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운동의 요람 만의서재(晩義書齊) (예천군발간:내고장전통가꾸기중에서)
예천군 지보면 만화리 402번지, 속칭 만촌 부락에 있는 건물이다.
현재 용궁 전씨 문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는데 원래 효자 諱전진광(諱全震光, 贈朝峯大夫童蒙敎官, 1685~1756)의 아들 諱세삼(諱世三, 1715~1789)이 만년에 몇칸의 초가집을 지어 세속과 등지고 오직 그의 아들 5형제의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용궁전씨세보(龍宮全氏世譜-世三:好學薦行 志高德備 構享屋後 謝俗逍遙)]에 의하면 諱세삼이 정자를 지었다 하는데그정자 이름은 학위당이었다. 諱전세삼의 자는 의숙(義淑)이요 호는 학고(學古)이다.
이 학위당이 발전하여 사학(私學)의 요람(搖藍)이 되었다.
이집에서 공부하던 인물중 후손인 諱전홍교(諱全洪敎, 1835~1893)는 1870년(高宗 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하였으며 諱전홍우(諱全洪佑,參奉), 諱전병태(諱全昞泰,主事) 등이 있다. 석산(石山) 정승모(鄭升模)도 한때 이곳에서 공부 한바 있다.
그후 개화와 함께 창동의숙(彰東義塾)이라 개칭하고 의성 대곡사(大谷寺) 재목을 사들여 1880(高宗 17)경에 중수 하였으며, 이는 지보공립보통학교(知保公立普通學敎)의 전신이 되었다.
이 창동 의숙은 일제 때도 계속되어 많은 인사들을 배출 하였다. 전 국방,내무장관 현석호(玄錫虎)도 이곳에서 공부 하였다. 전 국회의원 권병로(權炳魯)는 이곳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당시 초등반, 중등반으로 편성하여 초등반은 국어,한문,수학, 중등반은 국어,한문,영어,수학을 비롯하여 지리,역사,체조 등을 가르쳤으며 諱전동진(諱全東震, 1899~?) 같은 이는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망명, 신흥군관학교(新興軍官學敎)를 거쳐 다시 국내로 들어와 창동의숙에서 체조선생을 하면서 애국정신을 고취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된곳이기도 하다. 諱전동진은 수년간 옥고 끝에 석방되어 만주로 다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한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諱전병표(諱全炳豹, 字 理中, 1876~1961)는 국내에서 비밀 결사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으며 경상도 일대의 의용단(義勇團) 군무국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된 사실은 당시 동아일보에 상세히 보도된 바 있다.
諱전상조(諱全相朝, 字 忠可)는 지보공립보통학교의 설립에 안간힘을 썼으며 거듭된 흉년에 전병표와같이 지보면내 빈민들을 구제하였는데 모두 이 창동의숙을 중심으로 배출된 인물이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근간으로 한 창동정신(彰東精神)의 발로일 것이다.
일제 말엽에는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실시하였고 해방(1945) 후에는 건물이 퇴페일로에 있던것을 이곳의 용궁전씨문중에서 1972년에 중수하여 만산서제(晩山書齊)라 하다가 諱전병태(諱全昞泰)의 아호와 같다고 해서 페(廢)하고 만의서제(晩義書齊)라고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의정 記*
용궁의 동쪽 삼십리 가량에 위봉산이 있으니 산 아래 일구는 우리 축산 전씨의 세압인데 동리 안에 창연한 정자가 있으니
만의라는 현판은 고 학고전공의 강학 하던 곳이라.
공의 대인공 형제가 시묘 삼년 동안에 호랑이가 여막 옆에 업드려 밤 마다 늘 그러하거늘 주려(州閭)와 원근이그 효감 소치로 알고 조정에 상주 하니 증 조봉대부동몽교관 하니 여지승람에 실렷더라.
학고공이 선지를 받들어서 처음으로 만의산 중에초려를 세우니 배움을 좋아하고 행실이 돈독 하여
사람이 아는것을 원 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더불어 서로 잊으려 하는데
溪山川石之間을 소요자적 하니 세상 물정에 초연한 사람 같더라.
대게 그담백하고 부귀를 원 하지않는 덕의 풍범의 만에 일을 가히 상상 할수 있더라.
이래로 자손이 번성 하여 남파공의 문과장령과 만포공의 참봉 벼슬이 내린것은 적후 함이 아님이 없고
또 만취 만산 봉초 가석 제공의행의와 학덕은 향리에서 모범이 되는즉 어찌 일시의 반짝 하게 지나친 일이겟는가? <br> 신축년 개축시에 현판을 학위당으로하고 기문에 전말이 자세하게 기록됐은즉 거듭 말할 필요가 없으며
이후에 개와중수시는 종사가 기허했을때라 창동의숙으로 고치고 광복에 뜻을 두고 후진을 교도 하엿다.
강학 하는 열에는 현석호와 같은위가 장관에 이르는 이가 나서 행의와 범백이 유속중에서 초연하여 바탕이 자다함이 없으니
포의한사와 다름이없어서 이 숙에 빛이되게하니 누가 감히 적다고 할겄인가.
또 퇴락해서 개축하여 현판을 만의정이라 함은 선지를 취함이 아니고 천백대의 후세에 물려줄 계획인즉
영원의 뜻을 승계함도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당이 숙이되고 숙이 정자가 되는동안이 연연세월이 벌써 백오십여년의 일이라.풍연은 고침이없으나
상해는 누겁하여 세도가 다지하니 스스로 금석지감을금할수 없도다.?
액운을 당하여 다시는 송시,독서하는 소리를 들을수 없으니 우뚝선 일허정은 시종 묵묵히 말이없고
사람은 가고 빈뜰만 남으니 이것이 어찌 다했다고 할것인가.
나 병욱은 첨재족말하여 약관시에 래왕이 흡사 어제 아침과 같은데 거연 오십년이 나 보다
지난 옛일을 소급해 생각하니꿈만 같구나.
뜻하지 않게 족종 도성 재로 재하포가 나를 돌아보고 기문을 부탁하거늘 족의를 헤아리더라도
의리에 고사하기가 어려워 외월함을 헤아리지않고 이 전말을 기록하여 조르는것을 막고져 하노라
을축시월 일 족 후손 병욱은 삼가 쓰노라.
첫댓글 만의정 복사한 곳
http://blog.daum.net/kil0930/1007
http://blog.daum.net/kil0930/1007
http://cafe.daum.net/manchonin/Q9Bv/8
오랫만에 晩義亭을 보고있다.
매년 時祀땐 만의정엘 들렀었는데 올핸(2020년, 庚子년) 怪疾코로나 19 탓으로 고향을 가지않았다.
내 나이 87살이다, 얼마나 더 고향을 찾을수 있을가? 생각이 이에 미칠때면 70여년전, 半世紀가 훌적지난 옛일들이 소록 소록 생각난다. 오월 端午날은 만의정앞 큰 소나무에 그네를 메고 마을 새 색씨들, 처녀들, 간혹 청년들의 그네타는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