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재판이 공정하고 상식적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빌라도 자신도 나사렛 예수를 판결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갈릴리의 한 촌부가 자신이 메시야라고 말하면서 온 유대를 떠들썩거리게 만들고 병자를 치료하는 일은 적어도 로마의 장군인 빌라도에게는 유대를 통치하면서 들어왔던 일상의 일이었다. 헤롯이 요한의 목을 참수 할 때에도 그러한 자기네들의 종교적 갈등의 문제 때문에 떠들썩거렸을 때도 빌라도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빌라도 그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정치가 무엇인지를 배워왔고 또 그러한 정치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한 사람 예수라는 인물을 인하여 빌라도는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군중들은 가이사와의 관계를 부추기면서 예수를 제거하려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맹렬한 불길을 빌라도에게 퍼붓고야 만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머뭇거리다가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이 권력이 순식간에 풍비박산 될 지경이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유월절 특별 사면이라는 포석으로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가기를 기대했지만 군중들의 성난 불을 끄기에는 빌라도의 선택은 너무나도 초라한 선택이었다.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하였고, 빌라도의 생존을 위한 최고의 그리고 최선의 또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정의롭지 못한 판결의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다. 따라서 본 소고의 목적은 빌라도 예수 재판 보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적 성취가 역사를 거스르지 않고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살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류는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 속에서 오묘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눈이 닫혀있다. 우주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운행하신다. 만약에 인류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가 서로 다른 역사적 목적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 두 역사가 영원히 평행선을 긋는다면 성경의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운행하시면서 신적 목적을 가지고 오묘하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성취로서 한 사건을 접근해야 할 것이다.
복음서 안에 나타난 빌라도의 재판보도(마27, 막15, 눅23, 요18)는 예수가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빌라도의 예수 재판 보도는 각각 그 상황에 대해서 약간의 다른 진술을 하고 있다. 이 예수 재판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데 있어서 완벽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었다. 그러므로 본 소고는 각 복음서에 나타난 재판보도의 내용을 살피고 그 속에 나타난 갈등의 문제를 살피는 것이 빌라도의 예수 재판을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예수의 증언을 무시한다면 빌라도의 재판이 한 낫 잘못된 재판이었으며 예수의 죽음도 헛된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빌라도의 죽음이 성경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성취적 측면을 고려하여 본문을 연구하려 한다. 따라서 본 소고가 연구하려는 빌라도의 예수 재판이 예언의 성취로서의 필요 충분한 재판이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소고는 본론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살펴보고, 또한 빌라도의 예수 재판 당시정치, 사회적 갈등을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 재판을 결단하게 된 주요 요인을 정리할 것이다. 결론에서는 빌라도의 예수 재판의 결정이 지금을 살아가는 생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취적 측면에서 역사 속에 나타난 잘못된 결과들을 이해하는 열쇄가 될 것이다. 또한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기독인들에게 있어서 크고 작은 문제를 숙명 혹은 운명이 아닌 복음적 생존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믿음 안에서 극복 할 수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본 소고를 마무리 하려 한다.
B. 본론
1.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실수였는가? 아니면 의도된 하나님의 계획인가? 왜 예수는 무모하게 죽음을 선택했는가?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질문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이에 대해서 알버트 슈바이쩌는 예수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도박의 제물로 자신을 걸었고 하나님은 이 죽음 앞에서 즉각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셔서 자신을 구출 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기대는 무너지고 예수는 졸지에 나무에 매달려 죽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다. 슈바이쩌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무능력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통제 못하는 어리석은 선각자에 불과한 뜨내기 선각자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무능력으로 이루어진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자 하셨던 우주적 구원을 위한 틀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필요 충분했던 것인가? 예수의 자기 오판으로 만들어낸 이 죽음을 믿는 기독인들의 신앙은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은 무가치한 것일 뿐 아니라 성경이 지지하지도 않는다. 예수의 죽음은 의도 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속의 개입이셨다. 여기에 대해서 H. C. 웨첸은 예수의 죽음은 역사속의 사건이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님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그를 죽이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강조한다.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의 과정이 성경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마26:54-56; 막14:48-49). F. F 부르스도 ‘다 이루었다!’(teleo의 완료형 수동태인 tetelestai)는 마지막 말을 하고 숨을 거둔 예수의 죽음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목적이 성취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목적을 이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예수의 죽음은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진행되었다. 예수의 탄생은 “이 모든 일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2-23)는 이사야의 예언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도 애굽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돌아온 동네가 나사렛이란 곳이었는데 이곳은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2:23)는 사실로 말해준다. 그러나 이 선지자들(복수로 사용됨)의 인용은 구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H. C. 웨첸은 이 유일한 성취 인용은 단지 사실을 의미하며 마태의 예수 생애의 또 다른 변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변칙이라는 웨첸의 주장은 설득력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책에서 “마태의 목적은 단지 자기 백성이 자신을 배척한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사렛 사람’이라고 표현 했다고 변칙의 이유를 주장하지만 모든 성경의 인용의 부정확성이 성경 저자들의 의도된 변칙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또한 구약에 나타나지 않은 본문을 마태에 의해서 부정확하게 인용되어진 것을 부정 혹은 왜곡하는 것은 성경의 의도를 간과하기 쉬우며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일관된 진술에 모순을 가져 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나사렛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명백하며 마태는 예언자의 말을 통해서 이주의 사건을 확증하였다. 또한 이 방랑의 생활(베들레헴-라마-이집트-나사렛)은 세상으로부터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를 받았다라는 에두아르드 슈바이처의 말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고난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알버트 슈바이쩌는 예수의 고난이 스스로 자초한 길이며 그 꿈은 백일몽이었다. 그래서 알버트 슈바이쩌의 말을 빌리자면 ”운명의 바퀴는 돌지 않았다. 예수는 그 바퀴위에 자신을 던졌지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을 뿐이다“고 주장 하면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적 성취를 무시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의 고난이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역사 속에서 진행된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입성은 그의 고난의 절정기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마태는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탔다는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고난의 입성이 성취를 위한 것임을 드러낸다(마21:4-5). 이 예언은 누구의 저지도 받지 않는다(21:6-7; 막11:1-6). 예수는 스스로 잡히시기 위하여 들어갔다. 복음서는 구약의 인용을 분명히 밝히지는 않지만 예수가 기록 된 대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마26:24; 막14:21; 눅22:22). F. F 부르스는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얻었다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요12:23)이며 이러한 표현은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요13:31의 영광을 얻으셨다는 edoxathe가 부정과거형으로 쓰여진 것이고 이 영광은 요17:4의 edoxasa의 부정과거형 능동태와 맥을 같이 함으로 인자 안에서(예수의 수난과 영광) 영광을 받으신다고 강조한다.
예수는 이 고난의 절정 앞에서 고난의 극치를 위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이것이 마치 운명 지워진 것처럼 하나님께 탄원한다. 복음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막14:36; 눅22:42)고 기도를 세 번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마26:44; 막14:41). 에두아르드 슈바이처는 예수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며 죽음에서 지켜주기를 간청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알버트 슈바이쩌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가 자신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 확연히 주장한 것은 묵과 해 버리고 다만 종말론적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결과 예수의 양쪽의 가르침의 균형을 잃고 일관성 없는 주장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의 잡히심까지도 성경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마26:54-56; 막14:48-49). 요한은 예수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계셔서 하는 일이라고 기록한다(요14:10). 이상에서와 같이 예수의 죽음으로 몰아낸 이 고난의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성취로서의 예수 고난과 그 죽음의 의미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2. 빌라도의 예수 재판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
1)정치적 상황
빌라도는 그 당시 유대의 최고 통치자로서의 아우구스투스의 황제를 이어 디베리우스 황제(주후14-37)의 명으로 그의 재위 10년 동안 유대 총독으로 통치하였다. 그 당시 로마의 휘하에서 로마인들에게 총애와 권력을 얻은 팔레스틴의 분봉왕은 헤롯 대왕이었다. 그는 정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미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길이 무엇인지 능통해 있었다. 적어도 그는 마크 안토니(Mark Antony)와 클레오파트라에게 바쳤던 충성을 아우구스투스에게로 충성하여 신망을 얻는데 성공하였고 로마정부의 고위 관리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 영리한 통치자이자 권력가이기도 했다.
헤롯1세의 통치는 헬라주의-로마적 기준에 의하면 전에 없었던 영광스러운 반면에 특히 유다 농민들에게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억압의 시대였다. 헤롯의 광대한 건축 계획과 낭비는 납세자인 백성들은 고혈을 모두 짜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의 통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자기 영토의 전역에서 평화와 질서를 유지 하였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 통치 중 주전 4년에 헤롯 대왕이 죽자 급기야 백성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헤롯이 죽자 민중적인 폭발이 모든 통치 영역에서 일어났다. 이에 로마는 질서를 무자비하게 잡았고 백성들의 반로마적 민중들의 분노는 커져갔다.
팔레스틴은 헤롯의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는데 아켈라우스(주전4-주후6)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를 다스렸으며 헤롯 안티파스(주전4-주후39)는 갈릴리와 동부 요르단에 있는 베뢰아를 그리고 필립푸스(주전4-주후39)북부 요르단 지역을 다스렸다. 이 세 아들(아켈라우스, 필립푸스, 안티파스)은 영토 분할에 대한 인준을 받기 위해 로마를 각각 다녀왔다.
매우 전제적이었고 포악한 통치를 했던 아켈라우스는 백성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억압받던 신하들은 아우구수투스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그들의 고통을 간절하게 호소했고 그는 받아들여 주후 6년 아켈라우스를 갈릴리로 추방시켰다. 아켈라우스가 다스리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는 이때부터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 총독은 가이사랴에 머물렀으며 유대인의 축제일에 예루살렘에 올라왔다. 로마는 유대사회의 종교적 공동체의 생활과 산헤드린의 활동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에 올 때에는 군기를 들고 오지 않았다. 최고의 법적 권력은 총독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의 유대 공동체와 관련된 사항만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사형 선고나 집행은 할 수 없었다(요18:31).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헤롯을 비롯한 로마 총독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지역 문제들에 대해서는 유대의 제사장과 산헤드린이 대게는 조정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예수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있었는데(눅3:1)그는 악명 높은 로마 총독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성에 가져오게 하여 유대인들로부터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훼손시키느니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감수한다고 저항하자 비로소 군기를 다시 가지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로마제국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유대 사회의 독특성을 고려하여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해 왔다. 제일 먼저 로마가 한 조치는 세제개혁이었다. 이것을 위해 주민들의 수효와 그들의 재산 상태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눅2:1-5). 세금 징수는 경제적인 빈곤을 초래했으며 하나님이 아닌 로마 황제에 대한 납세는 유대 사회에 있어서 세금 징수는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권이 박탈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인에 대한 혐오감은 커져 갔고 세리들까지도 경멸하게 되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에서 주전4-주후39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부왕만큼 난폭한 정치를 하지 않았으며 자기 형 아켈라우스보다도 사려 깊었지만 로마인에게는 노예처럼 아첨하였으며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포악한 폭군적인 통치자였다.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 근친상간을 범행했다. 책망하는 세례 요한을 목 베었던 장본인 이었다(마14:1-12). 예수는 이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라고 불렀으며(눅13:32)안티파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기적을 보고 싶어 만나고자 하였다. 주후 39년에 안티파스 역시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주후 37-주후 41)에게 파면되어 갈리아의 룩두눔으로 추방당했다.
필립푸스는 이복형제인 아켈라우스와 안티파스처럼 야심도 많지 않고 음모가도 아니었던 그는 안정을 누리며 자신의 정책을 따라서 평화롭게 통치하였다. 로마 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하게 했던 첫 번째 유대인 군주로서 제국의 주권자들에게 자신의 존경을 보여주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 하였다. 그가 다스리던 북부 요르단 지역에는 유대인이 소수였기 때문에 고려할 필요가 없이 초상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필립푸스는 주후 34년 후손 없이 죽었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정치적 갈등으로 로마는 로마대로, 헤롯가문은 헤롯가문대로 자기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격동의 시대였다. 이 역사의 수용돌이 속에서 예수는 그 한복판에서 홀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의 성취의 역사를 다 견디어야 했다. 그 긴 어두움의 터널은 강렬한 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2) 사회적 상황
1세기 팔레스틴의 전체 인구는 150만명 내지 2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중에 50만에서 60만명이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팔레스틴 남부 지역인 유대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 북부 갈릴리 지역에는 비유대인이 많이 있었으며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려졌다. 유대 지방은 땅이 건조하고 농업에 적절하지 않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J.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수공업이 발전하기에는 원료가 부족했으며 상업과 교역이 발전하기에도 그 위치가 나빴지만 수공업과 상업은 번창하였고 각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1년에 세 차례에 걸친 전 세게 유대인의 왕래와 관련되어 있었다. 팔레스틴 지역의 전통적인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갈릴리 지방은 땅이 비옥하였고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많은 농민들이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소작인이 아니면 일 삯 품꾼들이었다. 헤롯 왕가의 폭압적인 통치와 로마 제국의 착취는 당시 팔레스틴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었다. 로마가 유다 지방에 책정한 농지 증세액이 600달란트였으며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헤롯1세의 수입은 1,000달란트를 초과했다는 것은 민중들이 이중적인 수탁을 통해서 대부분 절대적인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의 근거가 된다. 당시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이었으며 1 데나리온은 한 가족의 하루 생활비였다. 팔레스틴은 과중한 조세 부담과 극심한 기근으로 심한 빈곤으로 고통을 겪었다. 특히 조세 징수의 무자비하고 약탈적이며 전면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가장비옥한 지역에서도 거의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도시 역시 마찬가지고 낮은 임금과 많은 실업의 상태가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노예로 사용할 수도 있는 상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과 빈곤을 못 이겨 촌락을 배회하는 도적 떼 집단에 참여하였으며 팔레스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 도적 떼는 주후 60-70년대에 비로소 가시화되는 젤롯당의 배경이 되는 무리였던 것이다.
백성들은 착취로 인한 고통과 기근 때문에 반사회적으로 변해 갔으며 지배체제에 항거하면서 반로마 민족 해방 혁명의 의지를 높여 나갔다. 예수 시대에 나타나는 지배 계급과 하층 계급 간의 갈등과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적 통치와 수탈에 대항하는 반로마적 운동은 1세기 팔레스틴 사회현상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내용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은 당연히 광범위한 대중적 용기를 유도할 수 밖에 없으며 모든 통치 영역에서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헤롯 1세의 죽음을 이은 민중 봉기와 주후 66-70년 반로마 항쟁은 1세기 팔레스틴의 사회,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관건이 되는 사건들이다.
3. 빌라도의 정치적 결단
정치인 빌라도 그는 로마의 통치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나는 비결을 잘 터득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예수의 재판을 집행하고 판결을 내려야만 했다. 거부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불운아였다. 왜냐하면 그의 부인은 상관하지 말라고 간청했고(마27:19) 성난 백성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피를 자신들에게 돌리라고 요청(마27:23, 25)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단 해야만 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마27:1). 이제 빌라도의 재판은 시작되었다. 요한은 다른복음서와 다르게 너희 법대로 재판 하라(요18:31)고 권유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법이 없다(요18:31)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에 대해서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8:32)고 진술한다. 이에 대해서 F. F. 부르스는 유대가 주후 6년에 로마의 한 지방이 된 이후로 유대인들에게도 사형 형벌이 있었지만 로마인들이 빼앗아갔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요한이 유대인들의 변명이 유대인들이 스스로 예수의 한 말을 이루기 위하여 한 것은 아니며 로마인들조차도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사형 제도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전체 상황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그러한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적 수용돌이에 개입하고 십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그들의 진술의 내용에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눅23:2)이라는 내용을 첨가하여 빌라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는 누구에 의해서도 저지될 수 없고 그 성취의 목표를 향해 시위에서 떠난 화살과 같다. 빌라도는 곧바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27:11; 막15:2; 눅23:3; 요18:33)고 묻는다. 예수는 “그 말은 네 말이다(συ λὲγείς)”로 응대한다. 만약에 εγο είμί로 대답 했다면 상황은 급진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대답은 빌라도에게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아무 죄를 찾지 못했다고 보고한다(눅23:4; 요18:38). R. J카시디는 예수의 대답은 애매모호했고 빌라도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도 없었으며, 이러란 예수의 반응에 빌라도의 결정은 여러 요인들을 놓고 저울질을 하기 위해 고민하지 할 필요도 없이 선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곧바로 유월절 특별사면 이야기로 전환되어 재판의 결말에 이르게 되지만 반면에 요한복음은 특별사면 이야기 후에 유대인들의 분노어린 고함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며 자기들이 죽여야 하는 정당성을 재 진술하고 있는(요19:7)긴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다. 여기에 대해서 F. F. 부르스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진술이 빌라도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규정상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이었다(요14:49). 로마의 영토에서는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어느 누구든지 가이사의 주권을 부인하는 자이기 때문에 내란을 교사의 혐의를 받게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기를 힘썼다(눅23:20;요19:12). 그는 자신이 황제로부터 받은 권세까지라도 동원해서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고소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고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를 놓으려는 그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빌라도는 정치적 결단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담대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친 빌라도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로마의 한 장군으로 정치적으로 유대의 총독으로 황제의 충신의 문제는 그가 예수를 재판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불길한 조짐을 감지하면서 예수에 대한 그의 마음은 결정되었고 선고가 내려져야 했고, 그 죄목은 내란교사죄의 선고가 내려져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이 뒤집어 씌운 죄목은 신성모독(불경)이 아니라 황제 반역죄인 날조된 정치적 죄목이었다. 빌라도는 자신의 손을 씻으며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하고자 한 것 같은 본문(27:24)에 대해서 H. C. 웨첸은 빌라도의 자신의 무죄를 유대적 예식으로 실행한 것이지만 사실 빌라도의 무죄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기꺼이 짊어지기 원하는 책임과 무죄한자의 를 피를 흘리게 한 유대인들에게 심판과 저주를 기꺼이 받으라는 데 초점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E. 슈바이처도 빌라도 자신의 부정당한 판결과 피정복민의 요구에 대한 무능력함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로마인의 죄를 경감하고 유대인의 죄를 가중시키는 행위라고 한다. 이러한 빌라도의 행동에 유대인들은 즉각적으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 지니라”(마27:25)고 대답한다. 빌라도는 이제 예수 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라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마27:26;막15:15; 눅23:25; 요19:16). I. 하워드 마샬은 빌라도가 결정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요구를 수락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군중들에게 호의 베푼 마가의 진술을 피했다고 기술한다. 또한 존 드레인은 이러한 빌라도의 판결은 유대인들의 폭동과 자기 상관들의 눈치와 무죄한자를 죽이는 죄책감에서 그의 마음을 좌우한 것은 유대인들이 일으킬 폭동이었다고 한다. 또한 군중들이 그에게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고 소리친 그 고함은 자신에게 불리한 보고로 로마에 전달되는 것을 염려했으며 그도 원하는바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J. 그닐카도 빌라도가 무리의 의사에 굴복하고 이 일을 결정 했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재판의 결단은 정치적 결단이었음이 명백하다. 이 결단은 본인이 원하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요19:11)라고 말 한 것처럼 빌라도의 재판이 하나님의 성취의 과정이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C. 결론
본 소고는 서론에서 밝혔듯이 빌라도의 재판 보도는 철저히 하나님의 구원사적 성취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서론에서는 빌라도 재판을 통한 예수의 죽음을 빌라도 재판 보도를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취의 측면이 현재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생존 할 수 있는가 하는 소고의 목적을 밝혔다. 본론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취의 과정과 그 과정이 정치, 사회적 갈등 속에서 유대 총독인 빌라도가 결단을 내리게 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빌라도의 재판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완성의 성취를 위한 완벽한 재판 기록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이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고자 하셨다.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을 면하게 하려고 시도 하였다. 그러나 성난 군중은 마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된 사신들 만큼이나 조직적으로 상황을 몰아갔다. 빌라도는 유대인들과의 정치적 갈등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자신도 바라지 않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것은 곧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도록 성난 군중들에게 내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성취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 속에 일어난 빌라도 재판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취의 이해는 현재를 살아가는 기독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 속에서 선한 계획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와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은 나누어 질 수 없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써 내려가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의 개입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우리는 이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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