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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체화서원 + 체화당사 및 사적비 ↝ 것대산봉수지 ↝ 청주 초정행궁 ↝ 손병희선생유허지 ↝ 청원안심사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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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 청주시 ↝
◀ 2025년 0월 0일 청주시 관광 트레킹 코스 ▶
청주 체화서원+체화당사 및 사적비 ↝↝ 한란묘소및신도비+청주 한씨 시조묘 ↝↝ 금강사 ↝ 것대산봉수지 ↝ 풍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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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0월 0일 청주시 관광 트레킹 코스 ▶
0월 0일(금) 대전 출발 ↝ 청주 체화서원 주차장↝↝청주 한씨 시조묘 주차장↝↝금강사 주차장 ↝ 것대산봉수지 주차장 ↝ 풍주사 주차장 ↝ 청주 초정행궁 주차장 ↝ 손병희선생유허지 주차장 ↝ 청원안심사괘불 주차장 ↝ 대전
거리; 154.5km, 시간; 3시간 30분, 통행료; 약 1, 600원, 주유비; 약 23,719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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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주소 ↝
청주 체화서원 주차장;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신송서원길 137 ↝ 청주 한씨 시조묘 주차장;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가산리 546 ↝ 금강사 주차장;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가산길 79-14 ↝ 것대산봉수지 주차장;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389-7 ↝ 풍주사 주차장;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98번길 116 ↝ 청주 초정행궁 주차장;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약수로 851 ↝ 손병희선생유허지 주차장;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 ↝ 청원안심사괘불 주차장; 충북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사동리 2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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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체화서원 ↝
우애 깊은 교하노씨 4형제를 배향하는 사당
체화서원은 청주시 남일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 선조 때의 사대부인 교하 노씨 4형제를 배향하는 사당이다. 송헌 계원(1532~1586), 국헌 준원(1533~1592), 매헌 종원(1535~1583), 죽헌 일원(1539~1611)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기로 이름이 난 사람들로 당시 영상 류성룡이 영남에 갔다가 상경하는 도중에 이에 대해 듣고 가산리로 이들 형제를 찾아가 실상을 보고는 감탄하여 며칠 머물렀다 한다. 귀임 후 선조가 늦은 사유를 묻자 보고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아뢰니, 선조가 친히 쓴 [체화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지방관에게 명하여 쌀을 포상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편액과 당사가 불탔으나, 숙종 27년(1701)에 후손들이 남일면 가산리에 사당을 세우고 [체화당사]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고종 때 철폐되어, 그 후 1967년에 후손들이 현 위치에 사당을 재건하고 사적비도 옮겨 다시 건립하였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사당 앞에는 이우겸이 짓고 성영이 써서 숙종 45년(1719)에 세운 체화당 사적비가 있다. 청주 신송서원과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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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체화당사 및 사적비(淸原 棣華堂祠 및 事蹟碑) ↝
조선 선조 때의 사대부인인 교하노씨(交河盧氏) 4형제 송헌(松軒) 계원(繼元:1532~1586)·국헌(菊軒) 준원(俊元:1533~1592)·매헌(梅軒) 종원(從元:1535~1583)·죽헌(竹軒) 일원(一元:1539~1611)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이들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기로 이름이 났다. 당시 영상(領相) 류성룡(柳成龍)이 영남에 갔다가 상경하는 도중에 이를 듣고 가산리로 이들 형제를 찾아가 실상을 보고는 감탄하여 며칠 머물렀다. 귀임 후 선조가 늦은 사유를 묻자 보고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아뢰니, 선조가 친히 쓴 '체화당'이란 편액을 하사하고 지방관에게 명하여 쌀을 포상하였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편액과 당사가 불탔으나, 숙종 27년(1701)에 후손들이 남일면(南一面) 가산리(駕山里)에 사당을 세우고 체화당사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고종 때 철폐되어, 그후 1967년에 후손들이 현위치에 사당을 재건하고 사적비(事蹟碑)도 옮겨 다시 건립하였다. 사적비는 숙종 45년(1719)에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보수한 것으로,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자연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다. 굽은 담장으로 에둘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전면에 분합문을 달고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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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한란 묘소 및 신도비(淸州 韓蘭 墓所 및 神道碑)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에 있는 고려전기 개국공신 한란의 무덤. 신도비. 시도기념물.
고려의 개국공신인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의 묘소와 신도비이다. 한란의 원래 묘는 1659년(효종 10)에 노봉盧峯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1690년(숙종 16)에 봉분을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한란 묘소는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된 것이지만 묘비와 상석 등이 현존하고 효종 때의 문인석과 용마석龍馬石이 잘 보존되어 있어, 고려 초기 한란 묘역의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묘소 바로 아래에는 1768년(영조 44)에 세운 한란의 신도비가 있다. 한란 신도비는 후손인 좌의정 한익모韓翼暮가 찬하고 형조판서 한광회韓光會가 글씨를 썼으며,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가며 쓴 글씨]은 좌윤 한덕필韓德弼이 썼다. 한란 신도비에는 한란의 사적 및 조선 후기까지의 청주 한씨에 대한 내력이 새겨 있다.
한란은 청주 한씨의 시조로 후삼국시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고려군사에게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의 공을 세워 고려 개국공신이 되었다고 한다. 청주 한씨는 신라 말 고려 초기 청주의 유력한 토착 호족세력 중의 하나로, 청주의 토성土姓이다. 한란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에는 충청북도 문화유산으로로 지정된 청주한씨 시조제단비가 있다. 한란 묘소와 신도비,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 일대가 고려 초기 청주한씨의 본래 세력 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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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한씨(韓氏) ↝
청주 한씨 족보에는 상나라의 현인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주한씨세보>에 의하면 준왕(準王)의 후손이자 마한의 8번째 왕인 원왕(元王)의 아들로 우평(友平)·우량(友諒)·우성(友誠)의 3형제가 있어, 각각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 기씨(奇氏)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준왕의 후예인 한우량의 32세손이라고 한다. 다만 주류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존재가 부정되고 있기 때문에 상고대의 역사는 한씨 족보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삼국시대 백제 창건기의 십제공신 한세기(韓世奇)를 시작으로 고려 창건 때 삼한벽상공신 한란, 조선 창건 때 태조(조선)의 왕후인 신의왕후 한씨, 3등익대공신 한상경, 한충 등의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 중기 정치 패러다임을 만든 한명회는 영의정으로서 훈구파의 중심에 있었다. 한명회는 익대공신 한상경의 종손자(從孫子)가 되고 예종(조선), 성종(조선)의 장인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내내 왕비 6명, 문과급제자 315명, 상신(相臣) 12명, 공신(功臣) 24명, 대제학 1명, 부마 4명이 나와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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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것대산 봉수(淸州 巨叱大山 烽燧)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것대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봉수대. 1998년 11월 20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청주 것대산 봉수는 『세종실록지리지』부터 1908년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까지 조선 전 시기 지지地志에 기록이 있다. 노선과 성격은 경남 남해의 금산봉수錦山烽燧에서 초기하는 제2로 간봉의 스물한번 째 내지봉수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충청도 청주목 소재 봉화2처 중 1처인 거차대봉화居次大烽火 명칭으로 주의 동쪽에 소재하며 남쪽으로 문의 소이산봉화所伊山烽火, 북쪽으로 진천 소이산봉화所伊山烽火에 응한다고 하였다. 이때 남쪽과 북쪽으로 응하도록 설정된 대응봉수 노선은 1895년(고종 32) 봉수제의 폐봉廢烽 까지 한자표기의 차이는 있지만 노선의 변동 없이 시종 유지되었다. 청주 것대산 봉수는 조선 후기 충청병사忠淸兵使 소관의 봉수였다. 봉수운용은 『여지도서』 등 여러 지지에 위의 내용과 함께 봉수에 별장別將 1인, 감관(監官) 5인, 봉군烽軍 25명, 봉군보烽軍保 75명이 소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지지별로 시기에 따라 거차대居次大, 거질대산巨叱大山, 거대산巨大山, 거대령巨大嶺 등으로 표기되었으나, 최종 명칭은 거질대산巨叱大山이다. 여기서 거차대居次大와 거질대산巨叱大山은 모두 것대산을 음차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봉수는 1995년과 2008년 2차의 발굴조사를 통해 현황이 밝혀진 바 있다. 동-서 긴 방향의 능선에 석축으로 평면 장란형長卵形의 방호벽(防護壁)을 축조하였으며, 내에서 연조煙竈 및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동쪽 및 북쪽 일부의 방호벽은 1995년 발굴조사 후 복원된 상태이며, 서쪽 암반노두로 이어지는 담장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다. 외벽은 높게 쌓고 내벽은 낮게 쌓은 외축내탁外築內托이다. 외벽의 높이는 남쪽이 3.2m, 서쪽과 북쪽은 1〜1.7m내외이고 내벽은 0.6〜0.7m이다. 방호벽 상부 담장지의 폭은 0.5〜0.7m이다. 석축에 이용된 석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암계의 잡석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 하였다. 연조는 발굴조사 후 현재 북쪽 방호벽에 바로 연접하여 동-서1열로 5기가 복원되어 있다.
봉수의 규모는 방호벽 상단의 담장지 외측 통과선을 기준으로 동서 최대 26.5m, 남북 최대 16.3m이고 전체 둘레는 73.3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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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 청주시 고령산 풍주사(古靈山 豊宙寺) ↝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부처님께서 설하신 극락세계 (極樂世界)의 한 곳인 천상도솔천(天上兜率天)에서 지상(地上)을 내려다보며 항상 인간세계(人間世界)의 중생들을 가련하게 생각하며 구제의 깊은 뜻을 품고 살아가던 영주선녀(靈宙仙女)는 지상(地上)으로 하계(下界)할 것을 결심(決心)하고 선녀(仙女)의 아름다운 자체 모습으로 내려가게 된다면 인간 세계의 혼탁함으로 인하여 미처 뜻을 이루기도 전에 인간들에게 짓밟힐 것을 염려하여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變身)하여 타고 내려갈 용(龍)과 구름과 농사일에 쓰일 소와 씨앗들을 가지고 해동(海東)땅 서원(西原)인 지금의 청주(淸州)에 내려오게 되었다. 영주선녀(靈宙仙女)가 노파가 되어 내려온 산이라하여 고령산이었으나 지금의 고령산(古靈山)으로 바뀌어 불리워지고 있으며 선녀가 가지고 온 씨앗 중에 명협(蓂莢)이라는 풀이 있는데 매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한 잎씩 떨어지는 과정이 매월 반복됨으로써 인간들에게 달력 세는 법을 가르쳐주게 되었으며 영주선녀(靈宙仙女)가 가지고 온 풀씨를 명암(蓂庵)초라 하는데 그 후 그 이름을 따서 명암동(明岩洞)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내력에 의하여 명암동(明岩洞)이라하고 용담동(龍潭洞)은 선녀가 타고내려 온 용이 살았던 연못이있어 용담동(龍潭洞)이라 이름하고 영운동(永雲洞)은 선녀가 지상에 내려올 때 휘장(揮帳)되었던 구름이 깔려있던 곳이라하여 영운동(永雲洞)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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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정행궁 ↝
세종대왕이 초정에 머물렀던 121일간의 이야기와 세종대왕의 창의정신과 애민사상을 기억하고자 2020년 6월, 초정행궁을 개관하였습니다. 청주시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문화관광의 공간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전시·체험행사를 단계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종이 안질을 치료했던 초정약수가 연결된 한옥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추억을 남기시길 바랍니다. 초정행궁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초정약수의 효능; 초정약수는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초수(椒水)는 고을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 같으면서 차고, 그 물에 목욕하면 병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한 일이 있다.’라고 ‘초정’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며,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뜻의 초정약수는 땅 속 깊은 곳의 화강암층에서 솟아나는 탄산수로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여 세계광천학회에서는 독일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미국의 샤스터(Shasta), 조선의 초정약수를 세계 3대 광천으로 꼽을 뿐만 아니라 미국식품의약국(FDA)의 검사에서도 고혈압, 위장병, 당뇨병, 안질,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독서당; 세종대왕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독서당에는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등 한글 창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고서들을 전시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세종대와 관련된 역사·과학·건강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 1,600여권을 비치하여 방문객 누구나 자유롭게 독서를 즐기면서 세종대왕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였다.
초정원탕행각; 초정원탕행각은 톡 쏘고 알싸한 약수의 물 맛을 가진 초정약수를 이용한 야외 족욕 체험 시설로 초정행궁을 방문한 이용객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개방감이 좋은 야외에서 화강암층에서 솟아오르는 초정 광천수에 발을 담그고 세종대왕의 숨결을 느끼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몸과 마음을 치유 할 수 있어 많은 이용객이 찾고 있는 초정행궁 내 최고 명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초정약수 체험관; 초정원탕행각이 야외에서 초정약수로 족욕을 할 수 있는 시설이라면 초정약수 체험관은 실내에서 족욕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다. 초정약수체험관은 예약제로 운영이 되고 있으며 코로나 19로 인해 현재는 1일 1팀만 예약을 받아 운영하고 있으며 추후 코로나19 진정 상황에 따라 1일 이용 가능 인원을 증대할 예정이다. 이용예약은 초정행궁 홈페이지를 통해 할 수 있다.
(예약; 초정행궁 홈페이지; chojeong.cjsisul.or.kr / 전화 문의; 043-270-7332)
수라간; 임금님 수라상을 준비하는 공간인 수라간이 초정행궁에도 마련되어 있다. 현재는 코로나 19로 인해 운영하고 있지 않으나 추후 청주 전통조리서인 ‘반찬 등속’요리와 궁중요리 시식 체험, ‘반찬 등속’모형 전시 등 전통요리 관련 체험 프로그램이 이뤄질 예정이다.
한옥체험관; 초정행궁 내에는 일반 시민들도 한옥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옥체험관 6개 동 12개실을 운영 중이다. 초정행궁 내 다양한 시설을 체험·관람한 후 고즈넉하고 멋스러운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초정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어 많은 이용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1박 이용료는 성수기 기준 14만~20만 원(비수기 10만~16만 원)이며 이용예약은 초정행궁 홈페이지를 통해 할 수 있다.
(예약; 초정행궁 홈페이지; chojeong.cjsisul.or.kr / 전화 문의; 043-270-7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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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희선생유허지 ↝
인내천 사상과 자주독립정신이 서린 의암 선생의 유허지
손병희 유허지는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인 의암 손병희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초가집으로 원형을 보존하고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2000년 3월 1일에 의암영당과 의암기념관을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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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안심사 영산회괘불탱(淸州 安心寺 靈山會掛佛幀) ↝
청주 안심사 영산회괘불탱(淸州 安心寺 靈山會掛佛幀)은 충청북도 청주시 안심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탱화이다. 1997년 9월 22일 대한민국 국보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안심사에 있는 이 괘불은 길이 7.26m, 폭 4.72m의 크기로, 본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무리들과 석가를 호위하는 사천왕상 등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우견편단을 걸치고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중앙에 앉아있다. 길어진 팔과 손의 처리 등 세부적인 표현은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각진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해 근엄해 보이며, 전체적인 신체비례는 안정되어 있다. 광배에 있는 화려한 꽃무늬장식은 석가불을 강조하며 돋보이게 한다. 위로 갈수록 석가 주변의 무리들을 점점 작게 묘사해 상승효과를 나타내었다. 채색은 주로 홍색과 녹색을 사용하였는데 두텁게 칠해 밝은 느낌을 주지 못하며 부분적으로 덧칠을 한 흔적도 보인다.
조선 효종 2년(1652)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청주의 보살사 괘불이 조성된지 3년 후의 작품으로, 구도상 비슷한 점이 있어 17세기 중엽 충청지역의 불화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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