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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유적이 많은 나라 캄보디아
厚堂 고 광 창
觀光은 객지의 풍물이나 풍경을 구경하면서 즐기는 것으로 반드시 목적지(관광지)가 있음에 비하여 旅行은 객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것임으로 일정한 목적지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어르신들이 ‘집 떠나면 고생이다’ ‘旅行이 苦行이다.’라는 말씀을 곧잘 하셨는데 일단 집을 떠나면 어떤 숙소에 가서 자더라도 자기 집처럼 편할 수가 없다는 말씀일거라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 ‘여행이 고행이다.’라는 말씀이 정말 옳은 말씀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우리의 눈은 서로 다른 것과 잘 못된 것은 바로 찾아내지만 비슷한 점, 좋은 점은 얼른 찾아내지 못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눈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그런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외국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좋은 점을 찾아보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나의 가방끈이 짧은 탓인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아 무척 아쉬웠다. 좋은 점을 많이 발견하면 여행이 마냥 즐겁고 힘이 샘솟기 때문에 내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캄보디아도 정치적으로 아직 불안정하고 경제도 개발 도상에 있는 상태지만 태고적 자연 모습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자연환경과 불심이 강한 국민들의 착한 마음씨 등 좋은 점이 많이 있다. 짧은 기간에 좋은 점을 얼마나 많이 찾아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고생하면서 하는 여행이 진짜 좋은 여행인줄은 알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고 피곤할 때는 ‘지름길’이 있는데 왜 굳이 ‘에움길’로 가야만 하는지 자문자답해 보곤 했다. 그만큼 캄보디아 여행길이 어려웠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캄보디아에는 이런 格言이 있다고 한다. ‘미래를 겁내지 말고 과거 때문에 슬퍼하지 마라’ 캄보디아 역사를 보면, 캄보디아에 가장 적합한 격언이란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의 특징>
o 앙코르 유적이 많은 곳
o 외국의 침략을 많이 받았던 곳
o 쿠데타가 자주 일어났던 곳
o 대량 학살(킬링 필드)이 있었던 곳
o 경제적 빈곤 국가
<캄보디아 기본 사항>
o 공식 국명 : 캄보디아 왕국
o 수도 ; 프놈팬
o 면적 ; 남한의 1.8배 정도
o 인구 : 약 1200만 명
o 민족 ; 크메르족 90%, 베트남 인 5%, 화교 1%, 기타 4%
o 종교 : 소승불교 95%, 기타 5%
o 언어 ; 크메르어(캄보디아어)
o 화폐 : 리엘(Riel) R10 = 3원
o 정부/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양원제, 사회주의 국가
<캄보디아 역사>
o 후난 (1세기~6세기)- 서기 1세기 경 印度 브라만(인도 귀족)이 ‘후난’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힌두교 정착, 강대국으로 성장하다가 왕위 계승 문제로 6세기경 ‘첸라’에 합병
o 첸라(6세기~8세기) - 자야바르만 2세에 의거 통일하고 수도를 ‘씨엠리업’ 부근으로 옮김- 앙코르 문명의 시작
o 앙코르 왕국(802년~1432년) - 씨엠리업 북쪽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이주하고 대제국으로 성장, 12세기에는 앙코르 왕국 절정기, 13세기 소승불교 들어옴,
12세기말 ~ 13세기 초 앙코르 왓, 앙코르 톰, 바욘, 따 프롬 등 대규모 사찰 건설
o 13~14세기에 나약한 왕이 즉위하고 내정 불안으로 국력이 급속히 약해짐.
o 15세기 안남(베트남)과 시암(타이)의 침략을 받아 400년 동안 두 나라의 封臣[1]이 됨
우리나라도 고려 말기부터 중국 明나라에 조공을 바쳐오다가 조선이 들어서면서 國名을 어떻게?, 왕위 계승은 누구에게 할지 등에 대해서 淸나라의 자문을 받아야 했던 뼈아픈 역사적 기억이 남아있다.
※안남- 남베트남의 동부에 있는 곡창지대로 6·25전쟁 후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을 구입하여 나누어 주었다. 우리에게는 ‘안나미 쌀’로 기억되고 있다.
o 프랑스 식민지 - 1863년 프랑스와 보호조약 체결, 1867년 시암(타이)에서 캄보디 아의 지배권을 양도 받아 캄보디아를 라오스와 함께 ‘인도차이나 연합’으로 합병시킴 으로써 사실상 프랑스의 식민지가 됨
o 캄보디아 - 1953년 독립선포, 1955년 총선 실시,
<캄보디아의 정치 상황>
캄보디아가 90년 동안의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가 되자 ‘시하누크’[2] 가 일본의 도움을 받아 1952년 내각 해산, 1953년 독립을 선포하고 자신이 수상이 된 후 1955년 총선을 실시하고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주의로 전환했다.
1970년 론놀 장군이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크메르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민주 정부를 수립했지만 부패와 무능으로 국가를 혼란 상태에 빠뜨리다가 미국이 론놀 정권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자 1975년 공산주의 집단인 ‘크메르루주’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켐프치아 공화국’[3]을 선포한 후 철저한 공산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자신들의 이념인 공산화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했다(킬링 필드[4]).
그 후 몇 차례 내전이 계속되다가 1997년 중국을 등에 업은 ‘훈 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수상이 된 후 ‘인민당’을 만들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국정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 캄보디아는 프랑스 식민지 90년, 론놀 장군을 앞에 내세운 미국 통치 5년간을 겪은지라 서방세계와는 거리를 두고 중국과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도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캄보디아가 서방세계를 멀리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5]
너무 잔혹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무슬림들은 ‘할랄’ 음식을 만들기 위해 닭, 양 등을 도축할 때 그 동물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알라’ 이름으로 짧은 시간에 도축한다고 하니 이런 점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우리가 본받을 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캄보디아가 프랑스를 특히 미워하는 이유
캄보디아는 프랑스가 오랫동안 식민 통치하면서 이곳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각종 경제적 수탈(收奪)을 해가면서 도로 철도 등 개발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캄보디아에는 지금도 철도가 없다), 1954년에는 프랑스가 군대를 또다시 몰고 쳐들어와(인도차이나 1차 전쟁)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3국을 합쳐 ‘인도차이나 연합’을 만들어 자기들이 다스리겠다고 해 다시 한번 싸운 일이 있기 때문에 무척 미워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
한 나라의 경제는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먹을 게 없어 못 먹어 배고픔의 단계를 貧困이라 하고, 먹을 게 없어 굶어 죽게 되는 단계를 飢餓라고 하는데 이런 나라들은 대부분 외국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거나 국내 소요(쿠데타)사태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인 경우이다.
캄보디아는 지금까지 외국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또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90년간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해왔으며 최근에는 잦은 쿠데타로 정국이 불안하다보니 생활도 불 안정 해서 배고품을 느끼는 정도가 심한 나라인 貧國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 같다.
<타이에서 캄보디아 국경 넘기>
<방콕 북부터미널→ 아란야쁘라텟>
방콕 북부 터미널에서 아란야쁘라텟 까지 가는데 북부루트와 남부루트가 있는데 북부루트가 시간이 적게 걸리기 때문에 에어컨 1등 버스를 6시에 타고 북부루트로 4시간 30분 정도 걸려 아란야쁘렛에 도착했다. 당일 씨엠리업까지 가기 위해 서둘렀다.
<아란야쁘라텟→뽀이뺏>
아란야쁘라텟에 도착하니까 오토바이 기사와 뚝뚝이 기사들이 몰려온다. 국경까지는 뚝뚝 B50, 오토바이 택시 B30~40를 주면 된다. 또 국경에 도착하면 출국 수속을 도와주겠다며 호객꾼들과 아이들이 아주 반갑게 맞아 주지만 도움 받을 필요 없이 각자 여권과 출국신고서를 제출하고 휴대물품에 대한 세관 검색만 받으면 된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똑 바로 가면 작은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가 국경선이다. 다리를 건너면 캄보디아 입국장이 보이고 거기서 입국신고서를 작성하여 여권과 함께 제출하면 입국 절차는 모두 끝난다.
<뽀이뺏 → 씨엠리업>
입국장을 나오면 동상 왼쪽에는 트럭들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미니버스들이 서 있다. 트럭을 타면 흙먼지를 뒤집어 써야 함으로 좀 비싸더라도 승용차 택시를 이용하려고 대당 B1000에 흥정을 했다. 3시간 정도 지나서 씨엠리업에 도착했는데 도로 사정도 안 좋은데다가 택시도 낡은 것이라 피로감이 겹쳐진다.
타이에서 출발할 때 숙소 주인장이 우리에게 캄보디아 국경에 도착하면 비자를 대신 신청해 주겠다 또는 씨엠리업가는 차를 소개해 주겠다고 다가서는 호객꾼들이 많으니 주의해야 하고 특히 가방 간수를 잘 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기 때문에 그 덕에 호객꾼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무사이 국경을 넘어 온 것 같아 타이 숙소 주인장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1. 앙코르 유적지 입구 ‘씨엠리업’(Siem Reap)
앙코르 왕조 전까지는 ‘첸라 왕조’의 수도였는데 수도가 앙코르로 옮겨 간 후
오늘날에는 앙코르 유적을 찾는 관람객들이 스쳐지나가는 곳에 불과하다.
o 항공 - 항공편은 방콕에서 매일 4회, 프놈팬에서 매일 7편정도 운항
o 도로 - 도로가 매우 부실하여 많이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 매연으로 인한 공해는 없고 공기가 깨끗한 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동차 기름을 외국에서 수입해 오고 있는 형편임으로 도로가 부실한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o 배 - 씨엠리업 - 프놈팬 간 일반보트는 6시간 소요, 고급 보트는 4시간 소요
매일 1회 왕복 운항, 하루 전날 예약 필수
※水路교통 - 도로가 부실하기 때문에 수로를 많이 이용하는데 수로는 육로에 비하여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o 시내 교통 - 앙코르지역 갈 때 오토바이 택시인 모또, 승용차 택시, 뚝뚝이 이용
숙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글로벌 홈스테이’로 정했는데 도미토리부터 에어컨 방까지 구비되어 있고 아침 식사가 제공 되어 편리했다.
<앙코르 유적(Angkor Ruins)>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고 씨엠리업 주변 반경 약 30㎞에 걸쳐 모여 있는 대규모 유적군이다.
o 롤루오스 유적 - 씨엠리업 동남쪽 16㎞ 떨어진 곳, 10세기 이전에 지어 진 곳인데
유적 대부분이 오래되어 파손된 곳이 많아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o 앙코르 유적 - 씨엠리업 북쪽 10㎞에 위치
승용차 택시로 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상인들이 우루루 몰려온다. 밀짚 모자를 들고 원 달러! 하며 외치더니 조금 있으니까 방금 차에서 내리던 우리들 모습을 찍은 사진을 넣은 기념 접시를 가져와 투 달러! 하고 외친다.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짧은 순간에 사진을 넣은 기념 접시를 만들어 오는 걸 보고 놀랐다. 그만큼 삶이 절실한 것이다. 사진에 자기 모습이 잘 나온 친구 2명은 기념 접시를 사고 4명 모두는 밀짚모자를 샀다.( ※기념 접시는 접시 가운데 사진만 오려 붙인 것이기 때문에 사진만 떼면 또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① 앙코르 왓(Angkor Wat) - ‘사원의 도시’란 뜻,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 때 지은 힌두 사원, 앙코르 유적의 대표적인 곳, 사원에 조각된 수리야바르만 2세의 얼굴을 본뜬 부조물 들은 앙코르 최고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단다. 종교적인 건축물로는 가장 방대한 81㏊의 넓이인데 중앙에 우뚝 솟은 탑은 聖山인 수미산을 나타내고 주위의 탑 5개는 메루의 다섯 봉우리를 상징한단다.
② 앙코르 톰( Angkor Thom) - '커다란 도시‘란 뜻 12세기 말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가 불교의 왕도로 지은 건물인데 성곽 안에 여러 유적이 모여 있어 한 도시를 나타내는 지명이다. 톰의 내부로 들어가려면 해자(垓字) 위에 걸쳐 놓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 좌측에는 신들의 상, 우측에는 아수라 상이 나란히 들어서서 큰 뱀을 든 채 난간을 형성하고 있다.
③ 바욘(Bayon) - 12세기 말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 때 지은 불교 사원으로
사방에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가진 크고 작은 50개의 탑이 서 있는 장엄한 건축물이다. 앙코르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는 이곳은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을 본뜬 관세음보살상의 얼굴로 유명하다.
④ 따 쁘롬(Ta Prom) - 12세기 중반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 때 지은 불교 사원으로 ‘따 쁘롬’이란 ‘조상 브라호만’이라는 뜻이란다, 이 사원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쁘리야칸을 지었던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절로 1186년에 건립했다. 내부는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모양으로 화려한데 폐허로 발견된 당시의 모습을 보전하기 위해 일부러 복구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TV에서 커다란 나무뿌리가 담벼락을 휘감고 있는 사원을 가끔 보는데 이 사원이 바로 ‘따 쁘롬’ 사원이다. 외곽은 동서 1㎞, 남북 600m 에 이르지만 안쪽 사원은 사방 24m로 작다.
<캄보디아가 불교성지순례지가 아닌 이유>
이곳 캄보디아는 국민 95%가 소승불교 신자이고 앙코르에 불교유적이 많은데 왜 이 나라는 불교성지순례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앙코르에 와서 현장을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캄보디아는 인도의 브라만족이 ‘후난’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그때 힌두교가 자연히 정착되었고, 불교는 이후 이웃 나라에서 조금씩 들어오다가 13세기에 소승불교가 들어오고 왕이 힌두교를 불교로 개종을 하면서 힌두사원이 불교사원으로 바뀌었다. 12세기가 앙코르 왕국의 전성기였는데 이때 건립된 사원에는 힌두사원과 불교사원이 섞여 있다. 12세기 초까지는 힌두사원 유적, 그 이후는 불교사원 유적이라고 보면 된다. 앙코르 유적지에는 불교 사원 유적보다는 힌두교 사원 유적이 더 많고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인 ‘앙코르 왓’도 힌두교 유적지다. 따라서 불교신자들이 캄보디아로 관광은 가지만 불교성지순례지라고 찾아 가는 곳이 아니다.
2. 똔레 샤프(Tonle Sap) 호수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
시엠리업에서 남쪽으로 6㎞지점에 있는 담수호로 ‘똔레 샤프’가 있는데, 크메르 어로 ‘똔레’는 강, ‘샤프’는 거대한 담수호를 뜻한단다.
시엠리업에서 뚝뚝이를 타고 1시간여 만에 호수 선착장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려 호수를 보고 호수의 크기에 놀랐다. 호수 저쪽 끝이 잘 보이지 않아 바다인지 호수 인지 헷갈린다. 이 호수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담호수인데 주위의 주요 하천과 연결되어 있어 호수 물이 고여 있지 않으며 이 호수 물은 ‘똔레 샤프’ 강을 통해 동쪽의 메콩강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호수 모양은 호리병 박 형태인데 평상시에는 호수 면적이 2700㎢이고 깊이는 0.9~3m이지만 雨期(5월~10월) 때는 면적이 16,000㎢, 깊이는 9m에 이른다고 하니 그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백질 공급원>
雨期때 메콩강이 역류하여 강물이 밀고 올라오면 육상에서 자란 식물 유기물이 풍부하게 공급되고 다량의 플랑크톤이 발생하여 무게가 100kg이 넘는 거대 어종을 비롯하여 600여 종의 담수어가 살고 있는 큰 규모의 민물 양어장이다. 이곳 민물고기가 캄보디아인들의 단백질 섭취량의 6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똔레 샤프 호수가 캄보디아의 보물인 셈이다.
<비옥한 농토에서 2모작 가능>
또 雨期 이외의 기간에는 호수 물이 빠져나가면 호수 가운데에 있는 농지가 물 위로 들어나는데 물이 빠져나가면서 양분이 많은 퇴적물을 남기고 가기 때문에 우기 이외의 기간에는 들어난 농지에 벼와 채소 농사가 가능해지고 또 호수 주변의 농지도 메콩강이 역류하면서 양분이 많은 퇴적물을 골고루 배분해 주니 비옥한 농토에서 2모작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다른 지역은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나서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데 이곳은 메콩강이 역류하면서 농토를 옥토로 만들어 준다고 하니 믿어지지가 않지만 믿는 수밖에 없다. 아니다는 증거를 댈 수 없으므로 ---
참 하늘의 복을 많이 받는 곳인 것 같다.
<水上 마을)
호수 위에 집을 짓고 사는 水上 家屋이 호수 주변에 밀집해 수상 마을을 이루고 산다. 다른 나라 호수에도 수상 가옥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처럼 큰 마을은 아니었다. 수상 가옥이 많이 모여 그 규모가 커지다 보니 호수 옆 육지에 보건소, 경찰서, 학교. 병원, 우체국, 상점, 시장 등이 갖추어져 있고 집집마다 노 젓는 보트가 있어 이를 타고 왕래한다고 하니 노 젓는 보트가 육지의 자전거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호수가 이곳 애들에게는 마당이고 놀이터다.
보트 한 척을 흥정하여 호수 구경에 나섰다. 카누 모양처럼 앞뒤가 뾰족한 6명 정원인 보트를 탔다. 수상 가옥은 호수의 바닥에 쇠말뚝을 박아 만든 3층 높이에 있었고 배에서 내려 쇠말뚝에 연결된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렸다. 우기에는 수상 가옥 밑까지 물이 차오르는 모양이다. 수상 가옥 가까이 가자 비린내 비슷한 역겨운 냄새가 풍겨서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보트 선장에게 물어보니 수상족들은 대소변을 비롯하여 생활폐수를 모두 호수에 버린다는 것이다. 먹는 물만 사다가 먹고 나머지 생활용수는 모두 호수 물을 퍼 올려 사용한다고 하니 호수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 호수는 위생관념이 희박한 전염병 예방의 취약지역이고 이곳 수상족은 바로 캄보디아 빈민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곳 똔레 샤프 호수의 수상족들 불행을 보니 무척 마음이 아프고 또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3. 캄보디아의 보물 메콩강(Mekong)
중국 서부 청해성과 티벳 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 남부, 라오스, 타이,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쳐 남중국해로 들어가는 메콩강은 흘러 내려오면서 주위의 논에 물을 대주거나 水路 역할을 해 왔는데 캄보디아에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해오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메콩강은 505㎞의 거리를 흐르는데 메콩강의 연례적인 범람은 강 양쪽 언저리 광활한 지역에 비옥한 퇴적물을 쌓으며 수많은 논에 자연적으로 물을 대어 주는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로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고 하니 캄보디아에서는 메콩강이 보물인 셈이다.
4.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팬(Phnom Penh)
프놈펜은 메콩강, 똔레샤프 강, 사브 강이 만나는 내륙수로 교통의 중심지로서 캄보디아의 수도인데 90년간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유럽풍 건물과 캄보디아 전통 양식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교통은 수로가 없는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주로 버스를 이용하는데 우리나라 중·고 셔틀버스를 사다가 시외버스로 사용하고 있었다. 버스 옆에는 한글로 00 학원, 00 학교, 00 백화점이라 쓰여 있고 버스 안에 들어가 보니 운전석 옆에는 ‘금연’ ‘정숙’이라는 글씨가 그대로 쓰여 있다. 다음에 숙소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도색할 돈이 없어서 못하기도 하지만 한국 글씨가 쓰여진 자동차가 더 좋게 보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단다. 우리 젊은이들이 영어로 글씨가 쓰여진 모자나 셔츠를 입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씨엠리 업 가는 데는 도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배를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내륙수로는 메콩강, 사브강, 똔레 샤프강이 주요 통로 역할을 한단다. 시내버스는 없다고 하니 오토바이 택시인 ‘모또’나 자전거의 인력거인 ‘씨끌로’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숙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프린세스’ 호텔로 정했는데 도로변에 있어 찾기도 쉽고 객실은 깔끔하고 종업원도 친절했다.
1) 왕궁 및 실버 파고다
1866년에 만들어진 왕궁은 현재 국왕이 살고 있고 왕실 행사나 외교사절 영접 시 사용한다. 즉위 전에 있는 59m 높이의 황금탑이 인상적이다. 왕궁 안에는 왕궁 사원이 있다. 실버 파고다는 사원 안에서 가장 큰 건물이며 ‘은’으로 만들었고 안에는 9,584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황금 불상이 있다고 한다.
2) 국립 박물관
붉은색 건물 자체가 인상적이고 눈에 잘 띈다. 6~13세기의 크메르 유물을 5,000점 이상 전시해 놓았는데 대부분이 조각품인데 왕실에서 쓰던 물건도 볼 수 있었다.
3) 프놈 사원
14세기 중엽 ‘팬’이라는 여자가 메콩강에 떠 내려오는 불상을 가져다 언덕위에 사원을 지었는데 ‘프놈’이 언덕이란 뜻이므로 ‘프놈팬’이라는 도시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 되었단다. 이 절은 프놈팬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공원처럼 예쁘게 단장되어있다.
4) 킬링 필드(Killing Fields)
'킬링 필드'는 ‘죽음의 들판’이란 뜻으로 ‘크메르루주군’이 자신들의 이념과 다른 사람들 150만 여명을 학살하고 매장했던 곳을 일컫는다. 1975년에서 1978년까지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군’은 ‘론놀’ 장군의 쿠데타 시절 미국에 동조했던 사람들을 수용소에 가두었다가 집단 학살하여 이곳에 묻었다. 총탄이 아깝다는 이유로 쇠막대로 머리를 쳐서 죽이는 등 잔혹한 방법을 썼기 때문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었다. 지금은 추모탑이 있으며 당시 피해자들의 유골 수천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유골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 기분이 썸짓했다. 당시 희생자 중에는 ‘론놀’ 정권 때 고위 간부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 외국인 회사 근무자, 지식인, 성직자, 의사, 교수, 소수 민족 등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매장하였다고 하니 90년 동안 자기들 주권을 빼앗아 갔던 프랑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과 5년 동안 지배했던 미국 등 서구인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컸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5) 초등학교 교육
길을 가다 보니 부근에 초등학교가 있는데 수업을 막 끝내는 시간인 것 같아서 학교로 들어가 보았다. 교실 밖으로 나와 한 줄로 서서 반장의 구령에 따라 담임선생님께 함께 인사를 한 후,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개별적으로 다시 인사하면서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선생님도 학생 하나하나의 어깨를 두들겨 주면서 좋은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학생들이 모두 간 후 교실 좀 구경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 본 후 들어오라고 한다. 첫눈에 띄는 게 교실 앞 칠판 위 벽에 걸려있는 캄보디아 국기와 그 밑에 있는 국왕 사진 그리고 학생 책상이었다. 우리 학생 책상과 똑같아서 혹시 우리나라에서 기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책상 뒤편을 보니 우리 태극기가 아닌 일본 일장기가 붙여져 있다. 일본에서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학생 책상과 일본 학생 책상이 똑같다는 게 이상했다. 우리 특허를 일본이 사 갔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교사에게 ‘코리아’ 잘 아느냐고 물으니 잘은 모르는데 ‘잘 사는 나라’ ‘부자 나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조금 전 하교 시에 학생 개개인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느냐고 물었으나 대화가 잘되지 않았다. 30년 전 ‘킬링필드’ 때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모두 붙들려가 죽음에 이른 것은 알기 때문에 일부러 모른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학에서 외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선생님이 영어를 잘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베트남어, 중국어, 영어 등을 총동원해 단어 중심으로 手話와 身話를 곁들여 물으면서 맞으면 고개를 끄덕여 달하고 부탁해서 얻은 내용은 이렇다.(영어를 잘 모른다고 그 선생님을 탓하는 게 아니라 우리 네 명이 우리의 뜻을 그 선생님에게 정확하게 전달해 주지 못했으니 오히려 우리의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칭찬(과제를 잘 해왔다고, 친구들과 싸우지 않았다고), 격려(내일은 과제를 더 잘 해오라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고) 등등 모두 다르다고 한다. 내가 교사 시절에 하지 못했던 좋은 방법을 동원하여 칭찬교육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 모두 선생님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학생 개개인의 하루 생활을 잘 지켜보고 있다가 하교할 때 하나하나 칭찬과 격려를 해준 선생님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칭찬이 칭찬을 낳는다.’는 말이 있고 ‘그 나라의 학생들의 현재의 모습이 곧 그 나라의 미래 모습이다’라는 말도 있다. 이 나라가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운데도 교육만은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캄보디아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내 가슴이 뿌듯했다. 캄보디아에 와서 처음으로 좋은 모습을 본 것 같다. 캄보디아 파이팅! 이다.
캄보디아의 격언 ‘미래에 겁먹지 말고 과거 때문에 슬퍼하지 마라’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잘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과거 때문에 슬퍼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우리가 생활하는데 기초가 되는 것을 통틀어 衣食住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쉽게 말하면 입고. 먹고, 살기이다. 옷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음식은 몸의 건강을 위해, 집은 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필요 목적이 모두 전도(顚倒)되어 버렸다. 옷은 몸을 아름답게 멋 내기 위해, 음식은 배부르기 위해, 집은 재산 증식의 한 방법으로 --
그런데 먹기에도 음식 먹기와 마음먹기의 두 가지가 있다. 음식 먹기는 신체적 건강을 위해 먹는 것이고 마음먹기는 정신적 건강을 위해 먹는 것이다.
캄보디아를 경제적 측면에서 흔히 빈국(貧國)이라고 한다. 먹을거리가 적다는 뜻인데 강대국의 식민지로서 90여 년 동안 수탈을 당하고 그 후에도 내란이 자주 일어나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격언을 ‘미래에 겁먹지 말고 과거 때문에 슬퍼하지 마라’라고 정한 것 같다. 음식 먹기에서 좀 부족한 점이 있어 경제적으로 貧國이더라도 ‘과거 때문에 슬퍼하지 마라’는 격언대로 마음먹기를 잘한다면 정신적으로는 富國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경제적 부자보다는 정신적 부자가 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1] ※封臣 - 전쟁에서 지는 경우 상대국 왕의 신하가 되어서 상대국 왕을 섬기는 것
[2] ※시하누크 -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 초대 수상을 지낸 사람으로 중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캄보디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이끌었다. 그 후 왕 또는 국왕의 자리를 지키면서 캄보디아 독립의 영웅 또는 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3] ※폴 포트(Pol Pot) - 시하누크 왕이 파리로 유학 보낸 국비 장학생인데 귀국 후 시하누크 왕정을 반대하면서 중국을 등에 업고 크메르루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수렁에 빠져 론놀 정권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자 이 틈을 이용하여 무력으로 론놀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아 ‘민주캄푸치아 공화국’을 선포하고 76년부터 79년까지 총리가 되었다. 총리가 된 후 자기들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국민들을 심문하고 고문하고 살해하는 등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악동으로 비난받고 있다.
[4] ※킬링필드(Killing Fields) - ‘죽음의 들판’이란 뜻으로 집단 매장지나 희생자 유골이 있는 곳, 크메르루주는 ‘론놀 정권’의 고위관료, 전문가, 지식인, 소수민족 등 150만 명을 참혹하게 학살한 사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살한 인원도 많지만 학살 방법이 너무 잔혹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무슬림들은 ‘할랄’ 음식을 만들기 위해 닭, 양 등을 도축할 때 그 동물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알라’ 이름으로 짧은 시간에 도축한다고 하니 이런 점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우리가 본받을 점이 아닌가
[5] ※크메르루주(Khmer Rouge) - ‘붉은 크메르’란 뜻으로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 교육을 받고 온 사람들로 결성된 캄보디아 사회주의 혁명파 조직으로 ‘폴 포트’가 중심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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