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론(구원의 서정) 김진섭
구원론을 의미하는 라틴어 소테리올로지아(soteriologia)는
그리스어로 구제·구원을 뜻하는 소테리아와 말·생각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특히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연구하는 학문의 영역을 일컫습니다.
구원론은 말 그대로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내용이 그 주제를 이루지요.
그래서 구원론을 성령論이라고도 합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 구원은 완성형인가 아니면 진행형인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는 ‘구원 받았다.’ 라고 합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이제 구원받았으니 ‘구원에 대한 것은 완성되었다’라고 이해하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구원의 요소 중에 중요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회개는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180도 바꾼 것일 뿐입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죄의 오물들이 묻어있고, 성격도 그대로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믿고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를 하곤 하는 것입니다.
2. 신분의 변화와 삶의 변화
성경은 구원의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가능케 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분이 변화가 선포되어 완전히 바뀌었지만 우리의 삶은 이제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를 성령님께서 주도하십니다.
그 시간이 신앙생활의 시간이고 이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기까지 계속 됩니다.
3. 구원의 순서
구원의 서정이라고도 합니다.
순서라고 하니까 시간에 따른 순서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 논리적인 순서입니다.
이런 과정, 이런 순서로 구원이 이뤄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교단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개혁주의와 칼빈주의 루터교와 알미니안주의 등 각각 해석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맥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혁주의의 구원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여러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 순서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4. 구원의 순서 9단계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성도의 견인-영화
이 순서대로 보시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논리적인 순서라고 보셔야 되지, 시간의 순서라고 하면 논란의 여지가 너무 많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조금씩 순서가 바뀔수도 있으며 또 본인이 느끼는 감정에 따라 순서가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순서는 보편적인 순서라는 것을 먼저 전제해 두고 보시면 논란의 여지가 적겠습니다.
(1)소명(召命) = calling
말 그대로 calling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으로부터 구원은 시작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소명에는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이 있습니다.
내적 소명은 성령은 하나님이 영원 전에 미리 정하신 자를(롬8:30) 구원이라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써 부르신 것이다(롬8:29;엡1:4). 이 소명에는 성령의 중생시키는 역사가 동반된다(롬8:30;고전1:9;엡후1:10). 복음이 귀에 들려질 뿐만 아니라,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수반되어 구원에 이르는 결과를 낳으므로 유효적 소명(calling)이라고도 한다(롬4:17,8:30;고전1:9;엡1:10)
외적 소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나 성령의 중생시키는 역사가 뒤따르지 않으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막16:15,16;마22:2-14;요3:36;행13:46;살후1:8). 그러나 이것은 강제적이나마 하나님의 의를 보임으로써 죄인들로 핑계치 못하게 하는 목적을 갖는다(롬1:20).
(2)중생(重生). = rebirth
거듭남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른 자들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심어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이 단어가 ‘팔링게네시아’로 표현되어 있고 단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천지개벽의 차원에서 새롭게 된다고 할 때 사용되었다. 이 세상 마지막에 사람의 아들이 심판주로 다시 올 때 천지만물이 중생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개인적인 차원이다. 신약성서의 바울서신인 《디도서》3장 5절에 보면, 개인차원의 중생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중생은 인간을 향하여 그리고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순전히 하나님이 행한 구원사역(救援使役)이지 인간 자신을 통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 구원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디도 3:4). 이 말은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엡 2:1 이하). 중생이란 이런 자연인을 성령이 개입하여 영적으로 살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하고 그분과 생명의 관계를 가지는 사건을 말한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표현했는데, 위에서 성령이 개입하여 중생했다고 해서 ‘위로부터 남’이라고 한다(요한 3:3). 이 중생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통해 일어난다. 즉 승천한 그리스도가 성령을 인간에게 보낼 때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인간에게 믿음이 발생하고 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음과 동시에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은 인간을 예수와 같이 의롭다고 여기고 칭의(稱義)하는데, 이 순간부터 중생되는 것이다.
이 중생은 윤회설에 근거한 단(丹)사상이 말하는 환생과는 다른 것이다.
(3)회심(悔心, conversion) = 회개(悔改, repentance)
회개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생명 얻어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의식적인 변화입니다.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은 회심과 중생의 순서를 바꾸어 말하는 곳도 있습니다. 회심이 일어난 후 중생 즉 거듭남의 체험을 한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회심,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인간의 행동이고 거듭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신앙(信仰, faith, religious belief)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 내지는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인간의 순종(신뢰)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신불(神佛)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신뢰와 무조건 복종을 말하며, 불확실한 것을 주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사람은 종교적 체험이나 의례(儀禮)를 되풀이함으로써 인격의 내부에 차츰 일정한 신앙적 자세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게 된다. 이 심적인 태도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인데, 신앙은 개인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편, 신앙의 표현인 신조·조직·제도를 가진 공동체의 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이 되기도 한다.
(5)칭의(稱義,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뜻하는 말입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유명한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관련된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들을 하나님이 보시고 의롭다 칭하시고 선포하시는 일입니다. 법적인 용어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율법의 요구가 완전히 만족되어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구원을 받았다"," 죄사함을 받았다", "천국백성이 되었다" 라고 하는 근거가 칭의 에서나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었으니 의롭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불러주시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죄인입니다. 호칭상 자녀이고 의롭게 된 자이지 신분상 의로운 자는 아직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를 해야하며 천국에 들어가는 날 까지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다음 몇 가지의 성격을 가집니다.
첫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입니다(forensic).
온 세상의 심판主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죄인의 죄책(罪責, guilt; 법적 책임)을 제거시키는 것이며 죄인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사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화와 비교해 볼 때, 칭의는 죄책의 제거이며, 성화는 죄성 혹은 부패성의 극복이다. 또 중생, 회심, 성화는 사람의 내면적, 인격적, 실제적 변화이며, 칭의는 사람의 외면적, 신분적, 법적 변화이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칭의의 법정的 성격이 명확히 인식되지 못했었다.
천주교회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주입(注入)을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보았고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별치 않았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가 법정적 선언임을 보인다.
칭의 혹은 '의롭다 하다'는 성경 용어가 사람을 실제로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여러 구절들에서 확증된다.
히브리어 히츠디이크(의롭다 하다)--출애굽기 23:7,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이와 같이 칭의는 정죄(定罪)라는 말과 대조되는 裁判적 용어이지, 사람의 내면적 의(義)의 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오(의롭다 하다)--로마서 3:20-28, ". . . 이제는 율법 외에[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8:33, 34,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둘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4, 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골자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결론을 내리노라]." 로마서 4:4, 5, ". .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셋째로, 칭의는 즉각적이며 완전하다.
로마서 5:1,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디카이오덴테스,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 (참조) 로마서 3:24, 디카이오우메노이(현재분사); 8:33, 호 디카이온(현재분사)--현재분사는 칭의의 효력이 계속적임을 나타낸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6)수양(收養, fosterage)
다른 말로 ‘양자삼음’, ‘아들로 삼는다’ 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아들로 삼으시는 일입니다. 의롭다 칭한 자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습니다. 이제 완전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7)성화(聖化, Sanctification)
그렇게 아들로 삼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단계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구원은 이 성화의 단계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아들답게 살아야 합니다. 왕자와 거지 아시지요? 우리는 왕자의 옷을 걸치고 왕궁에 있으나 아직 거지의 본성을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뭘 해야 할까요? 왕궁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태도, 말투, 예의 등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배워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입니다.
이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해 개독교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목숨도 내 놓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시대 한국 기독교인들도 맘몬에 빠져서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8)성도의 견인(聖徒─堅忍, perseverance)
그런데 이런 성화의 과정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완성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다시 거지소굴로 돌아가고 싶은 우리의 죄 된 욕망은 오늘도 우리를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은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위치까지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견인하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견인까지 하시느라 우리 성령하나님 참 바쁘십니다^^)
캘빈주의의 견해로,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 선택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받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양자됨의 자격을 잃지 않고 의인의 신분을 빼앗기지 않으며, 영혼이 멸망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신약성서의 근거에 《요한복음》10:27~29, 《로마서》8:35~39, 《빌립보서》1:6 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하여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고 해석합니다. 이 교리는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에게는 비성서적이고 반(反)율법적이며 교만을 조장하게 한다고 비난 받았습니다. 도르트문트신조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9)영화(榮華, glory; prosperity)
그러나 성화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 완전히 변화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그 순간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순서입니다.
구원의 순서는 설명과 같이 우리의 구원의 내용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두 구원을 이루는 요소지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될 것이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니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해도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구원파가 이야기 하는 날짜나 시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겠지요?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뤄가야 합니다.
첫댓글 몇일전 영접기도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단순히 영접기도 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수 있냐고?
그순간 학부때 배운 구원의 서정을 대략 설명을 하며 구원은 시작은 그렇게 할지라도 완성은 되지 않는다고 9가지 단계를 거쳐 우리의 삶이 변화 되어야만 구원의 자리에 들어 갈수 있다고 간단히 대답했었다.
인터넷에서 구원의 서정에 대해 잘 정리된 것을 옮겨 놓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가 올바른 구원관을 가질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