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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 특강(16)-그리스도인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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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자인가? 아니면 자유롭지 못한 속박을 받는 자인가? 여러분은 자유자인가? 아니면 속박을 당하고 있는 종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칼빈이 말하는 믿음과 성화, 그리고 칭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칼빈은 이와 같은 논의를 한 뒤 이어 제3권 19장에서는“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데, 방금 질문한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답을 할 수 있겠는가? 자유자인가? 종인가? 혹시 “종교에 매여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한 누려야 할까? 이제 칼빈의 논의를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3.19 그리스도인의 자유
1.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는 필요하며, 이 자유에 포함된 세 부분 중에서 첫 부분은 갈라디아서 1-3장에 있다(3.19.1-3)
(1) 자유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3.19.1) 복음의 가르침을 요약하려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들의 자유”에 대한 설명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 자유는 특히 칭의에 따르는 것이며, 칭의의 힘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칼빈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앞에서(2.7.14-15, 3.11.17-18) 약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제 이곳에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하려고 한다.
특히 칼빈은 여기서 이 자유를 논하려고 하는 것은,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혼의 내적 평화를 모두 바르게 알 수 없다는 당위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자유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복종을 버리고 거리낌 없이 방탕 생활에 뛰어 들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는가 하면, 또한 어떤 자는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모든 절제와 질서와 분별을 폐기한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의 어리석음에 대응하기 위한 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3.19.2)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부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 이는 율법에 의한 의를 일체 잊어버리고 율법을 뛰어넘어 더욱 전진하는 것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란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무가치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만 율법이 무익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겠지만, 율법은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고 권고하기 때문이다.
(3) 갈라디아서에 있는 논증(3.19.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1-5)라고 바울사도가 편지한 바와 같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났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2. 둘째는, 율법의 강요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3.19.4-6)
(1) 율법의 강요에서 해방되는 것이 신자들의 진정한 순종을 확립한다(3.19.4)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신 6:5). 그러나 이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다른 감정과 생각을 없애버리며,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욕망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우리의 힘을 이 한 점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주의 길에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전진한 사람도 이 목표로부터는 아직 멀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준엄성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법은 모두 불완전을 정죄할 것이다.
(2) 강요(强要)에서 해방됨으로써 우리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된다(3.19.5) 율법의 표준으로 측정한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저주 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우리가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 그리고 하나님은 비록 그 자녀가 흠이 있고 불완전한 존재일지라도 그를 공경하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심으로 바로 알고 인정하는 자녀들에게는 아낌없이 그의 자비하심으로 대해 주실 것(말 3:17)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3) 은혜로 인하여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남은 죄를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3.19.6) 바울 사도는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롬 6:14),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자라고 하더라도 아직도 정욕이 가득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신자들은 아직 죄가 근절됐다든지 또는 의가 자기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죄를 언제까지나 노여워하시는 듯이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은혜로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무해 무익한 일들”로부터의 자유; 로마서에 의한 증명(3.19.7-9)
(1)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셋째부분(3.19.7)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셋째부분은 “무해 무익한” 외부적인 사물에 관한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사물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교적 의무에도 매여 있지 않고, 그런 사물을 때로 이용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이용하지 않는 것은 무방한 일이라 한다. 문제는 양심은 한 번 함정에 빠지면 멀고 복잡한 미로에 들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칼빈은 소위 말하는 신앙양심(하나님이 원하시는가 혹은 하나님의 뜻인가?)을 하나의 통제원리로 언급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선물을 그의 목적을 위해서 쓰는 이유(3.19.8) 바울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라고 한다(롬 14:14, 23).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반대되는 여러 가지 일을 강요에 못 이겨 할 때에, 큰 두려움으로 마음이 압도된다. 이 경우 진정한 감사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자유가 향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따라 아무 양심의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깨닫게 될 것이라 칼빈은 말한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탐식(貪食)과 사치에 악용하지 말라(3.19.9)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임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이 자유의 힘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떠는 양심을 진정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의 정욕대로 악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런 자기의 욕망을 변호하는 구실로 삼는 자들이나, 자유는 사람들 앞에서 쓰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면서, 약한 형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를 행사하는 자들은 모두 자유를 왜곡되게 해석하는 것이다.
칼빈은 확실히 상아와 금과 재산은 하나님이 만드신 좋은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로 쓰도록 허락된 것, 아니 지정된 것이다. 우리는 웃지 말라거나, 음악을 즐기지 말라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거나 하는 명령을 받은 일이 없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물질이 풍족하며, 열락과 쾌락 속에서 뒹굴며, 배불리 먹으며, 현재의 쾌락으로 머리와 정신이 몽롱하며, 항상 새로운 쾌락을 갈구하는 것- 이런 짓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맑은 양심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깨끗이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버려야 하며, 무절제한 낭비를 그쳐야 하며, 허영과 교만을 버려야 한다.
옷은 초라해도 마음이 고귀한 사람이 많으며, 자색 옷과 비단옷을 입었어도 마음이 단순하고 겸비한 예도 있다. 그러므로 생활이 빈곤하거나 보통이거나 부유하거나간에, 사람은 각각 그 처지대로 살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생활을 위해 공급해 주신 것이요 사치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법칙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자족할 줄 알며, 낮아질 줄도 알고 높아질 줄도 알며,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배부르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모든 형편에 대처할 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빌 4:11-12).
4.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약한 형제들과의 관계; 또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3.19.10-13)
(1)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해하는 것은 불가하다(3.19.10)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자유가 안전하지 않다는 듯이, 무분별하고 어리석게 그들의 자유를 경솔하게 행사함으로써 그들의 행동으로 약한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심히 많다. 따라서 우리는 약한 형제들을 참으며,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해를 줄 경솔한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넘어지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3.19.11) 바울은 “걸리게 한다”(걸림을 준다)는 것과 “걸린다”(걸림을 받는다)는 것을 구별한다. 첫째 종류의 걸림에서 약한 사람들만이 넘어진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악한 성품과 바리새적 교만을 가진 사람들이 넘어진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하나는 약자의 걸림이요, 또 하나는 바리새적 걸림이라 부른다.
우리가 자유를 얻는 것은 우리의 약한 이웃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니 사랑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그들의 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가 충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다음에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한 자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함은 물론 바리새적인 걸림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들과 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마 15:14) 그대로 무시하여 버려두라고 한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르게 행사하며 바르게 포기하는 데 대하여(3.19.12)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서는 할례를 하라고 하면서도(고전 9:19-20) 헬라인인 디도에게는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갈 2:3). 이러한 바울의 태도 속에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라는, 이웃에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지만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명백한 규칙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4) 이웃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3.19.13) 칼빈은 위와 같이 이웃을 위한 명백한 원칙을 세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손톱만큼도 벗어말 자유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용인하시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떤 구실 하에서도 불가하다는 점에서, 이웃에 대한 덕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5. 전통과 정부에 대한 자유와 양심의 관계(3.19.14-16)
(1) 인간의 모든 법에 대하여 양심은 자유롭다(3.19.14)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의 특권을 받은 신자들은 모든 인간의 권한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결론을 맺는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양심이 법과 규칙에 얽매인다면(갈 5:1, 4) 양심은 확실히 자유를 잃는 것이라 말했다.
(2) 두 개의 나라(3.19.15) 양심의 자유문제는 분명히 하기 위하여,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 하나는 영적인 통치로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통치로서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또 시민으로서 사람 사이에 유지해야 할 여러 가지를 배운다. 좀 더 이 둘을 비교한다면, 전자는 영혼의 생활과 마음속에 있는 영적인 나라에 속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현세생활에 관한 것, 즉 의식뿐만이 아니라 거룩하고 고결하고 절제 있게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으로 외면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정치적인 나라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이 둘은 항상 각각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면서, 한 쪽을 고찰할 때에는 다른 쪽은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칼빈은 영적 자유에 대한 복음의 교훈을 사회질서에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한 이유로 든다. 다만 영적인 자유가 무조건 외부적인 세속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상세는 그의 정부론에서 언급할 것임). 여기에 다소 딜레마가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칼빈은 양심의 개념 정립을 다음과 같이 한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사람이 마음과 이해력으로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며, 그 사물을 “안다”고 하는 것이 “지식”이라는 말의 유래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각이 사람에게 결합된 증인같이,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할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할 때에, 이 감각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양심은 사람이 마음속에 아는 것을 숨기지 못하게 하며, 도리어 그것을 추궁해서 드디어 유죄를 선언하기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라 본다. 그래서 성경은 베드로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을(벧전 3:21) 마음의 평화와 동일시했다.
(3) 양심의 구속과 자유(3.19.16) 칼빈은 행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 맑은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성실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 한 것이다(딤전 1:5).
그렇다면 “어떤 법이 양심을 구속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칼빈에 따르면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전연 고려함 없이 법이 그 사람을 구속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무절제하게 사는 사람은 형제들에게 나쁜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죄책으로 그 양심이 묶여 있다. 나아가 우상에 바쳤던 고기에 대해서,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고전 10:28-29)라는 바울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해무익한 일들에 대해서는 남을 넘어지게 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또한 그 양심은 여전히 자유를 유지해야 한다. 이럴 때 법은 외면적인 행동을 구속하면서도 양심의 자유는 침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법과 양심을 서로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면서도, 이 양심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 결국은 영적인 나라의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적 나라의 사회생활의 법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이론은 세상의 법보다는 영적인 나라의 법을 더 우위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양심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 또는 행동이라면, 결국 외면적인 행동을 구속하는 법도 당연히 위반하게 되는 꼴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특강 16 정리]
1. 제3부 19장 요약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9장에서 자유를 논하고 있는데, 그 목적은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혼의 내적 평화를 모두 바르게 알 수 없다는 당위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자유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복종을 버리고 거리낌 없이 방탕 생활에 뛰어 들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는가 하면, 또한 어떤 자는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모든 절제와 질서와 분별을 폐기한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의 어리석음에 대응하기 위한 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유와 관련하여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고 있는데, 첫째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양심의 자유를, 그리고 마지막은“무해 무익한 일들”(사소한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언급한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해서 율법이 무익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리로 또한 양심의 자유를 언급한다. 그리고 나아가 무익한 또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자유를 언급한다. 그런데 문제는 양심은 한 번 함정에 빠지면 멀고 복잡한 미로에 들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칼빈은 소위 말하는 신앙양심(하나님이 원하시는가 혹은 하나님의 뜻인가?)을 하나의 통제원리로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약한 형제들과의 관계(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자족할 줄 알며, 낮아질 줄도 알고 높아질 줄도 알며,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배부르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모든 형편에 대처할 줄을 알아야”(빌 4:11-12)하며,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는 성경 본문을 그 원칙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칼빈은 전통과 정부에 대한 자유와 양심의 관계와 관련하여,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면서 이 둘은 항상 각각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그는 행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면서, 맑은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성실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양심이란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각이 사람에게 결합된 증인같이,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할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할 때에, 이 감각을 “양심”이라 부른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그는 무해무익한 일들에 대해서는 남을 넘어지게 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또한 그 양심은 여전히 자유를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럴 때에만 법은 외면적인 행동을 구속하면서도 양심의 자유는 침해하지 않게 된다고 본다.
2. 법과 자유(칼빈의 법과 종교와의 관계론)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은 ‘오직 신앙’(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및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며, 이것을 기초로 한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들 사상들 간에는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전자는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구원이 각인의 신앙만에 의하여 이루어진 다는 점, 특히 로마서 제3장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기록하고 있어, 결국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의 교리에 근거하였다. 그리고 만인제사장주의는 위와 같은 이신칭의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은 교회의 조직의 개입 없이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양자의 이론은 결국 법사상에 만인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자라는 점을 시사한 것이며, 결국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근대법의 중요한 사상을 기초하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칼빈에게 이어져 갔는데,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이 모든 덕의 아버지”라고 보았던 바와 같이, 그 역시 인간의 최대의 덕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 법은 복음과 바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특히 칼빈은 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용법을 제시하였다.
첫째, 제1용법은 시민적 용법이다. 즉 인간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민사회에 있어 법이 없다면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행동하거나 자의적인 행동을 일삼게 됨으로써, 마치 홉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자연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칼빈의 이러한 제1용법은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막론하고 ― 시민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바른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 지켜야 할 정치적 사회윤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1용법에서는 굳이 법신학적 의미를 드러낼 이유가 없다. 통상 비기독교적 시각에서 법을 이해하는 경우, 이러한 제1용법에 그치는 것이 통례이다.
둘째, 법의 제2용법은 루터가 ‘신학적 용법’이라 부른 것으로, ‘죄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는 법’을 말한다.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율법은 인간의 죄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정당하지 못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갈라디아서 제3장 24절은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법(율법)은 인간의 무력함으로 인하여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여 다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긍휼만을 갈구하게 하도록 하는 방향타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행동만으로 볼 때는 늘 하나님의 진노에 떨어지게 되고 양심의 끊임없는 저주와 가책에 휩싸이게 될 것인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복음이 대안이라는 점을 루터 이래로 칼빈 등이 제시하고 있는 것도 위의 제2의 용법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의 복음은, 법(율법)이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의 사랑의 법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Felix Culpa!’라고 하였으며, 브루너(E.Bruner)는 “절망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힘입은 영혼만이 자신의 노력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자기의 설 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셋째, 법의 제3용법은 루터의 경우에는 제2용법에 흡수됨으로써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칼빈에 의하여 구체화 된 것이다. 칼빈은 제3용법을 신학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관계에 중요한 개념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제3용법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의 안내자로서의 기본법’을 말한다. 미국의 프린스턴 도웨이(E.Dowey) 교수는 “법의 제3용법은 기독교공동체와 시민사회와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가교(架橋)이다”고 보았다. 특히 사회가 급격히 변천함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복음을 통하여 새로운 접점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제3의 용법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3의 용법이 말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루터에 의하면 복음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킴으로 인하여 기독교인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불필요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칼빈은 그와 달리 믿는 자에게도 계속적으로 법의 필요성과 존재타당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말하자면 믿는 자에게도 율법은 진리를 가르치고 견책하고 교정하고 모든 선행에로 인간을 이끌어서 인간형성에 필수적인 것이 된다고 본다. 물론 칼빈은 어느 누구보다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전적인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라는 점을 강조한 신학자이다. 그러한 점에서 율법주의를 여지없이 규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우리의 생활에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칼빈은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본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삶에 있어 더욱 성화를 위해서는 법(율법)을 버려서는 안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 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형성(성화)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길잡이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이라 보았다. 그래서 그는 법은 ‘사랑의 법’으로 이해하였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자신을 속박하고 양심을 혼란케 하며 저주하는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통하여 부르시고 일하시며 이러한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잘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십계명의 부정적 형식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법이 들어 있다는 점을 누누이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십계명의 전반부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무의 법으로, 후반부는 인간 간에 사랑의 법을 규정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법의 제3용법은 단순히 죄를 깨우치고 죄를 정죄하는 것에 한정되는 소극적인 역할이 아니라, 모든 죄를 다스리고 모든 창조물과 하나님과의 사랑스런 관계를 회복케 하는 적극적으로 역사하는 법이라 본다. 그래서 브루너는 이 제3용법을 설명함에 있어 법은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2대 계명(二大戒命)으로 집약할 수 있는, 말하자면 모든 법은 사랑을 명제로 한 명령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칼빈의 논의를 통하여 그는 사실상 법과 양심을 서로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면서도, 이 양심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 결국은 영적인 나라의 하나님의 법(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을 위반하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적 나라의 사회생활의 법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법의 제1용법과 제2용법을 넘어 제3용법에 들어가면 모든 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법)으로 통합되게 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외적 행위만에 그치는 세상의 법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인 영적인 나라의 법을 더 우위에 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세상의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면 하나님의 법은 도덕의 최대한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며, 나아가 우리에게 주어진 영혼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 또는 행동이라면, 결국 외면적인 행동을 구속하는 법 기타 사사로운 문제에서 조차도 바르게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구모영 은퇴장로, 2014년 1월 26일 오후 예배 특강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