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6)
광산구 (3)
무양서원
월계동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御醫)이면서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중심으로 그의 후손 4명(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충열공 나덕헌)을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1927년에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서 세운 서원이다.
월봉서원
광산동
1578년(선조 11)에 김계휘(金繼輝)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대승(奇大升)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6년(인조 2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654년(효종 5)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다.
1671년에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德山祠)에 모셔져 있던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이향(移享)하였으며, 1673년에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을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그 뒤 전라남도유림에 의하여 1938년 5칸의 빙월당(氷月堂)이 건립되었으며, 1972년에 4칸의 고직사(庫直舍), 1978년에 외삼문(外三門)과 3칸의 장판각(藏板閣), 1980년에 사우(祠宇), 1981년에 내삼문이 건립되었다.
유애서원
흑석동
1754년(영조 30)에 이신의(李愼儀)의 학덕(學德)과 충절(忠節)을 추모하기 위하여 호남의 유림(儒林)이 건립(建立)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은 향호유림(鄕濠儒林)의 소굴이며 당쟁(黨爭)의 본거지인 서원이 경제적 폐단까지 겹쳐있어 그 피해가 극심함으로 서원 폐지령(廢止令)을 내려 훼철(毁撤)을 단행하였다. 1901년(고종 38) 서적과 거문고 유품을 임시로 보관하기 위해서 금서재(琴書齋)를 지었으나 1919년 봄 경장각을 짓기 위하여 18년이 된 금서재(琴書齋)를 철거하였다.
2000년 (庚辰) 유애사 사우건립 (遺愛祠 祠宇建立) 사우훼철 (祠宇毁撤) 후 81년 만에 경장강(敬章閣) 후면에 화려한 단청 사우(祠宇)를 마련 석탄공(石灘公)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었으며 2005년 6월 20일 유애서원(遺愛書院)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등록하였다.
남구 (1)
포충사
원산동
1601년(선조 34) 호남 유생들이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고, 1603년(선조 36)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고경명을 주벽으로 제향하고 동배위에 고종후와 유팽로, 서배위에 고인후와 안영을 배향했다. 포충사는 사액 사당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사우이다.
1623년, 1810년, 1879년, 1919년, 1927년, 1933년에 각각 중수했고, 1978∼1980년에 현재의 사우(신사우)를 정화하였다.
북구 (2)
운암서원
화암동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에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 1549∼1602)을 배향하였다.
그 후 숙종 35년(1709)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사촌동생이자 조선 선조 때의 유생인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 1559~1609)를 추배하였다. 서원에는 그 외에도 송타(宋柁), 권필(權鞸), 신필(申鞸), 신한주(申漢柱) 등을 추배하였다.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사라졌다가 최근 현 위치인 화암동 화암마을로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되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운암서원을 철폐한 후 1933년에 건립했던 송제민의 재실(齋室) 영모재가 있었는데 현재는 운암서원 안에 영모재가 들어서 있는 형태가 되었다.
임계서원
각화동
<각화동 풍경>
경상북도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김해김씨삼현파)을 본따 호남에 거주하는 후손 들이 삼현선조(三賢先祖) 신위를 모시고자 1985년 7월에 착공하여 1986 년 9월 건립하였으며에 후손들이 정신적인 구심 처로 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