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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an Delorme, “Lire Dans L’Histoire Lire Dans Le Langage”, Parole et récit évangélique: Etudes sur l’évangile de Marc(Paris, Montréal: Cerf, médiapaul, 2006), 19-34의 글을 안영주가 우리말로 옮김. 본고는 J. Doré(dir.), Les cent ans de la Faculté de la théologie(Paris, Beauchesn, 1992), 197-206에 실렸던 글이다. 장 들로르므(1920-2005)는 프랑스 안느시 교구 사제로 주석가이자 기호학자이며, 안느시 대신학교 성서학 교수와 리옹가톨릭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복음서 주석학을 가르쳤다. .. .... 한국과는 특히 인연이 있으신 분으로 서인석 신부님의 소개로 3번에 걸쳐 강의를 위해 초빙되셨다... 역자는 그분의 마지막 방문인 2000년에 뵙는 행운을 가졌었다...
I. 들어가는 말*1)
주석학과 신학의 오랜 갈등을 언급하지 않고는 신학 대학에서 주석학의 자리와 기여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학문 사이에 생긴 분열은 모두 인정하는 것이며 몇몇 학자들은 이를 통탄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는 문제이므로 본고에서는 이에 대해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서 검토하지 않겠다. 따라서 필자가 이 갈등과 알력을 종결짓기 위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기 바란다. 특히 주석학이 어디론가 분산되는 것 같은 이 시기에 말이다. 예루살렘 성서학교 100주년 기념학회 당시, 한 낙천가는 이렇게 말했다. “주석가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20년은 더 감수해야 할꺼요!”
그럼에도 신학자와 주석가들에게 만남의 자리를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자리는 이 학문들을 특수화하는 차이 곧 각 학문이 제안하는 지식의 대상들 간의 차이와 이 대상들에 도달하기 위해 따르는 과정들 간의 차이 이전에 위치할 것이며 만남 지점은 ‘신학적 또는 주석학적인 행위’의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2)
이 행위는 신학적이지도, 주석학적이지도 않다. 달리 말하면, 이 행위는 단지 목표하는 지식의 대상이나 채택한 방식들로만 정의될 수 없다. 만일 이렇게 정의된다면 좋은 신학이나 좋은 주석을 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을 잘 정의하고 정확하게 적용시키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학적 행위와 주석 행위는 주체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방법론적(인식론적) 주체, 곧 학문으로서의 신학과 주석학을 이루는 합의된 규칙과 제약들로 엄밀히 정의된 ‘주체’만이 아니다. 신학적 행위와 주석 행위가 언어 안에서 그리고 담화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2)이 행위들은 말하는 주체(sujet parlant)를 끌어들이며, 이 주체는 신앙 전통을 통해 전승된 글 속에 고정되어 있는 담화를 탐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또한 이 주체는 자기 것이 아닌 말에 충격을 받고 깊이 영향을 받아 태어나는 주체이며, 이 말을 증언하기 위한 만큼이나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온 힘을 쏟는다.
주석학에서도 신학에서도,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명쾌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을 말하기 위한 단어들은 쉽게 떠오른다”는 보알로(Boileau)의 규칙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착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석학적 담화 또는 신학적 담화는 그것을 전문인들이 검증할 수 있고, 승인하는 방식에서 나온다는 의미에서 어떤 ‘객관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담화를 단어와 문장을 매개로 하는 지식의 대상으로 파악하여 ‘실제’(현실)의 묘사로만 축소시키고, 그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 사이의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 매체로만 축소시킨다면 이 담화는 그 자체가 무시되는 것이며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담화는 담화가 알려주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고, 담화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만 말하지도 않는다. 만일 담화가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담화 속에 담화가 다루는 것에 관해 찾아야 할 지식 이상의 것이 있고, 말하는 기술이나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방법들의 몇몇 제어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말(parole)이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담화 속에는 말하는 주체에 대해 또는 말하는 주체를 위해 들어야 할 어떤 것이 있다. 이 주체는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말과 실랑이하는데, 담화를 듣거나 읽는 행위자와 마찬가지로 이 말을 가지고 담화를 구성하는 행위자도 결코 이 말을 다 파악하지는 못한다.
Ⅱ. 읽는 행위**2)
이 관점에서 담화를 이용한 말의 통과를 특히 순조롭게 하는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주석가와 신학자들이 공유하므로 그들을 대화로 이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읽는 행위’이다. 주석가와 신학자는 모두 읽는 일을 하고 있다(그들이 저술을 하게 된다 할지라도, 글을 쓰기 이전에 읽어야 한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독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으며, 신학자들은 독서에서 사고할 소재를 찾는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텍스트의 저자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상황 속의 독자이든(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공동체의 일원들이 하고 있는 것) 텍스트 자체에서 프로필을 드러내는 다소 추상적인 독자이든(여러 학술어에 따르면, ‘모델’ 독자, ‘이상적인’ 독자, ‘내포’ 독자)***3) 독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만일 우리 세기에 깊은 영향을 끼친 문화 사건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거기에는 유행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 곧 인간 언어에 관한 숙고와 언어에 행하는 분석이 차지하는 중요성이다.
Ⅲ. 역사 속에서 읽기****4)
근대주의의 위기가 있었다. 얼마 전 개최되었던 예루살렘 성서학교 100주년 기념행사 또는 지금 경축하는 파리신학대학 100주년 행사 때 자연스럽게 이 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주석학과 신학은 모두 역사 정신의 출현과 역사에 따른 해석의 발전들을 통해 재검토되었다. 이 위기를 통하여, 우리는 역사 안에서 성경과 교부들의 글, 교회 문헌 읽기를 배우게 되었다. 현재 이를 위해 우리는 전 세계 신학 대학들에서 널리 가르치고 있는 무수한 방법론과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특혜를 주려면 텍스트들의 독서가 제시하는 것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측면에서-주석학 측면에서조차-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는 복음 이야기보다 더 ‘있음직한 것’으로 평가된, 예수의 역사 재구성에 근거한 그리스도론이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있음직한(개연적인)’ 역사에서 출발하여 정립된 교회론이 출현했다. 그런데 이 ‘개연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범위는 어느 정도인가? ‘성서신학’(또는 야휘스트 신학, 이사야 신학, 마태오 신학)이라 명명했던 것은 대개의 경우 신학이기보다는 작품의 이어지는 문학적 층위의 재구성이나 사상들의 역사를 더 부각시킨 것이었다.
항상 문제시 되어 왔던 텍스트-역사의 연관(聯關)은 역사에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텍스트로 표현된 언어는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묘사로 다소간 이해되었다. 그리고 만일 이 묘사가 덜 믿을만하면, 더 신빙성 있는 표현을 거기에 덧붙였다. 또는 텍스트가 사건들을 해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전에 재구성한 사건들과 텍스트를 대조하면서, 해석의 여백을 평가하는 일을 떠맡았다. 그리고 사건과 해석이 경험과 기억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조차, 텍스트를 텍스트가 반영하는 세계와 역사에 관련지어 읽었다. 사람들은 텍스트의 의미 차원을 희생시키고, 지시 차원을 중시했다. 텍스트의 의미 차원은 텍스트라는 수레가 운반하는 메시지로 자주 축소되었다. 이 수레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텍스트에 대해 자주 갖는 도구적인 개념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달 매체보다 메시지가 아닌가?
Ⅳ. 언어 안에서 읽기*****5)
그런데 텍스트는 언어의 구조물로서 중요하다. 역사 비평의 도전과는 다른 도전이 우리를 부추긴다. 리꾀르(Paul Ricoeur)는 우리 세기에 매우 다양한 연구들에 강요되었던 ‘언어학적 전환점’(tournant linguistique)에 대해 말했다. 여기서 단지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에서 시작된 언어학의 발전이나, 인문과학을 휩쓸고 있고 다양한 의미에서 실행되는 언어 분석만을 생각하지 말자. 언어는 인간에 관한 우리의 중대한 질문의 자리가 되었다. 믿음(신앙)의 언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여러분은 필자의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기호학(sémiotique)이 넌지시 끼어든다. 기호학은 언어학의 딸이지만 단지 단어나 문장의 층위에서만이 아니라, 의미 총체의 층위 곧 신화, 문학, 텍스트에서 의미 문제를 제기한다. 기호학의 여러 갈래 가운데, 필자가 특히 좋아하는 한 갈래가 있다. 기호학의 이 갈래는 만일 우리가 읽을 때 행하는 것에 대해 자문한다면 특히 풍성할 것이다.*6)
우리는 기호 체계와 기호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관심을 갖는 기호론(sémiologie)**7)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의미 작용은 매개 기호들을 통한 메시지의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현상이다. 만일 사용자들이 인정하는 기호들을 한 언어에서 빌려와서, 그 기호들을 배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메시지의 산출은 단순한 코드화 작업이며, 독서는 해독 문제가 될 것이다. 기호론에서 말하는 기호의 개념은 주석학에서 텍스트 코드와 어휘 코드를 되찾기 위해, 문화 코드, 언어 협약, 문학 장르, 묘사들 그리고 텍스트의 출처 또는 시대의 개념들을 되찾기 위해 행한 노력의 기저를 이룬다. 주석들은 흔히 하느님과 세상, 역사를 표현하거나 상징하는 어떤 표현이나 이미지, 기법들이 의미하는 것을 규정하는 사전처럼 작동한다. 텍스트들이 기호와 코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작업은 해야 한다.
그러나 의미 작용(‘의미하다’의 활동이란 뜻에서)***8)은 형성되고 코드화 된 또는 코드화할 수 있는 기호들의 조작보다 더 미묘한 작용이다. 의미 작용은 텍스트 안에서 기호들에게 마치 방아가 밀알을 으깨는 그런 일을 한다. 의미 작용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가루를 의미들에서 뽑아낸다. 또는 여러분이 원한다면, 의미 작용은 한 사회 집단에서 전수된 코드와 의미를 해체하고 다시 만들면서 이것들을 이용한다. 이렇게 텍스트들의 특성은 유지되고, 텍스트의 직접 수신자들을 넘어서서 읽혀지게 된다. 성경도 이와 같다. 박식하게 재구성된 모든 코드들, 곧 어휘 코드, 신학 용어 코드, 백과사전적인 코드들은 매우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같은 텍스트를 읽고 또 읽어도 의미 생성의 역동성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해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의미가 아직도 발생하고 있고,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하게 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런 종류의 질문은 텍스트의 출처나, 텍스트가 지시하는 ‘현실’, 텍스트가 이용하는 코드들의 도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독서에 저항하는 동시에 독서를 유발할 수 있는 독특하고 기이한 ‘현실’이 되게 하는 논리적 무모순성(consistance)과 텍스트의 깊이가 있다. 필자는 텍스트의 논리적 무모순성이라 했지 일관성(cohérence)이라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관성이란 단어는 논리적인 함축을 잔뜩 싣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의미를 향하여, 의미를 위하여 요소들을 함께 일하게 하는 연결 장치의 여러 층위로 조직되어 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논리적인 기계 조직이 아니다. 그 자체로는 늘 포착하기 힘든 발화행위(énonciation)와 관련되는 불일치나 매끄럽지 못함, 단절을 보이지 않는 담화는 매우 드물다.****9)
발화문 안에서 발화행위는, 마치 원근법에 충실한 회화 작품에서조차 묘사될 수 없지만, 이것 없이는 회화 속에 경치도 묘사도 없는 소실점과 유사하다*****10). 우리는 회화가 지시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그림 안에서 회화 작품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림은 단순히 화가의 기량이 아니라, 세상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열망과는 다른 어떤 것에 사로잡힌 손의 움직임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어 안에서, 다시 말해서 인간에 대한 어떤 것, 곧 담화는 말하지 않지만 그것 없이는 담화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어떤 것이 말해지는 시니피앙*11)인, 이 독특한 재료 안에서 텍스트 읽기를 배운다. 그 정도로 담화는 늘 담화를 선행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4000년 전부터 인간은 존재했으며, 인간들은 말했고, 아직도 우리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달리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언어 안에서 읽기는 단지 단어의 의미나 생각들의 연속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언어 안에서 읽기는 말이 통과할 때 준비되는 것이다.**12) 사용 가능한 코드들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리고 텍스트가 매끄럽고 균일하기를 원하거나 텍스트가 텍스트 표면상의 일관성을 가지고 쓰여지기를 원하는 것은 위험하다. 말이 발생할 수 있고, 말하는 주체가 호출될 수 있는 하나의 맹점(盲點)***13)과 침묵점을 향하여, 텍스트가 자신만의 일관성과 균열과 함께 조직하는 연결 조직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는 주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말하는 사람(화자) 또는 어떤 사람들이 ‘저자의 목소리’ 아래 두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글을 쓰는 위치에 있든 읽는 위치에 있든 우리는 언어로 작업하는 중이다. 그리고 말하는 주체는 이 작업 덕분에 우리 안에서 탄생할 수 있다. 바로 이 비밀의 자리에서 우리는 육체와 말의 균열 그리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의 한계를 가끔은 고통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 자리에서 어떤 텍스트들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며 포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타자의 말의 부름에 대답하게 한다. 늘 위협받고 늘 시작하는, 인간 안에 있는 말의 주체에 대한 이 각성 없이는 성경은 성경으로 탄생하지 못할 것이며 신앙 전승은 표현되지 못할 것이고 주석학자와 신학자들은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V. 역사 속에서 읽기와 언어 안에서 읽기****14)
역사 속에서 읽기와 언어 안에서 읽기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 자체가 언어 안에서 말해지고 구성되고 읽힌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말하지 못했다면 역사를 만들었겠는가? 원숭이들이 역사를 논하겠는가? 그렇지만 지시 대상이나 배경으로 우리가 텍스트에 부여하는 역사는 자주 우리가 언어 안에서 일하고 있으며, 언어에 의해 작업되고 있다는 것을 잊게 할 만큼, 우리의 상상을 사로잡고, 우리의 주석들을 가득 채우려 한다. 역사적인 해석은 텍스트 여건 안에서 이것을 앞서는 상황 또는 동시대 상황 쪽으로 표지들을 찾는다. 그러나 표지로 삼는 요소들은 그들 사이의 연결 조직을 통해 의미하는 시니피앙들이다. 우리는 텍스트를 그 원인이나 정황, 외부 상황에 연결시키고 텍스트가 먼저 기호들의 규칙 안에 있다는 것을 잊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인과 관계의 규칙, 조건과 결론의 규칙 안에 텍스트를 둔다. 그런데 역사적인 독해 그 자체는 기호의 규칙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독해는 텍스트와 우리가 회상하는 역사 사이에서 의미를 만들고 의미를 나타내는 상호 작용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서의 두 가지 형태를 대립시킬 필요도 없고 이 둘을 차례로 연결하거나 각자에게 상대를 보충하라는 조건을 둘 필요도 없다. 잘못된 양자택일이나 타협은 피해야 한다. 의미 생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다른 방법론의 자리를 빼앗거나 방법 또는 접근들의 범위 안에 자리를 차지할 새로운 접근이나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학문들을 지배할 학문의 권좌를 세우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의미 생성의 문제 제기는 그것이 현대인들이 자주 말하는 통시적인 독서이든 공시적인 독서이든 아니면 수사학적 독서이든 시적 독서이든 역사적인 독서이든 간에 모든 독서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의 문제를 자각하도록 이끄는 것일 뿐이다.
Ⅵ. 말의 주체를 위하여*****15)
우리는 텍스트라는 현장에서 서로 만나기 때문에, 우선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주석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독서들이 내포하는 것들에 관해 자문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내포들 가운데 두 가지곧 해석 없는 독서는 없고 주체 없는 독서나 해석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둘은 자명한 이치로 보일지 모르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몇몇 말하는 방식은 해석을 독서 다음에 두는 경향이 있다. 우선 테크닉을 사용하여 의미를 정한 다음에 해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의 원래 수신자들과는 다른 수신자들과 다른 상황에 이 의미를 적용시키고 평가하고 비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란 결코 즉각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해석하지 않고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텍스트 특히 성경 텍스트는 복합적이다. 텍스트는 절대 한눈에 바로 의미를 넘겨주지 않는다. 기술 행위는 의미를 지연시키고 독서는 의미 생성을 멈추기보다는 더 쉽게 가동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늘 불분명한 시니피앙들의 연결 구조로 들어가는 수고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연이은 가설과 확인을 통해 시니피앙들이 서로 간의 관계 안에서 읽혀질 수 있게 해 주는 연결점(그러나 보이지 않는 점)을 찾아야 한다.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은 말이 통과할 때에 준비되고 우리 안에 있는 말하는 주체의 자각에 준비되는 것이다. 주체가 없는 독서나 해석은 없다고 말하면서 단지 텍스트를 읽기 위해 애쓰는 독자 주체나 글쓰기 이전의 저자 또는 글 쓰는 동안의 저자*16)만을 생각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 발화행위에 관한 기호학적인 숙고가 독서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진전시킬 수 있다. 발화행위의 심급**17)이 텍스트의 연결 구조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시니피앙들 덕분으로 독자를 동요시킬 수 있는 이 갇혀있는 말 쪽으로 파고들게 된다. 발화행위의 심급은 텍스트 안에서 놓쳐버린 말, 듣기의 요청처럼 ‘이 텍스트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또는 아마도 ‘다시 읽어야겠는데’라는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필자는 소문자 ‘p’로 쓰면서 갇혀있는 말(parole)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하느님 말씀을 들으라는 초대가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닌 말로의 열림에서부터가 아닐까? 고갈되지 않는 그분의 말씀을 말하는 주체 바깥에서 들을 수 있겠는가?
Ⅶ. 기억의 자리 그리고 탄생에서 말씀까지***18)
마지막으로 필자는 여러분에게 자주 읽히는 기억의 장소인 순례지 두 곳을 추천한다.
첫 번째 순례지는 베타니아(마르 14,1-11 참조)다. 이곳은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익명의 여인 때문이다. 텍스트는 향유를 부은 여인이 품었을 의미를 서술하지 않고 그 행위만을 묘사한다. 행위(의 해석)는 목격자들과 예수 그리고 독자에게 맡겨졌다. 목격자들은 이 행위를 말도 안 되는 낭비로 해석하며 분개한다. 그들은 이 향유로 할 수 있었을 것에 대한 인과법칙인 거래 차원에 집중한다. 한편 예수는 표징으로 이 행위를 받아들이고, 받은 그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여인이 행한 것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는 죽을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수의 독서는 자기 육신의 무게로 짓눌리는 듯하다. 받아들인 행위는 당신 몸에 새겨진 죽음이라는 시니피앙들의 사슬 속에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 깊은 곳에 충격을 가한 말씀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분 안에 남긴 흔적을 증언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복음’이 선포되는 어디에서나 이야기될 것이다. 마치 ‘기쁜 소식’이 들릴 때 육의 존재인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말의 통과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을 이 이야기가 제공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두 번째 순례지는 회상해야 할 말의 자리가 된, 영영 비어버린 빈 무덤(마르 16,1-8 참조)이다. “그분께서는…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가서…일러라”(마르 16,6-7). 시신을 찾던 여인들에게는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린 공포의 시간이 있다. 물론 그 후 ‘복음’, ‘기쁜 소식’이 선포될 수 있기 위해서 하나의 상흔처럼 마르코 복음서의 이 지점에서 이야기의 단절이 있어야 했으며 말이 끊겨야했다. 만일 먼저 침묵할 것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이 말해야 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사라지고 없는 몸을 말이 교대할 것이다.****19) 그리고 증인들의 말이 침묵하게 되었을 때 글이 그 뒤를 잇게 될 것이다. 글은 단지 상실을 보상하는 방식으로 기억 속에 새겨두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상실은 돌이킬 수 없지만 성경이 하나의 공간, 곧 다른 한 형태의 말을 위해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책이라는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곧 성경은 그 통과를 증언하고, 독서의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질 준비가 되어 있는 소리 없는 이 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부록: 다양한 주석 방법들의 기여*****20)
샤를르 뻬로(Charles Perrot)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회 발췌문
장 들로르므: 기호학자의 독서는, 이 독서가 “텍스트, 텍스트만, 텍스트가 전부”라고 주장할 때, 근본주의의 경향을 옹호한다고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를 믿은 한 여대생을 알고 있는데, 근본주의 경향이 있는 목사가 제게 보냈지요, 그 여대생은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세미나에 몇 번 참석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우리는 보통 역사 속에 텍스트를 자리매김하는 역사적인 독서와는 대조적으로 근본주의를 비난합니다. 이것은 텍스트 그대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막고, 거리를 두지 않고 텍스트에 달라붙는 것을 막으려는, 텍스트를 상대화하는 방식이지요. 그러나 역사와 관련해서 텍스트를 상대화하려는 몇몇 방식이, 텍스트 해석의 하나뿐인 확고한 ‘원칙’이기나 한 것처럼 ‘있음직한’ 역사의 재구성을 정립하는 데 있어 근본주의의 또 다른 형태를 재도입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자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사야 텍스트의 의미에 관한 질문에 대한 어떤 사람의 답변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 텍스트가 어떤 시대에 쓰였는지 모르기에 당신에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간격은 언어 행위 자체로 강요되며, 언어 분석을 통해 알게 되는 다른 하나의 간격을 없애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물에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들러붙어 있지 않는 하나의 언술문(言述文)을 말할 수 없고, 단어들을 발하지 않고서는 한 문장을 말할 수도 없습니다. 텍스트는 작가가 글을 쓰는 순간 세상과 작가와 거리를 두고 성립됩니다. 그리고 독자는 거리를 두고서만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화를 할 때,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듣고, 상대방이 내 말을 듣기 원한다면, 적당한 거리를 둘 필요성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리는 ‘텍스트 내의 타자’ 또는 텍스트를 타자로서 존중하게 합니다. 또한 만일 텍스트가 화자가 될 경우, 텍스트가 독자 안에 도입하는 것을 다른 장르의 간격 또는 분리로 고려해야 합니다. 주체를 꿰뚫고 가르는 날카로운 칼인 말(parole-glaive)의 성서적인 은유를 상기해 봅시다.
기호학에서 문자가 요구하고 독점하는 관심은 독자를 삼켜버리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울이는 관심은 독자에게 독자 자신의 언어와 거리를 두게 하고 가장 심층까지 가게 하면서 독자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이미지와도 거리를 두게 합니다. 읽기, 그것은 더 이상 텍스트에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 환원될 수 없는 이타성(異他性)에 직면하는 것이며 소유되도록 방임하지 않는 말을 경청하는 자로 자기 자신을 바꿀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성경 독서는, 특히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자기 자신의 소유권 포기를 배우기 위한 학교입니다.
저는 마치 연결되어야 하는 두 단계가 있는 것처럼 텍스트 소유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두 단계란 첫째로 텍스트를 그 기원에 다시 담그면서 거리를 두는 단계와 둘째로 텍스트를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소유하는 단계입니다. 역사는 거리를 두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기억하는 행위처럼 그것은 현재 행위입니다. 이 역사적 담화와 관련해서도 또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거리는 먼저 연대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텍스트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텍스트와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 현대 텍스트에 대해 거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치가들의 말이나 추기경들의 말로 인해 유발될 논쟁을 상상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고대 또는 현대 텍스트의 모든 독자들에게 자기 소유권 포기를 배우는 훌륭한 학교로 성경 독서를 추천해야 합니다.
참가자: 사실 소유와 거리 유지를 변증법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장 들로르므: 옳습니다! 거리 유지와 소유 사이의 변증법에 대해 말하면서 당신은 그 둘 사이의 연속에 대한 모든 생각을 없애버렸는데 이것이 내게 중요합니다. 제가 반대하는 것은 텍스트와 거리를 두는 것이 건너야 할 한 단계일 뿐이며, 그 다음에 소유한다는 논리입니다. 사실 텍스트가 복음이나 성경 텍스트처럼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우리는 텍스트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끝없이 논쟁할 것입니다. 텍스트의 언어와 자신의 언어 사이의 왕래는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텍스트에서 들어야 할 말씀을 전혀 내 언어 안에 갇히게 두지 않으면서도 내 언어 안에 그 흔적들을 남겨 두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신의 말과 혼동될 정도로 하느님의 말씀을 소화했다고 믿는 환상을 갖지 않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기어코 거기서 벗어나려고 조처하시겠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텍스트 안에 독자의 자리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Reader-oriented Criticism’ 등 참조). 이 자리는 마치 거기 앉기 위해 좌석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모두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적어도 주요한 연결 조직 안에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놓이는, 드러나지 않는 맹점(소실점)을 찾으려면 많이 인내해야 합니다. 이것은 텍스트를 제 것으로 삼으려 애쓰기 보다는 오히려 텍스트-타자를 경청할 각오를 하고 기꺼이 마음을 쓰려는 태도입니다.
소유 이론은 ‘텍스트의 세계’인 한 세상을 텍스트가 제안한다는 생각과 통합니다. 이 세상은 단순히 표현되고 묘사된 사람들과 사물의 세계가 아닙니다(리꾀르 참조). 그것은 텍스트가 열리는 존재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텍스트 생산 이전이 아니라, 라드리에르(J. Ladrière)가 ‘구조의 지평’(horizon de structuration)이라 불렀던 독서 앞쪽을 향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예를 들어 복음서의 비유들의 독서에서 열리는 이 세상은 독자에게 세상에 존재 가능한 하나의 방식처럼 제공됩니다. 그리고 독자는 그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유의 해석학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거나 존재 가능한 다른 세상을 보게 하는 표상들의 배열에 특혜를 줄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텍스트의 세계’나 ‘구조의 지평’보다 오히려 ‘내용과 발화행위 형태’(forme de contenu et d’énonciation)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텍스트가 제공하는 표상들을 그 형식이 발화행위, 곧 말하는 주체의 소환을 내포하고 있는 내용의 형상들로 고려합니다. 따라서 모든 차이는 (나의 것이 아닌) 의미 세계를 소유하는 것과 다른 말(말씀)의 부름에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정말 잘 정리된 내용이네요 감사합니다.
성경의 기호학적인 방법에 평생을 바치신 신부님의 글입니다. 지금은 하늘에서 당신의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축복을 주고 계실 것입니다. 번역의 어설픔에 걸리지 않고 그분의 말씀이 잘 전달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생을 바친 분의 글을 대하니 숭고한 마음이 드네요...그 존귀한 것을 전해주시고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그 보물을 찾은 이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지요... 보물이 보물인 것은 그 가치를 알아보는 이의 몫이오니... 행복하십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에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