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신문 2022년 3월 14일자 에 김현우의 창녕향토사 이야기
<편조왕사 신돈 이야기>(3) "옥천사 복원과 좌절"이 연재되었다.
* 옥천사 복원과 좌절
김현우
옥천리 산 293번지, 옥천사 절터라 알려진 그 터에는 지금 석축과 연화대석, 석탑 부재, 석등의 하대, 옥개석 등 석조물들이 남아 있는데 약 800여 평 정도 되며 <옥천사터>였다는 안내판만이 쓸쓸하게 지키고 있다. 그곳은 옥천사를 복원하려다 좌절된 절터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창녕현 조에 이 절을 후에 복원하려다가 완성도 되기 전에 다시 신돈의 일로 반대가 생겼기 때문에 헐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玉泉寺。在火王山南。高麗辛旽母,乃此寺婢也。旽誅,寺廢。後改創,未旣,以旽之故,復有論列者,撤去。
옥천사 :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때 신돈의 어머니가 이 절의 사비였다. 돈이 주살誅殺 당하자 절이 폐쇄되었다. 후에 새로 지으려고 하다 예전 돈의 일 때문에 반대가 일자 이윽고 이루지 못하니 헐어버렸다. “『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창녕현 <고적>란”
그 복원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일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조선 성종 25년(1494)에 창녕현감 이기담(李基聃)*이 창녕을 다스린 지 1년 만에 관리들과 백성들이 옥천사가 훼철된 것을 애석히 여기므로 새 당우堂宇를 객사의 동쪽에 건립하였다고 전해온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기담 : 성종 25년(1494) 재직한 창녕현감(성종실록 292권, 성종 25년). <창녕군지> 환적宦績에는 한강 정구(1577~1580 재직) 이전의 기록이 없다.
이 일은 임진왜란 100여년 전의 일인데 그때 현청은 지금의 말흘리 여박골 입구에 있었다고 전래되고 있는데 그 객사의 동쪽은 옥천 쪽이다. 새 당우란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사찰의 큰 집과 작은 집을 일컬으니 그때 신돈과 연관된 사찰이란 말을 피해 당우라 기록되었을 것이며 옥천이란 지명도 피하려고 “객사의 동쪽”이라 했을 것이다.
절이라면 대웅전과 그 부속건물을 지었다고 추정된다. 곧 이기담 창녕현감 재직 때 옥천사를 복원하려던 것임을 말해주는데 절을 다 짓지 못하고 신돈이 그때까지 신원 회복이 되지 않았기에 조정에서 말썽이 생기자 결국 공사를 중단하고 완공 일보 직전에 허물어버려 축대만이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옥천사터>라고 알려진 곳은 아마 그때 짓다가 허물어버린 흔적이 남은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반역죄를 지은 자에 대한 형벌로 저택瀦宅이란 것이 있었다.
저택은 대역 죄인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못을 파는 것이었다. 고려 말 이성계 일파와 권력을 다투다가 고향 창녕 땅으로 유배 와서 죽임을 당한 조민수 장군이 살았던 대합면 신당리 집터가 저택이란 형벌을 받아 그 동리가 못이 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조씨들이 떠나야 했던 일이 있었다.
그처럼 신돈이 대역 죄인으로 몰려 귀양을 떠난 지 나흘 만에 수주(지금의 수원)에서 사사(賜死)되고 그의 추종 관원들도 떼죽임을 당했다. 그때 옥천사도 훼철되었으니 아마 철저하게 절의 여러 건물이나 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저택과 다름없는 일이 벌어졌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기담 현감 시절에 옛 절터 인근에다 새로 터를 마련해 규모가 작은 당우(절)를 지으려 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을 비추어 봤을 때 지금 남아 있어 옥천사터라 알려진 곳이 이기담 현감이 500여년 전 복원하려던 절터였으리라 추정된다.
용천사의 내력대로 옥천사가 47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3,000명의 승려가 수도하는 큰 절이었다면 그 절터가 어마어마하게 넓고 컸을 것이다.
지금 알려져 있는 곳은 절터가 좁고 지형이나 지세에 맞지 않는 듯하다. 그곳은 화왕산 남쪽에 절이 있었다는 기록과 상이하다. 화왕산과 관룡산의 사이 산성골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개울로 인하여 서편 비슬산의 지맥이 끊어졌고, 화왕산 동쪽의 관룡산 용선대에서 뻗은 산줄기 끝자락이니 비슬산 자락이라 볼 수 없다. 어쩌면 옛 옥천사의 아래쪽 부속건물터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따라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훼철된 원래 옥천사의 넓고 큰 절터는 옥천 마을 서쪽 산중턱 어딘가 있었을 것인데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진 듯하다.
만약 옥천사를 복원하려는 계획이 있다면 관계 기관이나 단체에서 지금의 옥천사지로 알려진 관룡사 초입의 좁고 낮은 야산에 대한 재검토를 해야 할 듯하다. 그곳은 화왕산 줄기가 아닌 관룡산(구룡산)의 남쪽 산줄기이니 예전 기록과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화왕산 남쪽인 비슬산 동편의 산 중턱 높은 곳이나 옥천마을 일대를 답사 조사하여 옛 절터를 찾아야 할 것이다. 비슬산 말흘리의 재련골에 자련사(紫蓮寺)와 승지사(勝地寺)가 있었다고 하며 고개를 넘어 동편 골짜기 옥천 쪽에 불당골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불당佛堂은 곧 절집이니 그 지역도 현지 답사해 볼 만한 골짜기라 하겠다.
“화업십찰”의 입지조건과 걸맞은 비슬산 자락, 옥천계곡을 환히 조망할 수 있는 넓고 큰 규모의 높은 지대의 부지를 찾아내면 좋을 듯하다. 그곳에 옥천사를 복원하여 그 입구에 일주문을 세워 <비슬산 옥천사>라 현판을 단다면 잊혀 버린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