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가 있는 시론 8.8) 온양에 서원이 사찰 강당사 방문
충남 아산시 외암마을에 서원이 사찰로 변신한 지역이 있어 용봉산 석불사 주지 범상스님 안내로 방문하였는데 비구니 스님이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려는 듯이 도량을 정비하고 있었지만 비구니 스님은 합장만 하고 차 한잔 하자는 말로 없었다,
강당사는 유생들이 토론을 중시하면서 강당이 있는데 외암 이간 1677-1727)년에 성리학자인 그가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건립하여 성리학을 주장하던 유생의 본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27세(숙종 29년, 1703)에는 예산에 있던 신유(申愈, 1673 ~ 1706)와 대전 진잠에 거주하던 신경(? ~ 1708)을 찾아가 도(道)를 논하고, 30세(1706) 때에는 윤혼(尹焜, 1676 ~ 1725) 및 10여 인의 지기들과 광덕산 상류 용추에 놀러가 시를 짓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간의 7세손 이용헌(李用憲)에 따르면 당시 이간과 윤혼, 신유, 신경, 현상벽(玄尙壁), 한홍조(韓弘祚), 최징후(崔徵厚), 이하병(李夏炳)의 8학자를 ‘호중팔학사(湖中八學士)’라고 하였다. 이후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 1641 ~ 1721)의 문인이 되고 난 후에는 한원진, 윤봉구, 채치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로 더 잘 알려졌다. 외암 이간의 학맥은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서인-노론의 율곡학파이다. 이간은 18세기 이후 기호학파 내에서 100여 년 이상 지속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관한 논쟁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단초를 개척한 학자였다. 이간은 숙종-영조 대에 ‘호서사인(湖西士人) 중 등용할 만한 인물’로 자주 추천되었다. 숙종 36년(1710)에는 순무사 이만성(李晩成)이 조정에 올리는 계문에 34세의 이간을 언급하면서 ‘경학명세(經學名世) 하니, 이조에 명하여 그를 장려한 후 등용케하여 학자들이 이에 권면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고, 숙종 39년(1713)에는 영의정 이유(李濡)의 추천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36세(1712) 때 장릉참봉에, 39세(1715)와 40세(1716) 때 두 차례에 걸쳐 세자시강원 자의(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 43년(1717)에도 종부시정에 제수되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영조 1년(1725)에 49세의 나이로 회덕현감에 제수되었다. 이간이 회덕현감에 부임하면서 영조에게 사조(辭朝)하자 영조가 직접 ‘학문하는 요점’을 묻고는 이처럼 강학(講學)하는 사람을 얻기는 매우 쉽지 않다고 하며 올라와 강학할 것을 기약하였다. 이간은 회덕현감에 부임한 후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이 있자 전정(田政)과 군정(軍政)에 관한 개혁안을 마련하여 충청도 관찰사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곧바로 사임했다.- 중략-
외암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면 송악면 강당리 85번지에 강당사(講堂寺)가 있다. 이 강당사는 원래 외암 이간이 강학을 하던 외암정사(巍巖精舍)였다. 개인 서재나 사숙은 생활공간인 마을에 두지 않고 마을에서 떨어진 경관 좋은 곳에 입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이간 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주변에서 비교적 경관이 빼어난 강당골 냇가에 서재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관선재에 강당이 있어서 이 골을 ‘강당골’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33년(1707)에 세워진 외암정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혹은 수암 권상하의 글씨라고도 함) ‘관선재(觀善齋)’라는 편액 때문에 관선재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말기의 온양군 읍지에서는 천서 윤혼과 외암 이간이 이곳에서 서로 강학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1802년 외암 이간이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문정공의 시호가 내려지자 향유들이 그를 관선재에 배향하면서 외암서사라고도 일컬어졌다. 그 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서원을 정리할 때 훼철대상이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외암서사(巍巖書社)를 강당사라는 절로 바꾸고, 공주의 마곡사에서 불상을 모셔다 안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강당사는 본래 유학을 강론하던 자리에 불사가 마련된 곳이므로 사찰의 품격이 가람형태 보다는 서원, 혹은 조선시대 명문의 사가(私家)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찰은 동향의 사면을 정지하고 조영되었으며 현재 전체 배치는 ‘ㅁ’자형을 하고 있다. 건물 구성은 인지헌(仁智軒)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본래의 건물과 함께 그 정면에 법당과 절의 입구에 해당하는 솟을대문 형식의 건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년의 보수 시에 ‘숭정후세삼을유삼월이십일일묘시중수상량(崇禎後歲三乙酉三月二十一日卯時重修上樑)’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되어 영조 41년(1765)에 중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현재 강당사는 관선재의 편액이 여전히 걸려있고 외암집 목판각 285매가 보관되어 있다.
외암집 목판각은 이간의 문집인 『외암집』을 새긴 목판으로 각 면당 10행 20자의 행자수로 균일한 형태이며, 사주쌍변의 광곽에 판구는 화구로 상하향 삼엽 화문어미의 형태이다.
목판은 관선재를 정비하면서 다시 강당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판각이 있는 강당사의 정문에 걸린 현판에는 ‘문천사’라 쓰여 있다. 이것은 외암 이간의 문중인 예안이씨와 파평윤씨 문중에서 합의하여 쓴 것이라 한다. 현재 목판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자료로 지정(1994. 11. 4.)되어 있다. 아산외암마을 자료 참조
대원군은 1871년 5월 9일(고종 8년 음력 3월 20일) 서원철폐령으로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수백여 개의 서원이 철폐를 명했던 시기에 강당사로 사명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살아남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외암선생은 율곡의 불교관을 수용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박진관 시가 있는 논평 ,2021년 4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