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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학하는 즐거움 원문보기 글쓴이: 송사도요한
마지막 날 - 12월 13일(일) - 여행을 마무리 하면서
6박 7일의 일정 중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대주교님 방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했다. 일찍 일정을 시작하는 바람에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나야 했다. 줄곳 새벽에 일어나는 일정이라 쉽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제의 일정 때문이었는지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뒤늦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대주교님 방을 향했다. 그리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함께 한 천주교 신자들끼리 지켜야할 의무를 채우고 있었다. 몇 일 전 지나가면서 들은 이야기는 개신교 목사님들은 그 힘든 일정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하신 분들이 많으시단다. 그 분들의 삶이 늘 그렇게 살아진 탓도 있지만, 우리와는 사뭇 다른 삶의 리듬을 지닌 이들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미사 후에 대주교님께 어제 갑작스럽게 제안된 영국 정교회 미사 참례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생각외로 대주교님은 흔쾌하게 그 일정에 동참하기로 하시자, 우리도 예외 없이 함께 정교회 미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정교회 주일 미사는 길기로 유명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한 전례와 풍부한 볼거리(?)로 관심이 갔다. 단지 지난 번 서울 한국 정교회 대주교 착좌식에서 미사에 참석했다가 겪은 고충을 생각하면 조금 걱정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아침 시간은 개신교 목사님들과 우리 모두에게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솔직히 에큐메니칼 순례라고는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 일치를 위한 기도의 공동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기던차에 아침 일찍 함께 공동 예배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개신교 목사님 대표와 동의를 얻어 아침 미사 이후 호텔의 바에서 자리를 얻어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어젯밤의 광란의 파티가 끝난 이후라 바는 정말로 어지럽고 혼잡스러워 바에 들어오시는 목사님들의 표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이윽고 대표 목사님께서 이런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주셨다. 어쩌면 세속의 때가 묻은 곳을 정화하는 의미가 있다고 할까? 아무튼 짧지만 함께 말씀을 듣고, 김 대주교님과 개신교 대표 목사님 두 분의 설교를 듣고 함께 기도하면서 공동 기도회를 마쳤다. 물론 이 시간에 함께 순례에 참석한 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나눔도 빠지지 않았다.
아침 식사 이후 천주교팀은 영국 정교회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우리와 함께 동행한 나창규 대신부님께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이 곳에 있어서 만나던 차에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청한 모양이다. 정교회 담당자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물론 5시간이 넘는 미사에 처음부터 참석하게 하기에는 너무 힘겹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우리를 배려해서 정식 미사가 시작되는 10시 반부터 우리는 이미 시작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성당에 들어섰다. 성당은 정교회 성당의 특징처럼 화려하고 많은 이콘 그림들과 촛불과 향으로 가득찼다. 전체적으로 개축공사 중이라 천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화려한 제단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영국 정교회의 제단부분. 성찬례를 위한 누룩 든 빵을 축성하기 위해 제단에 쌓아두고 그 위에 초를 박아 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리 방문객을 위해 성당의 맨 앞자리에 따로 좌석이 마련되었다. 우리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미사는 대주교님의 집전으로 몇몇 신부님들과 부제들에 의해 그리스어로 진행되었다. 마치 우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와 비슷한 미사였다. 미사에 참여한다기 보다는 미사를 보러간다는 표현이 맞는 것처럼 말이다. 전례는 참으로 길었다. 무려 3시간이나 지속된 미사의 중심은 성가대의 끊임없는 노래와 제단과 좌석을 오가는 화려한 사제들의 복장, 전례에서의 다양한 행위들이었다.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미사 예절 가운데 우리와 공유하고 있는 성찬례의 본질에 관해서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이들이 성찬례에서 사용하는 빵은 누룩이 든 보통 빵이라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사제들이 축성한 빵과 포도주는 함께 적셔져 신도들에게 나눠졌고, 미사에 참석한 비신자들에게는 축성되지 않은 빵을 나눠주는 나눔의 예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성찬례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여전히 일치 운동의 난관이기는 하지만, 정교회가 배려하는 비신자 혹은 비정교회 신자를 위한 나눔의 빵이 지닌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줄곳 내 곁에서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던 한 할머니가 내게 빵을 건네주며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열심하 할머니의 모습이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비춰졌다.
영국정교회 대주교님의 모습이다. 전형적인 그리스풍의 정교회 대주교님이신데,
수염때문인지 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 풍긴다.
정교회 주교님은 성직자다운 전통적인 면모를 그대로 갖고 있다.
영국 정교회에는 영국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성이 동방 교회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선교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영국에 살고 있는 정교회 신자들을 위한 교회라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우리 한국에 있는 이슬람 중앙성원 같이 말이다. 미사 후에 대주교님이 우리 일행을 소개해주면서 따뜻한 인사를 전해주었다. 대주교님의 환대는 곧바로 우리 대주교님의 인사말로 이어졌고, 우리 일행을 몇 사람 초대해서 출판된 당신의 자서전을 나눠주고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를 나눴다. 물론 미사 후에는 대주교님의 작은 식당에서 신자들이 준비한 식사를 함께 나눴다. 전형적인 그리스식 식사였다. 스프부터 빵, 각종 요리가 준비되었지만, 비좁은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먹는 음식맛이 생각보다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정성과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나누는 식사가 주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비운 배를 채웠다. 옆에 앉아 있던 정교회 신자분이 묻는 말에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또 한번의 비애를 느끼며 그냥 할 수 있는 몇 마디 되지 않는 영어를 남발했지만, 이 기회가 내게 주어진 안식년에 해내야할 영어 회화 공부에 대한 동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당연했다.
우리를 미사 후에 따뜻하게 맞아주고, 함께 사진도 어울려 찍었다.
우리 일행과 본래 함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만나 사원을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중국식으로 제대로 먹기로 했는데, 우리의 갑작스런 일정의 변경으로 우리 천주교팀은 식사 후에 개신교팀과 시내에서 따로 만나게 되었다. 놓친 중국식이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정교회 전례에 참석한 의미를 더 크게 두기로 했다. 물론 다리와 허리가 아파서 적지 않게 고생을 한 것만 빼고는 말이다.
일행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현지 가이드의 표현에 따르면 4천만원의 가치를 지닌 내셔날 갤러리 박물관. 영국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세계적 작품들과 꼭 한 번은 봐야할 작품들을 짧은 시간을 내서 관람하게 되었다. 대단한 작품들이었지만, 제한된 시간 때문에 중요한 그림만 훌쩍 스쳐 지나면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그 그림들 중에는 익숙한 그림들과 유명한 그림들도 많았다. 늘 여행 때 박물관을 가면 느끼는 점이지만, 좀 더 시간이 있다면 박물관 만큼은 제대로 공부하면서 볼 수 있다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늘 한다. 또 영국 런던을 방문할 기회가 있는 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박물관을 제대로 공부해서 보는 것도 참 좋은 공부가 되겠구나 생각할 때가 많다. 프랑스 파리의 박물관들도 그렇고, 사실 박물관이야말로 역사가 살아 이야기해주는 곳이 아니던가. 공부를 하다보면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시대 정신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지 공부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런던의 내셔날 갤러리, 국립 미술관의 전경이다.
이 곳에 소장된 작품의 가치가 가히 천문학적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내셔날 갤러리에서 바라본 런던 빅밴의 모습이 정겹다.
아쉬운 시간을 뒤로 하고 박물관을 먼저 나와야 했다. 모든 일정을 끝내면서 내가 귀국하기 전에 들르기로 한 독일로의 비행기가 일행들 보다 2시간이 빨랐기 때문이다.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일행들과 나누고, 로마로 돌아갈 수녀님 한 분과 함께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향했다. 그 곳은 유럽 최대의 공항으로, 특별히 우리가 탑승할 청사는 브리티쉬 에어라인이 독자적으로 건설한 터미널로 그 크기가 가히 상사을 초월했다. 그리고 체크인 시스템도 무인으로 되어 있어서 간단한 전자시스템을 거쳐 짐만 붙이면 되는 형태였다. 우리 인천 공항이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선발되었다지만, 공항의 규모 만큼은 런던 히드로 공항을 따라가지 못할 듯 했다. 물론 공항을 다니면서 승객들을 위한 서비스 만큼은 인천공항을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터넷 환경이었다. 요즘 많이 가지고 다니는 노트북에 달린 무선랜으로 공항 어디서나 자유롭게 인터넷을 즐길 수 있는 우리의 실정과는 달리 유럽은 그 어디도 자신의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사실 외국을 나서면 인터넷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을 자못 크다. 그런 인천 공항이 내년에 민간 자본에 매각된다니 이런 서비스가 유료화될 것 같아 아쉽다.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선전중인 자기 부상 열차.
속도가 이전의 자기부상열차보다 훨씬 빠르다고 한다.
상용화가 언제 될지는...
런던 히드로 공항의 내부.
내가 탄 5청사는 영국항공사가 단독으로 만들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최첨단, 최대 공항이라고 한다.
공항에서 잠시 기다리고 독일 뒤셀도르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독일은 나의 두 번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27살에 신학생의 신분으로 낮선 땅 독일로 유학을 떠나 10년을 본(Bonn)에서 살면서 공부했다. 정확히 37살에 나를 놓아준 이 땅에 들어서는 기분이란 늘 묘했다. 2년 반전에 유학 마치고 처음 독일을 다시 방문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친근함은 독일말이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참 신기했다. 한국에서 살 때 독일어를 한 마디도 하거나 들을 기회가 없는데도, 이렇게 독일사람들 곁에 가면 독일어가 들린다는 사실이 말이다. 영어 공부 붐이 불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나도 영어 공부할 때 또 다시 영어가 이렇게 친근하게 들릴 날이 올까 싶다. 하지만 독일어권에 들어서면 고향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언어가 지닌 친숙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국 히드로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런던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여주었다. 다시 영국을 언제 방문할 지는 모르지만, 낮선 새로운 땅을 짧게 방문하고 떠나는 영국에 대한 아쉬움을 접고 다시 독일로 향했다. 1시간 남짓 날던 비행기는 대서양의 밤을 지나 독일 뒤셀도르프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는 내가 유학을 마치고 첫 본당으로 발령 받은 부평4동 성당에서 당시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준비하던 후배 신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같은 처지에서 유학을 준비하던 바오로 신학생과 함께 나눈 즐겁고 유쾌한 추억들이 많았기에 그에 대한 애착이 컸는데, 오스트리아 인스부룩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2년 전에 사제로 서품된 후 작년에 독일 뮌스터에서 다시 박사과정을 시작했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지도 교수가 본 대학교로 전임하면서 내가 공부했던 본으로 자신도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깊은 인연이란 생각에 돌아가는 길에 몇 일 그 후배를 만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히드로 공항에서 이륙할 때 런던 시내를 찍은 야경사진.
야경의 아름다움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뒤셀도르프에서 다시 만난 후배의 모습은 건강하고 밝았다. 늦은 밤 시간인데 차를 빌려 나를 마중나온 그 마음도 고마웠고, 내가 정들었던 본(Bonn)으로 함께 가면서 나눈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오랜만의 재회를 긴 이야기와 웃음으로 독일에서의 첫 날 밤을 보냈다. 이제 이어질 몇 일 간의 독일 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배의 사제관에서 참으로 편안한 맘으로 보내게 되었다. 교수 연구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터라 마음도 편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독일에서 머무는 나를 집처럼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3일 정도만 머물고 가려고 했지만, 너무 짧은 기간을 거쳐 가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이후의 많은 일정들을 뒤로 미루고 1주일 정도 더 머물게 되었다. 특별히 그 기간 동안 어디를 여행하거나 다닌 것은 아니지만, 함께 있으면서 나눈 많은 이야기들, 밤을 새면서 즐겁게 지낸 시간들이 정겨웠다. 그리웠던 독일의 맥주와 소세지, 아침 빵을 발라 먹으면서 쑥쑥 커가는 내 배와 살들이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다. 내년 다시 이 곳을 찾아 좀 더 안식년을 기쁘게 보낼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귀국하는 날이 성탄 전야라 아쉬움은 컸다. 성탄 시즌이라 얻기 힘든 비행기 좌석 때문에 부득이 성탄 전야에야 귀국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아마 성탄전야에 비행기에 몸을 싣는 사람이 없었을테니 자리가 비었겠지 생각했다. 생애 처음으로 성탄 전야를 성당이 아닌 하늘 위 비행기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러시아와 중국 대륙을 넘어가면서 아기 예수님의 축복을 전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누군가가 내게 해준 말, 하늘 높은 곳에서 하느님과 더 가까운 곳에서 성탄을 맞이하는 기쁨도 있다는 말에 큰 위로를 받기로 했다. 그래도 성탄 당일날 인천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나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내가 계획했던 일들에 대한 소망들을 오실 아기 예수님께 청해본다.
순례기를 마치면서
이 번 순례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환으로 준비되었다. 어려운 일정 준비에도 불구하고, 문광부에서 예산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갑작스럽게 준비된 일정이라 여러모로 부족한 점들도 많았지만, 순례를 준비해준 실무진들의 노고로 대과 없이 좋은 일정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함께 했던 개신교 목사님들의 첫 만남이 낮설었지만, 그래도 일정 중에 함게 나눴던 대화, 그 분들이 가졌던 관심의 변화, 그들의 기도 속에 드러난 신앙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에게도 일치 운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기회였고, 앞으로 일치 신학을 공부하는 데 더 큰 동기를 부여해준 순례였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러 모으신 교회가 분열을 겪은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백성들 간의 분열이 예수님의 대의에 어긋났음을 고백하는 것이 일치 운동의 출발점이다. 순례 기간 동안 목사님들이 가톨릭 교회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정리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황님을 만나고, 가톨릭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적지 않은 생각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으리라 기대해본다.
일치를 향한 여정.
앞으로 내가 무엇을 위해 사제로서 투신해야 할 지 좀 더 생각하게 해준 순례였다. 이 순례가 하나의 행사나 여행으로가 아니라, 함께 생각과 삶을 나누는 순례가 되는 첫 걸음이 되길 희망해보았다. 성탄 전야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에 아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초라한 마굿간에서 무엇 때문에 사람이 되시어 오셨을까?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 임마누엘의 하느님. 그 분을 영접하는 마음을 이 번 성탄은 비행기 안에서 조용히 가져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