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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I. 시작하며 II. 세대주의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1.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 2. 세대주의 종말론의 내용과 신학 III.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전개: 세대주의 종말론의 확산 1. 미국 개신교 내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의 확산 2.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 신학 3.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1) 찰스 브릭스 사건 2) 포스딕 사건 IV. 근본주의 신학과 내한 선교사 1. 무디와 세대주의 종말론 2. 무디와 학생자원운동 (SVM), 성경학교 3.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 4. 마펫의 신학과 초기 한국장로교 형성 V. 마치면서
참고문헌 |
I. 시작하며
세계선교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한국교회는 현재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그 위기는 양적성장의 쇠퇴와 더불어 신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바라보며 한국교회 신학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러 신학자들이 복음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을 중심에 둔 한국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현 한국교회의 신학을 진단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은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한국교회의 신학은 대체로 보수신학,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 신학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을 생각함에 있어 처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 많은 접근들이 있었다. 교회사가 민경배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1903-1929) 브라운을 인용하여 "전형적인 선교사는 청교도형의 사람이었다" 라고 하였고 류대영은 내한 선교사들을 미국 중산층이었고 한국에서도 그 생활을 유지하려 한 것으로 행태를 분석하였지만 신학적 접근은 충분하지 않았다.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최근 19세기-20세기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연장선 상에서 그 신학을 접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연구경향에 기초하여 이 글은 한국교회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신학의 뿌리를 성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내한 선교사들 신학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영향 하에 있었고 세대주의 종말론은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선교사들의 신학을 살펴보기 위해 이 글에서는 먼저 세대주의 종말론에 관해 살펴보고 그것이 19세기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개신교 특히 장로교 안에서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중심역할을 감당하는 과정을 성찰하고 나아가 이 영향 하에 한국에 온 내한선교사들의 신학을 접근해보고자 한다.
II. 세대주의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세대주의 종말론의 정확한 명칭은 세대주의 전천년설 (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전에 존재했던 기독교의 종말론을 간단히 살펴보아야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 이전에 나타난 기독교의 종말론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무천년설(amillennialism), 그리고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이다.
1.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
세대주의 종말론 이전에 나타난 종말론중 가장 대중적이었던 것은 전천년설이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1-6절에 나오는 천년왕국(천 년간 그리스도가 성도와 더불어 통치)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역사적으로 이 땅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예수재림시 이 땅에 배교, 기근, 지진, 전쟁등이 일어나고 (비관적 세계관, pessimistic worldview) 현 정치질서가(로마제국) 무너지며 박해당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예수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천 년간 통치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전천년설은 박해받던 초기 기독교인에게 소망을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의 기독교 수용이후 로마제국에서 통치의 한 축이 된 기독교가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나라 도래를 기대하는 전천년설은 존립하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신학을 요구하였고 로마제국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신학자인 어거스틴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그 결과는 무천년설이었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 문자적, 역사적으로 이 땅위에 실현되는 천 년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으로 어거스틴은 교회의 번영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사탄이 천 년간 갇힌다는 계시록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현재 곧 교회의 발전이 영적 천년의 기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종말론은 현 정치질서에 대한 신학적 지지를 담고 있다. 313년 이후 기독교는 이 두 개의 종말론이 경쟁하였고 A.D. 431년 에베소 회의는 전천년설을 정죄하고 어거스틴의 무천년설을 교회의 공식적 입장으로 채택하였으며 이후 전천년설은 소종파 집단에서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한 칼빈 역시 무천년설을 지지 하였다. 한편 근대에 들어와 후천년설은 18세기 영국의 신학자 다니엘 휘트비(Daniel Whitby, 1638-1726)가 선구자였고 이를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미국에 소개하였는데 그것은 천년왕국이 끝나는 시점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한다는 내용으로 천년왕국 이전에 과학, 기술의 발전을 수반한 기독교의 번성이 이루어진다는 낙관적인 세계관 (optimistic worldview)을 특징으로 하고있다. 19세기 미국개신교는 세대주의 전천년론이 출현하는 1870년대 이전에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이 서로 우위를 다투고 있었는데 부흥운동이나 번영의 시기에는 후천년설이 그리고 지진,전쟁등 사회가 불안한 시기에는 전천년설이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전천년설은 1843년 밀러의 재림예언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그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19세기 후반 특히 남북전쟁 이후에 영국에서 전래되어 개신교 특히 장로교와 침례교에 영향을 미쳤다. 근본주의는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제 세대주의 종말론의 내용과 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세대주의 종말론의 내용과 신학
세대주의 종말론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플리머스 형제단의 지도자인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의 신학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그는 문자적 성서해석에 기초하여 인간의 역사를 7세대(dispensation)로 구분하고 각 세대마다 각기 다른 구원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두셨다고 가르쳤다. 그 7개의 세대는 무흠세대(Innocence,에덴동산), 양심세대(Conscience, 아담부터 노아까지), 인간치리세대(Human Government, 노아부터 아브라함), 약속세대(Promise, 아브라함부터 모세), 율법세대(Law, 모세부터 그리스도), 은혜세대(Grace, 그리스도부터 재림까지), 그리고 천년왕국세대(Millennium, 재림부터 심판)을 말한다. 다비에 따르면 각 세대에 살고있던 인간들은 주어진 구원방법을 이루는데 실패하여 끝나고 다음세대로 이행한다. 즉 첫 번세대인 무흠세대에서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주어진 구원은 동산을 잘 지키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으나 실패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됨으로 끝이나고 다음세대로 이행한다. 또 현재는 은혜세대로 구원의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실패한 사람들은 칠년대환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세대주의는 전천년설처럼 계시록 20장의 천년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문자적 성서해석을 근간으로 하고있으며 재림이전에 지진, 전쟁등 재앙이 일어난다고 보는 비관적 세계관(pessimistic worldview)을 전천년설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세대주의를 세대주의 전천년설 (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이라 부른다. 하지만 전천년설과 다른 점은 그리스도 재림을 2단계로 설명하며 첫 재림시 (공중재림) 교회 즉 진실되게 믿는자들의 휴거가 (the rapture of the church)가 일어나고 두 번째 재림(지상재림)때 까지 7년간의 환난(tribulation)이 지상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각 세대는 인간이 주어진 구원의 방식을 이루지 못하므로 실패로 끝나게 되기 때문에 6번째 세대인 은혜세대에서 성공한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믿는 자들은 공중재림시 휴거하고 실패한 사람들은 7년 대환란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전천년설 지지자가 세대주의자는 아니더라도 모든 세대주의자들은 전천년론주의자이다. 이제 세대주의 종말론이 19세기말-20세기초 미국 개신교 특히 장로교 안에서 어떻게 확산되고 발전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III.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전개: 세대주의 종말론의 확산
앞서 살펴본 것처럼 1843년 밀러의 재림예언이 실패로 끝난 후 전천년설은 약화되고 후천년설이 지지를 얻다 1861-64년에 걸쳐 남북전쟁이라는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전천년설적인 해석이 필요한 시기에 세대주의 종말론이 창시자인 다비 (J.N.Darby)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다비는 1862년부터 1867년까지 미국에 거의 절반 가량을 머무르면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르쳤다. 전천년설이 밀러의 예언 실패로 세력이 약화되고 인간의 이성과 진보에 기초한 낙관적 세계관인 후천년설이 남북전쟁(1861-64)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던 시기에 다비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많은 지지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많은 장로교와 침례교인들이 이 종말론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제 세대주의 종말론의 확산과 근본주의 신학운동으로의 전환을 살펴보자.
1. 미국 개신교내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의 확산
다비를 추종하는 세대주의자들은 1870년대부터 정기적으로 여름에 약 2주간정도 하계 성경모임(Bible Conference)을 열고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르쳤다. 이 모임은 매년 여름 1-2주간 특히 1883년에서 1897년에 걸쳐 나이애가라 호수에서 모여서 그 나이애라라 모임 (Niagara Conference)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이 모임의 지도자들을 소위 "나이애가라 그룹(Niagara Group)”이라고 부른다. 나이애가라 모임은 존 다비의 세대주의를 전파하는 장이 되었다. 세인트루이스의 장로교 목사인 James H.Brook (1830-97)은 Darby가 주장한 교회의 휴거를 포함한 세대주의 종말론을 받아들였고 대부분의 나이애가라 모임의 강사나 리더들 역시 재림에 관한 다비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하계모임이외에도 나이애가라 그룹은 세대주의 종말론의 확산을 목적으로 일련의 좀 더 규모가 큰 성경예언대회를(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를 개최하였는데 다음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시기와 장소에 주목하여보면 이 운동은 적어도 4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된 운동임을 알 수 있다.
1878년 |
1회 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 New York |
1886년 |
2회 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 Chicago |
1895년 |
3회 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 Allegheny (펜실베니아주) |
1901년 |
4회 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 Boston |
1914년 |
5회 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 Chicago |
1918년 |
6회 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 Philadelphia and New York |
출처: Timothy P. Weber, Living in the Shadow of the Second Coming: American Premillennialism 1875-1982 (Grand Rapids, Michigan: The Zondervan Corporation, 1983), 28.
1878년 1회 뉴욕에서 열린 성경예언대회에서 이 그룹은 14개조항으로 이루어진 나이애가라 신조(Niagara Creed)를 작성하고 채택하였다. 이 중 1항은 성서에 관한 것으로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으로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것 (축자영감)을 강조하였고 또 인간의 전적 타락(3항) 예수의 재림 및 심판(13항) 그리고 비관적인 세계관(14항)을 열거하고 있다. 이 대회 35명의 발표자중 16명이 장로교인이었다. 이어 1895 제 3회 성경예언대회에서는 14개 신조를 축약하여 5개항으로 채택하는데 이것이 훗날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핵심이 되는 소위 근본주의 5개조항 (Five Points)이다. 그것은 (1)성경의 무오성(inerrancy of the Scriptures), (2)그리스도의 신성(the deity of Christ), (3)동정녀 탄생(virgin birth), (4)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substitutionary atonement of Christ), (5)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재림(physical resurrection and coming bodily return to earth) 등이다.
한편 1909년에는 세대주의자인 스코필드 박사 (C.I.Scofield)가 주 편집자가 되어 세대주의 종말론을 전파하기 위한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Gray, Pierson, Gaebelein등 당대의 저명한 세대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이어 1910년부터 1915년에 걸쳐 석유재벌 Lyman Stewart의 후원으로 “근본진리들-진리에 대한 선언” (The Fundamentals: A Testimony to the Truth)"이라는 총 12권으로 된 책을 300만부 발행하여 미 전역의 신학교및 교회에 무료로 공급하였다. 여기서는 근본주의의 기초가 되는 축자영감설을 옹호하고 비평적 성서읽기와 진화론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다수 실리게 되었고 집필자중 31명이 세대주의자였다. 이제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 신학과의 관계및 특징을 살펴보자.
2.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의 기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 세대주의 종말론은 근본주의 신학형성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 기원은 19세기 중후반 비평적 성서읽기 및 진화론등으로 제기된 성서및 기독교 전통에 대한 도전에 맞선 개신교의 대응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현대적 도전에 대응했던 방식은 2가지 인데 근대과학의 발견을 수용하여 현대사회에 적응을 모색했던 그룹과 전통적인 신앙을 사수하고 맞서 대응해야 한다는 그룹이 그것이었다. 전자를 현대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 (Modernists or Liberals)라 불렀고 후자를 보수주의자 (Conservatives)라 하였다.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세대주의 종말론을 추종하는 그룹은 당연히 후자에 속하게 되었고 이 그룹이 근본주의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근본주의 신학의 출발점을 언제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미국 복음주의 연구자들간에 일치된 견해는 발견되지 않는다.
먼저 근본주의를 연구했던 콜 (Stewart G.Cole)은 12권으로 된 근본진리들 (The Fundamentals)이 출간된 1910년 이후부터를 근본주의 신학의 기원으로 보고있다. 콜은 세대주의 종말론이 근본주의 신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입장이다. 근본주의를 세대주의 종말론운동의 확산으로 이해한 샌딘 (Ernest R. Sandeen)은 The Fundamentals를 보수주의자들과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의 동맹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기고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 근본주의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그에게 있어 근본주의 신학운동은 세대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한 것이었다. 마스든 (George M. Marsden)은 샌딘이 근본주의 운동에 있어 지나치게 세대주의자들의 역할을 강조한 점을 비판하며 근본주의 운동은 여러 저항운동의 결합이었고(현대주의에 대한) 세대주의는 그중 하나였다고 말하지만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세대주의 종말론을 추종하는 그룹이 근본주의 신학에 있어서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고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들은 또한 미국 장로교 내에서 주변적인 그룹이 아니고 총회장을 배출할 정도의 세력을 가진 당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 신학을 살펴보려고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를 대하는데 있어 축자영감설 (verbally inspired Bible)을 따르는데 그것은 다비의 세대주의가(세대구분이)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축자영감설(축은 좇을 逐, 축록-逐鹿-은 사슴을 좇다라는 뜻 즉 문자 하나하나를 따라서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의미)에 기초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실이 역사적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성서에 나타난 이성으로 이해가 안되는 기록에 관해 합리적 해석을 시도하는 비평적 성서읽기나 창세기에 위협이 되는 진화론등을 반대한다. 그 결과 이성적 눈으로 성서를 읽는 것을 반대하고 문자 그대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어야 한다는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으로 나아가게 된다. 근본주의 5개조항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항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5개조항을 인정하지 않는 그룹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자신들의 힘이 우월할 때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곤 하였다. 그래서 마스든은 근본주의를 전투적인 반현대주의 개신교 (militantly anti-modernist Protestant)라고 정의하였다.
19세기 중반이후 제기된 비평적 성서읽기와 진화론등의 도전으로 인해 미국 장로교 내에서 현대주의자들과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을 주축으로 한 근본주의자들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이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Fundamentalist Modernist Controversy)이었다. 이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을 살펴보기로 한다.
3.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미국 장로교 내에서 근본주의 진영과 현대주의 진영의 갈등은 진화론과 비평적 성서읽기가 미국에 소개된 19세기 중후반부터 태동하고 있었으나 외적으로는 1910년부터 표면화되었다. 대개 1920년대부터 1930년대를 양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여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기(Fundamentalist-Modernist Controversy)라 부른다.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양 진영간의 대립에는 신학적으로 진화론과 비평적 성서읽기에 대한 입장차이가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는 19세기 말부터 나타난 두 진영간의 갈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1)찰스 브릭스 사건
1891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가 된 찰스 브릭스가 (Charles Briggs, 1841-1913) 성서신학교수 취임연설에서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을 옹호하며 모세는 모세오경을 쓰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에스라는 에스라의 저자가 아니며, 다윗은 시편의 일부를 썼을 뿐이고 이사야는 이사야서의 절반도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어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그 바탕위에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무오류성도 거부하였다. 1892년 포틀랜드에서 열린 미국 장로교 총회는 유명한 포틀랜드 선언 (Portland Delieverance)을 채택하였는데 그것은 성서는 오류가 없고 이를 믿지 않는 목사는 물러나야함을 천명하였다. 뉴욕노회는 그를 정죄하지 않았으나 1893년 총회는 브릭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축출하였다. 비슷한 시기인 1892년 Lane Theological Seminary 구약학 교수인 스미스 (Henry Smith)가 성서무오설을 부정하다가 신시내티 노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또 1909년 3명의 뉴욕노회 소속 목사후보생들이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갈등에 직면하여 1910년 총회는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필요한 (necessary and essential to the Christian faith) 소위 Five Fundamentals를 제정하여 가결하였는데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근본주의 5개조항 (Five Points)와 거의 같다. 한편 양 진영은 포스딕 사건을 통하여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2) 포스딕 사건
1922년 5월 21일 주일 아침 뉴욕 제일 장로교회에서 현대주의자 포스딕 (Harry Emerson Fosdick, 1878-1969)이 “근본주의자들은 승리할 것인가?”(Shall the Fundamentalists Win?)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자유주의자 곧 현대주의자란 역사, 과학, 그리고 종교에서 발견된 새로운 지식을 옛 신앙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이라고 설명하였다.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발견과 종교적 대화에 문을 걸어 잠그고 전혀 관용을 보이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정의하였다. 이어 근대과학의 입장에 서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혹은 문자 그대로의 재림을 단순하게 믿기란 불가능하다고 하며 여러 다른 해석을 교회가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근본주의 진영은 반격에 나서 필라델피아 장로교 목사인 매카트니 (Clarence Macartney, 1878-1957)가 “불신앙은 승리할 것인가?”(Shall the Unbelief Win?)란 제목의 설교에서 포스딕의 견해는 장로교의 입장과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양자는 양립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신앙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의무라고 역설하였다. 이어 “동정녀 탄생은 신화나 전설적인 이야기가 결코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되고 권위있는 말씀이다… 자유주의 운동은 교회를 서서히 세속화시키고 있다”라고 현대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나아가 1916년부터 근본주의자들의 지도자로 부상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메이첸은 포스딕의 설교를 비교리적인 기독교로 정죄하고 1923년 출간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라는 저서에서 자유주의 (현대주의)가 기독교의 여러요소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본질적인 문제에서 기독교에서 이탈된 비기독교적이고 비과학적이라 비판하고 해결책은 기독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기간 양 진영간의 주된 쟁점은 축자영감설과 고등비평, 진화론등에 관한 것이었고 1910년에 이어 1916년과 1923년의 미국장로교 총회에서 다시 5개 근본진리(Five Fundamentals)들을 채택하여 총회 내에서 근본주의 세력이 우세함을 보여주었다. 근본주의는 1919년 세계근본주의연맹을 창설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진화론 교육금지법등을 통과시켜 성서의 기록이 오류가 없음을 증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1925년 미국 테네시주 공립학교에서 이를 무시하고 진화론을 가르친 스콥스 (John Scopes)란 교사의 처벌을 두고 벌어진 유명한 Scopes 재판 (일명 원숭이재판-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에서 비롯된 표현)을 기점으로 근본주의 그룹은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미국 장로교는 1925년 Scopes 재판 이후 1927년 5개 근본진리들을 채택한 이전의 결정을 철회한다. 1929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근본주의자들이 나와서 메이첸 주도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결국 미국 장로교 내에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은 이렇게 일단락 되고 근본주의 내의 한 그룹은 1930년대 이후 다시 신복음주의 (Neo-evangelicalism) 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한다.
지금까지 미국 장로교내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확산과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그리고 스콥스 재판을 기점으로 한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미국 장로교 내에서 근본주의 신학의 형성-발전-쇠락의 과정은 한국 선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내한 선교사들은 이런 신학적 소용돌이 속에서 특히 근본주의 신학운동이 우위를 점했던 시기에 오게 된 것이다. 이제 근본주의 신학이 내한 선교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고찰해보자.
IV. 근본주의 신학과 내한 선교사
내한 선교사들을 통한 근본주의의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과 관계가 깊었던 부흥사 무디 (Dwight L. Moody, 1837-1899)와 그의 영향 하에 있었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디와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무디가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근본주의 신학을 추종하였다면 그 영향 하에 있었던 내한 선교사들은 근본주의 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제 무디의 신학과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을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자.
1. 무디와 세대주의 종말론
무디는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근본주의 신학을 추구하였는가? 세대주의 연구가인 샌딘은 무디가 적어도 1877년경에 세대주의 종말론을 신봉하였다고 본다. 그 근거로 첫째이 때를 기점으로 무디의 설교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대주의의 특징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 휴거, 임박한 종말, 천년왕국의 도래 그리고 비관적 세계관에 기초한 이 세상과의 단절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1877년 무디는 그의 설교 "그리스도의 재림 (The Second Coming of Christ)"에서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천년왕국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구름 위로 데리고 가는 것 [휴거]은 마지막 심판과는 다른 것입니다...나는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비관적 세계관]...하지만 주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성경은 나에게 말합니다... 세상은 더욱 악해지고 결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날이 올 것입니다."둘째 무디는 세대주의자들의 1886년 2차 성경예언대회에 축하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는데 무디의 동역자 가운데는 세대주의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근본주의 연구자인 배덕만은 대중적 복음주의자인 무디를 설득해냄으로써 무디가 주도했던 부흥운동, 광범위한 인맥, 그리고 풍부한 재정을 동원하여 세대주의 종말론이 미국 개신교 내에서 폭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무디의 신학이 내한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통로는 그가 주도했던 학생자원운동과 성경학교 (Bible Institute)였다.
2. 무디와 학생자원운동 (SVM), 성경학교
세계선교역사에 있어서 학생자원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무디는 1880년부터 헐몬산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계성경학교를 운영해왔는데 강사들 가운데 세대주의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던 중 1886년 하계성경학교에서 모인 251명의 대학생중 100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자원하며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출범하게 된다. 이 때 주된 역할을 한 사람은 널리 알려진 세대주의자인 피어선(Arthur T.Pierson)이었다. 이 SVM은 각 학교를 다니면서 해외선교사 모집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SVM 모토 “이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하자”(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는 이 선교운동이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세대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1886년부터 이 운동이 약화되던 1920년대까지 대략 8천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SVM을 통하여 해외로 나갔다. SVM은 대략 4년주기로 선교사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아래와 같다.
연도 |
개최 도시 |
이 대회까지 SVM을 통해 해외로 나간 선교사 수 (누계) |
1891 |
클리블랜드 (Cleveland) |
320명 |
1894 |
디트로이트 (Detroit) |
630명 |
1898 |
클리블랜드 (Cleveland) |
1,173명 |
1902 |
토론토 (Toronto) |
1,953명 |
1906 |
내쉬빌 (Nashville) |
2,953명 |
1910 |
로테스터 (Rochester) |
4,346명 |
1914 |
캔자스 시티 (Kansas City) |
5,938명 |
1920 |
드 모인 (Des Moines) |
8,140명 |
출처:이 통계는 아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다.
John R. Mott, Address of Papers of J.R. Mott. SVM (NewYork: Association Press, 1946),
SVM, Worldwide Evangelization,1902 Toronto Report.
이 표에서 보는 것처럼 이 대회는 1920년을 마지막으로 SVM이 퇴조하여 막을 내리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근본주의 신학운동이 1925년 이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과 그 신학에 기초한 SVM이 약화되는 것과의 상관관계를 통해서도 이 운동이 세대주의종말론에 기초한 근본주의 신학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있다.
한편 무디는 성경학교를 (Bible Institute)세워 단기간 성경중심의 교육을 시킨 후에 해외선교사로 보내는 사역을 하였는데 세대주의에 기초한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교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889년 무디는 시카고에 무디성경학교 (Moody Bible Institute)를 세우고 세대주의자인 토레이 (Reuben A. Torrey)에게 운영을 맡겼고 비슷한 시기에 세대주의자들이 무디를 따라 성경학교를 개설하였다. 1889년부터 1923년까지 1,143명의 해외선교사가 무디성경학교를 통해 나갔고 이중 31명은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와서 일했다.
지금까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되어 20세기 초반 형성된 근본주의 신학의 역사및 특성을 살펴보았다. 세대주의 종말론을 중심에 둔 근본주의 신학은 그 전제인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성서의 무오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는 진화론및 비평적 성서읽기에 맞서는 보수진영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성서에 대한 이성적 접근을 차단하는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그리고 5개 근본진리들을 내세워 이를 수용하지않는 기독교인들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등을 특징으로 한다. 나아가 1920년대에 이르러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막바지에 이르게되면 현대주의자들에 대한 폭력적 태도를 보였다. 또한 비관적 세계관 (세대주의 전천년론자들이 주축)에 의거하여 세상에 대한 빛과 소금의 역할보다는 분리를 강조하며 오직 영혼구원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 가운데 미국 선교사들이 다수를 점하였는데 이들은 근본주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기에 주로 입국하였다. 이제 내한선교사들의 신학을 근본주의와 관련하여 살펴보고 나아가 그들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성찰하고자 한다.
3.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
여기서는 내한선교사들과 근본주의 신학간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해 내한 미국선교사들이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입국한 여러 가지 증거들을 분석하고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력을 찾아보려고 한다. 첫째 당시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일했던 아더 브라운의 평가이다. 즉 서론에서 본 것처럼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에 대해 당시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더 브라운은 “청교도 형의 신앙을 가졌고 주일성수를 중요시 하였으며 춤, 흡연, 카드놀이등을 죄악시 하였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전천년설을 따르고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이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위험한 이단으로 보았다” 라고 기술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전천년설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뜻했다. 둘째로는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이다. 앞서 무디의 영향 하에 있었던 SVM은 근본주의 영향 하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고 내한 미국 선교사들중 SVM출신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다. 다음의 표는 그 비율을 잘 보여준다.
년도 |
총 내한 선교사 |
내한선교사중 SVM출신자수 |
내한 선교사중 4대교단 출신자 |
4대교단중 SVM 출신자 |
1906 |
14 |
8 |
14 |
8 |
1907 |
43 |
23 |
42 |
23 |
1908 |
48 |
29 |
45 |
28 |
1909 |
30 |
21 |
21 |
19 |
출처: 류대영, 『초기 미국선교사 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51.
이 표에서 보면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내한한 미국선교사들 총수는 135명이었는데 그중 SVM출신이 81명으로 60%를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내한 선교사들이 세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셋째는 내한 선교사 자신들의 기록이나 활동 그리고 국내 학자들의 견해이다. 무디의 안수를 받고 내한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인 게일은 1913년 유명한 세대주의 종말론자인 블랙스톤의 책 Jesus Is Coming을 “예수의 재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조선야소교서회에서 출간하였다. 또한 1910년도에는 앞서 보았던 세대주의자 피어선 박사가 방한하였고 다음해에 사망하여 유족들과 한국교계 지도자들이 피어선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현 평택대학교).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내한 선교사들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기초로 한 근본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아 한국에 들어왔고 활동하였음을 알 수있다. 신학자 홍치모는 “한 마디로 말해서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은 청교도적인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학사상은 칼빈주의, 근본주의 사상으로 채색되어 있었다…여기에 덧붙여서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까지 혼합되어 있었다는것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하여 내한 선교사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을 추종하는 근본주의 신학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한국 근본주의 신학의 주역이었던 박형룡도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당시 보수적인 선교사 대부분이 열렬히 추종했던 종말론이라고 말한다. 현재 근본주의 연구를 하고있는 배덕만 역시 최초 공식선교사였던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모두 미국 근본주의 운동의 태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무디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다”라고 지적한다. 이들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서 초기 한국장로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교사가 마펫 (Samuel Moffett, 마포삼열)이었는데 그의 신학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4. 마펫의 신학과 초기 한국 장로교 형성
마펫은 1890년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1901년 한국 장로교의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평양신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최초 한국인 목사 7명이 탄생에 기여하였으며 이후 1924년까지 교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에도 1936년까지 교수와 명예교장을 하여 그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고 졸업한 학생 수만도 400명이 넘었다. 따라서 마펫의 신학은 한국 장로교 초기 지도자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펫은 1886년 SVM이 출범하던 무디의 하계수련회때 배위량 (Blair, 블레어 선교사)과 함께 참석하였고 배위량에 따르면 마펫은 결혼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재림은 7년대환란의 시작이므로 결혼할 때의 기대와는 상반되기 때문). 초기 선교사 헌틀리 역시 마펫과 그의 동료들은 시카고 맥코믹 출신으로 당대의 부흥사인 무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 지도자들의 산실인 평양신학교는 마펫과 배위량이 5개년 교과과정을 만들고 신학교육을 시작하였고 여기서 배출된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과 선교사들이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게 되고 마펫은 여기서 노회장이 되었다. 최초 한국인 목사 7인중 한 명인 영계 길선주 목사는 마펫의 영향을 받아 요한계시록을 200번 이상 통독하였고 1차 장로교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이 되어 선교사들과 더불어 초기 한국 장로교 형성에 기여하였다.
한국 장로교 형성에 있어서 마펫 선교사의 공헌은 지대하였고 그의 신학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근본주의 신학이었다면 그와 그의 동료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구축했던 한국 장로교의 신학 또한 근본주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마펫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기 한국장로교 지도자들이 1907년 독노회와 1912년 한국장로회 총회를 통하여 지도력을 형성할 때 마펫과 선교사들의 신학은 자신들의 영향 하에 있었던 한국교회 리더쉽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박용규는 초기 선교사들이 보수주의 신앙을 소유한 세대주의적 종말사상을 가진 선교사들이라고 하면서 “자연히 한국선교 초기부터 이들 전천년주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에서 전천년설은 성경이 보장하는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정통주의 종말론이라고 가르쳤다... 그결과 전천년설이 1945년 한국이 해방되기까지 한국장로교의 종말론을 지배해왔다”고 지적하며 한국 장로교의 형성과 발전에 세대주의 종말론을 기초로 한 근본주의자들의 영향이 컸음을 진단하고 있다.
V. 마치면서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의 신학을 조명하기 위하여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한국에 오기 전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 신학운동을 고찰하였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근본주의 신학운동 형성과 발전의 한 축이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 장로교는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을 경험하였고 근본주의 진영이 우세할 때 많은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은 초기 한국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신학은 초기 한국인 장로교 지도자들 특히 평양신학교에서 배출된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이어졌고 1912년 1차 장로회 총회는 이들 중심으로 교권이 형성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에는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오랫동안 일한 마펫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있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이 한국 초기교회 미친 영향에 대해 배덕만은 “선교사들이 가져온 근본주의적 신앙및 신학은 한국의 신학교육을 통해 초기 한국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라고 하여 그 지대한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은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을 진단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우리는 근본주의 신학이 유일한 신학 (the Theology)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 응답했던 여러 신학중의 하나 (a theology)임을 기억해야 한다. 신학은 상황에 대한 응답이므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신학은 화석화한 교리가 되어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없음을 교회사는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 신학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바람직한 신학의 모색을 위하여 내한 선교사들의 세대주의에 기초한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근본주의 신학은 스스로를 복음주의라고 하여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복음주의 역시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견해가 있어서 정리된 개념은 아니지만 대체로 18-19세기 영미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보고 있고 비관적 세계관의 근본주의와는 달리 낙관적 세계관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하며 적극적 참여를 통하여 문맹, 질병등의 악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을 추구한다. 바람직한 한국교회의 신학을 모색하기 위하여 근본주의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복음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울러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려는 한국교회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한다는 종교개혁의 명제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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