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피조물을 창조주로부터 분리하는 감각을 상실했다. 인간론은 자연히 그 신론으로부터 나온다, 피조물로서 인간의 한계만 부인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다른 차이가 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운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지만,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죄라는 것 자체가 없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 운동은 뿌리에서부터 죄의식을 상실했다.
이전에는 죄의식이 모든 설교의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것이 사라졌다. 현 시대의 특징은 인간의 선함에 대한 최고의 확신이다. 오늘날의 종교 서적은 이 확신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인간의 투박한 외면을 뚫고 그 아래로 들어가 보면, 소망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할 만큼의 자기희생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선을 가지고 세상의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밖에서 오는 도움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무엇이 인간의 마음에서 죄의식을 제거했을까? 전쟁이 이 변화의 일정 부분을 담당했을 것이다. 전쟁 중에 우리의 관심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에 집중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죄를 망각하기 쉽다. 때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주목하는 것은 필요하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모든 형태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습관이 영속화되어 평화의 시기에도 그대로 지속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현대 국가의 집단주의와 연합하여 개인의 인격적 죄책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나 죄의식의 상실은 전쟁보다도 훨씬 깊다. 그것의 뿌리는 지난 75년 동안 도도하게 진행되어 온 영적인 흐름에 있다. 너무나 조용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식도 하기 전에 그 결과가 이루어졌다.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기독교를 대신하여 이교주의가 지배적인 인생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75년 전의 서구 문명은, 비록 일관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기독교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교가 지배적이 되었다.
이교주의란 현존하는 인간의 능력을 건강하고 조화롭고 즐겁게 발전시키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는 인생관이다. 기독교적인 이상과 매우 다르다. 이교주의는 아무 도움도 필요 없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낙관적이지만, 기독교는 절망한 마음의 종교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절망한 마음의 종교라는 말은, 기독교가 절망으로 귀결된다는 뜻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가슴을 치거나 지속적으로 “화로다, 나여”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이라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기독교란 단번에 결정적으로 죄를 직면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영원히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이교주의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의 이교주의 문제는 찬란한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썩어 버린 기초에 있다. 감춰야 할 무엇인가가 항상 있었다. 건축자의 열정은 죄라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함으로써만 유지되었다. 반면에 기독교는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다. 죄를 단번에 결정적으로 직면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것이 처리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죄가 처리된 다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능력을 즐겁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교만이 아니라 신성한 은혜 위에 세워지는 휴머니즘이다.
비록 기독교가 절망으로 끝나지는 않지만, 시작은 절망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은 죄의식과 함께 시작한다. 죄의식이 없다면 복음은 전부 무익한 이야기로 보일 것이다. 어떻게 죄의식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함으로써 분명히 성취될 수 있다. 법이 범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율법 전체를 선포해야 한다. 유럽에서 있었던 큰 전쟁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전투에서도 조용한 부분이 대개 가장 위험하기 마련이다. 사탄이 우리 삶 속으로 침투하는 것은 “작은 죄들”을 통해서다. 그러므로 전선의 모든 부분을 감시하여,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명령의 통일성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죄의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로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불과 유황을 내뿜는데, 그와 동시에 회중이 죄를 가볍게 여기면서 세상의 표준을 따라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의 일반 신도들도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의 법을 선포하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 비밀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죄의식을 일으키기에 결코 충분치 못하다. 교회의 상황을 관찰하면 할수록, 죄의 찔림은 성령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위대한 신비임을 더욱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과 행동으로 율법을 선포하는 것이 죄의 찔림을 경험하는 준비는 될 수 있지만, 찔림 그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람이 이것을 경험할 때, 곧 사람이 죄의 찔림을 받을 때 삶에 대한 그의 태도 전체가 변한다. 자기가 장님 같은 상태에 있었음을 알고 놀라게 되며, 이전에는 무익한 소리처럼 들리던 복음이 빛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성령이 없이 무엇을 이루려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 교회의 근본적인 실책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고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교회는 의인을 회개시키려고 바삐 노력한다. 현대의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교만을 버릴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려 노력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죄의 찔림을 피하도록 돕기 위해 애쓴다. 설교자는 강단에 올라가 성경을 펼친 다음,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매우 선합니다. 여러분은 사회의 안녕을 추구하는 모든 호소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데 성경 속에서- 특별히 예수의 생애 속에서- 우리는 여러분처럼 선한 사람들에게조차 선하게 보일 정도로 선한 어떤 것을 발견합니다.” 현대적인 설교란 이런 식이다. 매 주일마다 수천 개의 강단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헛된 일이다. 우리 주님도 의인에게 회개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 우리라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p 111)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06-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