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그들은 결코 특권계급도 아니요, 우아하지도 않다.
한편, 초식동물(草食動物)은 어떤가 하면,
이들은 풀과 나무가 충분히 주어져 있기 때문에, 굶주릴 걱정은 없다.
따라서, 그냥 놓아두면, 그들의 종족은 자꾸 불어난다.
그러나 초목이 마르면, 그들의 생존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초식동물과 초목과의 조정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사자를 비롯한 육식동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목은, 무리지어 사는 초식동물의 배설물이 거름이 되어,
초목 자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꽃과 꿀벌이랑 나비의 관계이다.
꿀벌이나 나비는, 꽃에 있는 꿀을 찾고,
꽃은 꿀벌이나 나비의 중개로 꽃가루를 얻어,
꽃을 더욱 아름답게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동물과 초목과의 관계란,
서로 도우면서, 자연의 환경을 보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따로따로 독립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저마다의 입장에서 살려지고, 자기의 몸을 공양(供養)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처참한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꼴을 보이고 있지만,
그 그림의 숨은 배경이란 것은,
전체를 살리는 전체에의 조화이고,
각 종족이 몸을 내 던지는 것에 의해,
다른 종족이 보존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한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은 절대로, 무익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구로부터도 습격받는 것을 모르는 사자도,
일단 먹이를 얻어, 배를 채우고 나면,
절대로 그 이상의 먹이를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눈앞에 먹잇감이 지나가도, 그것을 덮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의 섭리’이다.
만약 그들이 재미로, 약자를 마구 죽이는 일을 한다면,
이윽고는 그들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요한 것밖에 잡지 않는다.
굶주림이 가시면, 그들은 거기서 만족한다.
족(足)함을 알고 있다.
알고 있다기보다도, 하늘이 부여한 그들의 본능이다.
자연이 그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동물이나 식물의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석유나 석탄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이 지상계의 진보와 조화의 초석이 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이 지상에 내려와, 이 세상의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서의,
선구자로 된 것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 자신의 혼(魂)의 진화가 촉진되어,
훗날 그들은 누구에게서도 범해지지 않는 혼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한 치의 벌레에도 오푼(五分)의 혼(魂)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힘껏 살면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자연계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표면에 나타난 모습만으로, 이것을 사회나 인생관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인간은, 도리를 생각해서,
보다 나은 사회, 조화된 지구국가(地球國家)를 이룩하여,
동식물을 포함한 대자연계의 좋은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神)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사명이다.
만물의 영장이하의, 동물의 투쟁 본능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영토 다툼이나 경제 투쟁에 밤낮을 지새워,
피로써 피를 씻는 무익한 싸움에, 생명을 버리고 있다.
그와 같은 인간끼리의 추악한 다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또 과학의 발달에 의하여, 살충제 등을 사용하거나,
사과나 복숭아 등의 과일을 인공 수정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화학제가 인체에도 해독을 주게 되었다.
산과 들의 동물들은, 양심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남획되고,
차츰 그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현대의 불행이다.
하천의 공해, 공기의 오염과 같은 자연의 파괴가,
점점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여,
동물 이하의 추한 파괴활동이나, 마음을 잊은 학문적인 인간만을 만들어 내어,
자연의 조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보다 더 힘써, 인간 부활을 외치기 시작하여,
대자연과 하나인 것을 알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대자연의 보다 나은 조화 속에서,
다른 동식물과 함께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데
자연을 해치는 다툼을 계속하면,
동식물의 생태에도 많은 이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동물, 식물의 실태를 바르게 인식하고,
한층 더 혼의 향상을 지향해 가야 한다.
(주; 우리의 육신의 가치는, 이 자연계의 일부분으로서,
자연계의 그 이상도,그 이하도 아닌 일부분..
빈틈없이 꽉 들어 찬 자연계. 그 속에서 일어나는,
생 노 병 사,
태어나는 것만이 신의 은총이 아니라, 늙어, 병들고, 죽는 것도,
신의 은총,...
새로 태어나는 새싹의 거름이 되어주는 노목의 죽음과 똑 같이,
멀리서 보는, 외부에서 보는, 숲은 푸르르고, 건강합니다..
하지만 숲속으로 들어가 보면, 생노병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봅니다.
모든 생명이 깃들어 사는 푸르른 숲은 신의 자비입니다.
항상 푸르른 숲은 항상 변하는 무상의 덕분입니다.
항상 변하는 무상은 생노병사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생노병사는 신의 자비입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에 포옥 싸여 사는 것처럼,
우리도 자연 속에서 포옥 싸여서 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생명의 은인 속에 싸여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 정견 > 입니다.
대자연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약육강식의 무서운 세상으로 본다면 절대자에게 구해달라고 매달려야 하겠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위대한 이유는
이 세상을 자비로운 세상으로 보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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