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소는 아시아 전역에 퍼졌습니다. 1942년(쇼와 17년)9월 3일 육군성 은상과장의 보고에서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을 다음과 같이 만든다. 북지(北支) 100개, 중지 (中支)140, 남지(南支) 40, 남방(南方)100, 남해(南海)10, 가라후토(樺太) 10, 계 400개소"로 나옵니다.
기금의 자료위원회의 보고서에 게재된 논문은 정부자료에 근거하여 중국의 양쯔강(楊子江) 변에 있던 위안소에 대해서 상하이(上海) 24, 항조우(杭州) 4, 쩐지앙(鎮江) 8, 창조우(常州) 1, 양조우(揚州) 1, 탄양(丹陽) 1, 난징(南京) 약 20, 우후(蕪湖) 6, 지우지앙(九江) 22, 난창 (南昌)11, 한코우(漢口) 20, 거티엔(葛店) 2, 하롱쩐(華容鎮) 2, 잉샨(応山) 1, 이창 (宜昌) 2로 파악됩니다. 이상으로 125개소입니다. 다른 자료에서 적어도 수조우(蘇州) 1, 안징(安慶) 2를 더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만으로도 모두 130개소에 가깝습니다.
또한 같은 논문에서 개별 데이터를 종합하여, 순수 민간 시설도 포함, 필리핀은 30개소, 버마는 50개소 이상, 인도네시아는 40개소 이상으로, 이들 3개국에서 120개소 이상이 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남방 100개 소를 넘습니다. 남해 방면에서는 솔로몬 섬의 라바울에만 해군 위안소가 6개소 있고, 그 밖에 육군위안소도 있기에 총수는 20개소로 추측됩니다. 라바울만도 남해에 10개소를 넘습니다.
앞의 은상과장 보고에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만, 그 후 오키나와(沖縄)에도 위안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오키나와의 연구자는 130개소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여성들이 일본군의 위안소에 모집되었는가, 조선인 위안부의 비율은 어느 정도였는가, 어느 정도 사람들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였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확실한 답을 알 수 있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먼저 위안부의 총수를 알 수 있는 총괄적인 자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총수에 대한 여러 의견은 모두 연구자의 추산입니다.
추산 방법은 일본군 병사 총수를 위안부 한 사람당 병사 수의 파라미터로 나누어 위안부 수를 추계합니다. 이 경우에 교대율, 귀환으로 교체되는 횟수를 고려합니다.
연구자들의 추산
[참고문헌]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종군위안부"이와나미신서, 1995년
하타 이쿠히코(秦郁彦)"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아"하, 문예춘추, 1993년 "위안부와 전장의 성"신조사, 1999년
수 즈일량(蘇智良) "위안부연구"상하이서점출판사, 1999년
문제는 파라미터와 교대율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입니다. "병사100명 여자1명 위안부를 수입"이라는 말이 긴바라(金原)메모에 있는 1939년(쇼와14년) 4월의 상하이 제21군 군의부장의 보고에 나왔습니다 (상하이제21군 군의부장 보고 긴바라 세쓰조(金原節三)자료적록에서). 이 숫자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병사 100명 당 위안부 1명 이라는 것은 병사가 매월 1회 위안소에 간다고 하면 위안부는 하루에 5명을 상대하고 월평균 10일은 쉬는 상태입니다.
민족별로는 김일면(金一勉)씨가 위안부의 "80%-90%", 17-20만 명이 조선인이라 주장합니다만, 이에 대한 총괄적인 통계자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종 자료를 종합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인 위안부는 많았지만, 절대적 다수를 차지한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일본인 위안부도 많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38년(쇼와13년)11월에서 1939년(쇼와14년) 12월까지 대만 각 주를 거쳐 중국으로 향한 군 위안소 관계자의 민족별 구성
『자료집성(資料集成)』1권 171~210, 219~251,301~337,407~415쪽
가오슝(高雄)주는 쇼와 13년(1938년)12월 자료는 없음. 타이난(台南)주는 쇼와 13년 12월, 쇼와 14년(1939년) 7월, 11월 자료만 있음.
1998년 6월22일,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와 소수자 보호를 위한 소위원회 특별보고자 게이 맥두걸(Gay J. McDougall)씨는 같은 소위원회에 "노예제의 현대적 형태 –군사충돌 동안에 조직적 강간, 성적 노예제 및 노예제적 관행"이라는 보고를 제출하였습니다만, 그 부록으로 보고 "제2차 대전 중의 위안소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에 관한 분석"(전문은 여기)이 붙어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맥두걸 씨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일본정부와 일본군은 1932년부터 45년 사이에 전 아시아의 레이프 센터-rape centres에서 성노예제를 20만 이상의 여성에게 강제하였다."
"이들 여성의 25퍼센트 만이 이러한 일상적 학대를 견디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가 근거로 든 것은 제2차 대전 중에 "14만 5,000명의 조선인 성노예"가 죽었다고 하는 일본의 자민당 국회의원 아라후네 세이주로(荒船清十郎)씨의 "1975(표시오기 그대로 둠)의 성명"입니다.
아라후네 세이주로 씨의 성명이란 그가 1965년 11월20일에 선거구의 집회(지치부군시(秩父郡市) 군은연맹 초대회)에서 한 다음과 같은 발언입니다.
"전쟁 중 조선인들도 너희는 일본인이 되었다 하여 저금을 시켜 1100억 엔이 되었으나, 이것이 종전으로 제로가 되어버렸다. 이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36년간 통치하는 동안에 일본 관리들이 가져 간 조선의 보물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징용공으로 전쟁 중에 끌려와서 성적이 좋았기에 병사로 썼으나, 이 중에 57만 6,000명이 죽었다. 그리고 조선의 위안부가 14만 2,000명 죽었다. 일본 군인이 성적학대 끝에 죽여버린 것이다. 합계 90만 명이나 희생되었는데 어떻게든 연금이라도 달라고 하였다. 처음에 이러한 배상으로 50억 달러라고 하다가, 점점 줄여 지금은 3억 달러로 해줄때니 마무리를 짓자고 하였다."
일한 조약 체결 시에 한국 측은 한국인 노무자, 군인군속의 합계가 103만 2,684명이었고 이 가운데 부상 또는 사망한 사람은 10만 2,603명이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위안부에 관한 것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라후네 발언의 숫자는 모두 아라후네씨가 맘대로 늘어놓은 숫자입니다. 유엔의 위촉을 받은 책임 있는 특별 보고자 맥두걸 여사가 이런 발언에 의거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가합니다.
수 즈일량(蘇智良)씨도 이 아라후네 발언을 알고, 이에 따라 조선인 위안부가 14만 2,000명이라고 한다면 36만 내지 41만의 위안부 총수 가운데 중국인 위안부는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도 아라후네 발언에 오도된 추론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