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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리 강령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를 가다 ①
[한울안신문=강법진] 변산제법성지는 소태산 대종사가 새 회상 창립을 위한 인연을 모으고 교리의 강령을 선포한 곳이다. 원기4년 12월 13일 초겨울에 심산구곡 험로를 헤치고 변산으로 입산한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 4년간 머무르며, 교리의 강령인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팔조목(三綱領·八條目)을 제정 발표하고, 『수양연구요론』(원기12년 발간)과 『조선불교혁신론』(원기20년 발간)을 초안했다.
대종사가 변산에 입산한 첫 번째 동기는 원기 원년(1916년, 26세)에 영산 노루목에서 깨달음을 얻고, 구인제자와 더불어 저축조합과 방언공사, 법인성사를 연이어 이루면서 심신 간 휴양이 필요했다. <원불교교사>에서는 “다년간 복잡하던 정신을 휴양하시며, 회상 창립의 교리 제도를 초안하시고, 사방 인연을 연락하여 회상 공개를 준비하시며, 험난한 시국에 중인의 지목을 피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방언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영광경찰서에 출석하여 일주일간 조사를 받고 나올 정도로 일경의 감시가 심했다.
초기 제자들을 영산에 두고 휴양처로 떠나야 했을 대종사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대종사는 먼저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 백학명 선사의 상좌로 살게 하고 4개월 뒤, 직접 찾아가 불교와의 친분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월명암으로 찾아와 모시기를 간청하는 제자들로 인해 결국 3㎞ 떨어진 실상사 옆 초가삼간을 매입해 새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이곳이 실상초당이며 현재는 6.25동란 때 소실돼 그 터만 남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 머물면서 조석으로 법문을 설하고 시봉하는 제자들은 산전을 개간해 생활했다.
이곳에서 주로 설했던 법문이 관심입정(觀心入定)과 성불제중하는 방법이다. 이듬해 4월 대종사는 교리의 기본 강령인 사은사요,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대종사의 교화방식이 교강의 이해를 통한 공부에 맞춰지기 시작했고, 정산종사와 함께 불교의 낡은 제도를 혁신해 새 회상을 열기 위한 『조선불교혁신론』 초안을 작업하게 된다.
원기105년은 대종사가 변산에서 교강을 선포(원기5년 4월)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종교활동이 중단 혹은 축소되면서 대종사가 우리에게 던져준 개교의 동기와 교리의 강령이 일상으로 더욱 깊이 파고든다. 전반기에 전북교구 주관하에 치르고자 했던 교강 선포 100주년 행사도 9월 6일로 미뤄졌고, 기념식도 오프라인 참석 200명으로 제한하며 온라인으로 동참케 했다.
지난달 26일, 소태산 대종사가 머물렀던 변산제법성지를 찾아 길을 묻고 싶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코로나19 이후의 우리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변산구곡 굽이굽이 성리법문을 설한 그곳에서 당시 석두거사라 불린 스승님의 물소리를 듣고 싶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스승님의 발자취와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그곳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원불교 교리 강령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를 가다②
[한울안신문=강법진] 원불교 변산제법성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위치한 변산국립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내변산이라 불리는 이곳 국립공원에 종교 성지가 있다는 것은 장점이면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소태산 대종사(이하 대종사)가 4년간 기거하며 수많은 성리법문과 교리 강령을 선포한 곳이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은 원불교라 이름할 만한 땅이 없다. 성지가 있는 구획 전체가 현재 실상사 소유의 땅으로 되어 있다. 여름철 신록은 무성한데 외로운 실상초당 터와 석두암 터 그리고 인적이 드문 봉래정사를 마주하니 죄스러움마저 든다.
기미년(1919) 12월 11일, 대종사가 영광 백수 길용리에서 출발해 서해안 육로로 2백리 길을 걸어 다음날 도착한 곳은 월명암이었다. 그해 3월 다녀간 후, 두 번째 방문이다. 이곳에서 정산종사가 3개월 넘게 백학명 선사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잠시 지친 몸을 의탁하던 대종사는 제자들의 간청으로 산 아래로 내려와 두 칸 초옥과 논밭 경작권을 매입해 생활하니 이곳이 ‘실상초당’이다. 본래는 두 칸 초옥이었으나 이만갑 선진의 희사로 방 한 칸을 더 증축해 방 두 칸, 부엌 한 칸에서 송적벽과 김남천 그리고 김남천의 딸 김혜월과 외손녀인 이청풍이 대종사를 시봉하며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인근 각지에서 법문을 듣고자 찾아온 제자들이 날이 갈수록 늘었다. 대종사의 비범함을 알아본 사람들은 세상에 나가 구국운동 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대종사는 “태평양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몽둥이로 때려서 몇 마리나 잡으며, 얼마나 큰일을 하겠느냐. 태평양 고기를 잡으려면 먼저 큰 그물을 장만해야지. 그와 같이 나는 천하를 구원할 그물을 만들고 있다”고 응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기5년 4월 실상초당에서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을 새 회상 교리 강령으로 공식 발표한다. 일원상(원기4년 금산사에서 처음 그려 보임)을 종지로 한 교강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후일 원기12년에 발간된 『수양연구요론』에 수록된다. 대종사는 그 서문에 “인생의 목적은 수양에 있고, 수양의 목적은 연구에 있고, 연구의 목적은 혜복을 구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변산반도는 예로부터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하고 수림이 울창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정평이 나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산해절승(山海絶勝)’이라 했다. 월명암을 비롯해 내소사, 개암사, 실상사 등 천년 고찰이 자리하고 있고, 삼국시대에는 변산 골짜기에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월명암은 부설거사 일가족이 도를 이루고, 진묵스님을 비롯한 백학명 선사가 정진하던 최고의 수행처다.
대종사는 변산에서 은거하는 동안 자신의 호를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하고 거처를 석두암(石頭庵)이라 이름했다. 대종사가 이처럼 ‘돌 석(石)’를 즐겨쓴 것은 변산이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뤄졌고, 수많은 수행자가 다녀간 곳이기 때문일 터. 대종사가 단기간에 성리법문을 쏟아낸 곳도 이곳 변산이다. 하루는 대종사가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그 한 수를 써주며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하며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고 했다.
원불교 교리 강령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를 가다③
[한울안신문=강법진] 소태산 대종사가 지친 심신을 휴양하고자 변산으로 들어왔지만, 실은 이곳에서 남녀 제자들을 모아 실질적인 회상 창립의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원기5년 4월에 교강을 선포하고 교리로서 제도 방편을 베푸니, 제자들은 날로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월명암에 상좌로 지내던 정산종사도 밤마다 험한 산길을 한달음에 내달려 스승을 만나 교리문답 하는 기쁨으로 살았다.
이를 지켜보던 제자 김남천·송적벽은 실상초당 위에 초가삼간을 하나 더 마련하자고 발의한다. 이에 월명암 주지 백학명 선사가 목재를 보조하고, 송적벽이 터를 닦고 김남천이 목수 일을 맡아 2개월 만에 초당을 완공한다. 원기6년 9월 석두거사(소태산의 당시 칭호)가 머물 석두암이 한 채 완성된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기존 실상초당을 여제자들의 거처로 내어 주고, 석두암은 자신이 윗방을, 남제자들은 아랫방에 머물게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근기 따라 교리를 설하며, 정법의 이해정도를 파악했다. 때로는 점점 늘어나는 제자들과 10인 1단의 조단 교화도 시도해 보고, 불교 스님들과 거래하며 조선불교혁신론의 초안을 잡았다. 특히 대종사는 과거와 같은 견성인가와 등상불 신앙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대도에 들지 못하게 하는 법이니, 이를 개선하여 사실적이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는 교법을 제정하는 데 고심했다.
당시 대종사의 가르침의 본의를 엿볼 수 있는 법문이 <대종경> 실시품 2장(인장바위)과 교의품 15장(실상사 노부부)에 잘 나타난다. 대종사는 참선하지 않는 제자를 크게 나무라는 노승들(백학명 선사와 한만허 화상)의 하소연을 듣고 (인장)바위를 가리키며 “제가 지금 스님들께 저 바위 속에 금이 들어있으니 바위를 부수고 금을 채굴하라면 제 말을 믿고 바로 채굴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지 못하겠다는 선승들에게 대종사는 “확신도 없는데 강제 채굴을 권하면 금을 채굴할 수 없듯이, 참선에 대한 취미도 모르고 발원도 없는 제자에게 억지로 참선을 권하는 것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영영 참선을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남의 원 없는 일을 강제로 권하지 말며, 권하려거든 먼저 자신이 깨쳐 솔선수범해야 따른다는 가르침은 그 어느 때보다 울림이 크다.
또한 불효하는 며느리가 못마땅해 등상불에게 불공하러 간다는 실상사 노부부를 대종사가 봉래정사 앞에서 만나 ‘며느리가 곧 부처’라고 한 법문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외에도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등 변산구곡 굽이굽이마다 설한 소태산 대종사의 성리법문이 성문으로 또는 구문으로 맥맥히 이어져 오고 있다. 변산성지는 제법성지인 동시에 곳곳에 교조의 깨달음과 교화방편을 읽을 수 있는 한편의 산 경전이었다.
초여름 변산원광선원 박청화 교무와 동행한 봉래5곡 너럭바위 위에서 잠시 선정에 들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일체 망념을 놓아버리고, 온몸을 감돌고 가는 바람결에 시름을 실려 보냈다. 변산제법성지를 찾는 순례객이나 선원들에게 이곳은 필수코스다. 돌이 되어 물소리를 들으며 성리소식에 한발 더 다가가 보는 시간, 이곳 제법성지에서만 누릴 수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정산종사의 큰 그늘에 가려 자칫 우리가 놓쳐버릴 수 있는 주산종사의 신성도 엿볼 수 있다. 그 이야기로 이번 호를 갈무리하고자 한다.
16세 주산 송도성 종사는 형의 인도로 변산에 들어와 스승의 시봉을 전담하게 된다. 하루는 아침식사 후 스승에게 차를 올리고 차 그릇을 씻기 위해 용두샘(실상마을 공동우물, 봉래정사 터 우측 선인봉 아래)으로 들고 나갔다.
그런데 한 나절이 지나도 오지 않자 대종사가 궁금하여 샘으로 갔다. 그때 도성이 우물가에서 차 탕기를 잡고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대종사는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는다. 도성은 “제가 부주의해서 차 탕기 꼭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라며 이실직고하자 대종사 “이미 깨진 걸 어쩔 것이냐, 실수로 깨뜨렸으니 앞으로 조심하고 그만 들어오너라” 하고 용서한다.
이후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무슨 일을 당부할 때, 매사에 정성스럽고 진지했던 주산종사 이야기를 비유하며 “도성이(가) 깨진 그릇 붙이듯이 하라”고 가르친다. 용두샘 우물가에서 깨진 차 탕기를 이리저리 맞추며 안절부절 애를 태우고 있는 소년 송도성. 구정선사의 신성에 가려 스승을 향한 제자 송도성의 오롯한 그 신성이 곁에 두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네 원석 같아 부끄럽고 기쁜 마음이다.
원불교 교리 강령 선포 100주년, 변산제법성지를 가다 (完)
[한울안신문=강법진] 소태산 대종사(이하 대종사)는 <정전>을 편찬하며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라고 당부하며, 열반 전 제자들에게 “나의 법은 신성 있고 공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 가도록 전하였나니, 하루속히 이 정법을 마음대로 가져다가 그대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라”(부촉품 4장)고 부촉한다. 과거 어두웠던 시대에는 미신신앙이나 우상숭배로 대중을 이끌었다면 앞으로 시대에는 대도 정법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고 세상에 유익을 줄 것이라는 성자의 가르침이 담긴 법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종교의 위기가 왔다고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멈추고 돌아볼 때가 아닌가 한다.
2간 초당서 불교혁신 설파
대종사께서 홀로 깨달음을 얻었으나 석가모니불을 연원불로 삼고 불법을 주체 삼아 새 회상을 열고자 했던 그때, 변산에서 교리강령을 선포하는 동시에 『조선불교혁신론』을 초안해 교단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변산 석두암에서 대종사는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를 ‘불교는 장차 세계적 주교가 될 것이나, 미래의 불법은 재래와 같은 제도의 불법이 아니라 사·농·공·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재가·출가의 구분이 없으며 허공법계를 다 부처로 아는 법’(서품 15~19장)이라야 한다고 설파한다. 당시 승려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절에 불교 개혁을 외치며 불법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제시한 것이다. 이렇듯 변산에서의 5년은 보림·함축의 시기이면서 새 회상 건설의 기초를 다지고 설계를 했던 때임을 알 수 있다.
대종사가 제자들에게 불교 혁신을 설파했던 석두암은 2간 초당의 흙집이었다. 아궁이를 내어 군불을 지피고 거적(짚을 두툼하게 엮어 만든 물건)으로 비바람을 막았던 시절에 수천 년간 이어온 불교를 혁신하여 수많은 대중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려는 열망의 그 눈빛이 숨어있는 곳, 지금은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은 석두암 터에서 한참 동안 발길이 멈춰서 있었다.
구원의 그물을 짠 제법성지
변산제법성지는 현재 변산원광선원(원장 박현심, 교무 박청화·정도전) 교무들이 성지수호 실무를 맡고 있다. 영산·익산·만덕산과 함께 4대 성지라 불리는 변산이지만 부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는 상태라 성지수호에 어려움도 적지 않다.
박현심 원장은 “가장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수많은 법문과 인연들이 나온 곳이다. 순례객들에게 도보로 성지 안내를 하면 곳곳이 법문의 산실이라 감명을 많이 받는다. 아쉬움이 있다면 출가교역자들이 성지에 대해 너무 모른다”며 “변산은 천하 구원할 그물을 짠 곳이라고 대산종사께서 말했다. 만약 대종사가 세계적 성자가 된다면 그것은 바로 교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교법으로 거듭나고 이곳을 세계적인 성지순례길로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순례·트레킹 겸한 맞춤형 코스
변산원광선원이 현재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5대 원장인 강숙원 교무의 공이 컸다. 대각전 신축과 본관 리모델링, 훈련관(황토방)까지 완비해 가족이나 15명 내외의 소모임이 1박2일 또는 2박3일 코스로 성지순례와 내변산 트레킹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특히 남한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내변산은 여름 계곡물이 흐를 때면 만법귀일 일귀하처 법문이 절로 떠오르고, 성지 곳곳에 숨어있는 대종사와 제자들의 법의 문답은 <대종경>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현장이 되기도 한다.
변산성지 주변 코스로는 대종사가 다녀간 월명암과 쌍선봉, 인장바위, 용두샘, 실상사와 종곡유숙터 등이 있고, 대종사가 원기4년 쌍선봉에서 법인기도를 해제하며 눈 앞에 펼쳐진 섬을 바라보며 정산종사에게 “연못에 연잎이 떠 있는 것 같이 아름답다”라고 한 하섬도 빼놓을 수 없는 순례지다.
변산제법성지가 품고 있는 대종사의 발자취와 교단사적 의미는 아직도 무궁무진하지만 연재는 여기서 마친다. 짧은 소견으로 써 내려간 이번 연재에는 앞서서 정리해준 강숙원·서문성 교무의 자료가 길을 터줬다. 올해는 원불교 교리강령 선포 100주년의 해이다. 전북교구에서는 9월 6일 온·오프라인을 통해 전산종법사를 초청한 대법회를 열 예정이지만 어느 때든지 스승님의 간절한 열망이 꽃 피웠던 제법의 현장을 직접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구구절절 법문이 넘실대는 그곳으로.
출처 : 한울안신문(http://www.hanul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