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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주씨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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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스크랩 논개 자료 - 신안 주씨
joo6921 추천 0 조회 379 14.02.07 14: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안 주씨, 논개 자료.잡동사니 ( 學 )

2012/07/12 17:04

복사http://blog.naver.com/chohyuks/110142553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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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주씨

시 조 명 - 주 잠(朱潛 , 호 淸溪)

시 조 유 래
주잠은 원래 송나라 신안현 사람으로 성리학을 대성한 남송의 대유학자 주문공(朱文公) , 주 자(朱子 : 본명은 희(熹), 성리학을 대성한 남송의 유학자)의 증손이다.
그는 당시 북쪽의 몽고족이 세력을 떨치며 송나라에 자주 침입해 왔으나 무능한 조정 대신들은 뚜렷한 대책도 없이 화의에만 급급하자 아들 여경(餘慶)을 데리고 섭공제(葉公濟) 조창(趙昶) 진조순(陳祖舜) 등과 함께 고려 고종 때에 들어와서 금성(錦城)나주(羅州)에 자리잡고 살았다고「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다

본관:창성유래
시조 주 잠이 중국 송나라로부터 동래하여 나주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그를 동래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후에 원나라에서 송의 유민을 압송하려 했을 때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성 고정리(考亭里)에 은거하였다가 여러 곳으로 이거하여 지명에 따라 따로 본관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新安) -나주(羅州) - 능성(綾城) 등 45개 파로 갈리었다.

지 명 유 래
중국 중앙부, 양자강 하류 및 회하 유역의 안휘성 휘주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논개

『WIN』 역사인물탐구팀은 「논개묘」를 찾아 26번 국도를 통해 육십령 (해발 1,264m)을 넘어 함양군 서상면으로 진입했다. 육십령은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道界)인데 옛날엔 도적과 맹수가 많아 최소한 60명이 작당해야만 넘을 수 있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험한 고개다.
서상면의 면소재지인 대남리에 이르면 「논개묘」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1km쯤 들어가면 금당리 방지마을이 있고 마을 입구의 산 중턱에 논개묘가 자리잡고 있다. 논개 묘의 상석(床石)에는 「유인(孺人)신안주씨논개지묘」라고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쪽 묘소의 상석에는 「충의공 증(贈)좌찬성 행(行)경상우병사 해주최씨 경회(慶會)지묘」라고 쓰여 있다. 이 묘역은 4백년간 방치되어 왔다가 1987년 함양군 그리고 신안주씨·해주최씨 문중에 의해 확장·단장되었다.



그러면 장수사람인 논개와 화순사람인 최경회가 왜 함양땅에 묻혀 있을까? 『진주성에서 패전하고 흩어졌던 전라도 출신 의병들이 진양(晉陽)벌의 지수(智水)목 남강 하류에서 논개와 최경회의 시신을 수습했답디다.
의병들은 한여름 2백20리 길을 왜병을 피해 가며 두 시신을 운구하여 논개의 고향 가는 길목이며 의병들의 창의지인 덕유산의 자락인 이곳에 묻었대요. 논개부인은 기생으로 오해를 받아 그 시신이 고향에 못 갔다고 합디다』 논개의 후손으로서 방지마을에 사는 주규상씨(68세)의 말이다.
주규상씨에 따르면 방지마을은 원래 신안주씨의 집성촌으로 그의 15대조이며 논개의 조부인 주용일도 장수로 이주하기 전에는 방지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면 방지마을 신안주씨들은 「논개」를 어떻게 대접했을까? 『기생이라고 하는 바람에 조상의 얼굴에 먹칠했다고 묘소를 돌보지 않았는데 1958년 장수사람 20여명이 찾아와 제사를 올린 이후 방지마을에서도 벌초도 하고 관심도 기울여 왔습니다』
방지마을의 논개묘는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채 근 4백년간 방치된 까닭에 오늘날 「전(傳)논개묘」의 취급을 받고 있다. 최근 논개묘로 고증해 달라는 함양군의 요청을 받은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는 논개묘가 방지마을에 있다는 구전이 있고 신안주씨와 해주최씨 문중에서 「논개묘」로 인정하고 있는 만큼 이를 뒤집을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부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면 논개의 시가쪽인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논개를 어떻게 인식해 왔을까? 『WIN』 역사인물탐구팀은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최경회의 고향인 화순으로 진입하여 우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재양(崔在襄)씨를 만났다. 해주최씨인 그는 『해주최씨세보』 그리고 『일휴당실기』 『최씨육의록』(崔氏六義錄)의 영인본 등 최경회 관련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해주최씨세보』 최경회 조(條)를 보니까 그의 첫부인 나주김씨와 재취 부인 여흥민씨는 모두 조정으로부터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칭호를 받았다. 정경부인이라면 종1품 문·무관의 정실부인에게 내리던 봉작이다. 정실부인 둘에 이어 「의암부인 신안주씨」는 「부실」(副室)로 기록되어 있다.

「의암부인 신안주씨」가 해주최씨의 족보에 오른 시기는 1975년부터였다. 그 당시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의암부인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거쳐 다수의견에 따라 족보에 올렸다고 한다. 논개가 최경회의 측실이라는 사실은 1905년 송병선이 지은 『동감강목』(東鑑綱目)에서도 이미 「慶會妾 論介 誘倭將 游南江中巖石上 抱倭將墮水而死」(경회의 첩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여…)라는 기록이 있는 만큼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개가 기생이었다」는 오해로 인한 물의는 최근에도 빚어졌다. 예컨대 최근 모 공영TV방송의 프로그램 『역사추리』에서 논개를 황진이와 같은 기생으로 설정했다고 해서 신안주씨 문중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번 논개 사적 답사에서 『WIN』 역사인물탐구팀은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지금도 논개는 사실(史實)과 전설(傳說)의 혼돈 중에 휩싸여 있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얘기가 있기는 하지만 정확한 고증이나 답사가 없는 기록은 역사를 왜곡할 우려가 짙다. 논개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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