에서 제사 때가 되면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맛보던 것이었다. 그러나 인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의 본바닥은 그저 조, 수수, 옥수수, 보리, 밀, 콩, 감자, 고구마, 담배, 고추, 황기 등 온갖 약초만 심어 기르던 곳이었으니 인삼 따위는 숫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여하튼 기차를 내린 석규 어머니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친척 아저씨 되는 분이 길을 안내하였다. 기차역에서 근 한 40여 분을 걸었다.
“쇡기야, 이제 다 왔다.”
“엄니, 워디루 가는겨?”
“늬 아부지 있는데 가는겨.”
“증말 다 온겨, 엄니?”
“오냐, 다 왔다.”
“얼만큼 가는겨?”
“쬐금만 가믄 되는겨.”
보퉁이를 머리에 인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만 되받아칠 뿐이었다. 석규는 아버지를 보러간다는 어머니의 말만 되새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머니 발끝만 보며 걸었다. 사과나무를 심은 과수원을 몇 군데 지나고 또 지났다. 과수원 울타리는 거의 탱자나무로 에둘러 처진 곳이어서 가시가 여간 위협적인 것이 아니었다. 뾰족한 가시가 옆을 스치며 지나가고 서리를 맞은 탱자나무 열매는 이미 검고 누르스름한 빛이 바래어 거뭇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친척집에 다다랐다. 길 아래로 움푹 내려 자리한 거뭇한 나무대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대문을 들어서서 조금 들어가니 조그마한 사랑방이 있었는데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친척 아저씨가
“쇡기 아범 있는가?”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친척 아저씨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쇡기 아범 있는가?”
“예, 들어오십시오.”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멈칫멈칫하며 들어가지 않고 석규를 본다. 석규는 멈칫하며 어머니를 본다. 친척 아저씨가 눈짓을 하며 들어가 보라는 시늉을 한다. 어머니와 석규는 그저 쭈뼛거리며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윽고 어둠침침한 방안에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어두운 빛이 새어나오듯 거뭇하고 묵직한 소리였다.
“왜들 그러고 있어. 들어오지 않구.”
아버지를 안 본지 꽤나 되었다. 무심한 듯 본바닥을 떠난 지 일 년은 넘었던 것이다.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한 것이었을까? 구름 따라 물 따라 거닐었던 행색은 아니었다. 고목이 거센 바람에 쓰러지듯 넘어진 육신이었다. 바람처럼 흩어진 영혼을 보았다. 검숭한 얼굴엔 시름이 잔뜩 묻어났다. 아니 바람이 시름을 잔뜩 몰아다 부어놓은 안색의 아버지였다. 검숭검숭한 얼굴에 휑하니 움펑눈을 한 모습을 그때 보았다. 바람의 무게를 이기다 지쳐버린 한 사내의 무기력함이 드러난 것이었다. 이를 세파라고 하던가!
“쇡기 어멈, 들어와.”
어머니는 도시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문 앞에 서서 다소 한기가 가신 한낮인데도 옹송그리고(춥거나 무서워 궁상스럽게 옹그리다) 있을 뿐이었다. 재차 아버지가 다그쳤다.
“추운데 얼른 들어와. 얘들 추우니까.”
“······”
어머니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는 석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약국을 경영하였다. 약국을 일 년여 하다가 사기를 당했던 것이다. 약사 자격증이 없었던 아버지는 약사를 고용하여 약국을 운영하였는데 약사가 돈을 빼돌려 도주를 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늘 약초에 관심과 흥미를 두어 약초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공책에 약초 이름과 성분 등을 적바림기록하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있었다. 여하튼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을 빼돌려 도망을 친 것이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장사에는 바사기 손방인 아버지는 눈 뜨고 당한 사기였다. 여러 친척들에게서 돈을 빌려 약국 운영을 하여 잘 살아보려던 꿈이 무참히도 깨진 것이었다. 두메산골에서 농투성이를 벗어나 좀 잘 살아보려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빚 독촉에 쫓기어 타향으로 떠도는 나그네 신세가 된 것이었다. 돈을 빌려준 친척이며 아버지의 친구들이 득달같이 석규의 집으로 짓쳐 몰려오는 것은 뻔한 일이었으니 아버지는 그대로 본바닥을 버리고 객지에 은신을 하였던 것이다. 세상에는 늘 도둑과 사기꾼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똑같다. 남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하는 일인 것이다. 한 하늘 아래 머리 검은 짐승이 서로 척을 짓고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세상에 도덕을 부르짖고 정의를 외쳐봐야 허공에다 짖어대는 개의 컹컹! 거림만 못하다더니 정말로 그런가?
사업이 부도가 난 뒤에 아버지는 그렇게 술을 벗 삼아 지내며 하 세월을 견디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퀭한 눈에서는 자조 섞인 망울이 빚어지고 있었고, 무심한 듯 세상을 바라보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본디 이재理財에 무심한 아버지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다른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젊을 때엔 그림도 제법 잘 그렸던 것 같다. 도화지에 꽃그림이건 새 그림이건 색연필로 그렸던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한 권의 도화지에는 늘 새와 꽃이 있었고 채색된 그림에는 늘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꽃이 핀 나뭇가지엔 앉은 새가 있는가 하면 그냥 꽃만 그린 것도 있었다.
젊은 날을 회상하는지 방문 너머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산을 지긋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엔 왠지 모를 애수가 설핏 스치는 듯하였다. 근 일 년 만에 보는 아버지였으나 이미 본바닥에서 늘 보아오던 그런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본바닥 앞산엔 뻐꾹새 울고 저녁엔 부엉이울던 밤에 방안에 앉아 새끼를 꼬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겨우내 소죽을 끓여내고 남은 잉걸불을 화로에 담아내오던 아버지의 모습도 간데없이 스러졌다. 옛살라비를 오밤중에 떠나 그곳 타향에서의 낯선 방에는 낯선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고향에서 본 아버지의 그림자는 숫제 보이질 않고 그림자마저 사라진 환영과 같은 존재가 보일 뿐이었다. 그림자 없는 방안에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허울처럼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오롯이 그림자 있는 방을 볼 수는 없다. 이미 석규의 고향은 거의 폐촌廢村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고향의 사라진 집의 방안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였다. 지금 고향의 집은 사라졌으나 집터서리엔 오래된 향나무만 남아있다. 수십 년 동안 그 자리에 오롯이 서 있을 뿐이다. 고향의 그림자 없는 방안에는 환영처럼 향나무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