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잖아도, 인간은 자기에게 좋은 것을 보면, 기뻐하고,
형편에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싫어합니다.
이것은 깊이 명심할 일이 아닐까요.
귀는 또, 공기를 매체로서,
1 초간에 약 330 미터의 속도로, 고막에 음파가 전달되어 온다.
그리고 청각신경을 자극하여, 의식으로 전달되어 갑니다.
다만 음에는 고저 강약이 있어 완벽하게 음파를 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불가능하다고 해도,
현세는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으로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그것이 불확실한 것이어도,
귀를 통해 듣는 모든 것은, 올바르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르게 듣는 것이 불가능한 귀를 가진 사람은,
타인의 일언일구에 감정적으로 되고,
자신을 미치게 해서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코는 후각신경을 담당합니다.
누구라도 악취는 싫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향수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는 독을 포함한 냄새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에는 자연의 냄새가 있고,
사물에는 또한 각각의 냄새가 있기 때문에,
바르게 냄새를 맡고 올바르게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혀는 언어의 발음원이기도 하고,
식사 때의 미각으로, 영양보급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재앙은 입으로부터
병(病)도 입으로부터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서는 가장 중요한 오관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중도를 근본으로 해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말이 타인에게 의지를 전하는 도구로서,
누구에게도 깊은 경험이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 일언일구가,
상대를 화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것을 보더라도,
중도를 지켜, 분별하여 말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목소리에는 운(韻=울림)이 있어,
언혼(言魂)이란 소리의 파동이,
이 현상계 이외의 의식계로 전해져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의 종소리나. 스님의 독경,
이것들은 어느 것이나 모두 음의 파동을 타고,
실재계(천상계)에도 지옥계에도
또 이 현상계에도 자유자재로 갈 수 있습니다
이 파동을 타고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내다보는 힘을 가지고,
깨달은 사람을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조화하여,
육체에서 이탈한 또 한 명의 자신이 그 파동을 타고 가면,
예를 들어 종소리의 경우에는,
그 종을 친 사람의 마음에 비례한 차원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몸은 육체적 감촉을 포함한, 오체 오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체란,
자손 보존의 본능으로서,
선조 대대로 내려와 계승되어 온.
지상계에 적응한 육체주(舟). 그것입니다.
혼의 수행장(물질계)을 목적으로 한 인생 항로의 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신리(神理=신의 이치).
즉 신리(神理)를 잃어감에 따라,
우리들은 육체가 절대다(육체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믿게 되어,
보잘것없는 얼룩진 역사를 계속 만들어 오고 만 것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육체주의 선장인 혼(魂).
즉 의식을 잊고,
그 중심인 마음을 소홀히 해왔던 것입니다.
육체주의 부속물인,
눈 귀 코 혀 몸이 절대처럼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만약 육체가 절대라면,
왜 죽을 때, 실재계(천상계; 영(靈)의 세계)로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차원이 다름과 동시에
이 지상계 가장 조악한 물질계와
조화된 정묘한 영위기에 둘러싸인 세계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는 병들고, 늙고,
그리고 죽어서 대지랑 하늘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거기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처럼 우리의 오체 오관의 번뇌가, 마음에 작용하여,
바른 기준, 치우침이 없는 중도의 기준을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랑, 재난 액난. 즉 모든 고액의 원인이 되어 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리자여.』
사리자라는 분은 고타마 붓타의 오른팔이라고 불렸던 사로몬(수행자)입니다.
《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
『 불교는,
시대와 함께 인간의 손에 의해, 어렵게 철학화 되고 말았다.
마음과 행동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말법의 신앙이다.
타력본원이 그렇고,
교단 불교가 그렇고,
제사 불교가 그렇고,
사경이 그렇고,
독송이 그렇다.
신불의 기쁨은 다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사람들이,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 불교 본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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