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인이 본 53 시론 10, 8.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민족자강 운동
대동강에 이양선이 정박해 있다고 하는 보고를 평양감사인 박규수에게 보고를 하였던 것은 평양에 미 상선을 평양 시민들이 화공 법으로 침몰한 이후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號事件)은 1866년(조선 고종 3년, 미국 앤드루 존슨 대통령 2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평양 군민(軍民)들이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응징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국의 조선에 상륙하려는 통상 배를 평양시민들이 나서 화공 법으로 불태운 사건이다, 물론 청나라는 이미 영국에 의하여 강점당한 이후이기에 미국 상선도 청나라 항구게 정박할 수 있었을 때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려고 대동강을 택하여 침략하려고 했던 미국상산이다,
미국상선은 대동강을 올라갔지만 폭우로 인하여 대동강물이 불어 미국상선이 대동강 상류 쪽으로 올라갔던 것을 목격한 평양 시민들은 푸랑스 군인들이 다시 오는 줄 알고 대응하였는데 미국의 상선을 대포를 쏘기도 했다,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제너럴셔먼호사건(─號事件))]
대원군은고종의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대원군에게 정치력을 부여하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로 대원군은 고종 임굼의 정치력을 바르게 성찰하지 못하고 있음이다, 당시의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힘이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에 이르렀고 평양부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와 쌀과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제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려고 했던 것은 미국의 개신교를 조선에 전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들을 이용하여 조선을 천주교를 전승하려고 했던 것이며 조선은 천주교 신부들을 서학이라고 칭하였다, 서학에 대응했던 조선은 그 이름이 동학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 개신교계에서 거의 무리하게 미화하고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애초에 토머스 목사는 무장상선을 타고 쳐들어와 군 및 민중을 살상하게 한 무리들을 따라 통역을 하고 선교하러 온 인물인데 이런 인간을 얼마나 좋게 볼 수 있을까? 앞에서도 나오지만 제너럴 셔먼호는 평화롭게 들어온 무역 상선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무장 상선이었고, 우매무지한(?) 평양 시민들이 먼저 공격해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사실, 통역을 맡았던 토머스 목사가 제대로 의미를 전하지 못하여 혼선이 초래, 이로 인해 이현익을 붙잡고 전투가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선을 지키려고 했던 승군들을 위하여 대원군은 후원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대원군이 불교 다시 말해서 승군에 대하여 역사를 고찰했다고 하면 조선에 승군을 양성했어야 했다,
2021년 9월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