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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동
1625년(인조3) 도경유가 낙음정사(落陰精舍1)를 지어 수학·강도(講7道8)하였다. 1675년(숙종1) 병암서당을 창건하여 후손들의 종회당 겸 후학을 양성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를 1785년(정조10)에는 도응유(都應喩)와 도경유(都慶喩)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병암서원으로 숭호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후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24년 지역유림과 후손들의 열의로 복원하였다. 200년 대구광역시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서원일대가 완전 재개발을 위한 구획정리가 딤에 따라 옛 서원을 헐고 2001년 8워 23일 재건축 기공식을 갖고 조감도와 같이 공사하여 2003년 5월에 사당, 강당, 동서재 등 목조건물 10여동을 새로 중건하였다.
용강서원
이곡동
허득량(許得良)과 허복량(許復良)을 모신 재실로 1639년 용강서원으로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0년 중창하여 용강사(龍岡祠)라 부르고 1986년에 복원하여 위 허득량(許得良)과 허복량(許復良) 양위(兩位)를 배향하고, 9대조인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시충목(諡忠穆) 허유전(許有全)을 정위(正位)에 추배하였다.
달성군 (9)
낙빈서원
하빈면 묘리
1679년(숙종 5)에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 등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4년(숙종 20)에 ‘낙빈’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1789년(정조 13) 지역 유림에서 유교적 문물과 예의를 중시하였던 김충선의 뜻을 기려 건립하였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에 귀순하였다. 이후 조총제작 기술을 전수하고 경주, 울산 전투에서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당시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낙향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885년 다시 지었고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사당인 녹동사(鹿洞祠)와 향양문, 유적비, 신도비 등이 있다.
한훤당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으로 원래 1568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워져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지금의 자리로 옮겨 건립했다. 1604년 사당을 먼저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 등 서원 일곽을 완공했다. 이때의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이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뛰어난 예학자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이었다.
1607년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고 사액되었는데,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자부심 넘치는 의미가 그 이름에 담겨 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서원 건축이 가져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평가된다.
송담서원
구지면 도동리
1634년(인조 12) 장현광(張顯光)이 발의하고, 지방 유림 75명이 동참하여 비슬산 기슭 쌍계에 박성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위패 봉안이 이루어지기 전에 소실되었다. 이에 1694년 지방 유림들이 다시 뜻을 모아 유택(幽宅)인 송림(松林)에 송담 서원을 건립하였다. 자료의 소략으로 건립 이후의 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인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 훼철 이후 복원 과정은 1998년 이헌주(李憲柱)가 쓴 「송담서원 복원기(松潭書院復元記)」 등을 통해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송담서원은 방화로 소실되었다. 근래에 와서 외삼문인 덕양문(德陽門)과 강당인 경의당(敬義堂), 비각 등이 복원되었다. 복원 시기에 대해 송담서원 복원기에는 1994년[갑술(甲戌)], 대구의 뿌리 달성은 199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연서원
유가면 가태리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 1등공신인 의병대장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충현사를 건립하고 현종 15년(1674)에 당시 현감 유천지가 규모를 확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더불어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황석산성의 수성장을 제수받고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곽재우 선생이 재종숙 존재 곽준 선생의 위패를 같이 봉안하였는데 숙종 3년(1677)에 예연서원이라 사액됨으로써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977년에는 6·25동란으로 소실된 강당과 삼문을, 1984년에는 사당을 복원하여 서원의 옛모습을 찾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또 곽재우 선생과 곽준 선생의 신도비도 다시 세웠는데 비각 안에 있는 이 비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이 흐른다고 하여 ‘땀나는 신도비’라고도 한다.
용호서원
다사읍 서재리
1704년(숙종 30) 도성유와 도여유를 배향한 세덕사(世德祠)에서 출발한다. 1708년(숙종 34) 서원으로 승호(陞號)되면서 도신수를 함께 배향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용호 서원 건립 시기에 대해 『영남 읍지(嶺南邑誌)』와 『교남지(嶠南誌)』는 1708년으로, 1931년 간행된 『달성 군지』는 1704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인 1871년(고종 8) 훼철된 후 용호 서당으로 사용되었다. 1984년 서원으로 중수하였으며, 2014년 신축하였다.
이강서원
다사읍 이천리
1639년(인조 1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사원(徐思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다가 19세기 중엽에 중건하였다.
이양서원
현풍면 대리
1707년(숙종 3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곽안방(郭安邦)·곽지운(郭之雲)·곽규(郭赳)·곽황(郭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5년 복원하였다.
인흥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조선 순조 25년(1825) 10월에 팔도유림과 20대손인 추세문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정리 당시에 화를 면하여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한천서원
가창면 가창동
『영남 읍지(嶺南邑誌)』에는 1840년(헌종 6)[경자], 『달성 군지(達城郡誌)』와 『교남지(嶠南誌)』에는 1847년(헌종 13)[정미], 서원에 소장된 한천재 중건기(寒泉齋重建記)와 한천서원 복설기(寒泉書院復設記) 등의 현판은 1838년(헌종 4)[ 무술]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료의 소략으로 건립 연대를 명확하게 밝힐 수 없으나, 헌종 연간 사우(祠宇)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인 1871년(고종 8) 훼철된 것을 1908년 자손들이 힘을 모아 몇 칸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1960년 전영기(全榮基) 등의 후손이 한성 대동 종약원(漢城大同宗約院)과 대구 종친회의 지원을 받아 한천재(寒泉齋)를 중건하였고, 1989년 한천서원으로 복원하였다.
화산서원
구지면 수리리
서원 내 현판인 화산재 중건기(花山齋重建記)를 보면 “화산촌 남쪽 송추(松楸) 아래 5칸 기와집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서 있는데 화산재라 편액되었다. 경인년[1950] 병란 때 모두 불타 버리고, 왼쪽의 3칸 문무(門廡)만 남았다.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이후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곽승화의 묘소 밑에 1990년에 사당을 창건하여 화산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구 (1)
백원서원
도동
1692년(숙종 18)에 현 위치가 아닌 팔공산 아래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에 건립하였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2년 본래 위치에 다시 복원되었다가 1928에 서시립의 생전 강학소가 있었던 이 자리로 이건 되었다.
동산서원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1820년(순조 20)에 겅주 최씨 최흥원을 배양하기 위해 경주최씨 집성촌인 옻골에 처음 창건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68) 때 훼철되었다. 이후 동산서원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옛 최흥원의 묘소 아래로 옮겨 동천서당 또는 각계재(覺溪齋)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2017년 현재는 아파트단지 개발지역에 편입되어 사라졌다.
북구 (5)
구암서원
산격동
1675년(숙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741년에 서성(徐渻), 1757년에 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숭현사, 3칸의 신문(神門), 5칸의 강당 등이 있다.
매양서원
매천동
1692년(숙종18) 때에 아헌(啞軒)송원기(宋遠器)를 기리고 선비가 모여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지어졌다. 1783년(정조7)에는 사람들의 합의로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와 남촌(南村) 송이석(宋履錫)을 배향하게 되었다.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두 차례 훼철된 후 1886년 재차 복원했지만 다시 소실됐고 2004년 제 모습을 찾게 됐다.
매양서원의 복원은 문중의 영광으로 그치기보다 지역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강학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유림과 지역민들의 권유에 따라 2009년 4월 26일 기적비(紀積碑) 제막식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서계서원
서변동
1781년(정조 5)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문화(李文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01년(순조 1) 이주(李輈)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그 뒤 점차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경서원
연경동
<연경고가>
1564년(명종 19)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였다. 이황이 죽은 뒤 1613년(광해군 5) 그의 위패를 모셨으며, 1660년(현종 1) ‘연경(硏經)’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1622년(광해군 14) 정구(鄭逑) 1676년(숙종 2) 정경세(鄭經世)를 추가 배향하였다. 1639년(인조 17)에는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전경창(全慶昌)을 모셨으며, 1647년(인조 25) 이숙량(李叔樑)을 그 곳에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화암서원
노곡동
정조 을유년(乙酉年)에 영남의 많은 사림들이 백인관(白仁寬) 선생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고 교육의 목적으로 성서(城西) 장기동(퇴락(頹落)함에 사람 및 후손들은 우구(憂懼)함을 이기지 못하여 경선재지(景長基洞)에 청원하여 봉사(奉祀)하여 오던 중 백문연·백용채(白文連·白龍采) 두 분을 추향하게 되었다. 82년간 지속하다 훼철당한 후 공께서 노후에 노곡동에 두어간 집을 세워 경선정(景禪亭)이라 편액하여 후학강론(後學講論)하시든 정(亭)을 사림 및 후손들이 경선재(景禪齋)로 중창(重刱)하였으나 또한 재(齋)가 禪齋址)에 중건을 합의하여 경오년(庚午年)에 기공(起工)하여 정축년(丁丑年 1997) 중춘(仲春)에 낙성(落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수성구 (4)
덕산서원
황금동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절개를 지켰던 남은(南誾) 서섭(徐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서섭은 달성서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派組)로 세종때 대과에 급제, 문종을 거쳐 단종 때에 이르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까지 지낸 인물이더. 서섭의 충절을 알게된 손자들과 유림에서 1926년 3월 그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에 첨모재를 건립하게 되었다. 1994년에 경모사를 존공하고 1954년 8월 중수하였으며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고있다. 최근 대대적으로 경역을 확장하고 당우(堂宇)를 신축하여 덕산서원(德山書院)이라 편액하였다.
봉산서원
상동
문탄(聞灘) 손린(孫遴) 선생이 돌아가신 뒤 1735년(을묘 영조 11년에 도내의 유생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었는데, 당시 방백이었던 김재증(金在曾)이 영문(營門)에 쓰기를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뛰어난 절개는 밝기와 해와 별과 같으며, 바람소리를 듣는 것과 같으니 누구라도 우러르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이후 1766년(영조42)에 수성 옛 터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였고, 1799년(정조23)에 금봉산(金鳳山)아래에 사우를 이건하였다.
이 후 1803년(순조3) 2월에 봉암사(鳳巖祠)에 위판을 봉안하고 1844년(헌종10)에 서원으로 높여 부르고 이름도 ‘봉산서원’이라 하였다.
이 후 1864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7년 강당을 지어 경모재(敬募齋)라 칭하고, 1996년 후손들과 유림에서 지행당 등 수성구 상동의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오천서원
파동
조선 성종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대봉(大峰)양희지(楊熙止)를 추모하기 위해 1744년(영조20)에 건립된 것으로 대구지역의 23개 서원 가운데 4번째로 건립되었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인 파령골에 있었다.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1905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당호를 무릉재라고 하였다. 1971년 유림총회의 의결로 사당을 신축하여 오천사라 하고 오천서원으로 바꾸었다.
청호서원
황금1동
1694년(숙종 2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손처눌(孫處訥)과 손조서(孫肇瑞)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55년(영조 31)에 유시번(柳時藩), 1764년에 정호인(鄭好仁)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72년 유림의 공의로 복원되었다.
옛 구암서원
동산동
서 침(徐沈), 서 거정(徐居正), 서 해(徐懈), 서 성(徐성)등 달성서씨의 선조를 모시는 곳이다. 1665년 창건한 건물로 처음에는 연구산에 있었다. 1675년(숙종 1) 귀계 서 침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다가 1718년(숙종44) 동산동으로 이전하면서 사가 서 거정 선생을 합향하고 그 후 약봉 서 성 선생과 함께 서해 선생을 합향하고 그후 약봉 서 성 선생과 함제서해 선생을 추향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동산동 일대의 주변환경이 서원입지로 부적합하여 1995년에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연암공원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