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설교학교 8기 개강 안내
설교#
설교는 이렇다할 정의는 어렵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신학이 나오기 전에 설교가 먼저 나온다.
그럼에도 설교가 신학을 넘지 못하는 현실 앞에 서있다.
신학은 성경의 단어나 문장을 이것이다고 정의한 사전적 의미이다.
그래서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시작점이고 그것 때문에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의미를 교회생활에 맞게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 교리로 발전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단과 교파가 형성되고 이단까지 나타나게 된다.
신학이 인간에게 가저다 준것은 추종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나눠짐이다.
모든 설교자는 신학의 기반과 자신의 기질적 성향을 바탕으로 설교를 구상한다.
청중도 누구에게 설교를 듣고 자라냐에 따라 신앙의 색깔이 분명하게 형성된다.
교단마다 청중의 신앙 패턴이 다르고 특히 이단에 속한 자들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바울의 설교나 가르침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든 동일하게 한가지로 나타난다.
신학을 기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도 있고 기도가 있으며 회개와 은사도 있지만 설교의 해결 타켓은 믿음을 가지고 말한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응답이 있고 믿음으로 회개하면 죄사함이 있으며 믿음으로 은사를 사용할 때 유익하다 한다.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나라인 것도 믿음으로 주님을 만날 때 되어진다 가르친다.
이런 것은 신학이 정립되거나 성경해석학 이전의 설교 패턴이다.
예수님 설교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상대성을 말하는데 신학에 영향을 받으면 설교에 절대성을 드러낸다.
이세상 인간의 설교는 그 어떤 설교도 절대성의 설교는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가 절대성인 것처럼 말한다.
설교의 설자도 모르는 부끄러움이다.
하나님이 초대교회 당시 신학이 절실히 필요하다면 왜 베드로나 바울에게 주시지 않으셨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영혼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필요하고 하나님 은혜가 요구되며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고단위 작업이다.
영감이 온다고 막 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영감이 들리고 변화되게 하는 정형화된 언어 표현이다.
하나님은 설교자에게 영감을 몇 십분 또는 몇 시간씩 주시지 않는다.
설교자 스스로 성경의 한 단어나 문장을 깨달아 확장된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영감이 설교를 통해 청중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면 반드시 일정한 틀이 요구된다.
틀은 세계관이기에 모든 인간은 공통적인 틀이 있고 그 틀에 의해 행동하고 발명과 발전이 발생한다.
아담 이후의 인간은 아담이 넘겨준 틀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기에 그 틀대로 말하면 들리고 변화에 이르게된다.
이때도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이 틀을 써야 할 설교자는 이 틀을 쓰지않고 세상의 자식들은 이 틀을 사용하여 엄청난 돈을 번다는 것이다.
설교가 신학을 넘지 못하면 성경을 해석하거나 해설하는 것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그 해설을 시대와 문화의 요구에 부합하려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설교라고 생각하고 진행한다.
그래서 가주어의 언어가 표현되지 못하고 설교자의 글과 생각을 언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러분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달려나와 엎드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엎드리십시오"
분명히 좋은 말인데 희한할 정도로 엎드리는 청중은 한명없고 안들리며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을 설교자의 학문과 지식으로 설명하려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내용은 장황해지고 엎드리게 하기 위하여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연예 이슈 개그 유머 예화 간증 심지어 인간이 쓴 책 내용까지 말한다.
가주어의 눈물을 말하지 못하는 설교자의 눈물이다.
신학도 아니고 성경학도 아니며 강의나 광고에 가까울 확률이 매우 높다.
성경 본문을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면 들을 것이라는 깊은 속음이다.
듣고 끄덕이며 아멘하면 깨달음은 있을지 모르지만 변화에 이르기에는 한계가있다.
설교자는 가주어의 눈물을 말해야한다.
말할 때는 가주어가 되어 가주어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표현 연습이 필요한 것이고 그 표현은 가주어가 되어 말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포인트이다.
설교자가 가주어가 되서 가주어의 눈물을 말하면 교리를 넘어 말하게 되고 인간이 정립한 신학에 저촉되지 않는 들리는 것을 말하게된다.
가주어의 눈물이 닦아질 때 청중은 간접적용이 되어 일차척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놀라움이 있다.
주일 오전 한편 설교에는 청중의 삼차적 변화가 존재한다.
한편 설교에 세번의 파도가 영혼을 적시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 설교를 보면 아주 많이 그리고 풍성하게 나타난다.
손마른 자의 눈물을 닦는데 이런 기법을 사용하신다.
손이 펴진 그의 V는 일반인 V와는 너무나 다르기에 손가락을 그토록 높이 세우고 다닌다.
손마른 것이 펴져 일차적 눈물이 닦아지는 첫번째 파도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이 자신에게는 진리로 밖혀 생각의 변화가 나타나는 두번째 파도이다.
삼차적 눈물은 글로 피력하기에는 너무 많아 배움과 훈련이라는 과정이 요구된다.
이 땅의 모든 청중은 여기 삼차적 파도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니 그것이 성경에 있느냐 없느냐의 신학적 접근의 설교는 멈추어야한다.
우리를 신학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설교자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이 의도하는 목적이 그것이 아니지 않느냐 지나친 상상이다 하는 성경학적 생각도 내려 놓아야한다.
우리는 성경학자가 아니라 설교자로 부름받기 때문이다.
신학자와 성경학자의 공통점은 깨달음은 줄수 있어도 변화는 주지 못하는 결정적 약함이 동반한다.
설교자는 깨달음은 약해도 설교 한편에 한 영혼을 변화에 이르게하는 하나님 심정을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이시대 마지막 남은 설교적 부흥을 기대하며 설교해야 한다.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하거나 해설하거나 설명이 장황해질 때 교회의 영혼은 손마른 자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말을 잘하거나 설명이 탁월하고 여러가지 간증과 예화를 통해 설교가 진행될수 있다.
청중은 그것을 듣고 깨닫기도 하며 은혜를 받았다 하는데 희한하게 변화에는 이르지 못하는 현실이다.
깨닫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동감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목적은 변화다.
설교자는 한편 설교 속에 가주어가 되어 말을 하고 진주어가 되어 말을 하며 선지자가 되어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되면 설교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신학자나 성경학자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거나 세미나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세미나를 다니며 설교 소스만 낚는 사람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이것은 설교적 관점이 아니라 목회적 관점이다.
목회를 하는 것과 설교가 되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다.
목회와 설교는 함께 가지만 Goal line은 명확하게 다르다.
목회가 교회성장과 부흥을 향한다면
설교는 한 영혼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의 삶을 재현하는 변화를 향하여 간다.
그래서 이 시대는 설교적 부흥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QT를 통해 깨달아지는 것도 설교에 넣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는 자에게 그렇게 살라고 깨달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다.
이 세대는 희한할 정도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설교에 집어 넣고 외친다.
성경속 가주어의 눈물과 하나님의 심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은 모든 성경 절수에 하나님 심정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이것을 말하라고 부름 받는다.
설교는 하는 자의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듣는 자의 꿈을 이루는 일이며 목회는 하나님 디자인하신
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설교를 못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다만 들리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심정 그리고 눈물의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