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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디모데후서3장1~5절
제목 :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➀
디모데 후서는 사도바울의 유언장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권면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 주의 증거를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주님으로 인해 갇히게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을 하며,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생명에 이르게 하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성된 일꾼이 되라권면하며 세가지를 말씀합니다,
➀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라, ② 법대로 경기하는 자가 되라, ③ 수고하는 농부와 같아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기억하라고 합십니다. ➀ 복음의 내용, ② 복음의 능력, ③ 복음의 영광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구원을 얻게 되는 영광, 부활의 영광,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영광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럼 없는 일꾼이 되라고 하십니다. ➀말다툼을 하지 말고, ②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고, ③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또 깨끗한 그릇이 되어 귀히 쓰는 그릇 되라고 권면합니다.
깨끗이 쓰이는 그릇은 ➀ 거룩하고, ②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③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된 그릇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말세를 “고통의 때”로 정의하고, “말세 때의 특징과 그 형상”들을 설명합니다.
1. 말세는 “고통하는 때”(1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말세'라는 말이 요즘은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말에 우리가 익숙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들은 이 말에 익숙해 있는 것일까요?
요즘 나타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이 곱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년전에 '오렌지족','야타족', '나타족',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즉석미팅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퇴폐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오랜지족 :이들이 고가의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길에서 여성들을 유혹할 때 오렌지를 들고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라는 견해.
*야타족 : 야타, 나타
*'전화방', '폰팅',
청소년들이 음란 비디오를 제작하고 부모들이 컴퓨터를 잘 모른다는 것을 악용해서 집에서 버젓이 PC통신을 통해서 음란물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말세야! 말세"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요즘은 모든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가족관계는 붕괴되고 가정이 파괴되는 일은 너무도 흔한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말세를 두고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우리 모두가 그 날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시작이 "네가 이것을 알라"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말세의 때”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가 말세지말을 살고 있고,
그 날이 우리에게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알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세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우리는 수년전에 예수님이 언제 어느 때에 온다고 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무리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날에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학생들은 학교에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하여 학교에 가지 않고, 임신한 여인은 들림을 받는데 몸이 무거우면 지장이 있다고 해서 아이를 지워버리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들의 집회장소에서 날마다 기도하면서 그날만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TV에서도 그날이 오자 그 장소에 가서 생중계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날,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시간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동은 모두가 성경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말세'는 메시야가 오시기 바로 직전의 때를 의미합니다(창49:1;민24:14;사 2:2;렘 23:20;겔 38:16;단2:28).
그러나 신약에서(행2:17;약5:3)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의 시대, 즉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 시대가 종료 될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행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약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오늘 본문에서 '말세의 때를 알라'는 말씀은 이와 같이 예수님이 언제 어느때 재림하시는지 그날과 그때를 알라는 말씀이 아니라,
말세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깨닫고,
그러한 삶에서 우리를 구분시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와 똑같은 삶을 살지 말 것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날에 대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1절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즉 말세의 때는 고통스러운 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란 말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과,
아울러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까지 포함을 하는 말입니다.정말 그렇습니다!요즘은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정신적으로 너무도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2. 말세 때의 특징과 그 현상(2~5)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통의 때가 이르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이렇습니다.
1)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2절에 보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참그렇습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아주 옛날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와 내 가족뿐입니다. 제가 자랄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웃의 일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내 일을 알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툭하면 주차문제로, 쓰레기 문제로 싸움만 할뿐 이웃과 더불어 산다는 의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같이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열중하는 현상이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단절된 자입니다(눅 14:26),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 돈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어쩌면 돈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 이것이 이 시대가 나은 최대의 병페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 하든지 간에 돈을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요즘은 아이들도 돈의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모든 판단기준을 돈과 관련시켜서 말합니다. 물론 성경은 '부유함' 그 자체를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을 보면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는데 까지 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스페인의 격언가운데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있을 필요가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언제 타락을 하는가? 하면 돈이 있고, 부유할 때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젊은 시절 다윗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께 향해 있었습니다.경제적으로 어려웠던 6-70년대에 "말세야 말세"라고 말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말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과거보다는 훨씬 부유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열심히 사랑하다보니까 여기저기서 부패한 관리들이 판을 치고,
돈을 사랑하다보니까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말세의 현상에 대해 말하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는 말에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두 말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진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말세의 현상은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는 뜻입니다.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되는 계명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사랑의 대상이 이렇게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합니다.
이웃대신에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함'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됩니다(딤전 6:10).
3) 자랑하며, 교만하다고 했습니다. '자랑'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말하고,
'교만'도 남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우월성을 나타내려고 하는 태도입니다.이 시대를 가리켜서 'PR시대'라고 합니다.
누군가 이 말을 해석하면서 PR이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라'는 뜻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알릴 것은 잘 알리는데,
피할 것은 피하지 못하는 것에 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자랑이나 교만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가? 하면
인류의 조상아담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단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게 하기 위해 부추겼던 행동이 '교만'이었습니다.
즉 교만이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라야 합니다.
나를 자랑하고 나를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려 하는 행위는 결코 주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자랑하고 또 다른 것을 자랑합니다.이단이 왜 이단이 됩니까?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단의 특징 중에 하나가 교주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말세의 징조입니다.그래서 요한1서를 보면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적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출현할 한 개인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보편적인 개념에서는 이와 같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많은 무리들을 일컫기도 합니다.
교만하여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자랑하며'는 본래 시골에서 효과 없는 약을 선전하며 뽐내는 돌팔이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교만하며'는 '거만한'의 뜻을 갖습니다(롬 1:30;약 4:6;벧전5:5).
*약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4)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한다고 했습니다. '비방'이란 이것은 언어 생활에서 하나님과 이웃의 권위를 무시하며 모욕한다는 의미입니다(딤전 6:4;벧후 2:11).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벧후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부모를 거역하는데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인간들에게 주신 첫 번째 계명입니다.십계명중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5-10계명은 사람에 대해서 주신 계명인데, 사람에게 주신 계명중 첫 번째 계명인 제5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부모 공경하는 일에 대해 중요한 계명으로 우리들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우습게 생각하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요즘은 단순히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부모라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서슴지 않고 살해하는 끔찍한 시대가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사는 시대입니다.이런 시대를 두고 누가 '말세'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요즘도 '현대판 고려장'이 재현되고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늙고 병들면 먼 곳에 갖다 버립니다.
무슨 물건도 아니고 어떻게 부모를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나름대로 이해가 간다"고 말입니다.그 어떤 이유로든 부모를 버리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일에 간섭을 하면 어른이라도 멱살을 잡습니다.
심지어 칼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조차 아이들의 잘못을 보고 쉽게 간섭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겁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5) 감사하지 아니한다 했습니다.
'감사'는 모든 덕의 기초입니다(눅 6:35).
그러나 말세에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푼 부모에게도 감사치 아니하며 하나님에게도 감사할 줄 모를 뿐더러(롬 1:21) 의도적으로 거역하며 대적합니다.
사람이 받은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점 점 굳어져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늘어가기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정에서나 직장 혹은 교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과거보다는 분명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교회에 나올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름에 에어컨이 없으면 더워서 못 견디겠다고 불평합니다.
겨울에 히터가 없어도 불평합니다.
차가 제대로 운행이 되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언제부턴지 교회에서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불만족스러운 것만 보고 불평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에게 더 많이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합니다.말세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의 마음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6) 거룩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성결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이런 모습도 없다고 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요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보다,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모든 삶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내 생각이 중요하고, 나의 결정이 더 중요할 따름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받아들일 만하면 그것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틀리고, 받아들이기 애매하면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이런 모든 행위는 거룩과 동떨어진 행위입니다.
말세는 거룩과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저와 여러분이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불경건한 모습 때문에 이웃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런 불경건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물질을 더 사랑합니다.
이런 불경건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육체의 쾌락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여러분!우리가 이 말세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말세지말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것을 알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세를 알라는 것은 이러한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별시키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나 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를 자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더 자랑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그리고 매사에 감사하며 거룩한 삶을 사시겠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 말세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시는 기회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