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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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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봉목사의 연구실 스크랩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해서 본 신학사상
정태봉 추천 0 조회 132 08.09.22 14: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차   례



Ⅰ. 서 론 ………………………………………………………………2


Ⅱ. 어거스틴의 사상의 형성배경……………………………………2

    1. 어거스틴의 생애와 주변환경 ………………………………………………2  

    2. 어거스틴과 마니교 관계 ……………………………………………………3

    3. 신플라톤주의의 극복 ……………………………………………………… 4

    4. 암부로시우스에 의한 회심의 의미…………………………………………7

    5. 사도바울의 영향 ……………………………………………………………10


Ⅲ.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 12

    1. 이성과 신앙………………………………………………………………… 12

    2. 인식론…………………………………………………………………………15

    3. 시간의 본질 …………………………………………………………………18

    4. 천지의 창조………………………………………………………………… 22


Ⅳ. 결 론 …………………………………………………………… 28

    참고 문헌 ………………………………………………………………………30






      Ⅰ. 서 론


  어거스틴은 한 시대의 마지막임과 동시에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이기도 한인물이다. 그는 고대 교부들의 마지막이며, 동시에 중세신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고대신학의 주류는 어거스틴에게 합류되었다가, 중세기에는 스콜라 철학자들에 있어서 어거스틴주의로 나타났고, 개혁시대에는 루터와 칼빈에 있어서 역시 찾아 볼 수 있으며, 교회에 있어서는 하나의 중요한 신앙의 요소로 되어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자신의 삶 속에서 직면했던 여러 현안 문제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의 고백록을 중심으로 그의 철학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리고 그 철학사상이 그의 신학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연구하고 자 한다.

  먼저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이 여전히 신플라톤주의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로의 회심인가를 문제점으로 제기하고 이에 대해서도 논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인 이성과 신앙, 인식론, 시간의 본질, 천지의 창조를 고찰 하고자 한다.



      Ⅱ. 어거스틴의 사상의 형성배경

     1. 어거스틴의 생애와 주변환경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은 354년 11월 13일, 히포로부터 멀지 않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의 작은 마을인 타가스테(Tagaste)에서 출생했다.  열정적이며 감수성이 많은 부친 패트리키우스(Patricius)1)와 기독교 역사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그 높은 지성과 영적인 경건성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끊이지 않았던 모친 모니카(Monica)사이에서 태어난 어거스틴은 이미 그 환경에서부터 신앙의 싹을 키어온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생애 중에서 그는 적지 않은 시간들을 세속적 쾌락과 마니교의 사상에 빠져있었고, 때로는 플라톤적인 이상 속에서 헤매이기도 하고, 때로는 지적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결국 어머니의 끈질긴 기도와 암브로스의 감동에 넘치는 설교,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무려 33년간에 걸친 지적 방황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오류와 방황이 그로 하여금 더욱 기독교 사상이라는 진리의 길을 바르게 가도록 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기억되어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총(Grace of God)을 그렇게 높였다는 사실에 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자서전인 “고백록”에서 자신의 무능과 교만을 철저히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을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생애 중에서 잊지 못할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어거스틴의 말하는 대로 그의 어머니가 깊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를 향하여 하나님께 드린 눈물겨운 기도였다.

  391년에 그는 히포(Hippo)에서 사람들의 요청에 의하여 교회의 장로에 선출되고, 395년에는 같은 도시에서 주교로 임명된다.  그리고 세상 떠나는 날까지 약 38년 동안을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서구의 기독교 지성을 찬란하게 꽃피웠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서구 기독교의 정신적 지주가 됨으로써 당시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교회의 견해를 대변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그는 언젠가 자신이 빠진 적이 있는 마니사상과 도나티스트, 그리고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반박하고 정통 기독교의 교리를 세워나가게 되었다.  76세 되던 430년 8월 28일, 그는 많은 동료들과 제자들이 둘러 싸여 신앙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당신의 집에서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지요!  당신의 품안에서 당신의 아름다우심을 열망하는 나의 마음이 불타고 있습니다.2)  


     2. 어거스틴과 마니교 관계

  어거스틴은 ‘그의 경솔한 시기에’ 특히 두 가지 일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하나는 마니교 분파가 매우 번성했던 카르타고의 마니교들과 친숙하게 지낸 일 이었다. 또 하나는 그가 신앙을 옹호할 정도로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무지한 기독교인들과 논쟁함에 있어서’, 종교적 논쟁에서 쉽게 승리하게 됨으로써 그에게 다가온 자신의 성취감이었다.

  어거스틴은 지식에 대한 열정으로 마니교도에게 갔고, 그들에게서 자신이 구하려던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성장해 나온 다른 영지주의와 비슷하게도, 거기에 단순한 하나님 개념만 들어 있다 하여서 구약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론과 그리스도론을 그럴듯한 학술적이며 천문학적인 논증들로 강화시켰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에 관하여 말하였으며 자유스러운 탐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모든 믿음을 맹신하라고 정죄하였다.3)

  그러나 그의 영혼의 가장 심오한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의 진리에는 너무도 정직한 것이었으므로 마니교들의 천문학적인 지혜와 그들의 “잘 차려입은 사환”3) 파우스트에게 속아넘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3) 는 사실이었다. 어거스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회의주의 철학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하여 이 결과에 이르렀는데, 그것들은 그에게서 마니교의 전 교리 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심한 좌절로 말미암은 이 분위기 안에서 그는 384년에 법정 웅변 교사로 밀라노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말하기를 마니교의 장점이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데 있다고 한다면, 그 약점은 여기에서 약속한 내용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데 있다. 마니교에 발을 내디딘 맨 처음부터 그는 마니교의 선생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어딘가 불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러한 의문점을 마니교의 가장 위대한 스승에게 물어보면 해답을 얻겠지 하는 생각으로 자위를 삼았다. 한편으로 그는 마니교의 가르침과 자신이 마니교에 대해서 연구한 내용들을 한 데 묶어서 점성술적인 사색으로 발전시켰으나, 점성술이 분명한 허위라고 밝혀지자 이내 실망하고 말았고, 또한 마니교에서 가장 명성이 있는 스승으로 알려진 밀레비스의 파우스트스(Faustus of Milevis)를 만났으나,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그는 마니교를 버리고 말았다.  

  마니교도들이 두 종류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영혼들에게 아주 구분되는 속성들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를 신(神)의 실체로 간주되기를 바랐으나, 그러나 그 신은 다른 신의 창시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에 어려움이 나타났다. 한편 그들은 자신들이 ‘신의 성전’이고 신의 본성의 일부분(입자)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육체는 어두움의 영역들과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 어두움은 육체뿐 아니라, 신(神)이 원수를 정복하고 체포하기 위해서 어두움과 오염에 굴복하도록 보낸 부분에 있어서 너희 신(神) 자신도 깨끗하지 못하게 만들것이다”라고 어거스틴은 주장한다.3)

  악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전적으로 신플라톤주의적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중심에 있어서 매우 기독교적이다. 이 논점은 또한 마니교와의 논쟁으로 중요한 논점이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선과 악이란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것이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한 그것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전체 체계와 일치하도록 질서 지워진다.” 악은 실재가 아니며 실재와 반대이다. 악은 “본질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이며, 비존재에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악은 선의 타락이다.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며, ‘그것이 타락한 어떤 실체 속에서’ 존재한다.

“타락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어떤 선을 결여하고 있다 …… 그러나 결핍은 그것들이 결핍하고 있는 것을 이전에 소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이 이런 선을 소유했다면, 그것들은 악의 완전성이 아니며, 따라서 모든 마니교의 이야기는 거짓이다.” 그래서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다.’3)

 

     3. 신플라톤주의의 극복


   1) 플로티노스의 사상

  신플라톤학파라는 말은 오늘날 플로티노스에서 시작된 철학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는 명칭이다3). 플로티노스 자신은 플라톤의 진정한 철학적 견지를 부흥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플라톤의 철학을 부흥시키려고 한 것은, 때때로 아카데메이아의 몇몇 지도자들의 가르침속에 침투해 들어온 스토아주의나 회의주의와, 그가 보기에 플라톤의 철학적 사상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받은 그 밖의 퇴폐적 요소들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플라톤으로부터 빌려온 관념의 사상 체계 속에는 플라톤이 뜻하였으리라고 보이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플로티노스가 플라톤 철학이라고 생각한 것은 우리는 신플라톤 철학이라고 부르게 된 것3)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로티노스도 그들의 철학의 기원이나 착상에 있어서는 모두 플라톤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으나, 양자는 각각 독립적 위치를 유지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많은 생각을 이용하였으면서도 자연주의적이며 다원론적(多元論的)인 철학을 이룩하였다. 이에 대하여 플로티노스는 역시 플라톤의 철학을 통해서 이상주의적이며 일원론적(一

元論的)인 철학을 이룩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전적으로 다르며, 어떤 점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플로티노스 자신은 자기의 견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 중에서 플라톤적 영향이 짙은 초기의 부분에다 주의를 집중시켰으며, 원숙기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초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추어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비판가라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및 플로티노스가 각각 다른 세 철학을 표명하고 있다3)고 말한다.

 

   2) 일자(一者)에 의한 유출론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무엇보다도 온갖 형태의 이원론(二元論)을 배격한데에 그 특징이 있다. 플로티노스는 서로 대립된 두 개의 다른 왕국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존재계열(存在系列), 실로 여러 단계의, 그리고 온갖 종류의 존재물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존재계열뿐이라는 것이다. 이 전계열(全系列)이 의존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의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것은 플로티노스가 보통 일자(一者)라고 부른 한 중심원리이다. 합리적 견지에서 본다면, 일자라는 것은 우리가 고찰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을 위한 논리적 전제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 전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의 존재론적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오직 일자(一者)만이 완전하고 충족한 것이다. 그 이외의 온갖 것은 그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것으로서, 그로부터 초래되는 필연적 결과를 보여 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낮은 상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더 완전한 존재에 참여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도 역시 자기의 낮은 상태나 나중의 높은 상태가 마찬가지로 일자(一者)라는 완전한 존재의 필연적인 표출임을 인식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낮은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완전히 악한 세계로부터 자기 딴의 다른 왕국에로의 비약이라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철학적 환상이요, 도덕적 오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앞서 여러 유한성을 지니고 있었음은 불충분한 존재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일자인 존재의 완전성을 좀더 충분히 지니고자 할 것이라고 한다.


   3) 주요한 기본존재(hypostases)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궁극적 목표와 그것의 기술적 성취 방법을 달리하고 있는 유형의 철학이라 하겠다. 플로티노스의 방법은, 우리는 경험적으로 우리 주위의 세계 안에서 그 세계가 의존하고 있는 초월적 실재(實在)들의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고 논하는 것이었다. 이 초월적 실재들을 그는 기본 존재(hypostases)라고 불렀으니, 그것은 그것들이 유한한 그리고 가시적인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거나 또는 그 세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존재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과연 일자(一者)의 완전한 존재성에 의해서 그것의 필연적 표출로서 다른 모든 가능한 형태의 존재가 생기게 되는 만큼 그러한 기본존재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 많은 기본존재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세 가지 있다. 즉 영혼의 단계와 예지의 단계와 그리고 끝으로 일자(一者) 자체인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영혼의 단계는 더 높은 존재의 단계, 즉 예지의 단계로부터 나온다고 단언하게 되었다. 예지의 단계는 원리로부터의 탈선이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없고, 또 변화가 그것의 영원한 타당성을 손상시키는 일도 없기 때문에 좀더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지의 단계도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은, 그 속에서는 많은 형상들이 유한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차이를 가지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의 최고 원리는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히 유일하고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 이리하여 플로티노스는 예지의 단계까지도 넘어선 곳에 일자(一者)가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일자(一者)에 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플로티노스는 솔직히 인정하였다. 일자(一者)는 아름답다든가 일자(一者)는 선하다고 하는 주장조차도, 비록 언어의 표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정당하고 진리에 가깝다 하겠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은 부적당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주장들은 일자(一者)를 묘사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자를 찬양하는 방식으로 여겨져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자(一者)는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일자(一者)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그 밖의 것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예지의 단계는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이요, 영혼의 단계와 유한한 가시적 세계와는 예지의 단계로부터 유출된 것들이다. 그리하여 현실은 ‘일자로부터의 생성(生成)의 하향도(下向道)’로서 다루어질 수가 있다. 일자(一者)야말로 시간과 공간과, 그리고 차별을 초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생겨나는 천차만별의 온갖 것들의 원천인 것이라3)고 한다.


   4) 은혜론으로 이성을 극복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신앙과 지식의 진리에의 두 길은 병행하여 발전되어 나갔다. 그는 신앙은 전통과 권위, 성경 등에서 얻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면을 한 번도 경시하거나 등한시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이것이 규준이 되고 목표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성(intellectus)의 길을 또 한편으로 취하였다. 이것은 그의 초기 작품들에 보면 플라톤주의 철학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기보다 신플라톤주의에로 개종하였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그와 같이 보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 용어와 논리 내지 체계를 말하고 있는 것의 실상은 그 체계를 이용하여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확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 방법으로 그의 신학을 전개하여 가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신앙 자체의 영역도 부단히 확장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신앙을 지식화하기 위하여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그 당시에 그가 전승으로 부터 역사적 신앙을 받았다 할지라도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요, 그의 바울 이해와 은총의 교리의 발전은 어거스틴의 신학을 은총의 신학으로서 변모시켜가고 있다. 이것은 동방의 삼위일체 신관 중심과 성육신 중심의 기독론 중심의 교리와 구별되어 서방의 역사적 신앙의 여러 교리 즉 전승론, 교회론, 예전론, 회개론, 은총론, 예정론 등을 발전시켰다.

  다음으로는, 이성(理性)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신앙과 이성의 두 가지 길로써 신학을 전개하여 왔다. 그는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고 이 신앙을 지식화 하기 위하여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이용하여 그의 신학을 발전시킨다. 이와 같이 하여 어거스틴의 초기 작품들에 있어서는 신앙과 신플라톤 철학 이론은 병행하여 발전시켰다. 실상은 그와 같이 하는 동안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에 대한 명상적 진리(contemplative truth)를 즉 하나님에 대한 ‘봄’(visio)의 진리를 발전시켜 온 것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어거스틴을 바울 서신의 영향 하에 그의 은총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신앙 고유의 영역의 발전이요, 역사적 신앙면의 신학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까지는 동방적인 신학을 발전시켜 왔으나 이제는 그 한 영혼 속에서 서방적인 신학을 발전시켰다. 진실로 은총론은 서방의 모든 신학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이와 같이 신앙면의 신학이 발전된 후에 그는 처음에 고전(古典) 이성(理性)면에서 발전시켰던 이성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태도 변경은 그의 성찰록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말년에 쓴 것으로서 그 때의 그의 사상 태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으나, 그와

같은 태도는 이미 오래 전에 발전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성찰록Ⅰ, Ⅳ’에서 그는 솔리로키아에서 자기가 취하였던 플라톤주의 철학의 요소들을 수정하고 있다. 그의 솔리로키아에 있어서의 수정은 곧 그의 작품 전체에 대한 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그의 신학 방법의 가장 근본에 속하는 진리에의 두 가지 길, 즉 신앙의 길과 이성의 길에 대하여 약간 수정을 하고 있다.3)     


      4. 암브르시우스의 영향과 회심

   1) 암브르시우스의 신학사상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는 트리에르(Trier)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 교육받은 최초의 라틴교부로서 갈리아의 집정관인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의 아들이었으며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365년에 집정관이 되었다. 밀라노 집정관으로 있을 때 그리스도교 정통파와 이단 아리우스파 사이의 분쟁을 수습하였고, 370년경 북 이탈리아 지방의 총독이되었으며 이때 밀란의 공석중인 감독직의 선출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정치가, 목회자로서 또 신플라톤학파에 속하는 지식인으로서 정통파 옹호를 위하여 활동하였고, 384년 이교(異敎)의 부흥을 노리는 원로원과 싸워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 우상 안치를 저지 하였고, 385∼386년에는 압도적인 민중의 지지를 배경으로 하여 황태후 유스티나와 싸워 아리우스파로 부터 밀라노 성당을 되찾았다. 그는 전례(典禮) 성가를 많이 만들었는데, 《모든 것의 창조주 되신 신이시여》는 어거스틴에 의해 암브로시우스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거스틴는 암브로시우스의 비유적 성서 해석 방법에 이끌려 개종했는데, 이것은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필론과 오리게네스 등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동방신학을 도입한 것으로, 그의 신학사상의 의의도 이 점에 있다.

  그는 가장 문제가 많은 시기에도 늘 교회의 실제 행정을 용기 있고 노련하게 해 나갔다. 이것이 암브로시우스가 명성을 떨치게 된 원인이다. 후에 많은 문제를 낳은 성직권에 대한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기독교인의 선함과 자기부인(self-denial)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아리우스주의로 부터 구해내어 믿음에로 복귀시켰다. 그의 성직 권위적 주장이 커가기는 했지만 그만큼 봉사도 뒤따랐다. 야만주의의 범람 속에서 포악행위가 그 앞에서 움츠러들 힘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문명화에 적잖은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아?레이아 회의 에서 행한 다음의 유명한 연설이 지니는 일면이다. “세상의 권세자가 성직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성직자가 세상 권세자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의 또 다른 일면은 그것이 발전하여 힐데브란트의 행위와 이론이 된 것이다.3)

  그의 교송으로 말미암아 서방교회는 영원히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암브로시우스 자신이 만든 찬송은 그리 많지 않다. 베네딕투스회 편집자들에 의하면 그가 만든 것은 모두 12곡이다. 그가 어거스틴의 세례를 위해 「Te Deum」을 작곡하였다는 것은 후에 생긴 전설이다. 작가로서 또 사상가로서 암브로시우스의 명성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그가 교회의 4명의 라틴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 당시 평가는 “암부로시우스는 저술보다는 행동 면에서 더 뛰어났다. 그의 글에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영감이나 락틴티우스의 우아한 수사법, 제롬의 생기 있는 재치나 어거스틴의 근엄한 힘 등은 찾아 볼 수가 없다”(Gibbon, ⅲ, 175). 사상가로서 그는 어거스틴의 그늘에 완전히 가려져 버렸다. 어거스틴을 그가 개종시켜 성 암브로기오 예배당에서 손수 세례를 주었는데, 이는 세계의 위대한 영적 사건들 중 하나이다(387. 4. 25).3)  

  한편 어거스틴은 381년 그가 로마로 가기까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교사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악의 근원과 본질, 기원에 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진 채였고 일년 후 그는 뛰어난 수사학자이면서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있는 밀라노로 갔다. 암브로시우스의 설득력있는 화술은 어거스틴의 마음을 움직여 386년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께 귀의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영향을 받은 암브로시우스의 사상에서 그의 기독론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무제한으로 동일 본질적인 신성을 긍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를 신성과 혼동할 수 없는 ‘세 인격’과 구별하였으며 종속설에 반대하였다. 그의 삼위일체 신관은 성 삼위는 모두 똑같이 영원하고, 똑같이 근원적이고, 제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떨어지지 않고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2) 어거스틴의 회심

  어거스틴의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는 그가 어려서부터 그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심어주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어려서 세례를 받지도 아니했거니와 철저한 교회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고독한 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의 이교도 아버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제어하기 힘든 삶의 쾌락과 무제한적인 명예욕과 생동감 있게 번득이는 정신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부드럽고 유연한 심성과 섬세한 영적 감각과 순전한 내적 경건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열정적인 감각성의 온 정열을 다하여 이 세상의 즐거움에 곧 외적 명예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사랑의 자극에 탐익하게 되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말고 내 마음을 즐겁게 하였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3) 라고 한 어거스틴은 이교도였다. “내가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구역질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내 영혼은 건전하지 못했으니 종기 투성이가 되고 곪아 터져서 그 가려움을 없이 하려고 나는 감각적인 것으로 긁고 있었습니다(욥2:7-8)”3)라고 그는 고백한 것이다. 또한 이교도로서 그는 어머니를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감각적인 것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라고 한 그의 뜨거운 정열적인 시절에 어머니의 유산은, 그가 친구들을 찾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러한 여성적인 부드러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와 같이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 들과의 영적인 연대성을 가지려는 그의 욕구는 전 생애에 걸쳐 드러나며, 후에 그의 사랑의 신학과 공동체 신학이 그 위에서 성장하였던 것이 자연적인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어거스틴의 영혼을 불태웠던 진리에 관한 질문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자신이 거듭 설명하듯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처음부터 그 안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그 어떤 단순한 의미로 볼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것도 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화한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란 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꽤 언짢은 실망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마니교에 빠져 있을 때에 그에게 있어서 미끼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들의 가르침에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묶어 둘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거스틴이 인식적으로가 아니라, 감성적으로 그 자신이 생각하고자 했던 것 이상으로 그 당시에 벌써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친구는 거의 회복할 수 없는 심한 열병으로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죽은 듯이 땀을 흘리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친구는 의식을 잃고 있는 중에 세례를 받게됐다. 그의 영혼은 무의식중에 그 육체에 행하여진 세례를 기억할 수 없을 거이라고 생각하고 세례의 소용성을 의심하였으나, 그 친구는 세례 받을 때의 말씀을 들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신이 사랑하던 것이 없어지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은 갈래갈래 찢어져 자기의 비참한 실존을 알게 되고 또한 이러 일이 있기 전의 자기 모습도 비참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3)

  어거스틴의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 사상에서 극복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심층적으로 그의 회심의 위기를 불러 일으켜 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이고 처세적이며 경건한 감독 암부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기독교 신자들의 하나님 개념과 믿음 개념에 대해 자신이 거절하게 된 판단들이 그릇된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밀라노에서 겪은 체험들 가운데 “우리의 주요, 구원자가 되신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계속 강하게 내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3)고 하는 사실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이 고백하였던 그 하나님은 모든 것이 변화하고 물체적이며 감각적인 사물들 저편에 이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반대편에 있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영적인 것 자체의 저 편에 있지는 않았다. 그는 모든 영적인 것과 비영적인 것에 대한 창조의 원(原) 근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 안에서 무한하고 풍성하게, 단계적으로 영적인 제 능력을 우주로 방출하며 사람에게 내어 비추는 영적 권세의 한 부분으로서, 질서 잡힌 단계적 과정에서 영적인 것으로 올라가서 환시(幻視) 가운데 그와 하나가 될 자격을 부여받는 그러한 영적 존재의 최고 정점이었던 것이다. 어거스틴 자신은 “떨리는 바라봄의 순간에”3) 신적인 것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신적인 것은 모든 영적인 것과의 본질적 일치를 이루었고 모든 비영적인 것과는 본질적 대립을 이루었다. 이러한 세계상으로부터 도덕성은 영적인 것으로써 이러한 신적인 생명의 불꽃을 감각적인 것의 구속에서 해방하고 만유의 영과 사랑으로 일치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모든 비 영적인 것, 곧 육신, 몸, 감각성을 죽이는데 있었다. 감각성의 변화가 아니라, 그것을 죽이는 일이 신플라톤주의 윤리의 목표였다3)고말한다.

  그는 혼인 생활에서 다소 감각적으로 오염된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혼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는 너무도 섬세한 감정을 소지하였기에 여기서 절충안들을 만들 수 없었으며, 그의 그 당시 입장으로 볼 때에 혼인은 하나의 절충안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결혼은 그에게 격렬한 투쟁이었다. 두 “의지가 내 안에 있었는데, 곧 옛 의지와 새 의지요, 하나는 육적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이요, 이 둘은 서로 싸우며, 내 영혼은 이 분쟁으로 찢겨 졌다.”3) 존경받던 수사학자 빅토리누스의 회심에 관한 충격적인 보고와 성 안토니우스와 그의 수도원들의 엄격한 회심자 생활에 관한 감동적인 소식은 더욱 깊게 그의 의지를 움직여 모든 감각성을 단호하게 부정하였으며, 이 야수성에 사로잡힌 사람은 또한 이 가운데 신음하며 깨어지기를 원했다. 그러자 결국 내적인 투쟁이 바깥 정원에서 그 정점에 달하였을 때에, 곧 그의 모든 뼈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으라고 제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까닭에 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번민하고 있을 때에, 어린아이들의 말소리가 있어서 그로 하여금 성경을 펼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눈을 대하듯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장 13-14절). 이 구절을 읽은 직후에 곧 그의 마음은 매우 밝은 확실성의 빛으로 비추어지고 모든 의심의 어두움이 사라졌다.3) 어거스틴은 치유된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기독교로의 회심이었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만을 원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회심은 신플라톤주의의 베일을 쓰고서 일어났다. 물론 마음과 심정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은 또한 신플라톤주의라는 옷에서 기독교적 영혼을 보시고 이 영혼이 은혜를 달라고 외친 것을 응답해 주신 것이라3)고 한다.


     5. 사도 바울의 영향

   1) 은혜론

  어거스틴은 그의 회심 이전에 벌써 암브로시우스의 영향 하에 바울 서신을 읽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회심 때에 책상 위에서 손쉽게 성경을 펴서 본 곳이 로마서 13장 13-14절이 될 수 없다. 그는 로마서를 카시키아쿰으로 가지고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장로로 된 후에는 바울 서신을 더 많이 공부하였고, 이때에 갈라디아서 주석을 썼던 것이다. 그는 로마서 주석도 계획하였으나 첫 다섯 구절만 다룬 후에 중단하였다. 그는 카르타고에 있는 교직자들과 로마서를 공부하였던 것 같고, 형제들의 요구에 따라 ‘로마서의 몇 제목의 해설’을 썼다고 한다. 이와 같은 모든 사실들이 그가 처음부터 바울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고, 더욱이 교직의 자리에 오른 후부터는 더욱 열심히 바울 서신들을 공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같은 율법이 은총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요,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나, 은총 아래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음에로 이끄는 직분’(the ministration of death, 고후 3 : 7)을 행한다.


     그러므로 같은 명령이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되며 그것을 사랑하는 자      들에게는 은혜가 된다. 그리하여 복음에 말씀하시기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바 되었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르렀느니라”고 하였다. 즉 모세      를 통하여 두려움을 위하여 주어진 바 되었던 그 같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은혜와 진리가 되었고 이와같이 율법은 성취되었다(Questione of Simplicianus).


  즉 어거스틴은 바울을 따라 율법과 은혜를 비교하여서 율법에는 죽고 은혜에 있어서는 새로 삶을 얻고, 이제는 이 은혜의 새 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하는 은혜의 종교를 가르치고 있다.


    2) 예정론

   둘째 문제는 로마서 9장 10-29절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태 안에  있어 아직 나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하시었고,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신 말씀을 따라 은총론과 예정론을 전개하고 있다. 즉 “그 자식    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   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어거스틴은 예정론을 전개하고 있다. 즉 에서와 야곱이 아직도 태에 있어 아무 선이나 악을 행할 기회가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도록 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선행에 대한 상급으로서 주는 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무조건적인 은혜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예정이 앞서는 것이요 선악간의 행위가 앞서는 것이 아니다3)라고 말하고 있다.


    은총은 부르시는 자로 말미암고, 그 결과 일어나는 선행은 그 은총을 받는 이로 말미암     은 것이다. 선행이 은총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고, 은총이 오히려 선행을 산출한다. 불은     태우기 위하여 뜨거운 것이 아니고, 타고 있으니까 뜨거운 것이다. 바퀴는 둥글게 되기     위하여 구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둥글므로 구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도     은혜를 받기 위하여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는 선을 행     할 수가 있는 것이다(Questione of Simplicianus).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와 같은 은총을 야곱에게는 보이시고 에서에게는 허락지 않으셨는가? 이 난제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예지(豫知)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미리 야곱에게는 신앙과 선행을, 에서에게는 악행을 예지하시었기 때문에 야곱은 선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다시 공로를 앞세우고 은총을 뒤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선악간에 예지에 근거하여 예정하시었다는 입장을 배격한다. 어거스틴은 신앙을 또한 보시고 예정하시었다는 입장을 반대하였다. 신앙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란 것을 분명히 한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다고 자랑한다면, 그는 그 신     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불신자로 있는 자     에게 그의 자비를 베푸시기 위하여 부르심을 허락하시고 이로써 마음 속에 신앙을 불러     일으키신다(Questione of Simplicianus).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자비는 그의 신앙보다도 또한 부르심보다도 앞선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부르심이 신앙보다 앞서고, 자비는 부르심보다도 앞선다. 그러면 왜 에서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아직 남는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세 가지로 답변한다. ⅰ) 빚 준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빚을 탕감하여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탕감하여주지 않는다 하여서 불의한 것이 없다. 온 인류가 다 죄의 덩어리(massapeccati)로 있을 때 그 중에 한 부분을 존귀하게 하시고 다른 부분을 버리시기로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의는 없으시다. ⅱ)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은 귀히 쓰기 위하여 만들고, 어떤 그릇은 천히 쓰기 위하여 만드시었다고 그릇이 그 만든 주인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말 할 수가 있겠는가?ⅲ)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 있어서 그 깊으신 의도가 어디 있는지 다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 선택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그의 의로우신 판단 가운데 행하신다3)고 한다.


        Ⅲ.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1. 신앙과 이성

    1) 신앙의 우선성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 영원한 로고스가 나타났다고 대담하게 주장했다. 일단 이 주장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자, 고대 철학체계들이 크게 흔들렸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가까이 오셔서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신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며, 또 한편으로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적 이성을 사용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성육신은 역사에 의미를 주었다. 고대 사상가들의 생각에 의하면 역사는 본성 상 실체가 없고 변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의미를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神)인(人) 교리는 궁극적 실재가 시간 안에서의 한 특정한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이런 사고가 그리스, 로마의 사고와

상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독교와 관점이 가장 비슷한 플라톤주의도 어거스틴의 견해에 의하면 성육신에 대해서만은 아무것도 올바르게 말할 수 없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작들에 담겨 있는 많은 내용들에 동의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것을 나는 거기서 읽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3). 그러나 나무 십자가와 함께 철학적 사고 앞에서 있는 장애물이며 철학적 지성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인 이것을 어거스틴은 카톨릭 기독교의 중요한 핵심이라 간주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신앙이라는 출발점과 이성과 문화라는 출발점에 대한 어떠한 타협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변증을 통해 그는 모든 지식 안에 있는 신앙적 요소들을 제시하는 일을 수행했다. 그의 변증은 또한 특수한 역사인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죄에 의해 무능해진 이성을 바로잡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우리는 어거스틴적 해결의 위대함이 신앙, 역사, 은혜, 특수의 어떤 우선성을 보존하면서도 이성, 철학, 본성, 보편을 거절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자연적 이성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이 이성은 결코 완전히 자연스러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조명 행위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은 의지의 힘에 의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전적으로 피조물에만 종사할 때에도-이런 의지는 타락한, 왜곡된 의지이다- 하나님의 조명의 힘 때문에 자신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피조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 안에 있는 이성은 참으로 존경되어야 한다. 이성은 그 안에 우리의 인간 본성이 완성되는 곳이고, 또한 이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따라서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다.3)


    2) 신앙을 필요로 하는 이성과 의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조명된 자연적 이성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정신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조명을 받기 때문에, 어거스틴에게는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방치된 이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성에게 이런 신적인 보장과 힘이 주어져 있다면, 신앙은 왜 필요한가? 혹은 어거스틴이 플라톤 주의자들을 그렇게 높게 평가했다면3) 어거스틴이 신앙의 올바른 규칙-우리는 신앙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완전히 볼 수 있다는 규칙-이라 부르는 것을 그들에게 강요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비록 어거스틴이 이성의 기능을 찬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심이 되는 주장은 육체를 입으신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식의 원리요 출발점3)이라는 논지였다. 어거스틴이 이성에 대해 일종의 우월성을 말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는 이점에 있어서 플라톤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이 영원한 말씀의 채우심이 모든과학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에서 이 우월성의 의미를 파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지식은 필연적으로 신앙과 그 대상-역사적 특수적인 육신이 된 말씀-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그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분명히 어거스틴은 자연적 혹은 타락한 인간이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빛으로부터 몸을 돌렸지만, 그 빛은 여전히 그를 둘러싼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을 둘러싼 이 어둠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 비록 사람들이 재인식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만한 잔재물들이 그들에게 남아있다. 이 흔적들은 재인식을 위해서 필수적이다.3) 하나님은 완전히 잊혀졌다면 결코 회상될 수 없다. 만일 내가 당신을 나의 기억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면, 나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어찌 당신을 찾아나설 생각을 했을까요?3) 

  또한, 인식에 있어서 권위가 필수 불가결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의 필수 불가결성이 어거스틴의 인식론에 있어서의 신앙의 우선성의 심오한 의미를 명확히 해주는데 유용하지 못하다. 신앙은 이성을 앞서야 한다. 이성이 원래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가 중보자의 은혜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는 이성은 믿을 수 없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과정에서 신앙의 우선성은, 이성과 지식이 의지의 성격에 의존하며 모든 의지는 타락되어 있다는 어거스틴의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은 깨끗한 마음에게만 알려진다는 소크라테스 사상의 확장이었다.3)

  모든 지상적 실재와 영원한 실재들은 인간이 알 수 있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빛으로부터 등을 돌려 피조물을 향하고 있다. 이 돌아섬이야 말로 왜곡된 사랑, 원죄의 상징이다. 인간 의지의 이런 경향성 때문에 피조물의 질서가 인간 지식의 일차적 대상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사랑이 의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 의지가 피조물로 향할 때 하나님에 대한 경향성이 줄어들고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줄어든다. 이 하나님에 대한 경향성은 감각세계를 향한 인간의 욕정이 살아있음에 비례해서 줄어든다. 이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엄청난 사랑은 인간의 기본적인 취약점인 자기 사랑 혹은 교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교만 때문에 인간들은 감각적인 것들을 사랑한다. 교만이 모든 죄의 시초이다. 인간의 죄의 시초는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림이다.


    3) 지식에로의 길이신 중보자

  사람들은 교만 때문에 피조물을 강박적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사물들을 규정하는 무조건적 실재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얻을 뿐이다. 신앙만이 역사적인 것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신앙만이 인간의 왜곡을 바르게 할 수 있다. 피조물의 깊음 가운데 발생한 하나님의 출현에 의해 사람들은 피조물과의 불경건한 결혼에서 부터 해방될 수 있다. 죄인의 형태. 종의 형태로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복종- 이것이 믿음이다- 이야말로 피조물을 향하는 왜곡된 사랑의 진정한 해결책이다. 새로운 사랑만이 이전의 왜곡된 사랑을 몰아 낼 수 있다. 새로운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한 길을 예비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그 역사를

믿는 그 믿음에 의해서만이 치유될 수 있다.

  이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의 원리의 사역은 - 그는 종의 형태로 오셨고 따라서 베일로 덮여져 있다 - 하나님의 겸손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겸손 안에서 인간의 교만을 낮추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놓았다. 이 그리스도는 소란을 일으키는 분이시다. 그는 사람의 이중적인 의지가 치료를 소망하도록 절망 속으로 인간의 의지를 흔들어 놓으신다.3) 교만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으므로 이제 겸손만이 유일한 길이다; 교만은 우리를 상처 입혔지만, 겸손은 우리를 온전케 만든다. 하나님은 교만의 상처로부터 인간들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겸손하게 오셨다. 이런 방식으로 중보자는 사람들이 그가 이미 느끼고 있었던 하나님을 알고 기억하도록 의지를 바꾸신다. 이것이 경험에 기초한 어거스틴의 놀라운 통찰력이다; “나는 물질적인 것들에 빠졌었고, 어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었고 그곳에서 나는 당신을 기억했습니다.”3)

  「고백록」에서 조차도 어거스틴의 신앙의 형태를 신(神) 중심주의(theo-centrism)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중보자는 고백록이 이끌어지게된 필수불가결의 도구이며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참회는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이 분을 통해서 당신을 찾지 않던 우리를 찾아 오셨나이다. 당신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으므로 이제 우리도 당신을 찾나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영원한 말씀이 사람의 이성에 벌써 방문하지 않으셨다면 육신이 된 말씀 조차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을 낳지 못했을 것이다. 이 방문에서 마음에 흔적이 남는다. 이 흔적이 없다면, 역사적인 것 안에서 영원히 식별되지 않을 것이다. 또 역사적인 것이 마음에 영원한 것을 상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지성에 대하여 “… 만일 자신이 외면한 선이 자기 안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지성이 되돌아가기를 원했을 때 지성은 그쪽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3)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기억한 것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안에서 근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


       2. 인식론(認識論)


     1) 기억의 신비

  어거스틴은 본래 자신에게 주어진 이 힘(감각)을 초월하여 단계를 밟아 자신을 만드신 그분에게로 오르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는 기억이라고 하는 평야와 넓은 궁전에 오게 되었고, 그 속에서 경험한 것들을 꺼내어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은 자신의 관점(감각의)을 통하여 기억이라는 창고에 들어가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각한 사물 그 자신들이 그대로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지각된 사물의 영상들만이 들어가 간직되어 있다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생각에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미래의 행동과 사건과 희망을 추측해보고, 이 모든 것을 현재적인 사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말할 때 그 순간 내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영상들이 같은 기억의 창고로부터 나와서 내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만일 영상들이 거기에 없다면 그것에 대하여 말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하게 된다.

  오, 나의 하나님, 이 기억의 힘은 위대합니다. … 누가 그 깊이를 재어 보았습니까? 그래도 그것은 내 마음의 힘이므로 내 본성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전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자기 자신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너무 좁은 듯합니다. 그러면 포괄될 수 없는 부분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마음 안에 있지 않고 마음 밖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이 왜 자신을 포괄할 수 없습니까?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볼 때 내 마음은 어리둥절해져서 경의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3)

  많은 학문의 지식에서 배운 것은 망각되는 것이 아니고, 더 깊숙한 곳 즉 내면의 세계(무의식)에 간직되어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지 보통 세 가지 질문을 한다.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러한 기억의 무한한 포용력은 사물의 영상들이 아니라 실체(학문) 자체이고 본질 자체들이다. 또한 우리의 기억은 망각되어 있는 것조차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고, 버려져 있고, 흩어져 있었던 것들이 마음에 낯이 모아지는 것이다. 우리 기억은 자기 마음에서 이렇게 발견하여 간직해 놓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하여 배워서 알게 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안다는 것은 흩어져 있는 것들을 거두어 모은다(colligenda)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cogito(나는 생각한다)란 말을 마음의 기능에만 적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모아진 것이 아니고 마음 안에서 거두어 모아진 것만을 생각한다(cogito)는 말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3) 

  오, 주님. 나는 당신을 찾고자 할 때 내 기억 밖에서 찾지 않고 내 기억의 넓은 광장 안에서 두루 살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알게 된 때부터 내 기억에 새겨진 당신의 모습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당신을 알게 된 이후 당신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진리를 찾은 그곳에서 진리 자체가 되신 나의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진리를 처음으로 알게 된 때부터 진리를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을 알게 된 이후 계속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 안에서 기뻐할 때 당신을 찾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거룩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당신께서 자비로서 내 궁핍함을 굽어살피시고 나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3)


    2) 인식론

  모든 사람은 누구나 비물질적인 정신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직관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여러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또한 오류를 범할 때나 의심할 때에 있어서도 사람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 ‘나’에 대한 지식은 감각적 경험이나 그 밖의 어떤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직접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는 이 견해를 유명한 하나의 짧은 구절로 표현하였다. “설령 내가 오류를 범한다할지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 Even if I err, I am.).

  어거스틴는 자기 자신의 인식설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을 때, 그리고 그때에야 그는 이론적 회의론의 입장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철학의 유용성과 철학의 어떠한 체계적 개요도 그의 인식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회의론자들은 보통, 이데아는 그것을 품고 있는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이요, 또 감각은 그것을 외적 대상이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온당치 못한 주관적 소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는 이러한 회의론적 입장에 대항하여 자기의 인식설을 세웠다.

  이 회의론적 입장의 첫째 주장에 반대하여, 어거스틴는 전형적으로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따랐다. 이데아는 우리의 마음에 의해서 발전되기에 앞서, 그리고 그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실재적 실체라고 주장하였다. 실로 이데아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직관으로써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데아 자체는 우리가 그것을 직관하지 않았더라도 사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이데아는 추론(推論)의 결과가 아니며 감관(感官)을 통해서나 또는 이데아 자체 이외의 어떠한 것을 통해서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데아 자체는 결코 심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물질적인 사물과는 달리 불변적이다.

  회의론적 입장의 둘째 주장에 반대하여 어거스틴는 감각은 신체의 변화가 마음 속에 일으키는 결과가 아니라, 마음이 신체에 있어서의 어떤 변화들을 자유롭게 택하여 주의해 보는 심적 활동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인간의 신체는 모든 물체와 마찬가지로, 다른 물체들과의 부단히 변하는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다른 물체들과의 접촉으로부터 피동적으로 많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마음은 본질에 있어 신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마음은 단순하고 비물질적인 실체요, 신체는 복잡하고 물질적인 실체이다. 마음은 신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 신체의 산물이 아니다. 감각도 신체로부터의 영향이 아니다. 감각은 신체 속에 일어나는 변화들 중의 어떤 것에 대한 마음의 주목이다. 마음은 신체 속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주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의 목적과 관계가 있는 신체적 변화만을 주목한다.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또는 어떤 감각을 지니고 있을 때, 우리가 우리의 신체 속에 진행되고 있는 어떤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변화에 관한 어떤 지식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감각은 실로 지식에의 길이다. 그것은 일정한 목적을 가진 활동으로서, 마음의 의도와 그 마음이 관계하는 신체의 상태에 대한 무엇인가를 나타내어 준다. 그러므로 감각은 가장 단순한 형태일 경우에서도 이미 지적 및 의욕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은연중에 동물적 신체 및 동물적 신체와 접촉하고 있는 다른 물체들에 관한 판단이다.

  어거스틴의 인식설이 카톨릭의 입장에 교묘하게 맞아 들어갔다. 어거스틴은 카톨릭의 정통적 견해로 된 것, 즉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치에 닿지 않는 맹목적 신앙에 찬동하지 않았다. 그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알기 위해서는 믿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선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신과의 접촉, 신으로부터의 조명을 얻을 것이요, 이는 결국 정신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만 못지않게 진정으로 온건한 확신을 가지고 믿기 위해서는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는 이해가 없이는 완전한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독자적 노력을 통해서 과학이라고 부르는 부류의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비록 과학의 존립을 인정하고 시간적, 현세적인 사물들에 관한 과학적 탐구를 위하여 여지를 마련하였지만, 그 자신은 이러한 지식을 쌓는 데 정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지혜라고 하는 좀더 높은 종류의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신앙의 결과인 동시에 성취로서, 사람들에게 정신적 실재(實在)들이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3)고 한다.

  이러한 인식설에 관한 기독교적 입장은 실재에 관한 참된 지식은 오직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진리를 그 통전성(coherence) 속에서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은 제한된 의미에서 진리의 계기들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우주 속에서 존재하는 관계들을 사실적으로 관찰하는 한, 그의 관찰은 참되다. 그러나 그가 이 관계들에 부여하는 해석 곧 그것들에 관한 그의 전체적인 관점이 진리를 곡해한다는 것이다.3)

  우리는 이상으로부터 진리는 우리 인간적 경험의 생각과 똑같은 관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가장 포괄적인 진리관은 인간의 마음의 초월적 영역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 헌신되거나 아니면 피조적 우주 속에서 확실성을 추구하거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포괄적인 진리관은 초월적인 충만한 진리 곧 예수그리스도이다. 이 진리의 초월적 영역으로부터 진리의 빛은 선험적인 시간적 지평의 아르리오리에 의해 결정되는, 시간적 진리의 영역들을 비추는 것이라3)고 한다.


     3. 시간의 본질


    1) 시간의 무상성(無常性)

  영원과 시간의 질적인 차이는 영원은 시간의 양적인 연장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탁월성이며,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음"(semper stans)이요, “영원한 현재”(nunc stans)라는 것이다. 반면에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으로서 “결코 머물러 있지 않음”(numquam stans) 즉 무상성(無常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원과 시간을 대조해서 어거스틴은 시간과 본질을 파악하고 질문을 던진다. 그는 시간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 파악되려면 얼마나 난해한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3)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쉽게 그리고 간략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      까? 누가 감히 그것을 잘 이해하여 그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는 일상대화에서 시간보다 더 친근하게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시간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시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      까?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     에게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3)


  시간이 무엇이냐고 그 본질(quidity, whatness)을 물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의 있음(that which is)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의식하려면 정지 상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시간이란 무엇인

가?”(Quid est tempus?)라고 물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아무것도 흘러 지나가     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요, 만일 아무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도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지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     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이 두 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해서 있게     되는 것입니까? 반면에 현재라는 시간이 항상 현재로 남아 있어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      지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     일 현재가 - 시간이 되기 위해서 - 반드시 과거로 지나가는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이 현재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현재 시간의 존재 이     유가 지나가 없어져 버리는 데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란 비존재     에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3)


  시간을 객관(공간)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면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 되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 되며”, 현재는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 되어, 시간의 어느 모습도 포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내면의 인간”(homo interior)에게 돌려 그 안에서 체험된 시간현상을 이해하려 할 때 비로소 시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과거 일의 현재” (praesentia de praetentis)라고 불렀다.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우리의 기대 속에 현존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미래 일의 현재”(praesentia de futuris)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재는 계속 지나가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직관 속에 “현재 일의 현재”(praesentis de praesentibus)로서 이해된다고 말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과거, 현재, 미래는 우리의 내적 인간, 즉 혼(anima) 속에서 과거를 기억(memoria)으로, 현재를 직관(contuitus)으로, 미래를 기대(expectatio)의 형태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3)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의 세 가지 모습이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현재를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외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할 때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져 결국 분산되어 버리는 그러한 현재도 아니다. 그것은 내적으로 체험된 현재, 즉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를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현재의 “지속”(duration)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영혼의 팽창(distentio animae)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간의 세 가지의 모습은 내면의 인간, 즉 인간의 혼 속에서 현재적인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간을 측정하는 데에서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먼저 그는 시간을 물체의 운동으로부터

구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의 측정이라고 보았다. 그 운동은 공간적인 차원을 내포하고 있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운동의 길이와 시간의 길이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물체가 A라는 점에서 B라는 점으로 옮겨질 때, 그 운동은 시간의 길이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며, 또한 우리는 물체가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시간을 측정(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그는 태양을 멈춘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어, 해는 멈췄으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고 말한다.3)


    2) 시간은 「영혼의 팽창성」(distentio animae)

  이와 같이 시간은 물체의 운동도 아니요, 또한 그 운동으로 시간을 측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시간은 물체의 운동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3)

  그러므로 과거가 이미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마음에 남긴 인상을 측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측정한다는 것도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기대한 것을 측정하는 것이다. 현재라는 시간은 연장이 없는 것이지만 계속 지속되는 마음의 주의(직관)를 측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가 길다 함은 과거의 시간이 긴 것이 아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길다는 것이요,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길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길다는 것이다.3) 이처럼 시간의 세 가지의 양태가 마음의 활동인 기억, 직관, 기대와 상호 일치되어 있어 그 마음 안에서 측정되고 파악되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시간을 “영혼(마음)의 팽창”(distentio animae)이라고까지 말한 것이다.3)그는 시간과 그것을 체험하는 마음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만일 나에게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시간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나는 모릅니다”라는 말의 진의를 알게된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객관화해서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눈을 인간의 내면으로 돌려 그 곳에서 체험된 삶의 시간을 파악하려고 할 때, 비로소 시간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은 인간의 anima(혼, 마음)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시간을 “distentio animae"이라고까지 말한 것이다.

  어거스틴이 시간을 정의하여 마음의 팽창이라고 말할 때, 그는 창조된 시간인 객관적인 질서를 결코 배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의 『고백록』에 나타난 시간론이 주관적인 시간체험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어거스틴이 “오, 내 마음아, 나는 네 안에서 내 시간을 재노라”라고 말했을 때, “내 시간”(tempora mea)이라고 강조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3) 이로써 아주 주관적인 면만을 주장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내 시간이란 하나님이 창조한 객관적인 질서로서의 시간을 내적으로 체험한 시간인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체험하고 측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객관적인 시간 질서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팽창이 시간의 원인이나 근원이 된다든가 또는 시간 그 자체를 이룩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이러한 오해가 있을까봐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당치      않습니다. 아마 “과거 일의 현재”, “현재 일의 현재”, “미래 일의 현재”라는 세 가지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영     혼(마음)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3)


  이것은 결코 객관적인 질서로서의 시간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외적인 시간질서와 내적인 시간 체험(의식)이 상관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생각한 듯하다. 즉 우리는 외적으로 존재한 것이 마음에 주어질 때, 그것을 인지하고 파악(체험)하게 되므로, 어거스틴은 시간의 주관적인 체험이 시간의 객관적인 근거를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본 듯하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시간 질서는 인간의 마음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다음 문장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이 사실 존재하고 있음을 애매하게 하지 말라.” 이 말은 어거스틴이 시간의 객관적인 질서를 부정하지 않음을 더 확실히 증거해 주는 표현이다. 그래서 아우틀러(Outler)는 이 문장을 이렇게 번역한 것이다. “Do not shout me down that it exists(objectively)”(시간이 객관적으로 존재해 있음에 대해 나를 어지럽게 하지말라)3)

  어거스틴은 시간을 세계창조와 관련시켜 존재론적으로 그 기초를 놓았고, 그것을 심리(체험)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인간의 운명과 관련시켜 실존적으로 추구했다. 따라서 인간 안에서 체험된 시간의식은 시간 안에서 사는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 보인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우리 마음은 팽창할 수 있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로, 지나가고 있는 현재를 직관으로, 이미 지나간 과거를 기억으로 각각 파악할 수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기대한 것에서 직관한 것을 통하여 기억한 것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무상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결과로 우리 인간은 첫째로 시간을 전체적으로 또는 동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부분적으로 혹은 연속적으로만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인간이란 무엇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 사실을 시편을 읽을 때, 전체를 동시적으로 읽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연속적으로밖에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3)

  둘째로 인간은 그 시간성(무상성) 때문에 인식의 차원에서만 이렇게 제한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삶)의 차원에서도 제한 받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인간의 혼 안에서 체험(파악)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 실존의 무상함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3)

  우리의 날(시간)에는 참 존재가 없습니다. 우리의 날들은 오자마자 지나가고 맙니다.…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는 다시 회복할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지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이미 왔을 때는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없습니다.3)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을 제공해주지만 시간은 그 사랑의 대상을 우리에게서 탈취해 가버림으로써 … 우리의 혼은 불한하고 불행하게 됩니다.3)

  어거스틴은 시간의 문제는 인간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존재를 시를 읽는 것에 비교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은 무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경향성 때문에 항상 무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무를 향해 있는 피조물의 모습은 무상한 시간성과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인간의 실존에서 더욱 명확히 그 뜻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서 말하면 인간은 무상한 시간안에서 항상 무의 위협, 행복의 상실, 죽음의 가능성에 직면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 안에서 무엇을 얻었다고 할 때는 그것의 상실이 뒤 따르고, 존재는 비존재를 동반하며, 생성은 멸망을 수반하고, 삶은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듯 시간 속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경험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문제 해결은 무엇일까? 어거스틴은 결코 시간을 악한 것이라든가, 혹은 시간으로부터의 도피가 인생문제의 해결이요 구원이라고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을 단순한 정신의 현상 혹은 환상으로 생각하여 그 실제성을 소홀히 취급한 것도 아니다. 그에게서 시간의 문제는 인간의 영적 생활과 그 의미를 추구한 종교적인 것이었다. 어거스틴이 시간의 본질을 이렇게 깊이 구명하고 이해하려는 이유는 무로 향해하고 있는 시간 체험, 즉 무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 시간과 영원을 중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시간론은 영적 관심, 즉 영원한 하나님을 떠난 인간존재는 항상 불안한 것이므로 영원 자에게 닻을 내려 그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주제가 놓여 있다. 그에게서 영원을 떠나서 시간을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3)고 한다.


     4. 천지의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어거스틴이 지닌 지성은 그의 우주론의 주요한 경향들이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종합되기 때문에, 그의 성찰한 내용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간과 영원성, 자연과 인간사(史), 신체와 영혼, 선과 악이란 모든 주제들은 어거스틴의 세계창조 사상에서 발전되고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 창조론을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소 주제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1)어거스틴의 사상에 있어서 성서의 계시의 역할, (2)신플라톤주의자 어거스틴과 기독교인 어거스틴의 관계가 이 두 소주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1) 태초에 (In the Begining)


   (1)시간과 영원성

  어거스틴은 ‘태초에’란 말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 말에는 비유적 의미와 문자적 의미가 있다. 비유적으로는 ‘태초에’(principium)는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그의 안에서 그에 의해 만드신 영원한 성자이신, 창조되지 않은 지혜이다.3) 문자적 의미로,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이다. 만물은 시간의 시작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출발점으로부터 어거스틴은 시간과 영원성의 의미탐구에 나서는데, 그 성과는 매우 독창적이며 시사하는 바가 많다.

  시간은 변화하는 사물들에 상대적이며, 그런 사물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변화하는 피조물들의 세계의 최초의 생성은 시간적 과정을 ‘시작하게’ 하지만 그 과정 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창조는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고 ‘태초에’ 존재한다. 피조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창조는 시간을 취하지 않았다. 세계창조는 시간적 지속을 지니지 않았다. 만물이 현재의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만물을 동시에 창조하셨다.’ 생명체들은 태초에 ‘숨겨진 씨’로서 창조되었다가 이후에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우리가 지금 생명체들을 알게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와 시간의 시작은, 즉 가변적인 사물들의 생성 그 자체는 시간 속에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창조는 하나님의 의지 행위인데, 하나님의 의지는 시간 속에 있지 않으며, 시간이 소요되지도 않기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3) 어거스틴은 매우 솔직하고 진지한 태도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결국 그의 대답은 순수시간에는 실재하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변화하는 사물들과 관계를 맺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 변화하는 사물들로부터 분리된 시간은, 즉 순수시간은 우리가 실제로 사유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천지’란 말로 모든 창조를 이해한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기전에 어     떤 것도 만들고 계시지 않았다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의 경솔한 지     성이 ‘시간의 모상들’을 통해서 창조 이전으로 소급해 가면서, 전능하시고 만물을 창조하     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당신께서 만물을 만드시기 전 광대한 시간동안     그런 일을 하시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면, 그를 일깨워 생각게 합니다. 왜냐하     면 그는 잘못된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모든 시간의 창조자이시고     창시자이신 까닭에 당신께서 만드시지 않은 광대한 시간은 어디에서 올 수 있겠습니까?     … 그렇지만 만일 천지가 생겨나기 전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때에 당신께서 무     엇을 하고 계셨는지 왜 묻겠습니까? 그것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때’란 존재하지 않     기 때문입니다.3)


  그래서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때’는 어떤 변화하는 사물을 전제하며 따라서 창조의 존재를 전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그때’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여전히 어떤 변화하는 사물을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시간에 의해 시간을 앞서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당신은 모든 시간들에     앞서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나 현재인 숭고한 영원성에 의해     모든 과거 시간들에 앞서시며, 모든 미래 시간들을 초월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들은     다가올 것들이며, 다가올 때 과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동일하시     며 당신의 세월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3)


  그러므로 세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과거’에 대해, 또는 만들어지기 ‘이전에’ 피조물들이 있었던 무(無)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 용어들을 시간상의 ‘선행(先行)’이 아니라 영원에 의한 ‘선행’으로 이해하고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과 세계 사이의 차이는 다른 존재 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 자를 암시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한 바보’ 조차도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과 세계간의 차이는 불변적 존재와 변화하는 존재간의 차이이다.


    그러나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영혼과 육체의 창조자이신 당신께서는 결코 이런 방식으로     미래와 과거의 모든 사물들을 인식하지는 않으십니다. 훨씬 더 놀랍고 은밀한 방식으로     당신께서는 이런 사물들을 인식하십니다.3)


  불변적 존재가 변화하는 존재자들과 어떤 방식으로 실제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는 신비로 남게 된다. 어거스틴이 한 일은 신비를 찾아내어 그것을 고백하는 일이다.3)


   (2) 역사적 의미

  어거스틴이 창세기에서 발견한 진리로 인해 그가 그들의 역사이론과는 다른 역사이론을 어떤 방식으로 정교하게 세우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그의 역사이론은 서구문화 속에 스며들어서 한 부분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진리가 지니는 힘이 어거스틴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도 살펴보고자 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영혼은 하나님과 상호적으로 영원하다(co-eternal)고 말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경우 그들은 영혼이 지금까지 처해있지 않았던 비참한 상태가 이전에는 빠져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은, 만일 영혼이 끊임없이 행복의 상태와 비참함의 상태를 번갈아 가면서 경험하고 있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들은 부당한 주장을 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소위 행복의 모든 상태에서 그것은 장차 다가올 불행을 예견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불행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경우) 속임을 당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그들이 역사에 진정한 새로움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이 하나님의 불변성과 모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변하며 역사는 실재하지 않는다’ 또는 ‘하나님은 가변적이며 역사는 실재한다’에서 딜레마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딜레마가 아니다. 어거스틴은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불변하며 역사는 실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태초에’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세계와 함께 시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비기독교적 역사관들과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경우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신앙이 그의 이성과 상충하지 않으며 그의 사유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맹목적으로 성서를 받아들이는 어거스틴과 철학자로서 사유하는 어거스틴이란 두 명의 어거스틴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명의 어거스틴이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서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며, 시간과 역사, 영원성의 의미를 새롭게 밝혀주는 조명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는 이러한 조명을 탐구하고 전달해야 한다3)는 것이다.


   2) 천 지(天地)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어거스틴은 ‘천지’를 해석하는데 ‘자구(字句)에 매달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는데 모두 참이다. 어거스틴은 이 단어를 ‘예지적 하늘’과 ‘형태 없는 땅’으로 이해한다.3) 예지적 하늘은 가시적인 창공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모든 사물들보다 뛰어난 영적 피조물인 천사들이 거하는 완전한 형태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가변적 피조물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영원성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끊임없이 확실하게’ 하나님께 ‘매어 달림으로써’ 영원히 하나님의 모습을 즐긴다.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이런 예지적 하늘은 하나님에 가까이 있다. 형태 없는 땅은 무가 아니기는 하지만 ‘무에 가까이’ 있다.3) 이러한 ‘형태 없는 땅’은 가시적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창공을 포함하는 모든 물체들을 형성해 내는 ‘물질’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지각하는 성질들을 형성해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형태가 없고 성질도 지니지 않기 때문에 무에 가깝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질료(hyle)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런 형태 없는 물질은 변화의 능동 인이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변화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변화의 원리이다. 어거스틴은 물질 자체가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가변적 사물들의 불변성 자체는 가변적 사물들이 변화해 갈 수 있는 모든 형     태들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변성이란 무엇인가? … 만일 ‘무인 어떤       것’,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은 저 가시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들을 수용할 수 있기 위해서     이미 어떤 종류의 존재를 지니고 있었다.3)


  플라톤은 우리가 물질을 사유할 수밖에 없지만 물질을 ‘서자(庶子)적 사유’에 의해 파악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형태 없는 이 물질을 먼저 창조하신 후에. 시간 속에서 그것을 형태 지워서 개별 가시적 사물들로 만드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만물을, 즉 예지적 하늘과 형태 없는 땅, 가시적 세계를 함께 창조하셨다. 만물은 동시에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작품들은 미리 존재하던 물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신은 흐르는 시간 없이도 형태가 없는 물질에 형태를 부여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같은 시간에 함께 창조된(concreated) 물질로 부터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물질과, 하늘과 땅의 가시적 형태는 서로 다른 것인 까닭에 형태가 물질에 시간적 간격을 두지 않고 따라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은 절대적 무로부터 물질을 만드셨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

의 가시적 형태를 형태 없는 물질로부터 만드셨습니다.3)

  어거스틴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인류는 세계가 시작할 때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존재하게 되었다. 인간은 태초에 가시적 형태로 창조되지 않았고, ‘비가시적으로, 잠재적으로, 인과적으로(이미 존재하는 것들과는 대조적으로) 장차 사물들이 만들어지게 될 방식으로’3) 창조되었다. 인간은 태초에 잠태재로 만들어졌다가, ‘정해진 자신의 시간에’3) 실제 형태를 부여받아 가시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사건들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3) 무(無)로부터

  교회가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는 무기로서 오랫동안 사용했던 전통을 따라서, 어거스틴은 성서 속에서 세계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가르침을 발견한다. 그는 이런 가르침을 그것으로부터 세계를 만든 ‘무’로 명명되는 어떤 것이 존재했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무를 실체화하고 있지 않다. 그가 말한 바는 “당신만이 존재하셨으며 그 옆에는 당신께서 그것으로부터 천지를 창조해내신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3)라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실체의 일부분을 취해서 그것으로부터 세계를 만드셨지만,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세계는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것 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성을 보조하기 위한, 자신이 만드시지 않은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세계는 무로부터 생성되었다.

  ‘태초에’의 경우에 이런 ‘무로부터’는 말하자면 타성적이고 억제하는 외부물체로 남아있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이런 사실은 자유케하는 조명적(照明的) 진리로 기능하였다. 이것을 두 가지 경우에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경우는 그가 신플라톤주의자들과 마니교도들을 반박하여 신체가 선하다는 사실을 옹호할 때이며, 두 번째 경우는 영혼이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라는 마니교의 생각을 공격할 때이다.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많은 오류의 근저에서 신체에 대한 혐오가 깔려있음을 찾아낸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마니교도들과 달리 현재 우리의 신체를 본성 상악한 것으로 증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시적 세계의 모든 요소들의 원인이 제작자로서의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

  이렇게 육체를 혐오하는 것 자체가 ‘욕체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감정들은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생겨나지 않고 인간의 환상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육체의 혐오로 인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육체가 부활해서 종국적으로 영화롭게 된다는 기독교 교리가 진리임을 고백할 수 없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세계는 절대적 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형태 없는 물질조차도 하나님께서 물질에 형태가 들어간 개별 본성들과 함께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무가 아닌 모든 것이 선하다는 사실에 관해 플로티누스보다 더 분명히 알 수 있으며 더 확신할 수 있다.3)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생각은 보편적 선을 인정하는 어거스틴의 생각을 더 분명하게 해주었으며 강화시켜 주었다. 마니교들은 하나님에 반대해서 ‘자신의 원리가 산출하고 전파하는 어떤 악한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악한 본성은 물질이다. 그러므로 물질로부터 형성된 신체는 악이다. 모든 육체는 악의 원리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무로부터 영적이거나 물체적인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물질은 하나님께서 반대되는 것이나 하나님의 의지에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로 만들어진 신체들은 본성상 악하거나 선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물질과 신체를 모두 무로부터 창조하셨고, 그래서 그것들의 본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말하듯이, 우리는 우리 신체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한다.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지니고 있을 리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어거스틴의 생각은 진행된다. 우리자신을 속이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부분이 아니며, 자식이 그 부모의 본성을 지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을 지닐 수 있는 하나님의 자식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로부터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체와 영혼 둘 다 무로부터 창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신체와 영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신체와 영혼은 그 본성에 있어서 선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이다.

  신체와 영혼은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달리 가변적이며 타락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 하신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제외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절대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피조물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된 것으로서의 자신들의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면 그분의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을 벗어나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알기 어렵게 된다3)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성서 속에서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의 새로운 방향을 발견했다는 의미에서 성서에 의존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의존이 플로티누스에 대한 의존이나 플로티누스의 비전이 그러했었을 것보다 더 우연적이고 사유를 거치지 않은 것이며 사유에 있어서의 명료성과 이해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라는 암시를, 말하자면 이런 의미에서 보다 ‘철학적’이지 못하다는 암시를 주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거스틴과 플로티누스 각자의 생각이 서로 다른 비전을 출발점으로 하여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세계에 관해 사유하면서 플로티누스 못지 않게 철학적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도 이러한 비전이 없이는 세계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성서 속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였는데, 이 진리는 신플라톤주의의 전망을 충족시켰으며 그것을 넘어섰다. 하나님은 천지에 있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성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비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탐구의 종착점이지만,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의미에서 새로운 출발점이었다3)고 본다.





      Ⅳ. 결  론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쓰기 시작한 397년을 전후로 일어난 역사적 상황은 기독교가 크게 상장하고 있는 반면에 로마 제국은 곳곳에서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378년 서고트족의 침입과 동로마 제국 황제 발텐(valens)의 아드리아노플에서의 죽음은 야만인 족으로 기울기 시작하였고, 어거스틴이 로마에 건너갔을 때에는 ‘로마 기근’이라는 어려움이 닥쳐왔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기독교는 로마와는 반대로 그 위세가 커져 가고 있었는데 어거스틴이 개종한 후인 394년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이교 신앙을 금지 시킴에 따라 기독교는 법적으로나 실제 면에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제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체계화 시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저술한 근본 목적을 성서적 관계에서 볼 때, ‘고백’(Confession)이란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께 고백하게 하시고,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시66:6)의 말씀을 뜻하고 있다. 즉 여기서의 ‘고백’이란 인간의 죄에 대한 고백일 뿐만 아니라 신의 능력에 대한 고백이라는 의미이고, 죄와 불의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기 위한 것이며 죄의 고백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백’의 본질은 두 부분으로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된다. 어거스틴은 다윗이 서술한 시편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 죄의고백 등이 자신의 신앙적 도정과 유사하다고 보고 있으며,「고백록」에서도 자신의 체험을 시편 형식을 빌려 쓰고자 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어느 부분까지가 플라톤적이며 어디까지가 기독교적인가 하는 문제는 「고백록」에서 추적하고자 하는 중요한 이슈가 되어 왔다. 그는 「고백록」의 7권에서 플로티누스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고 그것을 통해 체계적인 해답에 도달하고 있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플로티누스의 「Enneads」에서 영혼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그의 물질적인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관계는 ‘유출설’에 의하여 해법이 가능했고, 악과 선의 관계도 이 유출의 과정에서 생기는 선의 부족상태라는 방법으로 악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플라톤의 ‘로고스’의 ‘말씀’과의 관계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터득하면서 그같은 깨달음에 이르게 한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로 돌아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O'meara는 어거스틴의 플로티누스적 회귀를 신약에서 말하는 탕자의 돌아옴에까지 비유하고 있고 어거스틴이 플로티누스의 책을 읽음으로써 전혀 다른 새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어거스틴의 젊은 시절의 철학적인 각성도 키케로의 「호르테시우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10 범주론」등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가 회심한 후에도 플라톤, 플로티누스 등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전 사상이나 교육의 중요성을 부인한 적이 없으며, 신앙과 이성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것들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이상과 같은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때문에 어거스틴의 회심이 성서적인 완전한 회심이 아니고 다만, 신플라톤주의로써 사상적 전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어거스틴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라는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그의 회심은 신플라톤주의적 유심론으로의 회심이며 무화과나무 아래의신비적 경험도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비록 어거스틴이 뒤에 기독교에 포용되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일생을 통하여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자로 남았으며 적어도 신플라톤주의적 사고 기조가 아직도 동화되지 않은 상태의 기독교와 더불어 마음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기독교를 플라톤적 사유 방법으로 이해 수용하였고, 이 수용의 전기를 통하여 성서적 이해에 삼투되어 들어갔으며 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여 기독교적으로 소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같은 결과로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고백록」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신플라톤적 사유체계를 서술하려는 것보다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었다는 점은 어거스틴의 신앙변천의 궁극적인 성격을 대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역사인식을 논할 때 제일 먼저 이해해야할 요소는 그의 ‘기억론’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능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기억이라고 보고 사물에 대한 인식도 기억이 매체를 통해 가능하며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는데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사유’는 기억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며 또, 그것이 인간의 행위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고 기억이 없으면 사유가 있을 수 없으며 사유가 없는 행위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현재의 기억 속에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 속에 없는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의지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기억을 배제한 역사인식은 있을 수 없으며 기억은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기억은 현재적이며 그래서 현재적 관점에서만 역사의 조명은 가능하다. 이 점에서 크로체가 역사를 ‘현재적 역사’라고한 것이다. Carr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던 것은 어거스틴에 그 연원(淵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고백록은 어거스틴 사상의 핵심이 모아진 것이며 이에 대한 이해 없이 어거스틴 사상의 이해란 불가능하다. 또한, 고백록은 단순한 신앙 고백의 차원을 넘어서는 조직적인 신학서이며 사상서이고 신의 본질, 선과 악의 문제, 시간관, 창조론 등을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그 자체로 매우 획기적인 주장이지만, 그것들은 또한 고대 헬라적 신관이나 역사, 우주관과 맥을 달라하는 또 다른 사상의 진원이 되었다.

  경험 없는 개념 정립이란 불가능하다고 보면 고백록은 어거스틴의 고뇌 어린 신앙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농축된 사상이라 할 수 있고, 고백록은 이 전 사상편력에 대한 정리이며 이후 저술들의 원칙이 된다할 수 있다. 그리고 고백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창조론, 시간론, 의지론등은 이미 기독교적 역사 인식의 틀이며 그가 제시한 이러한 개념들은 바로 중세 사상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할 수 있을 것이다.












참 고 문 헌




국내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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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precht. S.P.「서양철학사」. 김태길, 윤명로, 최명관 譯, 서울: 을유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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