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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황씨(昌原黃氏)제4편
호장공계 역사,문화재,유적, 유물 현황
제1장 창원황씨(昌原黃氏)호장공계
창원황씨(昌原黃氏)호장공계는 고려조 대상(大相)을 지낸 황석주(黃石柱)의 조부(祖父)
고려조 의창현(義昌縣) 정조호장(正朝戶長)황양충(黃亮冲)을 시조로 한다.
호장(戶長)은 향직(鄕職)의 가장 윗자리이고 여사선거지향직고(麗史選擧志鄕職考)에는 여러대에 걸쳐 우미(優美)한 가풍을 지닌 자손에게는 처음에 병사(兵史)나 창사(倉史)부터 임명하여 호장에 이르게 하고 가풍이 불급(不及)한 집안은 공수(公須)나 약점(藥店)등 까지 만을 시켰으니 이로 미루어 계대이전(系代以前)에 착적(着籍)이 오래되고 또한 가풍이 뿌리가 깊었음을 알수 있다.
창원황씨는 임계병화(1592년)에 보첩이 소실되어 그 선대를 실전하여 고증할 길이없다.
창원황씨(昌原黃氏)호장공계 대표적인 인물은 3세 고려조 대상(大相)을 지낸 황석주(黃石柱)와 12세 호조판서,병조판서,예조판서, 이조판서,우찬성 황사우(黃士祐)1486년(성종17)~1536년(중종31)자는 국보(國輔)호는 용헌(傭軒,병산 출생~7세 백동 이거),14세 예조참판 대사헌 대사성 증 이조판서 황섬(黃暹)1544년(중종39)~1616년(광해8)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息庵) 돈암 시호는 정익(貞翼) 이다.
근세에는 22세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五衛都總府副總官)을 지낸 황중걸(黃中杰)의 현손인 27세 외무고시 합격, 주 제네바 대표부 공사,주 튀니지 대사관 대사, 주 대만 대표부 대사를 역임한 황용식(黃龍植)1944년5월28일생이 있다.
황용식(黃龍植)
대구 광역시 북구 노곡동 557-2
3세조 황석주(黃石柱) 묘소 및 선조 8위 묘소
경남 창원시 적현동 산20 번지
제2장 창원황씨(昌原黃氏)병산(屛山) 입향조
순흥부(順興府) 소산(素山)(현재 병산) 입향
창원황씨(昌原黃氏) 7세 신호위정용중랑장(神虎衛精勇中郞將) 황승후(黃承厚) 께서 고려 공민왕6(1357)년 정유(丁酉)년에 신호위정용중랑장(神虎衛精勇中郞將)이 되어 그해에 창원에서 죽주(竹州 순흥부(順興府) 소산리(素山里) 현 병산리(屛山里)로 옮겨 오셔서 죽주안씨(竹州安氏)와 혼인 하였으며 자(子) 처중(處中) 여(女) 이의생(李義生)이며 창원황씨의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개척 하신 분이다.
7세 입향조 황승후(黃承厚) 재실
소재지:경북 봉화군 물야면 두문리 2리
7세 병산 입향조 신호위 중랑장 황승후(黃承厚) 묘소(배 죽주 안씨 합폄)
소재지:경북 봉화군 물야면 두문리 2리
경북 봉화군 물야면 두문리
7세 병산 입향조 신호위 중랑장 황승후(黃承厚)는 고려 때 大相을 지낸 3세조 석주(石柱)의 현손으로 창원에서 병산으로 이거하여 20여대를 지난 지금 많은 후손이 병산을 기점으로 백동,문단,인천강화등 전국으로 이거 되었으며 본향 창원에서 옮겨 와 여기 병산 입향 2015년(을미년(乙未年)이 658년의 긴 세월 터전을 열었으니, 정착 연대가 매우 오랜 뿌리 깊은 가문이다.
입향조(入鄕祖) 승후의 아들 처중(處中)이 조선 초에 영일감무(迎日監務)를 지내고
손자 제(躋)가 서승(署丞)을 전(躔)이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지냈으며 제(躋)의 증손 한충(漢忠)이 학식과 덕망이 높아 도고서원(陶皐書院)에 제향(祭享). 그 밖에도 여러 사마(司馬), 좌수(座首),문행(文行)이 배출되었다.
봉례공(奉禮公) 황전(黃躔)의 자손이 풍기 희여골(白洞)에 옮겨 살아, 증손이 호조판서,예조판서 이조판서,우찬성 황사우(黃士祐)1486년(성종17)~1536년(중종31)자는 국보(國輔)호는 용헌(傭軒), 현손이 예조참판 대사헌 대사성 증 이조판서 황섬(黃暹)1544년(중종39)~1616년(광해8)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息庵) 돈암 시호는 정익(貞翼) 이다. 황사우(黃士祐)도 이곳 병산에서 태어 났다.
8세 영일현감공(迎日縣監公) 황처중(黃處中)의 묘소
영일현감공(迎日縣監公) 황처중(黃處中)1398년 조선조 태조 7년에 영일현감(迎日縣監)이시며 배(配) 무송예(茂松曳)씨와 혼인하여 자(子) 제(躋), 전(躔) 여(女) 김존(金存)이다.
소재지: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2리 소지골
8세 영일현감공(迎日縣監公) 황처중(黃處中)의 묘산도
영일현감 휘 처중 묘갈명 (迎日縣監 諱 處中 墓碣銘)
창원지황(昌原之黃)은 세칭동국대성(世稱東國大姓)이라.
공의 휘는 처중(處中)이니 고려조 호장이신 휘 양충(亮冲)이 공의 시조이시다.
이전(二傳)하여 휘 석주(石柱)는 관금자광록대부상주국대상 (官金紫光祿大夫上柱國大相)이요. 이전(二傳)하여 휘 유(裕)는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등문과(登文科)하여 관동래부사(官東萊府使)며 이전(二傳)하여 휘 승후(承厚)는 공민왕조(恭愍王朝)에 관지신호위정용중랑장(官至神虎衛精勇中郞將)이니 곧 공의 선부군(先府君)이시다.
공민왕(恭愍王)6년 정유(丁酉 1357)에 자창원(自昌原)으로 여공이래(與公移來) 순흥(順興)하여 자손이 잉거언(仍居焉)하다.
공은 조선태조 7년 무인(戊寅 1389)에 관영일감무(官迎日縣監務)하시다.
자여생졸(字與生卒)은 부전하고 묘는 재순흥 지동 소지곡 자좌(在順興之東蘇池谷子坐)하며 육대손인 관승지 시 (官承旨 是)가 수묘표 입갈(修墓表立碣)하 고 외예손 영천군수 김륵공(外裔孫榮川郡守 金玏公)이 수수갈통문(修竪碣通文)하여 조사(助事)하다.
배위숙인(配位淑人)은 무송유씨(茂松庾氏)이니 고려조에 관찬성판내부사(官贊成判內府使)인 당(璫)의 따님이며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인 금필의 후예이니 생기(生忌)는 부전하고 묘는 재 봉화군 물야면 서리 만석산 간좌지 원이라.
계배숙인(繼配淑人)은 화산권씨(花山權氏)이니 부조(父祖)와 생졸(生卒)은 구부전(俱不傳)하고 묘는 재 영주 이산면 운문리 새답이라 생 3남 1녀라 장(長)은 제(臍)이니 세종조(世宗朝)에 관도염서승(官都染署承)이요.
차(次) 장 은 무사(無嗣)하고 전(躔)은 세종조에(관통례원봉례(官通禮院奉禮)인데 증손사우(士祐) 의 귀로 증공조참판(贈工曹叅判)에 추증되고 숭보사(崇報祠)에 제향 되었으며 여(女)는 적군수김존(適郡守金存)하다.
증손사우(士祐)는 관우찬성(官右贊成)하고 현손 섬(暹)은 대사헌(大司憲)이며 현손 시(是)는 관지도승지(官至都承旨)하니 오호라 공지적덕여음(公之積德餘蔭)으로 자손이 번연(繁衍)하며 대소과환(大小科宦)이 전후상망(前後相望)하니 불능진기(不能盡記)라.
묘도유고갈(墓道有古碣)이나 세구태심(歲久苔深)하고 마륵우심(磨泐尤甚)하여 음기박락(陰記剝落)일세 내어종회(迺於宗會)에 준발개수지론(峻發改竪之論)하여 류불녕(謬不佞)에게 촉수천지명(囑隧阡之銘)이라. 고여멸학(雇余蔑學)이 하감당시기(何敢當是寄)리요.연이나 첨재외예지말(忝在外裔之末)하여 심이탁명기하(深以托名其下)로 위영요 (爲榮耀)하고 수불뢰사(遂不牢辭)하며 안장이위지명(案狀而爲之銘)하니 명(銘)왈 세덕연면(世德連綿)하니 원심류장(源深流長)이라 기려불억(其麗不億)하여 위세동량(爲世東樑)이라. 울울송백(鬱鬱松栢)은 묵방산양(墨坊山陽)이라 아명정민(我銘貞珉)하여 백세유방(百世遺芳)이라.
서기2001년 신사 추 8월 하순 외예손 야성(冶城)송홍준(宋鴻俊)근찬
9세 승사랑도염서승(承仕郞都染署承)황제(黃躋)
공은 서승공파(署承公派) 시조이며 배(配) 화산권(花山權)씨와 혼인하여 자(子) 영손(永孫), 여(女) 윤중은(尹仲殷)이다
병산에서 영주 내마암(內馬巖 현 휴천동)이거 하였다.(생몰미상)
9세 서승공(署承公) 황제(黃躋) 묘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소지골)
9세 서승공(署承公) 황제(黃躋) 묘산도
소재지: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소지골)
제3장 창원황씨(昌原黃氏)봉례공계 병산
9세 통덕랑통례원봉례(通德郞通禮院奉禮) 황전(黃躔 )1391년(공양왕3)~1459년(세조5) 세종(世宗)8년(1426) 35세 때에 통덕랑통례원 봉례(通德郞通禮院奉禮)를 지내시고 1459년 배(配) 정부인 곡성임(谷城任)와 혼인하여 자(子) 귀경(貴卿),직경(直卿),의경(義卿),신경(藎卿),언경(彦卿),윤경(允 卿) 여(女) 허윤공(許允恭),노계조(盧繼祖) 6남 2여를 두시고 유생들의 후학과 학문 연마를 위해 소산서원(현 첨모당)을 건립하여 병산(屛山)에 은거중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 복위 운동(1457년) 에 큰화를 이르킬줄 미리 아시고 칭병은거(稱病隱居)하여 화를 면하고 자손을 보존 하였으며 영주,병산 중흥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1459년 별세 (향년 69세)숭보사(崇報祠)에 모셨고 1535년(중종30)공조참판(工曹叅判) 증직.
첨모당 (瞻慕堂) 9세 봉례공 황전께서 유생 후학과 학문을 위한 (구 소산서원)
소재지: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1리 315번지
첨 모 당 (瞻慕堂)전경 (경상북도 문화제 자료 제 315호)
숭 보 사(崇 報 堂)
통덕랑통례원봉례 증 가선대부 공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황전
배 정부인 곡성임씨 위패를 모신 숭보사
숭 보 사(崇 報 祠)내 위패 봉안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1리 315
첨 모 정 (瞻 慕 亭)
소재지: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315번지
병산 갈참나무(대한민국 천년기념물 제 285호)
(1426년 통덕랑 통례원봉례 증 가선대부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황전 9세조 기념식수)
소재지: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1리 산 338 번지(병산마을 수호 서낭 나무)
갈참나무는 우리나라 각 처에 자생하지만 특히 중부지역에 많이 자라는 낙엽성의 넓은 잎을 가진 나무이다.병산 갈참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 이며 크기는 높이 15m 나무 둘레는 4m이다.마을 앞쪽 언덕의 평탄한 곳에 충분히 자랄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아랫쪽 곁가지는 굵고 길게 뻗어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다.
이 나무는 동리의 서낭 나무로 매년 정월 보름에 동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동민들의 건강과 무병을 빌고 액을 물리쳐 마을의 풍년을 목적으로 나무 아래서 동제를 올린다.
이 갈참 나무는 통덕랑통례원봉례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황전( 黃躔)
9세조께서 조선 세종 8년(서기1426년)병산 처음 입향 하여 기념 식수 하신 나무이다.
이제 대한민국 천년기념물 제285호 문화제가 우리 병산에 있다는 것은 자랑스럽고 황씨 문중의 자부심입니다.
잘 관리하여 자손만대 갈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 후손들의 몫 이다.
병산마을 수호 서낭제 바위돌 (일명: 허장군 바위 돌)
허장군 (허윤공 별칭)바위돌 유래
통덕랑 통례원 봉례 증 가선대부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황전(黃躔)1391년(고려공민왕3)~1459년(세조5) 자 형보(亨甫) 의 사위 공주판관(公州判官) 허윤공(許允恭) 1414년(태종14)~미상 자 효응(孝應) 호 남재(南齋)의 아버지는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분연히 벼슬을 그만두고 노구를 이끌고 영월로 달려가 단종을 추종하다가 단종이 승하하자 영월의 산속에 숨어 삼년상을 마치고 또한 그곳에서 일생을 절행(節行) 한 공조참판(工曹叅判) 허방(許邦)1391년(공양왕3)~1459년(세조5) 자 중안(仲安) 호 석헌(石軒)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주오씨 군수 상지의 딸이다.
출생지는 진천(鎭川) 금곡리(金谷里)에서 태어났다. 비범한 자질에 행실이 도탑고 문장이 뛰어났다
일찍 사마(司馬)에 올라 벼슬이 공주판관(公州判官)에 이르렀다.
단산 양천허씨 문중의 입향조로 이 또한 단종에 대한 절신 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그가 단산으로 들어온 연유에 대해서는 그의 부친인 방(邦)과 함께 단종이 있는 영월로 갔다가 그곳에서 금성대군이 있는 순흥으로 가서 금성대군을 도와 주라는 부친의 명에 따른 것이라 한다.
정축지변 (丁丑之變) 1457년10월9일 (세조3)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의 단종복위운동(端宗復運動)거사 실패(노비 밀고) 사건 당일 공은 장인 봉례공 황전(黃躔)이 단산면 병산1리 315번지 첨모당 (당시 소산서원) 에서 칭병은거 중에 있어 병문안 인사를 드리고 단종복위운동 거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봉례공 황전((黃躔)께서 사위 허윤공(許允恭)이 거사에 참석하면 큰 화를 당할 것을 예견하고 찿아온 사위에게 칭병으로 너무 무료하니 바둑을 좀 두자고 청하여 의도적으로 몇시간을 지체 하였는데 순흥 거사 장소에서 큰 불기둥이 치솟아 올라 허윤공께서 급히 말을 타고 병산 마을 뒷산 시루봉에 올라 순흥쪽을 바라보니 단종복위 운동 거사가 실패되고 정축지변의 큰 화가 발생되어 허윤공(許允恭)께서 거사 실패에 대한 분노와 화를 삭히지 못해 시루봉 산에 있던 바위돌을 옆구리에 끼고 말(馬)을 타고 달려 내려 오던중 단산면 병산1리 345-3번지 에서 타고 달리던 말(馬) 이 곤두박질 치며 다리가 부러지고 그자리에서 죽어 말(馬 )은 그곳에 자갈돌 무덤으로 묻어 주고 허장군이 가져 갔던 바위돌은 그 자리에 표지석으로 했다.
그후 허윤공(許允恭) 이 별세한 다음 병산1리 동민들은 정축지변으로 희생된 많은 영혼과 허윤공의 충절과 그자리에서 죽은 말(馬)의 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정월 보름날 0시 그 장소 표지석 바위돌과 병산 갈참나무(대한민국 천년기념물 제285호)에 동제를 지내다가 2013년에 갈참나무와 떨어져 있어 동제사 지내기가 불편하여 병산마을 동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바위돌을 갈참나무(단산면 병산리 산 338)옆으로 옮겨서 계속 동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와 같이 그가 단산으로 들어 온것 또한 단종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사실로 짐작이 된다.
당시 처가이던 단산에 은둔처를 마련하여 평생 단종에 대한 흠모와 절행을 하였다.
공의 아들 허지(許智)1434년(세종17)~미상 자 감옹(鑑翁)또한 보령현감(保寧縣監)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영월을 향해 오던 도중에 병사 함으로써 가히 3대에 걸쳐 단종에 대한 지고한 절의를 보여준 가문으로 전해진다.
관계 유물로는 허방(許邦) 허윤공(許允恭) 허지(許智) 3대의 시와 행적을 모아 엮은 "삼절당실기"가 있다.
또한 그 3대의 절의(節義)를 추모하여 지은 삼절당(三節堂)이 단산면 사천2리(띠기)에 있으며 보계당(保繼堂)이 부석면 보계리에 있다.
단종충의록(端宗忠義錄)에 그의 사적이 전하고 있다.
삼절당(三節堂) 허방(許邦),허윤공(許允恭),허지(許智)절의를 추모하여 지은 당(堂)
소재지:경북영주시 단산면 사천2리(띄기)
경북 영주시 단산면 사천2리 (띄기)
9세조 통덕랑통례원봉례 황전( 黃躔) 묘소
소소재지:경북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 산20번지(문좌실)
9세 봉례공 휘 전 묘소 항공 사진
21세조 이첨공 휘 두한(黃斗漢) 묘소
소재지:경북 영주시 순흥면 지동(재방리)
21세조 황두한(黃斗漢) 1762년(영조38)~1833년(순조33) 초명(初名)태한(台漢)
자는 이첨(爾瞻) 호는 소행재(素行齋) 증 가선대부이조참판(贈 嘉善大夫吏曹叅判)
순흥부향장(順興府鄕長) 소수서원원장(紹修書院 院長)
22세조 황중걸(黃中杰) 묘소
소재지: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2리 (서창) 22세조 황중걸(黃中杰)1816년(순조16)~1903년(광무7) 자는 치흥(穉興)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總府副總官),소수서원원장(紹修書院 院長)
22세조 황중걸(黃中杰) 배 정부인(配 貞夫人)야성송씨(冶城宋氏) 묘소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1리(뒷산 여바우골 입구)
26세 황윤덕(黃潤德) 추모비(追慕碑)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1리 (첨모정 옆)
26세 황윤덕(黃潤德)1905년~1948년 자는 덕경(德卿) 호는 단암(丹菴) 단산면장 역임
병 산 마 을
창원황씨 세거 700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함께 이어 내려오고 있는 병산은 소백산 정기 받아 뻗어 내린 아름다운 산 자락 밑 동남 방향으로 마을 앞에는 드넓고 비옥한 전답과 소백산 발원지서 옥수 같은 맑은 물 내려오는 단산천이 흐르고 마을 뒤를 휘감아 둘러싼 산 기슬의 우측 끝은 군자봉이요 좌측 끝은 옥여봉이다.산수가 수려하고 풍부한 병산 마을은 현달 하신 선조님께서 후손들이 벌족의 후예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높이고 유구한 자손 만대 천만년을 위해 자리 잡은 천혜의 배산임수의 터 명당 마을이로세
병산마을 전경
병산1리 표지석
병산마을 표지석과 좌측은 소산정 정자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1리 (마을회관앞)
창원황씨 대상공파 행열표
다음 제5편은 창원황씨 대상공파 봉례공계 백동 입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을미년 새해
황 윤 진 올림
첫댓글 방대한 자료를. 찾으셔서 기록하시고 후손들을 위해 수많은 나날을 보내시며 카페에 올리시느라 무한. 노고를 아끼시지 않은 회장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조상에 관한 것을 후손에게 알리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