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깊은 산골도 아니고 외딴 섬도 아닌
읍내가 십리정도 되는 평범한 농촌이였는데도
인근에 학교가 없는 탓으로 한반이 6년을 함께 다녔다.
선배들은 2개반 이상 이였을 때도 있었다.
내가 다닌 창신초등학교에 대하여 할머님께서는 말씀해주셨다.
그 학교는 조부님과 당하리 사시는 이옹이
일제시대 함께 목수를 대서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 45년 해방이후
정식으로 학교로 인정 받은 곳이라 하셨다.
우리는 남녀 48명이 졸업을 했다.한 친구는 졸업을 얼마 앞두고 인천으로 전학을 갔는데 산수를 좋아하고 달리기도 잘하던 가무잡잡한 새탓말 사는 여자 아이였다.
1970년대 중반,조국근대화를 위한 새마을 사업이 일상속에 뿌리내리던 즈음,
정치적으로 10월 유신의 저항도 무디어 질때쯤 쌀쌀한 꽃샘추위와 함께
졸업식을 했다.
나는 5학년 후배 미경양의 송사에 답사를 했다.
처음 제의를 받고는 반 대표가 아닌데 왜 내가 그것을 하느냐고 말했었다.
권위에 대한 저항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선생님께선 내 목소리가 다른 학생과 는 좀 다르다면서
내가 꼭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조금은 두려웠지만 하기로 했다.
선생님께선 뭔가를 힘들어 하는 날 알고계셨는지도 모르겠다.
겨울방학 동안 사택의 따뜻한 방 아랫목에서 선생님과 감정을 넣기도, 강약을 조절해 가며 읽고 외우고 녹음도 들어도 보며 연습을 했었다.
처음으로 나의 목소리를 알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선 나의 목소리속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소리가 난다고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었다.
나 자신은 매번 만족스럽지 못했고 더 잘 해보려고 했으며,
반면 수줍음도 많던 시절이였다.
" 자랑스런 교장선생님,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 선생님들 !
그리고 정성으로 길러주신 부모님과 후배들의 성원속에
오늘,저희들은 졸업의 영광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6년동안 철없던 저희들에게 ...."
그 졸업식이 끝나고 1시간도 안되어
운동장옆 이발소에서 상고머리를 빡빡 깍았다.
그리고 점심 때 선생님들과 아버지가 식사하는 장소에 나타나
술을 따라주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였을까 ?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였을까 ?
돌때부터 달고다녔다는
기침,가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