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38장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불실덕, 시이무덕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상덕무위이무이위, 하덕위지이유이위
上仁爲之而有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상인위지이유이위, 상의위지이유이위, 상례위지이막지응,
則攘臂而扔之.
칙양비이잉지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고실도이후덕, 실덕이후인, 실인이후의, 실의이후례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 전식자, 도지화, 이우지시
是以大丈夫, 處其厚, 不居其薄.
시이대장부, 처기후, 불거기박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처기실, 불거기화, 고거피취차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前識者에 대해 ‘무근거적예측’이라는 한비자의 해석에 동의할 수 있을까? 識은 예측이 아니다. 前識과 豫測은 엄격히 다른 언어이다. 앞서 아는 것이고 명확히 아는 것일 때에만 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앞서 아는 일은 도의 꽃이다. 한비자는 전식자가 무근거적예측이라고 해석하니 꽃은 '화려한 수사'라는 뜻으로 흘러가고 만다. 후대 도덕경을 해설하는 이들은 대부분 한비자의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해석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前識者가 무근거적예측이라니, 아니다. 그게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그런 수준 낮은(?) 말을 한다고 나는 보지 않는다. 무근거적예측이나 일삼고 화려한 수사로 도를 말하는 정도는 저작거리에서도 비판받는다. 무지랭이 촌부(?)도 허언이고 화려한 수사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 정도는 도덕경에서 지면을 할애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는 얘기다.
前識者는 먼저 오는 깨달음이다. 직관지로 오는 것이기도 할 것이고 불현듯 찾아오는 앎이기도 하다. 논리적 추론이나 근거 지움에 의한 지식놀음이 아니다. 하여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표현 그대로 ‘도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도의 꽃은 전식자다. 꽃은 늘 열매에 앞서 먼저 오기 때문이다.
노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而愚之始라고. 그러나(而) 그것은 어리석음의 시작이라는 충격적인 반전이다. 모름지기 대장부는 그 두터움(도타움)에 머물지 그 얕음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터움은 열매요 얕음은 꽃이다. 무엇을 알았다는 것에 머무는 것은 대장부가 아니다. 어릴때는 무엇을 알았다는 것에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는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 것을 취하고 이것은 지나간다(去)는 것은 꽃이 떨어지고(去)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나가는 것(깨달음, 곧 꽃)을 붙잡으려는 어리석음 을 지적하는 것이다.
어찌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을까? 꽃은 늘 화려하게 마련이다. 벌을 불러들이고 수정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피어 있는게 꽃이다. 한동안 피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또한 꽃의 때의 도가 아닌가. 도의 삶은 늘 앎이 먼저 찾아온다. 그건 알음알이의 앎이 아니다. 분별지가 아니다. 식이 먼저 찾아온다. 그리고 그 다음 두터워진다. 헌데 화려한 꽃에 허다한 인생이 미혹되어 떠나지 않으려 하니 그를 일깨우려는 말이 위의 문장이다. 깨달음은 열매를 향한 과정에서 피는 꽃일 뿐이지, 그 자체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이이다. 이를 열매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요, 그것은 얕음이라는 노자의 일격(一擊)이다.
한비자는 도덕경을 저작거리의 잡서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는 도덕경의 도를 논하고 있으니 훈도요 선생임이 분명하나 유위의 자리에서 무위를 논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사과나무의 무수한 가지는 어느 한 가지도 배나무의 가지가 될 수는 없다. 도의 흐름은 온 데 간데없이 얕음의 경지조차 들지 않는, 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얘기로 흘러 간 것이다. 이로써 한비자를 혹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道之根 ! 도에 뿌리를 내리고(도가 뿌리인 사람) 있는 이가 대장부다. 그는 분명 시시비비에 휘둘리지 않는다. 유위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쉽사리 일희일비하지 않고 천하에 우뚝 자리하고 있다. 일러 대장부라 불리운다. 그렇다. 도의 꽃을 피우려면 도의 뿌리가 있어야 한다. 道之根, 道之華, 道之實은 한 길이다. 무엇은 중요하고 무엇은 중요하지 않음이 아니다. 무엇은 크고 무엇은 작고가 아니다. 다만, 그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으려면 앎이 떠나고(꽃이 떨어지고-功成而弗居는 여기서도 해당) 삶으로 두터워져야(숙성되어야) 한다. (1장의 명가명비상명 원리가 여기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기서 앎과 삶은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자연스러움이 무위자연 아니겠는가? 따라서 道之華에 머물러 있는 것은 멈춤이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도를 거스름이요 무위자연을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머물러 있음은 곧 失道요 愚之始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고 나는 풀이한다.
어떤 풀이는 참으로 가관이다.
"열매가 알차게 익어가는 것같이 서서히 행동하고, 꽃처럼 화려하긴 하지만 금방시드는 것과 같이 경박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이같은 풀이는 완벽한 처세술의 책 혹은 행동지침서로 만들어 버린다. 무위의 세계를 유위의 세계로 바꿔버린 풀이일 따름이다.
도올은 “시대를 앞서간다 자처하는 자들이야말로 길의 허황된 꽃이요 모든 어리석음의 시단이다.”라고 하고 있는 데 작문을 하고 계시더라. '허황된'이란 말이 왜 튀어나오는가. '도의꽃'이란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작문할 수밖에 더 있을까.
그것은 그 누구를 향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일깨우는 소리다. 시대를 앞서간다 자처하는 자들을 향한 소리가 아니라 그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나에게 하는 노자의 소리다. 지금은 내가 읽고 있으니 그 순간 내가 받아야 하는 소리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