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용 시인의 그림으로 읽는 詩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성향숙
안녕하십니까?
잠깐만,
들판을 지나 구름을 따라가다 접질려 발목이 삐었다
빛나는 햇살이 이마에 부딪쳤기 때문이야
대지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야
소복하게 부푼 멍과 푸른 발등과
시린 발목을 가만히 직시하는데 우두커니
말뚝에 묶인 줄 끝에 붙어
염소 한 마리 깔깔깔 노래 한 소절 부른다
말뚝을 몇 바퀴 빙빙 돌면서
충분해
달달한 감동은 아니지만
뒤집힌 바퀴처럼 가끔 헛발질의 리듬을 음미하는 것
우울을 전달하는 절름발이 걸음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아침의 눈인사와 지난밤의 잠자리, 손에 쥔 휴대폰
길바닥에 숨은 크고 작은 안녕들
원초적 감정과 본능들
일이 꼬이면 뒤돌아 몇 발짝 절뚝이며 걸어보는
어쩐지 슬픈 뒷모습
들판의 염소가 감긴 줄을 풀다가 말뚝에 머리 찧고
질식한 흰 침을 흘리고 서 있어
고요하고 절망적인 평화, 역겨워
염소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성향숙 시인의 시집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사족)
이 시편을 읽으면서 시인은 신앙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왜냐하면, 시편에서 나타난 ‘염소’가 그렇고, ‘빛나는 햇살’이 그렇고 ‘구름’이 뜻하는 상징이 그렇기 때문이다. 생소한 표현이 시창작에 있어 중요하지만, 감정교류를 통한 독자와 소통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 시편은 더욱 호감이 간다. 염소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니? 염소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찾기 위해 시를 여러 차례 읽고 또 읽었다.
염소는 성경적으로 볼 때 좋은 뜻으로 비유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염소의 상대는 무엇일까? 나는 이 시편에서 구름(양)으로 본다. 신학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구구절절 할 말이 많겠으나(마태복음, 최후심판에 따른 염소와 양의 구분 등), 시는 종교적 정파성이나 편협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해석해야 함으로, 이 시편을 읽을 때 표현론적관점表現論的觀點으로 바라보았다.
「아침의 눈인사와 지난밤의 잠자리, 손에 쥔 휴대폰/길바닥에 숨은 크고 작은 안녕들/원초적 감정과 본능들」이라든지 「들판의 염소가 감긴 줄을 풀다가 말뚝에 머리 찧고/질식한 흰 침을 흘리고 서 있어/고요하고 절망적인 평화」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비유하고 있다. 현대인은 늘 무언가에 묶여 산다. 핸드폰에 그렇고 특히 물질에 매여 사는 것이 괴로워 줄을 풀다가 절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여전히 사랑과 연민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일이 꼬이면 뒤돌아 몇 발짝 절뚝이며 걸어보는/어쩐지 슬픈 뒷모습」이라고 표현한 문장이 그 증거다.
어둡고 갑갑한 것들로부터 빗겨나 빛을 감당함으로서 행복하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빛은 시인이 신뢰하는 대상, 그가 인격적으로 교류하는 대상인 것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곳이 너무 선명해서 시를 읽는 동안 경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