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시 창작을 전문적이며 특별한 훈련이나 지식이 필요하고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시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어서 평범한 생활인의 경험이나 생각으로는 범접할 수 없다고 아예 담을 쌓아 버린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학교에서의 문학 교육이 잘못된 탓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부분의 시들이 비일상적인 것인데다 그것을 획일적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배웠으니 시를 골치 아픈 존재로 여길만도 합니다. 그러나 시가 생성된 배경이나 본래의 기능은 오히려 골치 아픈 것을 해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또 갈수록 일상적인 소재와 평이한 화법을 구사하며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 노래를 흥얼거리듯이 눈물과 함성과 탄식을 토하듯이 시 역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희로애락을 담고 해소하는 기능을 합니다. 다른 감정 표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노래를 예로 들면 자신이 창조한 가락을 흥얼거리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런 즉흥곡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던 경험이 있을 줄 압니다.
그것처럼 시를 쓸 수 있는 마음도 이미 모든 사람이 갖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아직 발견해 내지 못한 것이지요. 시의 마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수많은 느낌에 휩싸여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다는 느낌, 잠을 좀 더 자고 싶다는 느낌, 물이 차갑다는 느낌, 이빨이 시리다는 느낌, 음식이 짜다는 느낌… 또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 하늘이 푸르다는 느낌, 누군가 보고 싶다는 느낌… 그뿐 아니라 잠든 시간에도 우리는 꿈을 꾸며 어떤 느낌들에 계속 사로잡혀 있습니다.
시를 쓰기 위한 첫 단계는 우선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 버리지 말고 마음 속으로 되새겨 보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 번 중얼거려 보십시오. 그러면 짧은 느낌으로 그냥 흘려 버렸을 때보다 바람의 시원함을 몇 곱절 더 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은 누구나 갖는 것이니까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기 바랍니다.
‘막혔던 가슴 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 …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순간 순간의 느낌을 반추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 더 풍부한 인생을 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느낌의 양이나 질이 점차 향상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대문 앞의 쓰레기통을 보며 ‘너는 매일 그렇게 음식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구나.’ 라든지, 이리저리 뒹구는 휴지 조각을 보며 ‘너는 아직도 이렇게 배회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부여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분은 저도 모르게, 우주 삼라만상과 대화하고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2. 남과 다른 글쓰기
문학지망생들을 만나면 예외 없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기성문인들은 뭔가 자기 나름대로 글을 잘 쓰는 비법이 있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글쓰는 일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막연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비법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처럼 정도가 있을 뿐이지요.
그 정도라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그런 과정에서 자신만의 내밀한 요령을 터득하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미세한 경험과 깨달음들의 결과이기 때문에 남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됩니다.
대학마다 문학에 관한 전공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시중에는 많은 문예창작 지침서들이 나와ㅏ 있지만 그런 것들이 정작 자기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정해진 공식이나 이론에 대입시킨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지는 필연과 우연의 만남입니다. 여기에 글쓰기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그저 우직하게 우리가 다 알고 있는 3多의 과정을 좇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하는 문학지망행들의 질문이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삭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 온갖 꽃들이 피어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 꽃을 보고 글을 쓴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의 대부분은 꽃의 아름다움게 감탄하여 그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문학이라는 형식이 존재하고부터 수많은 문장가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찬탄한 것이어서 여간해서는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꽃이 아름답다는 발견은 이미 일반화된 사실이어서 다른 이에게 쓰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꽃이 기지개를 편다’든지 ‘꽃이 하늘로 가고 있다’ 든지……
이렇게 남과 다르게 쓰려면 남과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하는 데 그것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글쓰기가 단순히 좋은 말로 미끈한 문장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으시면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세계를 보는 자기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남과 다르게 본다는 것은 남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다른 정도가 남과 비교해 판이하게 다를 때도 있고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만큼 미세할 때도 있지만 분명 여러분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일간들과 비교해 다릅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무리 닮은 일란성 쌍동이라도 다른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요. 생김해도 그렇지만 생각에 있어 다른 사람과 내가 다른 것은 성장한 환경과 그동안의 체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의 과저어에서 생성된 여러 독특한 생각들을 우리가 글로 쓰려고 하는 대상 속에 투영하면 자신만의 글, 남과 다른 글쓰기가 가능해 집니다.
3. 무엇부터 써야 할까
평소에 줄곧 독서를 해온 분들은 누구나 자기 글을 한 번 써 보고 싶은 욕구를 가집니다. 그런 욕구를 부추기는 동기는 대략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번째는 나도 이런 멋진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이고, 두번째는 내가 쓰면 이보다는 더 잘 쓸 것이라는 자만심이고 세번째는 이런 이야기도 글이 되는 걸 보면 내 인생도 충분히 글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기를 가졌다 해도 대부분은 시작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첫번째 경우는 기대감이 열등감으로 바뀌어서 그렇고, 두번째 경우는 욕심과의욕만 앞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쳐서 그렇고, 세번째 경우는 게으르거나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됩니다.
그래도 이 중에서는 마지막 경우가 가장 성실하게 글쓰기를 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앞의 두 경우는 막연한 동경이나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특별한경우가 아니고는 제동 장치가 없는 자동차가 되기 쉽습니다. 저는 출판 일을 오래 해 온 탓에 그런 유형의 분들을 더러 만났습니다. 대부분 자기 글에 대한 맹신을 갖고 있어서 책으로 출판하기만 하면 곧 베스트셀러가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단순한 열정이나 치기로 글쓰기를 시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남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오만해지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문학작품은 절대적인 평가가 불가능합니다. 어떤이에게는 눈물을 쏟게 하는 감동일수 있지만 또다른 이에게는 유치한 신파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모든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이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요.
그렇지만 최대치는 항상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감동을 받은 글들은 주제나 소재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대체로 자신의 세계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깊은 울림을 준 것들입니다.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글이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이거나 원대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쓰는 것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자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 내 경험은 진부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타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충격과 간접 경험의 단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생각들이지만 타인에게는 남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자기 주변에서부터 찾아보십시오. 빨래하고 설거지한 일, 친구를 만나고 시장을 한바퀴돌아보면서 느낀 것, 남을 증오하고 시기한 것, 그런 것들을 우선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단 한 두 줄이라도 좋으니 적어보십시오. 형시기은 일기나 편지가 되어도 좋고 문장 구조를 갖추지 않은 메모가 되어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디에 있더라도 필기구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필기구는 꿈속에라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4. 어떤 세계관을 가질 것인가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과 아름다운 언어들을 알고 있다 해도 창조적인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사람은 문학적인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실용적인글을 쓸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글을 잘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높은 학식과 많은 경험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자신의 내부에서 저도 모르게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어떤 생각과 느낌들이 많고 적으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글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멍청해보이기도 하고 건망증이 심하다는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증세를 가진 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글을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이므로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어줍잖은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분이 있는데 그런 분들도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신이 남보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그만큼 이 세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컴퓨터가 시를 쓸 수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시를 쓰라고 지시하면 미리 입력된 사랑과 관련된 여러 단어들을 불러들여서 컴퓨터가 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보다 훨씬 완벽하게 ‘사랑’과 관련된 언어들을 시의 형식으로 조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와 느낌이 결여된 공산품의 가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길에 아무렇게나 놓여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가 있다고 합시다. 보통 사람들은 이 돌멩이를 아무 생각없이 지나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도 할 것이고 기껏 관심을 갖는다고 해 봐야 주어다가 어디 써먹을 데가 없을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 중심, 더 나아가 인간중심으로 그 돌멩이를 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돌멩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무심코 걷어차는 사람들의 발길이 입기도 할 것이고 흙과 풀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또 대굴대굴 굴러서 자기 짝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점점 돌멩이의 시각으로 생각을 확대해 나간다면 하찮게 보이는 돌멩이 하나를 통해 이 세계 전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삼라만상의 모든 물질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면 엄청나게 신비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생물까지를 포함하여 세계 전체를 내가 지닌 자아와 동등하게 보는 시각은 글쓰기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사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요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문제라는 것도 다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빚어낸 무서운 결과가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이 마음만 먹는다고 금방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5. 어휘 문장 구성의 기본기
늦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분들일수록 조급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축적된 자기 이야기가 태산같이 쌓여 있다 보니 그것들을 단번에 그럴듯한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서러이나 시창작으로 바로 들어가는 경우를 흔히 보는데 십중팔구는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늦을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글쓰기는 이야기거리가 두둑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좋은 재료가 준비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버무리고 조리할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음식의 만이 손끝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글스기도 글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우선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방법은 간단하나 산문 형식의 글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운문부터 시작하는 것은 축약과 비약의 요소에 먼저 길들여질 우려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데생을 충분히 해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문을 통해 기본적인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을 터득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문학 장르의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수필과 고설 같은 산문 장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시나 극본 같은 장르 역시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이런 기본기가 충분히 습득되지 않은 채 시를 쓰면 생경하고 난해한 시가 되기 쉽고 거칠고 짜임새 없는 극본이 되기 쉽습니다.
어휘력은 단어를 풍부하게 알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말은 워낙 그 표현이 풍부해서 한가지 뜻에서 여러 가지 단어군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어휘들을 충분히 자기것으로 소화하고 있어야 하며 또같은 종류의 말이라도 전체 문맥의 흐름과 분위기에 맞게 잘 골라 쓸 줄 알아야 하바니다. 이를테면 ‘쓸쓸하다’고 해야 할 자리에 ‘고독하다’고 하면 의미의 단절과 과장을 불러오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요. 한 문장 속에 스며들어 빛을 발하는 가장 적절한 어휘는 단 하나 뿐입니다. 가장 적절한 말을 골라서 쓸 줄 아는 능력이 어휘력인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이 어휘력 배양을 위해 국어사전을 외우기도 하는데 문학에 있어서의 어휘는 문장 속에 융화되어 있어야 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므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어휘력 향상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 말들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육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문장력은 어휘력이 바탕이 되고 남의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됩니다. 좋은 문장은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없고 읽기에 편하도록 적절한 호흡을 가진 것입니다. 너무 긴 문장이 장황하게 계속되면 문맥의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너무 짧은 문장이 반복되면 단조로운 느낌을 주게 됩니다. 탄력있는 문장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듯이 길고 짧은 문장이 적당하게 섞이면서 이어져야 합니다.
구성력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능력입니다. 글감의 대상으르 기능전결로 배치하는 것은 너무 흔한 방식이므로 때에 따라 결말을 먼저 제시하거나 절정 부분을 글머리에 내세우는 등 여러 가지 구성의 변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6. 시와 산문은 어떻게 다른가
앞으로 각 장르마다의 특성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시와 산문이 어떻게 다른 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형식적인 면으로 보면 산문은 긴 줄글로 되어 있고 운문은 짧고 리듬이 있으며 행과 연을 나눕니다. 담는 내용에 있어서도 산문이 일관된 흐름을 갖춘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면 운문은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서사와 서정의 차이라고 합니다.
물론 운문에도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 있고 산문에도 서정적인 문체를 구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 소설이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정착한 오늘날에는 시는 서정적인 특성을, 소설은 서사적인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습작기에는 이런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여 자신의 감성이 어느 장르에 적합한지를 빨리 간파하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들, 시는 춤에, 산문은 도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도보는 일정한 보폭으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한 결음씩 나아가는 것이지만 춤은 아무런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느리고 빠르기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하며 공중을 향해 훌쩍 솟구치기도 하고 쓰러지며 뒹굴기도 합니다. 춤은 일정한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질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춤과 도보의 차이점을 시와 산문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형식적인 차이는 시 정신과 산문 정신의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시 정신이 주관적 인 진실을 추구한다면 산문 정신은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인 진실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만 진실인 것이고 객관적인 진실은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만년필 속에 잉크가 들어 있다’고 쓰면 객관적인 진실을 드러낸 것이지만 ‘만년필 속에 옛사랑의 추억이 있다’고 쓰면 주관적인 진실을 드러낸 것이 됩니다. 만년필에서 옛사랑의 추억을 읽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인식이 발동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인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사적인 바탕이 없이 서정적인 요소를 무리하게 도입한 산문은 생경하고 황당무게한 서술이 되고 마는 것이며, 반대로 서정적인 바탕이 없이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한 시는 감칠 맛이 전혀 없는 상식 수준의 뻔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과 연을 나누어 형식을 갖추어도 이것은 시가 될 수 없습니다. 시 정신과 산문 정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예를 초보자들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을 나무와 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뿌리에서 몸통이 자라고 거기서 가지와 잎이 뻗어 가는데 여기까지는 나무 본연의 모습과 색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뿌리와 몸통과 가지와 잎이 하나의 계통으로 일관된 연관성을 갖고 뻗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가끔 피워 내는 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나무에서 어떻게 저런 꽃이 피워났을까 싶을 정도로 형태와 색깔과 질감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빨강 노랑 하양의 색색으로 보드랍기 그지없는 꽃망울을 터트립니다. 앞의 과정이 산문의 세계라면 뒤의 과정이 시의 세계일 것입니다.
7. 시의 언어를 찾아
흔히 시를 언어 예술이라고 합니다. 시적인 체험과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최근에는 실험적인 시의 한 양상으로 사진 그림 악보 등이 시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자가 주가 된 상황을 보조하는 차원이지 그 차제가 주 표현방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시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갈지 모르지만 언어를 주 표현수단으로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제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색깔이나 소리도 없고 움직임이나 형상도 없는 말들을 조합해서 이 세계의 복잡다단한 결들을 드러내는 일은 너무 막연하고 난감하게만 느껴집니다. 초보자들이 시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춤과 노래와 그림처럼 언어에도 희로애락이 있고 색깔과 소리, 형상과 움직임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시 한 편을 읽고 환희와 격정과 비애을 느끼며 어떤 소리와 색채와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때로은 색채와 소리로 형상화된 예술보다 더 큰 진폭으로 그런 것들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총체적으로 건드려 주는데 시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언어를 통해 총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며 매력이겠지만 처음 시를 쓰려는 분들에게는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어를 캐내고 다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어가 곧 시의 재료인 만큼 멋진 말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시 쓰기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국어사전이나 남의 작품 속에 있는 좋은 말들을 밑줄을 쳐 가며 외우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만 번드레한 사람이 남에게 오히려 거부감을 주는 것처럼 자신의 진심이 실리지 않은 언어는 남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문학에서의 언어는 곧 자신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이 가진 현재의 언어 밑천만을 가지고 시 쓰기를 시도하라고 권합니다. 시 쓰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분 속에 녹아 있는 언어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시 쓰기가 가능합니다.
개인이 가진 언어군은 그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과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자란 사람과 경상도에서 자란 사람, 산골이나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과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언어군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엏게 어떤 상황에 반응하고 갈등하면서 형성된 것이 그 사람의 언어 습관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오랜 시간 서서히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축적된 것들입니다.
그 언어들만 가지고도 일상 생활의 의사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듯이 시를 쓰는데도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시를 쓰는데 사용되는 별도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의 몸 속에 육화된 언어야말로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언어이며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시의 언어인 것입니다.
8. 단풍나무가 되는 나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죽여야겠다고/가을 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안도현 시인의 ‘단풍나무 한 그루’라는 시입니다. 온 산이 붉게 물든 이 늦가을에 무척 어울리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가을은 그리운 누군가가 절실하게 더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곧 퇴락의 겨울을 맞게 될 것이므로 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드는 것이지요.
시 쓰기에 앞서 남이 쓴 좋은 시를 많이 읽어 보는 것이 꼭 필요한데 이는 남의 좋은 부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며 시의 발상에서완성까지의 구체적인 방법을 익히는 공부가됩니다. 남의 시를 읽다가 자기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을 만나면 그 시인의 시집을 구해서 꼼꼼히 읽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공감한 시를 쓴 시인은 자신의 체질이나 성향에 맞는 시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그만큼 배울 점이 많습니다. 문학의 스승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나집니다.
그렇게 선택된 시를 읽을 때는 그 시를 쓸 당시의 시인의 마음이 되어서 읽어보십시오. 그 시인이 처한 환경 조건이나 심정을 유추하며 한 행 한 행 같이 시를 써 나가는 기분으로 읽는 것이지요. 위의 시 같은 경우는 가을비가오는 날 단풍나무 아래 서 보는 것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온통 몸이 달아 벌겋게 된 단풍잎, 그 사이에서 알절부절 못하고 찬비를 맞고 있는 나... 목석이 아니라면 누구나 처연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처연한 심정이 되면 모든 것이 간절해지는 법이고 그러면 누군가가 못견디게 그리워질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수순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도달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정황들을 어떤 식으로 엮어 구체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만 막연해집니다. 이제 그 한 해답을 시인에게 얻어봅시다. 우선 가을산 찬비와 나의 관계를 엮는 고리로 시인은 ‘너 보고 싶은 마음을 눌러 죽’이려고 가을산에서 청승맞게 찬비를 맞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없는 가을산에서 찬비를 맞고 있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이런 발상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라고 해도 그런 발상을 거쳐 그런 마음을 먹은 시인은 더욱 처연한 심정이 됩니다. 빗소리만 들리는 고적한 산중턱, 그리운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나. 이 정황은 비장한 정적이며 폭발 직전의 절정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이려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 하나의 발상이 가을산과 빗소리의 분위기를 시적인 정황으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풍나무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엮고 있습니까. ‘너 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밋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에서 드러나듯이 보고 싶은 마음을 더이상 어쩌지 못해 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비장한 인내와 비오는 가을산의 정적이 드디어 단풍으로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시적 대상과 시 쓰는 자아가 동일시되는 서정시의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9. 안개 속에 묻힌 나를 찾아
어느새 일 년의 마지막 달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늘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와 티끌만큼 남은 시간의 유한함에 몸을 떨게 됩니다. 한 장만 달랑 남아 있는 달력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바빠지고 다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달이기도 합니다. 정말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잠시도 멈추거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문학은 이런 세계의 유한함에 대항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한한 시간을 인정해 버리고 거기에 무방비로 던져진 상태의 인간은 무력해지거나 즉물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말을 앞두고도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끝나더라도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끝나면 세상도 끝나는 것으로 압니다.
문학은 이를테면 그런 현세적인 가치체계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자기만의 것에 골몰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과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삼라만상에 눈을 돌리도록 하는 것, 유한한 것이라고 믿는 인간의 시간을 무한한 순환의 수레바퀴로 돌려놓는 작업이 곧 문학이 추구하는 일입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 남의 인생까지를 참견해야 하는 문학은 그래서 고통스럽고 복잡다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툭 소리를 냈다.
위의 시는 오규원 시인의 「안개」라는 시입니다. 여기서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안개가 나를 가린다’가 아니라 ‘안개가 나를 지운다’고 말한 점입니다. 나 위주로 판단하면 안개는 분명히 나의 시야를 가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는 강과 돌, 초지와 둑, 망초같은 것들과 동격입니다. 그런 사물들과 함께 내 육체도 안개에 의해 서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나의 의식은 내 몸을 강둑에 버려둔 채 팔짱을 끼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자기자신까지도 객관하시켜 전체의 맥락 속에 놓을 수 있어야 참다운 글쓰기가 가능해집니다.
여기서의 안개는 무심히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일 수도 있고 우리의 존재를 갉고 지배하는 외부적인 힘이나 나태한 관습, 고정관념 따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안개에 가려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위기 상황을 인식한 내가, 내 존재의 여부를 확인해 보기 위해 하체를 손으로 툭툭 쳐 보는 것입니다.
문학은 이렇게 끝없이 자기 존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형체없는 안개가 자기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것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촉수로 무감각해진 자기 존재의 하체를 한 번 툭툭 건드려보시기 바랍니다.
10.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이제부터는 소설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소설이 시와 다른 점은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형식에 있습니다. 대체로 운문이 짧고 리듬이 있으며 행과 연을 가지고 있다면 산문은 일괄된 흐름을 가진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서사(敍事)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어떤 일을 서술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소설은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연륜 만큼, 그리고 생의 곡절 만큼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행동하고 생각하고 어떤 일에 휘말리는 사람살이가 바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도 꿈을 꾸기 때문에 그 꿈도 이야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야기에는 끝도 없습니다. 몇 사람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게 되는 것도 사람의 하루는 모두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바로 소설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소설이 이야기라고 한다면 어지럽기만 할 것입니다. 너도나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에 질서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러한 질서잡기를 소설의 형식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무엇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끝을 맺을 것인가 하는 계획이 있어야 겠지요. 하고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서 어떤 방법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은 소설이라는 틀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준비해야 할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개인에게나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소설의 주제를 설정하는 일입니다. 한 편의 시가 읽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듯이 한 편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어떤 일들이 의미있고 어떤 일들이 의미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느낌과 의미는 다르니까요. 그러므로 아무리 평범한 일상이라 할지라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느낌과 생각을 거기에 담아서 서술하느냐에 따라 진부한 이야기도 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면 구태어 소설이라는 방법을 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소설에 있어서도 시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관찰하고 그 세계 속에 놓인 자아를 살피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은 흔히 픽션이라 해서 허구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설에 있어서의 픽션은 어디까지나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있을 수 있는 일처럼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소설을 시작하는 경우에는 상상과 허구에 매달리기 보다는 현실에 비중을 두어 보는 것이 훨씬 쉬울 것입니다.
11. 소설과 로망스
앞에서 소설은 허구의 세계이면서 있을 수 있는 일을 서술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독자에게는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나 상식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일, 실제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등을 상상력으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이것을 소설에 있어서의 개연성(蓋然性)이라 합니다. 개연성이 없다면 소설은 르뽀나 생활문 또는 수필처럼 되어버릴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실제 일어난 것처럼 서술하는가 하면, 실제로는 A의 형식으로 일어난 일을 B의 형식으로 일어난 것처럼 창작해낼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소설 쓰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모든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 하나,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소설이 재미를 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계몽이나 교육 교화 등의 기능을 가지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런 기능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긴 글을 읽어내려면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펼치면서 교양과 계몽 또는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을 심어주는 아주 복잡하고 흥미로운 문학 장르가 소설이라는 말이지요.
범상한 일상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고, 또 사람의 상상력이란 너무나 무궁무진하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일은 그리 힘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께는 소설과 로망스의 차이점을 설명해드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소설의 특질이 서술과 이야기라고 하였듯이 로망스의 특질도 서술과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소설과 로망스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일까요?
우선 로망스라고 일컫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남자 주인공은 영웅호걸이고 여자 주인공은 절세가인입니다. 나아가 로망스의 남자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든지 평범하지 않고 영웅이 되어가며, 작가는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갖가지 덫을 놓아 주인공을 시험합니다. 물론 영웅의 잠재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은 결국 영웅이 되고 절세가인과의 사랑도 완성합니다. 그에 비해 소설은 당대 각 계층 사람들의 생활 사업 또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경험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서술합니다. 로망스가 일반적으로 현실도피의 성격이 강한 문학 양식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소설은 역사의 변화나 시대의 변화 등에 깊이 천착하는 경향이 있고, 삶에 대한 감상적 환상적 접근법을 경계합니다.
우리들 삶의 일상적인 문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라는 양식보다 일반 대중들이 로망스에 더욱 심취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로망스의 주인공들이 일상적인 여러 문제들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로망스는 멜로드라마라는 이름으로 많은 수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 형식은 공상소설 연애소설 괴기소설 탐정소설 등으로 다양합니다. 다분히 현실도피적인 성격이 강한 장르인 만큼, 로망스는 태평할 때나 어려운 때에나 현실 생활에 지친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12. 인과관계로 형성되는 이야기
이제 실제로 소설을 써 나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저는 우선 육하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하원칙이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느냐는 것입니다. 흔히 문장의 구성요소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육하원칙은 우연을 배제하고 사건과 인물, 인물과 인물, 사건과 사건의 철저한 인과관계를 형성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현진건의 <빈처>에 육하원칙을 대입시켜 보겠습니다. 우선 ‘누가’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빈처, 가난한 아내지요. (여기서 화자(나)와 주인공을 혼돈해서는 안되겠지요. 주인공은 아내이지만 아내의 모습이 나를 통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를 때 ‘나’를 말하는 사람, 혹은 화자話者라 부릅니다.) 다음은 ‘언제’ ‘어디서’가 되겠는데, 말할 것도 없이 현진건이라는 작가가 살았던 1920년대의 도시 변두리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는 실제로 작품을 보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이 어째 없을까?”
아내는 장문을 열고 무엇을 찾더니 입안말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없어?”
나는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책장만 뒤적뒤적하다가 물어 보았다.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았는데.”
시작부분입니다. 아내는(누가) 모본단 저고리를(무엇을) 찾고 있습니다(어떻게). (왜) 찾는 것일까요? 먹을 것이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짧은 예문으로 제시한 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도 빈처의 전체를 살펴 보아도 육하원칙에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와 아내가 결혼을 하여 그처럼 빈곤하게 사는 원인이 엄격한 인과관계에 의해 설정되어 있습니다. 소설에 있어서의 육하원칙은 단락 단락 뿐만이 아니라 전체를 통털어서도 어김없이 지켜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지요. 이 육하원칙이 소설론에서는 인물 배경 사건 주제 등으로 설정되어 많은 이론을 낳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근래에 히트한 <좀머씨 이야기>에도 누가(좀머씨가) 언제(오래 전, 수 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어디서(시골 마을) 무엇을 어떻게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는 일 외에 몇 가지 일들) 왜(글쎄, 왜 그랬을까요?)를 대입시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요소들은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왜’는 가끔 분산되어 있거나 숨겨져 있을 수 있기도 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왜’를 되도록이면 드러내지 않고 여운으로 처리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주제가 너무 선명하게 부각되면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계몽소설이라든지 교양소설 등은 너무 옳은 이야기만 늘어 놓아서 상상하고 즐기는 맛이 줄어들지요. 좀머씨 이야기에서처럼 작가는 ‘왜’를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독자로 하여금 다양하게 주제를 인식함으로써 읽는 재미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삶의 진리를 탐구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13. 소설의 구성(플롯)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엄격한 인과관계를 토대로 하여 쓰여지는 개연성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지난 회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인과관계란 육하원칙에 따라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소설을 쓰려면 우선 단단히 계획을 세워야겠지요. 하고 싶은 이야기나 주제를 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배열하는 것이 좋을까, 또 주인공이 직접 이야기하게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게 할까 등등의 문제 등, 사람 사는 세상에서의 하고많은 이야기를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법으로 써 나가기 위해서는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지요.
소설의 구성 요소는 플롯과 인물 주제 문체 배경 사건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요소들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각각의 요소가 적절하게 배합되어야만 소설이라는 문학 작품이 탄생하게 됩니까요. 이번 회에서는 플롯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플롯은 흔히 구성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 소설의 뼈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건축물을 세울 때도 철근으로 골조를 먼저 세우듯이 소설에 있어서도 튼튼한 구성을 가진다는 것이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짓는다고 보아도 좋겠지요. 철근으로 골조의 틀을 잡고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운 건축물의 경우에는 사소한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치장이 화려하고 외관상 보기 좋아도 기초공사를 잘 하지 않은 건물은 불안할 것입니다. 소설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문장, 누구나 관심을 가질 문제적 인물, 재미있는 스토리의 전개가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배열하고 배합해야 하느냐에 따라 튼튼한 작품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부실한 작품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면 플롯은 어떻게 시도하는 것이 좋을까요. 물론 여러분의 마음대로 입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강요할 권리도 없는 여러분의 재량에 따라 플롯은 이루어집니다. 다만 재량에 따라 선택을 할 때 최선의 방법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대소설이나 역사 전기 소설, 그리고 르뽀같은 종류의 글들을 보면 사건의 전말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옮겨 놓고 있거나 아니면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법을 평면적 구성이라 합니다. 평면적 구성은 가장 사용하기 쉬운 방법입니다. 하지만 현대소설은 평면적 구성만으로는 결코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현대의 소설이 담고자 하는 다양한 인간의 내면이나 의식의 변화 그리고 사건들은 복잡미묘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성의 방법 또한 복잡해져야만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바뀌어 서술되기도 하고, 현재 속에 과거가 끼어들어 주인공의 의식을 지배하기도 하는 심리묘사를 시도할 경우에는 더욱이 복잡한 구성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성을 입체적 구성이라 하는데, 독자에게는 읽는 재미를 더해주지요.
하지만 입체적 구성을 시도할 경우에는 꼭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평면적 구성과는 달리 입체적 구성에 있어서는 자칫하다가는 스토리 전개의 일관성을 상실할 수도 있고, 그것은 결국 소설 전체의 통일성을 잃어버리게 하니까요. 소설을 쓸 때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말은 아마 이러한 구성의 문제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군요.
14, 인물의 설정
플롯의 가닥이 잡히면 소설을 쓰려는 계획의 기초는 세워진 셈이 됩니다. 다음은 인물을 설정할 차례인데 플롯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미 인물에 대한 구상도 어느 정도는 확신이 서 있을 줄 압니다. 이야기란 어차피 인간과 사회, 인간과 인간의 갈등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인 만큼 어떤 인물이 플롯의 여기저기에 관여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갈 것인가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니까요. 다시 말해서 플롯을 생각한다고 해서 플롯만 따로, 인물을 설정한다고 해서 인물만 따로 분리시킬 수 없도록 소설은 플롯과 인물, 주제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요. 이렇게 플롯과 인물을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은 사실 설명하는 입장의 편리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소설에서의 인물은 우선 평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즉 문제성을 가진 인물이어야만 소설의 주인공으로 적합하다는 말입니다. 흔히 기구한 운명에 처한 사람더러 소설의 주인공 같다느니 영화의 주인공 같다느니 하고 말하는 것도 소설의 인물은 상당히 문제가 많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지요. 이 인물의 문제성이야말로 소설의 주제를 드러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글쓰는 이가 소설을 통해 사회에 던지려는 메세지가 주제라고 한다면, 주제를 전달할 수 있는 매개는 당연히 인물의 몫일 테니까요.
여기서의 문제성이란 쉽게 말해서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갈등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계맺음에서 느끼는 갈등으로 인해서 인간은 고민하고 방황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갈등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만나기도 하고 삶의 진리를 깨닫기도 하니까요. 소설을 써나가는 일은 어쩌면 이러한 문제적 인물이 안고 있는 문제성을 분석하고 갈등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무조건 많은 문제성을 가진다고 해서 인물이 특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성을 가지되 장편이냐 단편이냐에 따라 문제성의 범위가 한정될 수도 있고, 하나의 문제성이 한 작품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 단편의 경우에는 대개 단일한 문제성을 가지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주인공의 심리적 불화라든지, 남편과 아내의 갈등, 교사와 학생간의 문제, 직장에서의 상하관계 등등은 물론이고 개인이 사회구성원으로 살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사회문제나 정치문제까지도 문제성이고 갈등이지요. 장편의 갈등구조는 이러한 단편의 갈등구조들이 여러 번 겹쳐지고 복잡하게 얽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소설적 인물이란 어떤 문제성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사람은 누구나 문제성을 가지고 있고 개인과 사회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인물에 문제성을 부여할 때에는 개성과 독창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개성과 독창성은 인물의 성격과 행동에 아주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인물의 창조이고, 인물의 창조는 소설의 성패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 회에 예를 든 ‘좀머씨 이야기’에서 좀머씨는 폐소공포증이 있고, 날마다 걸어다니기만 하는 괴상한 성격의 소유잡니다. 좀머씨의 독창적인 행동과 성격은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좀머씨가 안고 있는 문제성이 성격을 창조하는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5. 인물 만들기의 예
전 회에서는 인물을 설정할 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독창적인 문제성을 지닌 인물이 소설적 재미를 더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독창적인 문제성’을 지닌 인물이라 하니까 정신병동에서 격리되어 지내는 사람이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은둔자, 혹은 범죄자 등만을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말하는 보통 사람들에게서야 독특한 문제성이 있을 리도 없으니까 소설적 인물로 끌어들이기를 망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망설임 속에 문제성의 핵심이 숨어 있습니다. 소설의 문제성은 범죄자 정신병자 등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친구 가족 직장 동료들과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사소한 의견 충돌과 세계관의 대립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하소설이거나 장편소설이거나 문제성은 개인에게서 시발하여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문제성으로까지 확대되고 발전되어가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수박을 먹을 때 박이라는 사람은 수박씨를 다 빼 낸 다음에야 먹고, 김이라는 사람은 수박씨 같은 것은 괘념치않고 무조건 먹는 버릇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박과 김이 한 자리에 앉아서 수박을 먹게 되면 두 사람 다 아주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수박씨를 빼지 않으면 수박을 먹을 수 없는 박이 이쑤시개나 젓가락, 심할 경우에는 씻지도 않은 손으로 수박씨를 빼는 행위를 보면서 김은 박에게 좋지 못한 선입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 저렇게 까탈을 부리는 것으로 봐서 아주 옹졸하고 융통성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 판단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박은 새까만 수박씨를 꿀꺽꿀꺽 삼켜가면서 단숨에 수박을 먹어버리는 김을 성급하고 참을성없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김과 박이 드난없이 지내는 사이거나, 좋은 감정으로만 본다면야 수박을 어떻게 먹든지 상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는 보여지는 행동이나 말씨가 많은 작용을 하니까요.
수박을 함께 먹게 된 두 사람이 상대방의 사람됨을 판단하게 되는 문장을 작성해 보겠습니다.
나(김)는 물끄러미 건너편에 앉은 남자(박)를 바라보았다. 자기 앞에 놓인 접시로 수박 한 조각을 집어다 놓고 그는 이쑤시개로 씨를 빼내기 시작했다. 까맣고 미끄러운 수박씨가 접시에서 미끄러져 탁자에 떨어지자, 그는 냅킨으로 떨어진 수박씨를 집어 접시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고 붉은 수박의 속살에서 빠져나온 씨를 흰 접시 위에 가지런히 줄지어 세운 뒤 마치 스테이크라도 먹듯이 포크와 칼로 수박을 자르는 것이었다.
‘글렀어. 평생은 커녕 사흘도 함께 못 살 남자야. ’
침을 튀기며 남자의 배경과 학력을 떠벌이던 중매쟁이의 말에 솔깃해져서 맞선 자리에 나온 자신에게 화풀이라도 하듯이 나는 수박 한 조각을 집어 아구아구 베어먹었다. 남자가 움찔하면서 나를 보았다. 나는 수박물을 튀기면서 수박 한 조각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뒤, 남자를 향해 말했다.
“수박은 이렇게 먹는 거예요.”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인식되어진 개인의 문제성은 대단치 않은 것 같지만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사회의 문제성으로까지 자연스럽게 확대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고, 소설적 인물의 창조에 기여하게 된답니다.
16. 주제의식 살리기
지금까지 말씀드린 구성(플롯)이라든지 인물의 창조 등은 어찌 보면 소설의 바깥 모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어떻게 엮어 나가야 할 것인가라든지, 주인공이나 등장 인물의 성격은 어떻게 할까 등등의 문제는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일 뿐이라는 말이지요. 요즘이야 워낙 물자가 풍부해서 외양을 세련되게 잘 꾸미는 사람이 눈에 띄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마다의 숨겨진 내면은 외양만으로는 판단하기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수수하게 차려 입은 사람일지라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내면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가 하면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행실에 믿음이 없어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도 있지요. 외양도 보기 좋게 간수하면서 덕과 인품으로 내면의 향기까지 갖추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개성 있는 묘사와 단단한 구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등장 인물과 함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하는 주제를 갖추고 있다면 참 좋은 소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허하고 황량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겉치장을 잘 해도 존경받을 수 없는 것처럼 주제가 없는 소설이란 한갓 시시한 이야기거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소설에서의 주제란 작가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사물과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아름다운 꽃과 날아다니는 새를 보더라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듯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마련입니다. 옳다 그르다의 판단을 내릴 수 없을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요즘 세상은 더구나 개인의 가치관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요. 이러한 혼란 가운데서 나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저것은 저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보편적인 진리에 바탕을 둔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이 서 있어야 할 것이고, 그 가치 기준을 세계관의 뿌리라고 보아도 좋겠지요. 그러한 세계관의 입장이 소설을 쓰려는 목적과 부합되어 소설 속에서 하나의 주장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주제, 혹은 주제 의식이라 합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일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다면 소설은 따분한 설교조의 문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분하고 설교만 늘어놓는 글이라면 구태여 소설을 택해 읽을 필요도 없고 쓸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세계관을 드러내 보이는 한편, 자기의 주장(주제의식)에 많은 사람이 동조해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독자가 따분하다고 외면한다면 소설로서의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일일 테고, 그렇다면 결국 자기의 세계관을 다른 사람에게 펼쳐 보이는 일에도 실패하는 셈이 되겠지요. 작가가 자신의 주제의식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주제의식을 내보이지 않고 소설을 이끌어 나가면서 독자를 작품 속으로(작가의 세계관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성공하고 있습니다만, 직접 소설을 써 보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17. 문체의 힘
지금까지 여러가지 면에서 소설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피상적일 뿐입니다. 소설이란 것이 주제며 구성 문체 사건 등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문학장르이고, 사람마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입장이 다르기도 한 만큼 소설을 써보겠다고 작정하신 분이라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소재를 취재하는 일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실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많은 연구자들이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정의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요즈음처럼 다양한 개성을 지닌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어떤 형식이든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소설을 쓰려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일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한 소재를 동원해서 다른 사람이 이제껏 시도한 적이 없는 주제를 드러낸다든지, 구성을 아주 특이하게 해서 소설을 읽는 새로운 재미를 제공한다든지 하는 일도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일 중의 하나이겠고, 사건의 배경이나 서술 방법(묘사)을 통해서 자기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의 개성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펼쳐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문체가 아닐까 합니다.
문체란 흔히 스타일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 작가가 이야기하는 투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말투가 제각각 다르듯이 작가도 작중 화자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투가 다 다르고, 그것이 어떤 톤을 가지기도 하고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소설의 얼굴이 문체라고나 할까요.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소설도 문체라는 얼굴을 가지고 작가의 개성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카운터 앞자리에 앉아 방금 중국집에서 배달해 온 자장면을 먹고 있었다. 소리를 내며 먹지 않으려고 그녀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은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검은 면발이 저지른 소리는 이쪽까지 분명히 들려왔다. 그녀는 정말 소리없이 하느작거리며 가만가만 먹이를 먹고있는 물고기처럼 보였다…
- 윤대녕 <은어> 중에서
그 뒤로도 부월은 뻔질나게 주방을 드나들면서 마치 어미제비가 벌레를 물어오듯 부지런히 새로운 소식들을 문간방으로 물어날랐다. 더부살이 부부가 느끼는 궁금증이 어느 정도인지 뻔히 알면서도 입이 천근인 집사 여편네는 보따리째 한꺼번에 확 풀지 않고 야금야금 한 토막씩 꺼내어 알려줌으로써 사람을 더욱 감질나게 만들곤 했다…
- 윤흥길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중에서
위의 예를 통해 문체가 바로 작가의 얼굴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윤흥길은 <장마>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을 통해 리얼리즘 작가로 알려져 있고, 최근에 부상한 젊은 작가 윤대녕의 소설은 <빛의 걸음걸이><남쪽 계단을 보라>에서도 나타나듯이 신선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현실보다는 현상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18.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자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로 만원이었습니다. 그 출근길 지하철 풍경을 취재하러 온 기자가 있다면 ‘아주 복잡한 출근길’이라거나, ‘기름값이 상승하고 있는 요즈음은 자가용 대신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고 표현하겠지요. 하지만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분이라면 이렇게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 아침에는 승용차의 키를 아내의 화장대 위에 얹어 두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읽는 사람은 왜 그랬을까 하는 유추와 상상을 할 것입니다. 열쇠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잊어버렸을까, 아내와 싸웠을까, 해고를 당해 직장 대신 배회할 곳을 찾아나선 것일까, 감봉을 당해 더이상 승용차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갑자기 일이 생겨 아내가 차를 이용하게 된 것일까 등등의 여러가지 상상이 가능해집니다.
여러분이 직접 한 번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보기 바랍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자동차 키를 두고 나온 것이 아주 평범한 우연으로 생각되겠지만 그 원인에 따라 앞으로 얼마든지 복잡하고 미묘한 사건들이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먼저 자신의 주변과 일상을 통해 사건의 인과관계를 만들고, 거기에서 내포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소설의 출발입니다.
소설을 쓰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기심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독자를 붙들어두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두서없이 말씀드린 것들은 소설 쓰기의 방법에 있어서는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설에 대한 이론들은 이미 많은 책으로 나와 있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작품을 써 나가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에 어떤 모범답안이 없듯이 소설을 쓰는데도 정해진 길은 없습니다. 소설 역시 하나의 예술 양식이라는 점에서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그 규격화된 이론들이 오히려 방해가 될뿐입니다. 그러므로 소설 쓰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작품이 되든 되지 않든 일단 쓰기를 시작해 보는 것이고 이론은 자기점검을 위해 필요한 차후의 문제입니다.
소설 쓰기 강좌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생활 주변에 널려 있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스토리)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제) 다른 사람에게 조리 있게 전달(구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입니다. 매일 대하는 얼굴과 또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사들이 지루하고 짜증날 때, 이 일이 이렇게 전개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 번 해보기 바랍니다. 구태여 소설을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무가 쭉쭉 잘 자라게 곁가지를 잘라주듯이 매 시간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의미 있는 일만 새겨두었다가 생의 원리와 순리에 따라 일이 얽히고 풀리는 과정을 되새겨보십시오. 그러면 소설의 본질이 무엇이고, 왜 소설이 쓰여지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만으도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쓰여진 한 편의 소설은 여러 사람의 가슴에 깊은 향기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