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기독교의 역할〈상〉
`아,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사람을 복종시키는 강한 힘의 시대가 지나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는도다…우리가 이제 분발해 일어난다.양심이 우리와 함께하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한다…오늘 우리의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 정신을 발휘할 뿐 배타적 감정을 버려야 한다.마지막 한 사람까지,마지막 시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3·1독립선언서 중).
1919년 3월1일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는 동안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 전국 9개 지역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그후로 1년여 동안 전국 3백11개 지역과 만주 연해주 등에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이 펼쳐졌다.
이같은 일은 이미 1월부터 준비된 것이었다.특히 기독교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평양에서는 선우혁이 서울의 이승훈 양전백 등을 찾아가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한 뒤 평양 선천 정주 등의 서북지역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조직화작업에 들어갔다.서울에서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박희도,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 이갑성 등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과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두 운동세력은 이승훈의 제의에 따라 천도교 등과 연합하게 됐다.
천도교측에서도 독립운동을 준비했다.그러나 본격적인 운동 계획은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들고 귀국한 기독인 송계백을 1919년 2월에 만나면서 시작됐다.기독교와 천도교의 연합전선은 1919년 2월24일 한용운 백용성 등의 불교계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민족대연합전선으로 확대됐다.최남선은 선언서를 기초하면서 기독교 이념을 수용,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보편적 가치관과 인류 공존을 지향하며 비폭력 평화를 중심으로 작성했다고 밝혔다.선언서에는 기독교에서 16명,천도교에서 15명,불교에서 2명이 서명했다.
초기 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에 의해 주도됐다.그러나 기독교의 역할이 두드러졌다.첫날 만세운동은 모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이뤄졌고,의주와 평양에서는 목사에 의해 진행됐다.또 주도세력이 뚜렷한 3백11개 지역 가운데 78개 지역에서 기독인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주도한 곳도 42개 지역에 달한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탓에 피해도 컸다.1919년 10월 3·1운동으로 인해 한달 늦게 열린 제8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3·1운동으로 사망한 교인이 52명,체포된 교인이 3천8백4명인 것으로 집계됐다.11월 열린 감리교 연회에서도 목사와 전도사 등 직분자 1백60여명이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특히 전체 목사 28명 가운데 14명이 체포,구금됐다.일본 헌병대의 조사 결과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 2백44명이 체포돼 그 수가 천도교나 불교의 두 배에 달했다.특히 여성 구금자 4백71명 중 3백9명이 기독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만열교수(숙명여대)는 기독교인의 적극적인 3·1운동 참여 이유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른 민족관과 기독인의 민족의식 및 민족운동의 전통,교단의 조직화,종교적 자유의 박탈”을 들었다.이교수는 당시 기독인들은 민족을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류를 보존하는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또 장인환 우덕순 이재명 등 기독인들의 민족운동에서 강한 자극을 받았으며,교단 창립에 따른 전국적인 조직망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기독인들은 신앙과 민족사랑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했다.선언서에 서명한 기독교계 민족대표들은 일제의 법정에 서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민족의 독립을 희망했다고 대답했다.이승훈은 “하나님이 가르친 바가 있으니 오색 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신홍식도 “처음에는 조국의 독립이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니 어찌하나 하고 참고 있었으나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인 태도와 압박,핍박으로 참지 못하고 조선 독립의 사상이 날로 가슴에 부글부글 끓게 되었다”고 참여 이유를 밝혔다.
만세시위 때도 기독인들은 `독립단 통고문'을 뿌리면서 매일 3시에 기도하고 주일은 금식하며 월요일 이사야 10장,화요일 예레미야 12장,수요일 신명기 28장,목요일 야고보서 5장,금요일 이사야 59장,토요일 로마서 8장을 읽으라고 권면했다.
이사야 10장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예레미야 12장은 유다가 멸망한 배경,신명기 28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을 받아 고통을 받게 되리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또 야고보서 5장은 고난 당하는 기독인에게 기도로 인내할 것을 권면하며,이사야 59장은 회개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실 것이라는 내용이며,로마서 8장은 장차 받을 은혜에 관한 내용이다.
이교수는 “3·1운동을 주도한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성격은 정의 자유 평화에 기반한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대라는 기독교 신앙과 자주 평등 해방을 목표로 한 독립국가,민족자주의 건설이라는 민족적 양심의 접점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같은 신앙과 민족의식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일제의 문화정치와 회유·분열책,정교분리노선에 넘어가 일부 기독교 민족지도자들이 친일이라는 오명을 갖게 된 것은 반성해야 할 점으로 남아 있다. /전재우 jwjeon@kukminilbo.co.kr
3.1운동과 기독교의 역할〈하〉
`3월1일 조선 민족대표 33인의 조선독립 선언은 결코 개인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조선민족의 양심적 요구를 확증한 것이며,하나님의 뜻임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1919년 3월12일 `12인 등의 장서' 중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뒤 기독교 지도자들은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을 후원하는 글을 발표했다.
3월12일 김백원목사(안동교회) 차상진목사(승동교회) 등 12명은 서울 서린동 영흥관에 모여 조선총독 하세가와에게 보낼 장서를 작성하고,종로 보신각 앞에서 군중이 보는 가운데 낭독했다.`12인 등의 장서'의 내용은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끝까지 독립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1919년 3월1일 전국의 기독지도자들은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여대목사의 경우 서울 선언식에 불참한 채 의주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유목사는 의주 서부교회 공터에서 김창건목사 김이순전도사 등의 교역자들과 함께 지역주민 7백~8백여명을 모아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됐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던 김선두목사도 평양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김목사는 이일영 김이제 강규찬목사,정일선전도사 등과 함께 평양 6개 교회를 연합,숭덕학교 운동장에서 시위를 벌였다.김목사는 1천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구속되어 천년을 사느니 자유를 찾아 백년을 사는 것이 낫다”는 연설을 해 군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그는 현장에서 구속돼 1년6개월의 실형을 받아 그해 열린 총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경북지역에선 노회 임원들이 기독교학교 학생과 교인들을 동원,시위를 벌였다.3월8일 대구 장날을 기해 교인들과 계성학교 학생들을 장터에 동원,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강화에서는 평신도에 의해 만세운동이 벌어졌다.은 세공업자인 유봉진을 비롯한 기독인들이 3월18일 강화읍 장날에 시위를 벌였다.이날 시위에 참여한 인원이 1만명을 넘었다.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는 당시 노회장이던 최대진목사와 문용기장로 등이 남전교회에서 거사를 모의한 후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당시 이리에는 일본 대교농장의 곡식창고가 있었다.일경은 시위군중이 창고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창고의 담 위에서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발포했다.이 과정에서 문용기장로가 일경에게 항거하다 체포돼 일경의 칼에 쓰러졌다.김용환목사(72·기장 원로목사)는 어머니 조마리아씨로부터 전해 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이리에서 20리나 떨어진 남전교회 교인들이 주축을 이뤄 이리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진압은 무자비했다.평화적 만세운동을 벌이는 민중에게 일제는 헌병과 경찰,군대를 동원해 인명을 살상하고 체포 구금 고문했다.그 과정에서 교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3월3일 평남 강서 사천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역시 사천교회와 원장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그러나 일제는 시위운동을 벌이는 교인들과 민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43명을 죽이고 20여명에게 중상을 입혔다.3월4일에는 정주에서 학살 방화사건이 일어났다.9일에는 서울에서 `십자가 학살사건'이 벌어졌다.일제는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찬동한 기독인들을 체포,교회로 끌고가 십자가에 묶고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표적인 사건이 4월15일 수원 제암리교회 사건.3월 중순부터 시작된 수원지방의 만세운동은 장날에 따라 확대됐다.3월31일에는 발안지방에서 수천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이 시위는 제암리교회 교인들과 천도교인들에 의해 주도됐다.야간 횃불시위도 계획됐다.4월2일 수요 저녁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은 인근 산에 올라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는 4월 초 육군 보병 79연대를 파견,수원 발안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게 했다.그러나 발안 시위의 주동자들이 체포되지 않자 일본군은 제암리 토벌작전을 단행했다.이들은 제암리에 도착하면서 순사 1명과 군인 2명을 마을 반대편으로 보내 주민들의 대피로를 차단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마을에 도착한 일본군은 제암리의 성인 남자 30여명을 교회에 모아놓고 밖에서 창문을 통해 사격한 후 교회에 불을 질렀다.불은 곧 바람을 타고 인근 집으로 옮겨붙었고,불을 피해 나온 주민들은 일제의 총칼에 희생당했다.이 사건으로 기독인 12명을 포함,모두 29명이 희생됐다.
특히 일제는 기독인에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추정된다.당시 만행을 모면한 사람 중 한명이 사건 현장을 방문한 언더우드 일행에게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진술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교회사가 이덕주목사는 제암리사건에 대해 “우리 민족의 저항운동에 대한 탄압이었으며,만세운동이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저항운동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재우 jwjeon@kukmin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