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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어난 거에 대해서 머리 쓴다고 뭐가 좋아지나?
질문자1: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구요.
상황을 좋게 만들기 위해 머리를 쓴다구?
질문자1: 네, 그렇게 해서 상황이 좋아졌던 경험도 저한테는 꽤 있었을 거구요.
아니, 어떤 일을 하기위해서는 머리도 써야 되잖아. 그거 아니고?
질문자1: 이미 어떤 일이 딱 일어났는데, 이걸 갖다가 좋게 해결을 하기위해서.
아~~
질문자1: 그런 거는 상당히 많이 쓰죠.
그걸 어떻게 무마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도 해보고 저런 말도 해보고.
질문자1: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말하자면 플랜을 짜는 거죠.
내가 이 말 했을 때 저 사람이 이렇게 말이 나오면 저렇게 하고?
질문자1: 그런 것도 있구요. 그것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상담 같은 거를 하다보면
내담자가 이렇게 하면 그 횟수가 딱 끝나면 이 사람이 상담자가 플랜이 있잖아요.
다음 차수에는 어떤 식으로 이걸 이끌어 가야겠다 이런 것들이 있잖아요.
이제는 어차피 저는 상담자도 아니고요,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금 해석하고 그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옮기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그게 항상 그랬었다는 얘기죠?
질문자1: 그렇죠. 그거는 계속 하고 있었죠.
그것은 어떻게 해야 되기 때문에 한 게 아니고. 왜 이런 거잖아.
일어났을 때 이거를 다른 쪽으로 바꿔봐. 이런 식으로 어떤 미션이 있다.
그러니까 이게 뭐가 앞뒤가 안 맞는 거야.
백지 상태로 만나야 돼.
백지상태로 만나면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그냥 그대로 들려. 뭘 원하는지가 그대로 들려.
왜냐하면 그게 아니고, 내가 말하는 게 그 사람한테 그대로 맞게 돼. 백지상태면.
그런데 내가 이 사람을 이미 다 알고 있어.
이 사람은 분명히 이런 사람이고 난 분명히 이렇게 얘기를 하는 큰 아웃트라인이 있어.
그런데 이 사람이 와서 이런 얘기를 했어. 그러면 모든 거는 이 아웃트라인 안에 집어넣어.
그러면 이 사람하고 안 맞는 거야. 하나도 안 맞는 거야.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끝. 이 사람하고 전혀 안 맞는 거예요.
이 사람은 변할 수가 없지. 이 사람이 감동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때 그 때 밖에 없어.
내가 만약에 오늘 왔는데,
‘나는 이런 얘기를 이만큼 해야지. 그래서 이거를 막 깨우치게 해줘야지.’ 이러고 딱 왔어.
그래서 그 얘기를 계속 했어. 하나도 감응 없어, 그냥.
그냥 이런 얘기를 하니까 이런 얘기가 나와. 그래야지 이게 100%예요.
내가 뭔가를 하겠다고 자식도 똑같애.
나는 오늘 이 얘기를 해줘야지. 하고 만났어. 옆으로도 안 들어가.
내 얘기만 하는 거야. 그거는 나를 얘기하는 거야. 내 생각을 얘기하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거 그냥 하는 거뿐이기 때문에
그건 상담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애요.
사는 방법이 생각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생각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정말로.
그래서 지식으로 살지 않고 지혜로 산다는 게 바로 그거예요.
앎에 머물러서 그것을 계속 얘기하면서 사는 게 아니고,
그냥 그 때 그 때의 일어나는 상황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일어남,
백지상태면 그게 일어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완전 무방비상태에서 만나는 게 훨씬 감흥이에요.
그러니까 왜 사람이 변화를 받고 하냐면 아무 사심이 없기 때문에 그래.
내가 사심을 갖고 그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은 안 변해.
그 사람도 또 다른 사심을 갖게 되는 거지.
그런데 그런 게 없을 때 그냥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만약에 상담을 한다면 상담도 그렇게 해.
내가 옛날에 부산에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이런 모임이 하나 있었는데, 학교선생님이었어.
그 사람이 요새 학생들이 너무 많은 나쁜 말들을 쏟아내는,
자기한테는 아니지만 욕설, 막 이런 것들 요새 애들 평상시에 얘기하고 이런 것들에
자기는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아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때 나는 그냥 이런 얘기를 하고 저런 얘기를 했는데,
이 사람이 하는 얘기가 ‘상처의 못들이 다 사라졌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그 얘기를 들어주고
그냥 그 얘기에 대해서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다른 얘기도 했겠지.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지.
그거는 아무 ‘나라는 어떤, 내가 어떤 사람이다. 내가 어떤 얘기를 해줘야지.
내가 어떻게 해줘야지.’ 이런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어떠한 교감이라면 교감인 거예요.
그 때 그 사람이 이렇게 얘기를 했잖아.
내가 진심으로 던지니까 아무, 왜 그렇게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그 당시에 그런 얘기가 나왔어.
그 사람은 ‘진심으로 난 혼자 있고 싶어’ 얘기를 했다, 끝.
그냥 그러한 들음은 있었잖아, 그지?
그럼 그 사람은 그 다음에 와서 생각이 또 바뀔 수가 있죠.
‘그 때는 혼자 있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러면 나는 또 벙 찌는 거지,
왜? ‘혼자 있고 싶다’에 모든 플랜을 짜놨는데,
그런데 너 왜 지금 이래? 이렇게 되는 거지. 그거는 진정한 주고받음이 아닌 거지.
없어야 되는 거야. 들음은 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또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모르고,
그 때 또 이 상황이 어떨지 모르고, 그러니까 ‘그러한 자’라는 것에 대한 게 없어야 돼요.
‘자’라는 게 없어야 돼.
내가 상담을 해준 사람, 내가 훈계를 해서 얘를 고쳐야 되는 어떤 자, 이런 게 없어야 돼. 그냥 상황만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준비는 뭐가 준비냐면 깨어있는 게 준비야.
여기에서 상에 매이지 않고 있는 게 준비에요. 우리가 다른 준비가 필요 없어.
우리가 도를 얘기할 때는.
지식을 얘기를 하고 뭔가 세상적인 지식을 얘기할 때는 준비를 해야 되겠지.
공부를 해야 되지만 그게 아니잖아. 그럴 때는 플랜이 필요가 없어요.
다만 어떤 뭔가 기록을 하고 싶을 때
그냥 어떤 생각, 느낌, 문득문득 기록할 수 있지만, 그것도 그냥 기록일 뿐이지,
그게 하나의 플랜이 되는 건 아니에요.
‘아,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이 문득 일어났어.
생각이 일어나는 그것뿐이지.
거기에 대해서 ‘이 친구는 이렇게 생각했으니까 다음에 만나서는 이런 얘기를 해줘야지.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변화가 될 거야.’ 말짱 도루묵이야.
그렇게 되는 거 하나도 없고. 그러면 서로 힘든 거지.
내 맘대로 안 돼서 힘들고,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해서 힘들고, 서로 그렇게 되겠지.
그러니까 어디를 가려면, 몇 시에 기차를 타고 몇 시에 뭐를 하고 이런 계획은 짜지.
그렇지만 그건 계획이잖아.
그 사람을 언제 만나고 이런 계획은 짤 수 있지만,
어떻게 얘기를 하고 이런 아우트라인을 짠다는 거는 좀 다른 얘기지.
질문자1: 전혀 플랜이 없으시네요.
물리적인 플랜 말고, 내가 뭔가를 어떻게 하겠다 하는 그런 게 전혀 없으신 거네요.
그렇지. 그냥 그 상황에 해야 될 일만 하는 거지.
그냥 지금 이 순간에 해야 될 일이 생각 날 거잖아. 그러면 그걸 하는 거지.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렇게 안 되잖아.
그러니까 불편한 거야.
질문자2: 그런데 일어나기는 일어나세요?
이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일어나시는지 .
글쎄.
질문자1: 그런 생각도 안 일어나실 거 같애. 매순간이니까.
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도 없구나.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그런 생각이 일어날 수 있을 수는 있지, 뭐. 우리 애가 만약에 ...
질문자2: 시험을 본다, 그러면 잘 봤으면 좋겠다.
질문자1: 그 정도. 시험을 봤으니까 어떻게든 되겠네.
그런데 그런 것도 별로 없어. 되면 기쁜 거지.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거지.
편안했으면 좋겠다 는 마음은 들어. 지금 이 순간. 그런 생각은 들어.
걔가 시험을 칠 때 편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은 들지만,
결과적으로 그거야 모르는 거니까. 그런 생각은 없는 거 같애.
그냥 그런 느낌들은 있겠지만, 그런 거는.
질문자2: 내 딸이 됐으면 좋겠다 하면 그것도 하나의 바람인데.
그러니까 모든 불편함은 어떤 원하는 데서 오잖아.
그랬으면 좋겠다는 게 있으면 그렇지 않음이 생기면 불편한 거고,
그냥 ‘생각’ 이러고 끝나면 또 괜찮은 거고 그렇지.
뭔가를 해야 된다, 아니면 그한테 뭔가를 남겨야 된다,
뭔가를 해줘야 된다, 이런 게 없어.
그런데 뭔가를 해주기위해서 만나더라고.
뭔가 해줄 일이 있으니까 만나자고 그러더라고.
줄 게 있고, 해줄 말이 있고, 뭔가 그랬을 때 만나자고 그러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애.
늘 뭔가를 바래서 만나면 다 어긋나. 그럼 나중에 원망만 남아.
그래서 결국은 끝이 안 좋은 거지.
우리가 자식도 그렇고, 부모도 그렇고,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 계속 뭔가를 원하고 있어.
그래서 계속 만나면 싸워. 계속 불편해.
그리고 뭔가를 하면 그냥 함이 끝이야.
거기에 군더더기가 없어, 그러니까 꼬리가 없어.
나랑 같이 생활하는 빌리지의 국장은 이제 알아.
내가 얘기해놓고 기억을 못한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뭔가 잡지 않으면 구태여 다시 기억하고 이럴 필요가 전혀 없어지니까.
얘기해주면 기억나는 거고.
왜냐하면 순간 사건들이 일어나고 일들이 있으니까.
질문자3: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거는 그걸 잡고 있다는 거죠?
잡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나라고 지칭할 것이 정말 없는 거야.
그러면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지.
그런데 뭔가를 계획하고 있고 뭔가를 하고 있으면 나라는 게 탁 만들어지잖아.
그러면 계속 튕기지. 맘에 들면 받아들였다가 아니면..., 계속 이런 상황이 되지.
그러면 이 상황이 불편한 거지.
그러니까 매순간 계획하고 매순간 원하고 매순간 재고 판단하고
그렇게 나름대로 자기 잣대로 다 해석하고,
이런 사람하고 만약에 내가 계속 만났다 그러면 이 사람은 진짜 불편할 거야.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
한결같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여튼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질문자3: 생각 없이 사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까요?
앞뒤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고,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하여튼 여러 가지 자기 나름대로 잣대를 갖고 원하는 상을 갖고
나를 계속 본다면 그건 아닌 것 같애.
그런데 그렇게 대부분 살고 있잖아.
정형화된 기준에 나도 맞추고, 너도 맞춰서
그것에 모든 것들을 잣대를 나, 너에 다 하는 거지.
거기에 어긋나면 틀린 게 되고, 거기에 잘못되면 잘못하는 사람이 되고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런 게 없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정형화 되어있지 않은 거야.
질문자1: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 틀린 건 없는 거예요. 그죠? 다 다른 거지.
그치.
질문자1: ‘틀리다’라는 게 인간들의 정형화된 거에서 못 미치고 미치고의 개념이잖아요.
그 개념도 그 기준도 다 다르잖아, 사실은. 그러니까 틀린 게 없는 거야.
불편함이 일어나는 거는
스스로 정형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불편함이 일어나는 거지.
누가 불편함을 주는 게 아니에요.
옳고 그름이 있고, 좋고 싫음이 있고 그게 계속 있다는 거지. 그냥 다른 거지.
어떤 하나를 갖고도 다 다르잖아.
생각하는 거, 기록하는 거, 말하는 거, 하나를 놓고 다 다르잖아.
그런데 ‘이게 맞다’고 고집하는 순간,
‘내 말이 맞다’고 고집하는 순간, 얘는 다 틀린 게 되는 거지.
그러면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나에 맞추어서 이거를 ‘내가 맞다’는 것에 오케이를 하기를 원하면,
계속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려는 거잖아. 이해를 시키고 계속.
그래서 이해해서 ‘내가 맞다’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고집 피우고 ‘지가 맞다’고 우기고, 아니면 내 말 안 듣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뭔가 융통성 없는 사람이고, 고집 센 사람이고, 아상이 강한 사람이고.
나하고 탁 마주치는 사람인 것 같으면 아상이 강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이게 내가 옳다, 내가 맞다, 내가 아니다, 거기에 잡혀 있는 거지.
‘내가 없음을 나는 안다’ 이렇게 되는 거지. 골치 아프다, 정말.
내가 없음을 나는 안다.
그러니까 이게 어느 순간 그렇게 갖다 붙는다니까.
의식이라는 게 그게 ‘그냥 그렇구나’ 라고 끝이 안 나고
어느 순간 그게 아는 자가 돼버린다는 거지, 자꾸.
주장을 하게 되고 얘기를 하다 보면 또 ‘아는 자’가 돼버리고, 또 그렇게 돼버리고.
그러다가 그게 순간순간으로 끝나면 되는데, 계속 그걸 갖고 가는 거지.
중도, 도를 듣고 아주 편안해졌는데 어느 순간 불편해졌어.
그러면 결국은 중도 앎을 들고 있는 거야.
뭔가를 잡고 있으면 또 다시 불편해지지.
그러니까 누군가를 변화시킨다는 게 사실은 참 오산이야. 그냥 들어줄 뿐이야.
들리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얘기해주고 이럴 뿐이지,
나머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지.
‘변화됐다’라는 거는 변화된 척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 가족을 한 번 봐요, 다.
그래도 가장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가족들도 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 다르게 삶을 살잖아.
그냥 내 식대로 변화시키고 싶은 그들조차도 전혀 그렇게 안하잖아.
왜, 자기 길이 다 있어.
이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이 공부를 '이게 맞다' 이런 생각이 들어도,
결국은 엇나가고 딴 짓하고 딴 소리하고 그런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런 것도 바로 그런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정해진 무엇은 없어요. 정해진 무엇이 없다는 건 뭐냐.
이렇게 될 것이다...아무 쓸모가 없다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살다보면 매순간 할 일이 생기고,
생각해야 될 문제가 생기고 계속 그러잖아요, 매순간. 그냥 그러할 뿐인 거지.
그러니까 누구랑 어디를 간다, 누구랑 만난다 해도 생각이 나도 그렇게 안 펼쳐지잖아.
그냥 그 상황 그 상황대로 움직이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해야지 하고 만나면 항상 문제가 생기니까.
다툼이 생기고. 왜냐하면 안 맞으니까.
질문자1: 자식이 부모를 통제하는 방법이지.
제가 어렸을 때 음식 가지고 우리 엄마를 그렇게 통제했어요. 안 먹으니까.
그걸 알고 있었어? 엄마가 거기에 꼼짝 못한다는 걸?
질문자1: 그럼. 그래서 음식 가지고 우리 엄마한테 횡포 많이 부렸어요.
그래서 가장 좋은 치료법이 무시하는 거거든요.
그랬을 때 안 먹는다고 막 떼 부리고 아니면 배 아프다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무시를 해버리면 다음에는 그게 안 먹히는 줄 알고.
질문자1: 제가 그게 깨진 게 우리 엄마 아파서 눕고 난 다음부터 깨졌어요.
집에 일하시는 분이 오셨거든. 누가 그거를 기다려주고 누가 그거를 먹으라고
이러고 있느냐구. 한 시쯤 나갔는데 없어. 어, 개기면 안 되는구나.
애들 때도 그러잖아. 안 먹으면 먹이지 말라고 그러잖아.
조그만 강아지들도 뭘 했을 때 이 사람이 벌벌 기면 항상 그거를 해서 자기가.
그러니까 정신적인 것도 그렇게 이용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지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정신적인 문제로 연결이 됐을 때
그렇게 만들어진다니까. 고착화 돼버리면.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이 안 됐잖아.
그러면 애가 대학을 못 갔다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얘가 좀 약간 트라우마가 있어서 문제가 있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게 낫지,
‘우리 애가 못 나서 그 대학에 못 갔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보다.
그러니까 둘 다 상생인 거야.
그러니까 겉으로 보여지는 자기, 나, 나의 지위, 나의 정체성,
이런 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무모하게 문제 있게 만드는지 몰라요.
그게 바로 그런 거잖아. 그게 바로 있는 그대로 못 보는 거야.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정체성에 속고 있는 거야.
질문자2: 스스로 속이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까 서로 속고 속이고 있는 거야. 자기도 스스로 속지.
왜냐하면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속는 거니까.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놓고.
질문자2: 나라고 하는 거는 자기가 그거를 모르니까. 그런데 아까 정신적인 그런 거는
내면에서 알고 있잖아요. 나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거를.
그런데 본인은 진짜로 자기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금은 생각할 수도 있는 거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이화여대 안 나왔는데, 이화여대 나왔다고 계속 행세를 했단 말이야.
이 사람 뇌 속에는 ‘나는 이화여대 나온 사람’으로 돼있어.
자기가 속인다는 의식이 없어.
위조된 어떤 상황에서 그게 나라고 생각을 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을 안 한다니까.
그러니까 정신적인 문제 있는 사람한테
‘당신은 정신적인 문제 있어요’ 하면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잖아.
질문자2: 그러면 치매도 그런 하나의 일종 아닌가요? TV 드라마에 보면, 순간적으로
갑자기 평소에 잘 지내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누구세요?’ 이렇게 하는 거.
그건 뇌기능이 잘못된 거지. 그리고 치매는 물리적인 현상이야.
치매를 일으키는 단백질 그게 자꾸 많아지면
지금도 알츠하이머를 일으키는 단백질이 만들어져요.
그런데 그게 뇌에 쌓이면 알츠하이머 치매가 걸리는 거지. 물리적인 현상이야.
질문자2: 그런데 차별적인 치매도 있잖아요. 자기 아들은 기억하고 며느리는 기억 못하고 그런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건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된다니까.
요번에 왔던 할머니는 정말 시집살이를 심하게 했거든요?
그런데 저번에 왔을 때는 치매에 걸려서 주간보호센터 다니고 그러신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요번에 왔을 때는 돌아가셨다고 그러더라고.
치매인 상태로 15년을 계셨다가 돌아가셨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자기는 어머니가 치매 걸려서 너무너무 편하게 있다가 돌아가셨대.
자기 남편이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아들을 오빠로 알고 있었대.
그러니까 며느리가 올케가 돼버린 거야.
그러니까 자기는 며느리로 있었던 게 아니고, 15년 동안 올케로 있었기 때문에
어머님한테 자기가 너무 어려운 사람이 돼버린 거죠.
자기 남편이 15년 동안 수발을 다 했나 봐요. 그리고 작년엔가 돌아가셨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그건 어쩔 수 없어.
어떤 부분이 기억이 안 나고 어떤 부분이 기억나고, 이런 거는 전혀 알 수 없어요.
그거는 그냥 물리적인 일이야.
단백질이 뇌를 많이 침식을 하면 그 부분이 기억이 안 나고, 단기기억력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영원한 건 없는 거야.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물리적인 현상이지.
요새 카이스트에서 명상과학연구소가 생기나 봐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명상을 연구하자.
그래서 뇌 과학자가 한 번 강의를 하는 거를 들었는데,
그 사람은 ‘명상은 뇌 안에 여러 수만 가지의 자아가 하나의 자아로 떠오르는 거다’
뭐 이렇게 하여튼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라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는 철학과 교수인데 자기는 명상에 일가견이 있다고 나온 사람이야.
그래서 마음챙김을 얘기하면서 그것도 한 번 해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컨트롤 하는 것이 명상이다.
그러한 것을 알아차리고 컨트롤 하는 것이 명상이다.
그건 명상하는 자들은 나오겠지만 그것이.
일어나는 거를 해석하지 마세요. 일어나는 게 다야.
아들이 뭔가를 했어. 딸이 뭔가를 했어. 그러면 일어나는 게 다야.
‘쟤가 왜 저랬을까? 저건 저런 식으로 해서 저렇게 됐을까?’
그런 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야.
그냥 일어나는 게 다야.
왜, 그것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게 한 가지의 원인이 아니잖아요.
한 가지 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업이 생긴 거예요.
지속되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이러한 현상이 결과고, 이러한 현상이 결과를 일으키기에는 뭔가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아서 찾아서 가다보니까 업이라는 게 생긴 거지.
경험되는 그대로, 일어나는 그대로.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다음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미리 계획하고 미리 한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는 거지.
누가 ‘앎이 계속되지 않나요?’ 라고 물으면 뭐라고 얘기하겠어요?
질문자1: 재행무상.
생각 속의 일이야, 그죠?
지나가서 보니까 알았더라 이렇게 되면, 그게 앎이 계속된다는 거예요.
지속되고 뭔가 불편하고 있으면, 100% 뭔가 찾고 있는 거야.
일어나는 그대로라는 거는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대해서 다시 리마인드 하지 않는 거예요.
다시 생각해서 다시 결론내고 다시 해석하고 그거 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설거지 할 때는 설거지만 하고, 그게 바로 그거에요.
알아차림을 한다는 거는 그러한 의미야.
생각에 대해서 누가 얘기를 했었는데,
사람이 하는 생각 중에 부정적인 생각이 거의 다래요.
긍정적인 생각은 거의 몇%가 안 된대.
거의 다 떠오르는 건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른다고 그러더라고.
어떤 심리학자가 얘기를 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하면 우울해지는 거 같애.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다 바꿔. ‘생각, 생각’으로.
생각이 일어나면 그걸 ‘한 번 보자’ 하고 끝까지 잡지 말고, 생각으로 딱 끝내버려.
떠오르는 생각 이런 것들.
수사들도 그렇고, 스님들도 그렇고, 빠지지 않기 위해서 라기 보다 매순간 일을 하잖아요. 잠시도 가만히 안 있잖아.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절벽 위에 있는 수도원에 뭐 그렇게 일이 있겠어요, 그죠?
그런데 하루 종일 일하잖아, 하루 종일.
그러니까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라는 현상이잖아요.
그런데 생각의 내용을 붙들면 그거는 잡음이 되는 거예요.
생각의 내용이 계속 이어지는 거잖아. 그거는 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생각을 없애는 게 도가 아니잖아요. 생각은 일어나.
그런데 그 생각의 내용을 붙들고 있는 거는 도가 아니에요.
사실은 매순간 깨어있는 삶이면 그냥 발 하나 움직이는 것도 선명하거든요.
뭐라고 하나 확실하면 지루하지 않아요.
어디에 묻혀있으면 지루함이 있는데,
그냥 아주 사소한 움직임조차도 깨어있으면 그냥 재밌고 새롭고 이래요.
생각에만 안 빠지면 다 그래요.
생각에 빠지면 뭘 해도 재미없고 뭘 해도 지루하고 뭘 해도 비슷하고 그러는데,
생각에 안 빠지면 하나하나가 새로워요. 선명해.
생각이 일어나도 생각의 내용을 기억하지 않기,
그러면 좀 더 선명해질 거예요. 생각과 움직임 이런 것들이.
해석하지 않기. 왜냐하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왜 일어나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너무너무 알고 있잖아, 그지?
이치는 다 알고 있잖아.
내가 뭔가를 알아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아무 의심이 없다고 해서,
보기에 어떤 행동이나 어떤 것들이 달라졌냐? 했을 때 똑같애.
다만 간섭하지 않고, 이런 거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니까 그게 차이를 잘 모르겠어.
다만 나의 그런 문제는 다 해결이 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그러한 것들이 없는 거예요.
‘어떻다, 어떻다’ 라는 게 없는 거야.
‘어떤 사람이고 싶다’가 있었을 때는 항상 불편했던 것 같아요.
나는 항상 거기에 못 미치고, 미쳤다고 할 때는 우쭐하고.
만약에 내가 그런 사람이고 싶다 했을 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내가 있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없잖아.
그럼 내버려 둬야지.
어떻게 보여지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이 나오든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가장 멋있는 사람이 되는 줄 알아요? 방어하지 않는 사람 있잖아요.
그렇다고 항상 좋냐, 항상 좋은 말만 듣냐, 좋은 일만 생기냐,
그런 거하고 아무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그냥 괜찮은 거지.
생각으로 결론 낼 수는 없는 거야. 생각으로 편안해질 수는 없어요. 무방비에요.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대로 같이, 그거예요.
거기에서 지킬 게 아무것도 없잖아. 이거에요.
이게 바로 평온이에요. 어떠한 모습이 정답이다가 없는 거야.
그럴 수가 없지.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데 아무렇지도 않으려면 뭐예요?
내가 이러고 있다는 착각이 없으면 되는 거야.
내가 이렇게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건 가짜고 이게 진짜야’ 이러면서 진짜를 잡고 있는 거예요. 가짜로 하는 거라니까.
그래도 같이 이러는데 여기서 보면 다 똑같잖아.
그런데 일종의 도인이라는 사람은 딱 지켜보고 있는 거지.
그럼 이 사람은 도인이잖아. 그거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되는 거.
한 번 완전히 ‘나 죽었네’ 하면서 있어보세요.
그냥 주어지는 대로 살아보는 거지. 그래도 바쁠 거야.
뛰어가고 걸어가고 눕고 앉고 서고, 다 똑같애.
한결같은 게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살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