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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명의가 될 걸세”
나는 충남 태안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해가 해방이 되던 해였다. 모두 어려운 시절이라 배우는 것보다는 먹고 사는 일이 더 급급할 때였다. 집집마다 집안일을 시키려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이상 학교를 보낼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형님은 배워야 한다며 나를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었다.
졸업 후 군대를 갔다가 제대하자 형님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대일본 수산물 무역을 배우게 했다. 그러다가 인천에 사는 형님의 친구에게 수산물 거래사업을 좀 가르치라며 나를 맡겼다. 내가 ‘인천 형님’이라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이다.
어려서 내 꿈은 항해사가 되어 바다를 누비는 ‘바다의 사나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해양고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하고 형님과 함께 수출하는 일에 매달리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70년대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만 국가시책으로 모두가 달러를 벌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낼 때여서 파출소에서 도장을 받으면 수출업 하는 사람들은 통행금지 시간에도 다닐 수 있었다. 나도 수출을 위해 파출소에서 손목에 도장을 받아가며 불철주야 일을 했다.
그런데 인천에 머물게 되면서 큰 형님이 소개해 준 인천 형님은 나를 끔찍이도 챙겨주셨다. 인천형님은 대뜸 나에게 침을 배우라고 했다. 학벌도 아깝고 자유분방한 내 성격을 아니까 침을 배우면 차분해진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때 내 나이가 마흔이 넘어섰을 때다. “이 나이에 뭘 배우냐!”며 안 배우겠다고 고집을 피웠더니 벌써 수강료 30만원을 침 선생님에게 드렸다며 단단히 엄포를 놓으셨다. 그때 돈으로 30만원이면 큰 돈 이었다. 30대 중반에 잠깐 수지침을 배운 적이 있긴 하지만 내가 침을 배워 뭐에 쓰나 싶어 안 배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인천 형님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니 성질 더러우니까 이거라도 배워 마음 잡아!" 하면서 배우라 했다. 결국 형님에게 억지로 코가 끼어 침뜸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온 우주만물이 도와주셔서 평생을 잘 살았습니다. 나를 아시는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원만 성취하시길 바라며 두 손 모아 경배합니다."
인천 형님의 손에 이끌려 침뜸공부를 하려고 갔더니 나 말고 9명이 더 와 있었다. 2명만 여자고 나머지는 다 남자였는데 거기서도 내가 제일 막내였다. 그렇게 한 팀이 되어 침을 배우게 되었다.
스승은 최형배라는 분이었다. 최형배 선생님은 황해도 안악 출신인데 일본 와세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로 전쟁 때 월남을 하신 분이었다.
그때는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배웠는데 나중에 인천 형님에게 물어 보니 그제야 선생님에 대해 알려 주었다. 지난 2009년에는 최 선생님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서 인천으로 가 사모님을 뵈었다.
최 선생님은 일본에서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그는 한 때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 씨가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운영한 무료진료병원인 새마음병원에 재직한 적도 있었다. 사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새마음병원 제7내과에 최형배 과장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었다."며 "병원에서도 침시술을 했다."고 전했다. 사모님은 최 선생님이 직접 필사하신 침구술 노트와 침 쌈지를 보여 주셨다.
최 선생님은 현대의학을 전공한 의사였지만, 침뜸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따로 사람을 불러 침 공부를 할 만큼 침구학에 관심이 높았다.
최 선생님은 따로 침을 가르치고 제자를 두고 그러지 않는 분이었다. 최 선생님의 사모님이 인천 형님과 동향(同鄕)이라 침을 가르쳐 달라고 인천 형님이 따로 부탁을 했다. 그러자 최 선생님이 사람을 모으면 가르쳐 준다고 해서 10명을 모은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그에게서 침을 배운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가 됐다. 그분은 돈에 별 욕심이 없고 오로지 사람 살리는 의술에만 관심이 있으신 분이었다.
최 선생님은 아주 야무진 분이었다. 수업시간엔 인체도를 직접 그려 와서 아주 세세하게 혈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맥 짚는 법도 보여주면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수업을 했다. 6개월을 거의 매일 만나 공부하고 실습을 하였다. 교재는 당시 한국침술연합회 회장이었던 이우관 선생이 펴낸 『전통침구학』이었다. 우리는 경혈자리를 배우고 나서는 서로의 몸에서 혈자리를 확인하고 바로 침을 꽂아 보았다. 다음날은 배운 내용으로 혈자리에 대해 토론도 했다. 짧은 시간에 배워야 하니 이론과 실습을 그날그날 함께 했던 것이다.
내가 잘 따라 배웠는지 최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에게 “손병덕 처럼 메모를 하라”고 하면서 나름 나를 칭찬하고 아끼셨다. 최 선생님은 은침을 가지고 다니셨는데 꽤 두꺼워 보였다. 처음 침을 배우는 나는 그 침이 왠지 좋아 보였다.
그렇게 최 선생님 밑에서 6개월을 배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제대로 배웠던 것 같다. 아직도 그 때 공부하던 책을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보게 된다.
정신없이 지내던 시절엔 기억도 안 나더니 요즘 그 선생님 얼굴도 뚜렷해지고 말씀들이 하나씩 기억이 난다. 내가 이리 침을 놓게 되리라는 걸 이미 아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009년 여름에 인천 형님과 함께 최 선생님의 부인을 찾아뵈었더니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살아 계셨으면 아마 90세도 넘었을 것이다.
한창 침을 배우고 있던 어느 날, 인천 형님 댁에 갔을 때 형수님이 뒷목이 뻣뻣하다며 침을 놔보라 했는데 그땐 어찌나 떨리고 땀도 나던지 겨우 놔드린 적이 있었다.
공부를 마칠 때 쯤 여름에는 큰 형님이 살고 계시는 고향 시골에 일주일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거기에 누님이 와 계셨는데 왼쪽 팔을 못 들어 올린다고 자형이 밥상을 다 들고 다니고 설거지를 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침을 놓아드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누님이 "니가 무슨 침을 놓냐, 돌팔이 같은 소리 마라"며 약을 올리고 핀잔을 줬다. 그러면서도 동생이니까 한번 놔보라고 했다. 침을 놓고 한참 뒀다가 침을 뽑았다. 그러자 누님이 "어! 팔이 올라가네"라며 아픈 것도 없어졌다고 좋아했다.
누님은 "돌팔이가 팔 고쳤다"라며 놀리면서도 나에게 "침 잘 배웠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시골이니까 소문이 금세 났다. 머리 아프다고 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와서 침을 놨더니 또 나았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너도 나도 침을 맞겠다며 몰려들었다. 더럭 겁이 났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며칠 그렇게 침을 놓다가 그냥 냅다 도망을 쳤다. 그러고 얼마 뒤에 러시아에 왔다.
새 삶의 터전이 된 사할린
사할린은 새로운 삶을 살며 도전의 기회를 준 곳이다. 사업을 하며 방랑을 하던 내게 터전을 만들어 정착하게 해주었고, 침뜸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기회를 준 땅이다. 겨울이 길고 낭만적인 자연환경 탓에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한 때 맹목적으로 돈만 쫓던 부담감도 사라졌다.
러시아에 와서 집사람도 만났다. 아프다고 찾아와 치료해 드린 동포 한 분이 딸을 소개하여 그 인연으로 함께 살게 되었다. 내가 침뜸을 하면서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집사람의 내조 덕이다. 러시아 말을 몰라 대화도 안 되는 나였는데 집사람이 오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역도 해주고 힘들 때 마음의 위로도 많이 해주었다. 집으로 농장으로 사람들이 그리 찾아오면 귀찮고 짜증도 날 터인데 군소리 없이 오는 사람들을 다 받아주고 밥도 해먹여주며 내조를 했다. 집사람은 내가 침뜸으로 환자를 고치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단다.
사할린은 러시아 동쪽 끝에 있는 긴 섬인데 남북의 길이만 900km에 달한다. 넓이는 우리나라의 면적보다는 작고 전체 인구가 60여 만 명밖에 안 된다. 기름진 땅이 많아 농사를 지으면 잘 되지만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 놀리는 땅이 널려 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사람들이 섬의 반을 차지하여 석탄, 목재, 수산물을 많이 가져갔다고 하는데 요즘도 석유와 가스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일제시대에 조선 사람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고국으로 가지 못하고 사할린에 정착하였는데 지금은 2만5천여 명 정도 남아 있다.
‘까레이스키’라 부르는 조선족은 사할린에 사는 소수민족 중에 제일 많다. 고난의 땅에서 와서 한 많은 삶들을 이어 갔지만 우리 교포들은 러시아인들과 잘 지내고 성실해서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한국의 음식은 인기가 많다. 김치와 찌개, 비빔밥, 김밥 심지어 젓갈 같은 음식까지 러시아인들에게 매력적이고 친숙한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김치는 러시아인들도 직접 겨울에 김장을 담가 먹을 정도로 집집마다 챙기는 음식이 되어 버렸다. 까레이스키들은 사할린 사람들의 식탁과 입맛 까지 바꾸어 놓을 만큼 사람들과 친화력이 있었다.
러시아와 수교를 맺고 한국에도 자유스럽게 왕래가 가능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도 일 년에 몇 번씩 한국에 가곤 해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다. 치열하고 바쁘게 사는 한국의 도시 사람들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여유롭다. 그런 점들 때문에 나도 돈이나 명예보다는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어울리는 삶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사할린의 겨울은 10월 중순부터 4월까지 이어진다. 겨울이 길 뿐만 아니라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와서 늘 눈에 쌓여 있고, 추워서 다른 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시베리아 풍설이라고 부르는 눈보라가 몰아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세찬 바람에 날리는 눈만이 시야에 부딪친다. 눈이 많이 올 때는 한 번에 사람 키를 넘기기도 한다.
사할린의 집들은 모두 북쪽 방향에 문이 있다. 시베리아 풍설이 북쪽에서 불어치면 건물 북쪽은 눈이 날리지만 남쪽으로는 눈이 높이 쌓인다. 그래서 남쪽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집이며 아파트, 사무실 건물, 학교가 다 북쪽으로 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사할린의 긴 겨울은 춥고 눈이 많아 어디 돌아다니기도 힘들어 내내 집에서 지낼 때가 많다.
러시아에서 유명한 음악가, 소설가, 과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아마 한가롭고 낭만적인 겨울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할린의 겨울은 인생을 돌아보며 긴 시간 명상을 할 수도 있고,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계절인 것 같다. 그런 겨울 덕에 나도 공부도 하고 명상도 하며 나를 돌아보며 지내게 되었다.
하얀 겨울 침뜸공부 속으로
사할린은 한국과는 좀 달라서 면허 없이 침을 놓는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병원에서 침뜸의 효과를 인정하고 치료가 힘든 환자를 보내기도 했다. 환자의 입장에서 아픈 걸 고치는 게 면허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단 서로 믿고, 믿는 만큼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나도 조금씩 침뜸치료에 자신감을 갖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사람을 고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치료를 할 수는 없어 책을 옆에 끼고 시간 날 때마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침뜸을 많이 하던 처음 3년 동안은 12월부터 3월까지 정말 매일 같이 공부만 했다. 사할린의 겨울은 길고 추운데다 눈도 엄청 많이 와 밖에 나가기가 어려워 집에서 공부하기에 딱 좋았다. 침구공부를 무슨 고시공부를 하듯이 했다. 학창시절 그렇게 온 정신과 정열로 공부를 했으면 분명히 뭐가 되었을 것인데 이리 뒤늦게 법석을 떨고 있었다.
침이란 게 많이 하면 할수록 무조건 느는 것 같다. 그렇게 매일 수십 명씩 침뜸치료를 하고 공부를 하는데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배운 것을 잊어버려서 환자에게 바로 침구시술을 할 수가 없을 때도 많았다. 혈자리를 잘 찾지 못할 때는 미안하지만 내일 다시 오라 하고는 한국에서 가져 간 침구 관련 책들을 뒤져보며 증상과 혈자리 등을 밤새 공부해서 다음 날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그 사람들이 ‘돌팔이’라거나 ‘못 믿겠다’고 했으면 더 이상 침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할린 사람들은 나에게 자신의 몸을 맡겼고, 나도 부족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연구를 하여 치료를 해주었다.
짧은 기간 배운 것이었지만 침뜸공부를 한 것이 임상에서 큰 도움이 되었고 또 부족한 것은 더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하여 채워 나갔다.
처음 일 년은 정말 매일 밤 잠 자는 시간을 쪼개 공부를 했다. 인체그림을 그려 놓고 밤새 혈자리를 찾아 표시를 한 후에 다음에 오면 그림을 옆에 놓고 보면서 침을 놓기도 했다. 치료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증상별로 좋은 혈자리를 표로 만들어 외우고 다녔다. 그렇게 공부하며 3년을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침뜸치료를 하다보니 반(半) 의사가 되어 버렸다.
사할린은 면허증을 묻지 않았다
한국에서 나처럼 면허도 없이 침뜸을 했다면 여러 번 감옥에 갔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러시아는 사정이 좀 다르다. 침뜸에 대해서 들어는 봤지만 대부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한 사람들이고 막연하게 신비한 동양의술로만 알고 있다.
러시아 의사들 중에는 침뜸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실제로 침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 의료체계는 서양의학 중심인데 환자를 고치는 데 필요하다면 다양한 치료방법을 허용한다. 당연히 법으로 침뜸행위를 규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환자가 원하고 의사가 허락하면 언제든지 직접 병원에 가서 침뜸시술을 할 수 있다. 내가 환자의 요청으로 병원에 불려가 침뜸시술을 할 때면 그 병원의 원장과 간호사들이 모두 나와 보기도 했다. 면허가 없는 돌팔이란 선입견이 없이 매우 진지하고 신기하게 나의 침뜸시술 모습을 관찰하곤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환자들 중에 자신도 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병원에 들어가 떳떳하게 침뜸을 할 수 있는 병원이 과연 있는가?
사람을 고치고 아픈 환자에게 고통을 덜게 하려는 것이 의술인데 현대의학이니 민간의술이니 구지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러시아는 그렇지 않다. 미국도 그렇고 독일도 그렇고 현대의학에서 힘든 부분을 침뜸으로 보완하려고 많은 연구와 노력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는 동생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엉덩이뼈가 부러져 병원에 누워 꼼짝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어찌 해야 할지 봐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병원에서는 노인네라 금이 간 엉덩이뼈가 붙지 않고, 수술을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 허락만 하면 내가 병원에 직접 가서 침뜸을 해 보겠다고 했더니 와서 치료를 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병원에 갔더니 다친 할머니가 통 꼼짝도 못하고 계셨다.
금이 간 부위를 중심으로 침과 뜸을 10일 정도 하니까 어혈이 풀리고 금 간 곳이 잘 붙었다. 20일 후 퇴원하여 집에 계시다고 해서 갔더니 내손을 잡고 “아제 때문에 걷게 되었고 살았다”고 눈물을 흘리고 고마워했던 일이 있다.
침을 놓으면 혈액 순환이 잘 되어 부러지거나 금이 간 뼈에서 액이 나와 잘 붙는다. 그런데 할머니는 아무래도 연세가 있어 오래 걸리는 게 사실이다. 몇 번을 치료하여 다행히 할머니는 걷게 되었다. 병원에서도 아주 신기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사할린은 환자가 원하고 병원장이 허락하면 침을 놓을 수 있다. 죽고 사는 건 환자의 몫인데 환자가 원하는 치료 방법이 있다면 해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침뜸을 해서 죽은 사람은 없다. 후유증도 침뜸이 제일 적다. 러시아 사람들은 우리 침뜸에 대해 신비롭고 확실히 치료가 잘 된다고 생각하여 상당히 우호적이다.
스탈린시대 중국의 모택동 주석과 중의학 교류를 한 적이 있어 러시아에서도 의사들이 침술학을 한동안 많이 배웠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침은 굵어서 환자들이 아파하고, 의사들도 선호하지 않는 모양이다. 더러 중국인들이 러시아에 와서 침을 놓기도 하지만 환자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러시아에도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 민간요법이나 약초들이 있다. 특히 러시아 사람들은 수술해야 하는 병을 제외하고 병원에 크게 의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사할린에서는 침뜸이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있어 침뜸치료를 좋아한다.
러시아에서 한국 침뜸을 알리고 펼쳐 아픈 이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좋겠다. 러시아나 한국이나 어디든 인간이 아프지 않도록 하면서 살면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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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러시아는 아직도 가능하군요.. 저도 기회가 되면 방문하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