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를 지내는 시간
번역문
【문】 ‘궐명(厥明)’과 ‘질명(質明)’…….
【답】 ‘궐명’의 ‘궐(厥)’ 자는 제삿날 전날 재계할 때를 기준으로 삼아서 말한 것이네. 그러므로 ‘궐(厥)’이라고 말한 것이니, 이는 ‘그다음 날[其明日]’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네. ‘질명’의 ‘질(質)’ 자는 ‘정(定)’ 자와 같으니, 이는 틀림없이 다음 날이 됨을 질정(質定)한 것일세. 궐명이 질명보다 조금 빠르니, 궐명은 바로 첫닭이 울 때이고, 질명은 오경(五更)의 파루(罷漏)가 칠 때이네. 옛적에 여동래(呂東萊 여조겸(呂祖謙))의 집안은 오경에 제사를 거행하였다고 하네.
원문
厥明質明云云.
厥明之厥, 從前日齊戒時言之, 故曰厥, 如云其明日也. 質明之質, 猶定也, 蓋質定其必爲明日也. 厥明, 差早於質明, 厥明, 卽鷄初鳴時. 質明, 是五更罷漏時. 昔呂東萊家五更行祭云.
- 박윤원(朴胤源, 1734~1799), 『근재집(近齋集)』15권 「답홍백응(答洪伯應)」
해설
언제나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가족과 친지 또는 지인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필자의 전공과 직업 때문인지는 몰라도 종종 이른바 ‘유교식 예법’이 이야깃거리가 되고는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들어서 필자의 기억에 남는 말이 있는데, 바로 “기제사(忌祭祀)란 고인(故人)이 살아계실 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기일(忌日) 전날에 지내야 한다.”라고 한 것과 “기제사는 반드시 자정(子正, 0시 30분)에 지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사찰에서도 고인을 위하여 재(齋)를 올리게 되면 기일 당일을 기준으로 삼아서 거행하고, 성당이나 교회에서도 고인을 위하여 기일 당일에 추도식을 거행한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유교의 기제사만 유독 기일 전날에 지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기제사를 자정에 지내야 하는 것인가? 과연 이러한 말들은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예법 –관혼상제(冠婚喪祭)- 의 근간이 되는 것은 『가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정(程)ㆍ주(朱) 성리학(性理學)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조에서 『가례』는 사회 기초 질서의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하였기에, 각종 의식 절차에 『가례』의 영향이 지대하였음은 재언할 필요가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바로 이 『가례』 가운데에 「제례(祭禮)」 ‘기일(忌日)’ 조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제삿날 하루 전에 재계하라. 설위하라. 제기를 진설하라. 제수를 갖춰라. 궐명에 일찍 일어나 채소와 과일 및 술과 제수를 진설하라. 질명에 주인 이하는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사당에 가서 신주를 모셔 나와 정침으로 나아오라.[前一日齊戒. 設位. 陳器. 具饌. 厥明夙興設蔬果酒饌. 質明主人以下變服. 詣祠堂奉神主出就正寢.]
여기서 ‘궐명’과 ‘질명’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는 제사 지내는 시점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이는 기제사뿐만 아니라 제사 중 가장 중요한 사시제(四時祭)를 포함해 제반 제사에 관한 예문(禮文)에 공통으로 보인다.
이 ‘궐명’과 ‘질명’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그의 스승인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에게 여쭈었다. 여기서 잠깐 학맥을 살펴보자면, 매산은 근재의 학문을 전수(傳受)하였는데 근재는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리고 매산의 학문은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에게 이어졌고 또 이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에게 이어졌다. 이것이 18ㆍ19세기에 이어지는 낙론(洛論)의 정통 학맥이다.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던 근재는 제자의 물음에 대하여 참으로 간명(簡明)하게 설명해 주었다.
‘궐명’이란
‘계초명(鷄初鳴)’, 즉 ‘계명(鷄鳴)’인데, 이는 대체로 축시(丑時, 오전 1시 30분~3시 30분)에 상당한다.
‘질명’이란
‘오경(五更)의 파루(罷漏)가 칠 때’로, 오경 삼점(三點)인데, 이는 대체로 인시(寅時, 오전 3시 30분~5시 30분)에 상당한다.
요컨대, 근재의 말인즉슨 바로 제삿날 당일 축시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인시에 제사를 거행한다는 것이다. 그 실례(實例)로서 근재는 ‘여동래의 집안’을 언급하였는데, 다른 기록을 찾아보면 오경에 제사를 거행한 것은 ‘정자(程子)의 집안[程子家]’, ‘정이천의 집안[程伊川家]’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여기에 근거해서 보자면 ‘기제사는 기일 전날에 지내야 한다.’라고 한 것이나 ‘기제사는 자정에 지내야 한다.’라는 등의 설(說)은 연원이 불분명한 속설(俗說)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해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하였을까? 아마도 『가례』의 예문 중에 ‘제삿날 하루 전에 재계하라. 설위하라. 제기를 진설하라. 제수를 갖춰라.’라고 한 내용이 있는 데에다가 기일이 되자마자 고인의 혼령을 곧바로 모시고자 하는 후손의 정성이 더해져서 그러한 듯하다. 특히 옛적에는 하루의 시작을 자시(子時, 전일 23시 30분~익일 1시 30분)로 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습속(習俗)이 생겨나 고착하도록 조장하였으리라.
예법은 시대적 변천을 겪고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면서 일정하게 변형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기제사는 기일 전날에 지내야 한다.’라고 한 것이나 ‘기제사는 자정에 지내야 한다.’라고 한 것을 두고서 ‘우리나라 예법의 특징이다.’라고 하거나 ‘우리나라의 고유한 전통이다.’라고 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 역시 어찌 보면 그 나름대로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다만 예법의 한국적 변용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 원인을 규명하려는 의견에 대해 도리어 핀잔을 주거나 무지를 지적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기제사’라는 것 자체가 ‘유교식 예법’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자의 『가례』- 을 근저로 삼고 있는 만큼, 엄밀하게 ‘유교식 예법’이라는 잣대로 판단해 보자면 상기한 현행 기제사는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한 ‘한국 스타일의 추도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기제사’란 말 그대로 기일,
즉 돌아가신 바로 그 해당일에 지내는 것이다.
기제사를 지내는 구체적인 시각은
기일의 질명,
즉 인시 –오경 삼점(三點)- 에 거행하되,
부득이하여 이때 지내지 못하였을 경우 해당 기일 안에만 지내면 된다는 것이 실증적으로 명확한 예법이다.
글쓴이이영준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 선임연구원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첫댓글 유익한 정보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