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1~10 뼈와 영혼의 떨림 2020. 6. 24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편에도 표제어가 있습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 ‘스미닛’이라는 단어는 번역하여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또는 ‘팔현금에 맞춘 노래’라고 합니다. 역대상 15:21절입니다.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과 아사시야는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요” 여기서 여덟째 음이라는 단어가 ‘셰미니트’입니다. 그러므로 ‘스미닛’에 맞춘 노래란 이 단어로 해석합니다. 스미닛에 맞춘 노래는 시편 6편과 12편입니다.
오늘 본문을 6세기의 교회에서 참회의 시로 분류하였습니다. 시편 6편과 함께 참회의 시로 보는 시편은 32, 38, 51, 102, 130, 143편입니다. 우리가 이 중에 제일 잘 아는 시편은 시편 51편입니다. 시편 51편은 분명한 죄가 드러나 있지만 오늘 본문은 무슨 죄로 인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봉독” 주의 분노와 주의 진노가 왜 일어났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주님의 분노와 진노로 인한 책망과 징계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수척하였다고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린다고 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즉시로 고쳐주지 않으시니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당하여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고통이 어떤 고통일까요? 육체적은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만 시편 51편과 같은 경우에는 죄를 고백한 후에 정직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주의 영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고통이란 구원의 즐거움이 없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은 주의 영이 일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통입니다.
창세기 6: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는 이유가 사람이 육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이후의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영원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들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자 인간은 육신이 되었습니다. 몰락할 인간으로 자신의 육신의 소욕만 따르는 자들이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노아시대에 사람들의 고통은 사고팔고 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며 시집가고 장가가지 못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방주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노아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았을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은혜를 입은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구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당합니다.
베드로후서 2:5~8절입니다. “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롯의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삼촌인 아브라함이 아들처럼 돌보아 왔는데 재산이 늘어나자 종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줍니다. 자기를 돌본 삼촌에게 좋은 곳을 선택하라고 해야 하는데 양보하지도 않고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을 선택하여 간 곳이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롯도 소돔과 고모라성의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인하여 고통 받았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떠날 용기는 없는데 그곳의 불법한 행실로 마음의 고통당함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고통이 있습니까?
다시 본문 1~3절을 봅니다. “봉독” 다윗이 책망을 받고 징계를 받으면서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까?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린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뼈란 육체의 힘과 건강의 자리이며 감정의 처소가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악을 인하여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라고 합니다(렘23:9). 본문에서 다윗은 뼈만 아니라 영혼까지 떨리니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빨리 고쳐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어느 때까지인지 묻습니다.
오늘 우리는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고통이 있습니까? 뼈란 신체적인 것이라면 영혼은 마음으로도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심신이 다 떨리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인하여 뼈와 영혼이 떨리는 것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으로 인하여 떨고 있습니다. 지금 시편 기자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짐으로 인한 고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뼈와 영혼의 떨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두려움과 떨림이 있는 겁니다.
이사야 66: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자가 어떤 자인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자는 여호와를 위하여 집을 지어드린다거나 소나 양을 잡아 바치거나 분향하는 자들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를 돌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겁니다. 그 말씀의 책망과 징계로 인하여 다윗은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린다고 하면서 자신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죄를 지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면 회개하고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돌이킴조차 못하기에 고쳐달라고 합니다.
시편 80:17~19절입니다. “17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주께서 돌이켜 주셔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주의 오른쪽에 있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손을 얹음으로 이루어내십니다. 그렇게 고침을 받는 내용은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어주는 겁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함이 고통입니다.
시편 80편을 볼 때 다시 보겠습니다만 우리의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살이 떨린다. 치(齒)가 떨린다는 말을 합니다. 치가 떨린다는 말은 몹시 분하고 지긋지긋하여 이가 떨린다는 말입니다. 배신감에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편에서 무엇으로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린다고 합니까? 여호와의 책망과 징계로 인하여,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온 몸과 마음이 떨리는 겁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 고쳐달라고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자신의 죄가 무언지 드러나지는 않지만 육신의 생각으로 살다가 여호와와 관계가 멀어져서 죄를 지은 겁니다. 이런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책망과 징계가 반드시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사생자가 아닌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가 있습니다(히12장).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을 때에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심정으로 주께 고쳐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잘못하였으면 자기가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인 ‘헤세드’ 곧 긍휼과 자비에 호소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성경에서 사망과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로 무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런 사망과 무덤도 하나님과 분리된 곳으로 사용되지만 이런 시편에서는 사망과 스올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앞에서 창세기 6:3절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인간은 육신 곧 ‘바사르’가 됩니다. 바사르란 몰락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들은 이미 사망아래 갇힌 자들입니다. 이런 사망에서 주를 기억하거나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야만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이 뼈와 영혼이 떨리며 사망의 고통임을 알게 됩니다.
본문 6~7절입니다.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주님의 말씀이 임하였기에, 은혜가 임하였기에, 주의 영이 임하였기에 다윗은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립니다. 사망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 전에는 자신의 왕 됨이든지 자신의 성취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고통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책망과 징계를 받으면서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눈물로 요를 적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근심으로 쇠하였다고 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다윗이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수들이 봅니다. 그 대적들이 하는 말은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욥의 고난을 보고 욥의 친구들이 한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다윗과 욥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책망과 징계로 인한 고통과 환난은 구원이 되는데 이것을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기에 조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울음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본문 8~10절입니다. “봉독”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이 됩니다. 조금 전까지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고통을 토로합니다. 사망가운데 주를 기억하거나 감사할 이가 없다고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면서 악인들을 떠나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고 또 들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며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반전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거나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말씀과 기도 속에 응답을 받았기에 이런 찬송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표제어의 배경이 되는 역대상 15:21절을 봅니다.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과 아사시야는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요” 이 내용의 사건을 간략히 살펴보면 오늘 본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가면서 찬송하는 자들이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처음 언약궤를 정병 삼만 명을 동원하여 호위하여 가려고 하다가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납니다. 소가 뛰고 웃사가 언약궤 잡다가 즉사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다윗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이 실패를 통하여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찬양하는데 그 찬양의 곡조가 여덟째 음에 맞춘 스미닛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윗과 함께 함을 보고서 다윗은 기뻐하며 춤을 춥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심을 인하여 기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삶에서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고통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함이 고통입니다. 다윗이 핍박을 받고 환난을 당할 때에는 늘 하나님과 동행을 합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적들을 거의 다 물리치고 평안해지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하여집니다. 자기 힘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일들이 육신의 소욕들입니다. 그로 인하여 책망과 징계를 받음으로 다시 회복되는 내용이 이런 시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고통이며 회복됨이 구원임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성령이 임한 자들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이 없어서 탄식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짐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도 믿는 자들이 어떤 탄식을 하는지 왜 징계를 당하는지 아주 많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3절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이 탄식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가 탄식하는 이유는 아직 몸의 구속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살지만 아직도 몸으로 일어나는 연약함과 죄들을 보면서 탄식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1:31~32절입니다.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문맥은 성찬을 잘못 하는 일에 대한 책망입니다. 성찬에 먼저 온 자들이 먹고 취하는데 늦게 온 자들은 먹을 것도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징계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징계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들이 살피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판단을 받는 것이 징계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징계를 역사 속에서 받음으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이 많습니다. 징계를 통하여 세상이 받을 심판과 정죄에서 빼내십니다.
고린도후서 1:8~9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가 자기 죄가 아니라 복음 전하는데도 왜 이런 환난을 주십니까? 우리가 육신이 있기에 환난이 아니면 다시 자기 육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형 선고 받은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하여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 심신의 고통들이 있다면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고통이 복입니다. 물론 탄식도 함께 나옵니다. 그러나 그 탄식으로 인하여 주님을 의지하게 됨이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