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 결정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한국 천주교회는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 결정이 초래할 상황을 주시하고, “평화는 결코 ‘무기라는 힘’의 균형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상호 신뢰에 의해 확립된다.”(「지상의 평화」, 110.113항 참조)고 하신 요한 23세 성인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아래와 같이 교회의 입장을 표명한다.
1.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세계 평화에 대한 우려
2016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재의 지구촌 상황이 이른바‘산발적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릴 만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규정하신 바 있다. 인종, 민족, 국가, 종교 간 갈등이 점차 심화되는 현실에서 강대국의 충돌 지점에 위치한 한반도의 평화 유지가 갖는 의미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권 방어에 대한 현실적 실효성조차 확보하지 못한 사드 배치는 한반도가 새로운 냉전체제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교회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오로지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로 전락될 수도 없다.”(사목헌장 78항)고 천명한다. 군사력의 증강을 통해 한반도의 위기가 진정되고, 평화가 오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질서의 확립을 통해 이룩된다.
여러 차례 주장한 바와 같이, 핵개발은 북한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 이로 인한 강대국 간의 긴장 고조가 민족의 공동선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북한의 핵을 저지하기 위한 사드 배치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군비경쟁이 인류에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안겨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동시에 지성과 감성의 교류와 공감이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현장도 경험하였다. 한반도의 핵문제를 둘러싼 긴장과 위기는 군사력의 우위를 과시하는 압박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2. 민족 화해 분위기의 냉각에 대한 우려
지정학적 특성과 강대국들 간의 이념적 대립으로 분단된 한반도는 분단 71년의 역사 속에서 위기를 평화로 이끌어가기 위한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7·4 남북공동성명’(1972), ‘남북기본합의서’(1992), ‘6·15 남북공동선언’(2000), ‘10·4 남북공동선언’(2007) 등은 남북 관계의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노력의 귀중한 결실이다. 최근의 신무기의 추가적 개발과 배치는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점에서 그간의 모든 민족화해와 공동번영 노력에 역행하는 일이다.
최근의 남북 관계는 개성공단의 폐쇄로 큰 시련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드 배치로 인해 주변국 간의 긴장과 적대감이 증가된다면 남북 협력과 대화의 길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이에 교회는 정부 당국이 한반도를, 패권이 충돌하는 위험 지대가 아닌 화해와 협력의 상생 지대로 변화시켜 가는 노력을 경주해 줄 것을 촉구한다. 힘이 아닌 설득과 대화를 통해 핵 포기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전방위적으로 노력해 줄 것을 간절히 촉구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방한 중 청와대 연설에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외교는 화해와 연대의 문화를 증진시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끝없는 도전이며 가능성의 예술”이다. 진정한 평화는 상호 비방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인내를 수반하는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정부 당국이 평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 주기를 거듭 촉구한다.
3. 민생 불안과 부담 증가에 대한 우려
한국 천주교회는 사드 배치가 어려움에 처한 한국 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아울러 교회는 균형 있고 절도 있는 군비 축소와 대화 협력을 통해서 궁극적인 평화 실현과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또한 교회는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이다.”(「민족들의 발전」, 76항)라고 선언한다.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을 인간적인 환경으로 이해시키는 발전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후 국제 갈등으로 인해 남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악화될 경우 평화 실현은 더욱 힘들어지리라 예상된다.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위기는, 자신에게 살생의 무기를 들이대고, 자기 화살을 불화살로 만드는(시편 7,14) 우를 범하지 않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이사 2,4)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임을 보여준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한반도의 평화가 군사력의 우위로 이룩될 수 없으며, 민족 간 화해와 협력을 통해 한 걸음씩 진행되어 나아가야 함을 실증해야 할 시점에 있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는 한반도의 군사적, 경제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사드 배치를 강행하려는 현재의 상황에 심각한 우려와 함께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한다.
사드의 효능도 검증하지 않은 채 사드 배치를 강행하여 국민들에게 불신과 불안을 안겨 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커다란 외교적인 손실을 입게 될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위한 환경평가를 거치지 않은 채 강행하는 사드 배치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고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증진시키는 방안을 모색해 주기를 간절히 촉구한다.
2016년 7월 15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주교
2016년 제21회 농민주일 담화문
생명의 밥상을 차립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생명농업으로 하느님 창조질서 보전에 힘쓰고 계시는 농민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또한 지난해 11월 14일, 쌀 값 인상을 요구하다 공권력에 의해 의식을 잃고 있는 백남기(임마누엘) 형제의 조속한 쾌유를 빌며, 정부의 책임 있는 처신을 촉구합니다.
“귀를 기울여 내 소리를 들어라. 농부가 씨를 뿌리려고 날마다 밭만 갈겠느냐? 줄줄이 밀을 심고 적당한 자리에 보리를, 가장자리에는 귀리를 심지 않느냐?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에게 법칙을 일러 주시고 그를 가르쳐 주신다”(이사 28, 23-26 참조). 하느님은 이렇게 살아갈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농민은 이런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인간과 자연이 협력하여 하느님 창조질서에 가장 친밀하게 동참하는 생명을 일구어 왔습니다. 그러나 전면적인 농산물시장 개방과 세계화의 진행으로 농촌 공동체는 파괴되고, 농업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4년 현재 농가인구는 전체 국민의 5.3%인 275만 명으로 줄었고, 이마저도 69%가 60세 이상입니다. 농가의 평균 경작면적은 1.5ha에 불과하고, 연간 농업소득은 1천만 원 가량으로 영세 소농구조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도·농간 소득격차가 큰 폭으로 확대되어 도시근로자 가구 대비 농가소득은 57%로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주식이자 농업의 근간인 쌀까지 지난해부터 관세화를 통해 완전 개방되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농사는 고되고 소득은 적고 전망이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살아왔는데, 농민의 살 길은 점점 막막해져 갑니다. 생명을 가꾸는 고귀한 일에 동참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선포하는 교회의 입장에서, 농민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국가와 사회가 경제논리로 농업을 희생하여 다른 산업을 키워갈 때 교회가 힘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전자변형식품(GMO)으로 국민과 자연생태계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데도(?찬미받으소서?, 134항 참조) 우리의 인식과 대처가 부족했음을 반성합니다. 그래도 농민들은 묵묵히 밀과 쌀보리를 심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이름으로 농민들을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농촌을 살리기 위해 1994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의 결정으로'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엔 '농민주일'을 제정하여 농촌과 농민들을 위해 함께 기도와 실천운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교구별로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본부'를 만들어 생명농산물 직매장을 운영하며 다양한 도·농 교류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교회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여 농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우리가 희망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밭이 되어주고, 우리가 땅이 되어주면 농민들은 우리를 희망 삼아서 밀과 쌀보리를 기쁘게 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농촌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생명농산물을 정직하게 생산하는 농민들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라도 생명 존중과 형제적 연대를 바탕으로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는 가정에서부터 교회의 모든 기관과 시설, 사제관과 수도원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밥상 차리기'에 적극 동참해 주시길 청합니다. 또한 교우들의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위해 식생활 교육을 적극 추진하고, 본당의 생명농산물 직매장도 더 많이 개설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특별히 쌀값 하락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농민 형제자매들을 위해 교회 공동체의 행사에 우리 쌀로 만든 떡이나 빵, 과자, 음료 이용하기, 아침밥 먹기 등 쌀 소비 촉진에도 적극 동참해주시기 당부 드립니다. 농민들이 생산한 밀과 쌀을 감사히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교회 속에서 새롭게 희망을 만들 수 있습니다. 농부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이 늘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16년 7월 17일 제21회 농민주일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유 흥 식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