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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성명 |
재임 |
기간 |
시대 |
1 |
송도덕(宋道德) |
1973. 7. 1 - 75. 6 |
2년 |
제4공화국 |
2 |
윤정기(尹正基) |
1975. 7 - 78. 12 |
3년 6월 |
〃 |
3 |
박윤화(朴允華) |
1979. 1 - 81. 12 |
3년 |
제4·5공화국 |
4 |
김형삼(金炯三) |
1982. 1 - 85. 12 |
4년 |
제5공화국 |
5 |
윤정택(尹正澤) |
1986. 1 - 89. 1 |
3년 1월 |
제5·6공화국 |
6 |
윤정기(尹正基) |
1989. 2 - 93. 12 |
4년 11월 |
제6공화국 |
7 |
정진룡(鄭鎭龍) |
1994. 1 - 97. 12 |
4년 |
〃 |
8 |
윤정기(尹正基) |
1998. 1 - 99. 12 |
2년 |
〃 |
9 |
윤진수(尹進壽) |
2000.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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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정진용 (鄭鎭龍) |
2010, 9 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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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무동리는 1973년 7월 삼남면에서 언양면으로 이속되면서 초대 송도덕(宋道德) 이장 이후 최장수 이장은 1975년 7월 이후 1999년 말 사이 전후 3회(3. 6. 8대)에 걸쳐 10년 5개월간 재임한 윤정기(尹正基) 이장이고, 다음은 1982년부터 1985년까지 4년간 재임한 김형삼(金炯三 : 4대) 이장과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년간 재임한 정진룡(鄭鎭龍 : 7대) 이장이었다.
무동마을 다리는 지금현제 세들보부근에 6“파이프 3개을 놓코 위에 잔디때짱을 언저서
중간준간에 6m중간에 말목을치고 12m 마다 대나무로 망테기를 만들어 돌을넣에 만드에
사용하다가 강건너 지금 족구장 맞은면에 잔디 뻔디기가 좋았는데
1962년 9월부터 65년 12월까지 사연땜 공사로 인하여 중장비로 불도져로 트럭에 실는
장치 골제체치한다고 하다가 다시 언양 울산
고속도로 68년부터 70년 언양울선고속도로 공사
또한68년부테 69년12월 대암땜공사 등으로 무동은 섬베기부터 골제
체치로 수난시대 현제무동교 자리에 공사판 나무로 각기목으로 다리를 만드어 다니고
있어씀 지금 들마당 자리에 아스콘 프렌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공사끝나자 무동다리가
71년도에 처음군비와 고속도로 공사찬조 동내대밭에 대팔은 돈으로 다리공사와
강년보 설치 하였다가 강년보도 유실되고 다시하고 동내다리도 유실되고 다시하는 등
여번의 수리와 유실 보수등 하다 이번에 크게많들어 졌습니다
80년초 마을앞으로 지나가는 융관공사로 섬배기 까지 길이되었다
마을 지명유래
무동(武洞)
(법정)구수리의 제일 아래(동편)에 있는데, 남쪽 문수산(600m) 기슭에 산을 등지고 앞에는 내가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북향촌(北向村)이다.
마을 앞은 언양에서 흐르는 남천이 범서면 사연리(泗淵里)에서 반구대(盤龜臺)에서 남으로 흐르는 사연댐의 대곡천(大谷川)과 합쳐 태화강 중류를 이루어 울산만으로 들어간다.
동쪽은 같은 문수산 기슭인 범서면 천상리(川上里), 서쪽은 남천을 건너 언양읍 반천리(盤泉里) 살수(米淵)마을, 서남은 같은 구수리의 행정리인 대동(大洞)과 접하고, 북쪽은 반연리(盤淵里)와 범서면 사연리가 남천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며 마주 보고 있다.
약 400년 전쯤인 임진왜란 후 윤씨(尹氏 : 坡平)·김씨(金氏 : 金海)·정씨(鄭氏 : 東萊)·박씨(朴氏 : 密陽)·송씨(宋氏 : 恩津)·한씨(韓氏 : 淸州)·서씨(徐氏 : 達城)의 7성이 입향하여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동쪽 산(문수산의 북쪽 한 줄기)의 산세(山勢)가 춤을 추는 모습과 같다 하여 처음에는 <춤출무(舞)>자를 따서 무동(舞洞)이라 하였다가, 뒤에 반상(班常 : 양반과 상사람) 구별의 의미에서 상사람(常人)처럼 춤출무자(舞)가 상스럽다 하여 <호반(虎班)무(武)>자로 바뀌어 오늘날 같이 무동(武洞)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1975년부터 정부시책인 그린벨트에 묶여 각종 개발에 제한을 받아 낙후되고 말았다.
무동마을에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상공파(領相公派) 무동문중 재실인 평모재(平慕齋)가 있다.
1997년 무동52번지 (윤희우집)매입하여 제실을 착공하여 1998년 완공되었다
파평윤씨의 입향조(入鄕祖) 파평윤씨 28世 德運(덕운)1704~1769) 5世관 윤관장군이며 15世곤 소정공
18世 윤필상 영의정 (갑자사화에 연산군에의해 유배)
→자세한 것은 <원사정재(院祠亭齋)>편 참조.
무동리 동제단(洞祭壇)
무동 동제단 건물은 1959년 사나호태풍이후에 근립되었고 그때 나무도 약한 10년생 되는것으로 심은것으로 알고있음
그이전에 동제단은 있어는지는 알지못함 그당시 동내에 않좋은 일이 있어 만들어 동제를 지넨섯으로 알고있음
무동리 동제단은 마을 입구 태화강가에 있는데, 한 아름쯤 되는 느티나무르 당사목(堂祀木)으로 모시고 매년 정초에 마을에서 제관(祭官)을 선임하여 정월 대보름날 자정(子正)을 기해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내고 있다.
무동마을 동제는 2011 정월 대보름날 오전10시 향우회에서 주관하여
동제제물을 마련하고 동제를 올린뒤 점심식사하구 달집을지에 달집사리기
행사를 향우회에서 하기로 하였습니다
무동 마을회관
무동리 마을회관은 1975년 구수리 53-1번지에 정부지원금 85만원, 자부담 46만원, 계131만원을 들여 1층 슬레이트건물을 건립했는데, 그후 점차 퇴락되어 1997년에 같은 장소에 전적 정부지원금으로 종래의 건물을 헐고 1동 2층 슬라브건물로 신축했다.
경로당과 회관을 겸했으며, 1층 50.10㎡, 2층 39.69㎡, 화장실 3.0㎡의 규모로 되어 있다.
새들보(洑)
구수리 861번지 부근 남천하류 구수리앞에 있는 보(洑)이다. 1년 농사를 짓기 위해 30일을 보역사 했던 것을 1979년 3월 정부지원으로 몽리면적 37.560평에 물을 댈 수 있는 현대식 보(洑)를 막았으니 보뚝의 길이는 108m이고 폭은 8m이다.
배락소·배락디미·배락더미
미연1리 살수마을 동북쪽 언양↔울산간 국도 제24호선 북쪽 산자락 끝에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데 이를 <배락디미> 또는 <배락더미>라고 한다.
방향을 바꿔보면 범서면 사연리 넘내에서 언양읍 반천리 살수로 넘어오는 북쪽의 가파른 벼랑이다.
이를 <배리끝>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 벼랑(배리끝) 밑에 물살이 세찬 맑고 깊은 청소(淸沼)가 있어 이를 <배락소>라 하였다.
<배락>은 '벼락(霹靂)'의 이 지방 방언(方言)이다. 구수리 대동과 반천리 살수를 휘돌아 동남으로 흐르는 남천의 급류가 산밑을 쳐받고 용솟음치는 소리가 마치 벼락치듯 하므로 배락소라 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좀 달리 볼 수도 있다. 이곳의 지형과 지세는 가파른 벼랑(斷崖)을 이루고 있으므로 '벼랑소'가 와전(訛傳)되어 <배락소>라 하였을 것이다.
또 <배락더미>라 하는 것도 '벼랑더미'의 와전인 것으로 보아지며, <더미>는 흙더미·돌더미·산더미·잿더미·돈더미·빚더미·쓰레기더미라 할 때의 '더미'이니, 많은 물건이 한데 모여 쌓인 큰 덩어리를 뜻한다.
1960년대 말까지 이 배락디미 밑으로 난 국도를 따라 시간버스(지금의 시내버스로 하루에 대일곱번 운행했다)가 곡예(曲藝)를 부리듯 엉금엉금 기어갔다. 울퉁불퉁한 노면의 비포장도로에 뽀오얀 먼지를 날렸고, 비만 오면 종종 산사태와 낙석(落石)으로 언양↔울산간 교통이 마비되어 가슴을 조이곤 했다.
1974년 언양↔울산간의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배락소는 매축되어 도로로 변하고 1980년경 국도 24호선이 범서면 사연에서 올라와 반연리의 남단부에서 태화강을 건너 구수리 무동마을 입구에 이르는 무동교가 세워지자 종래 배락디미 밑의 험로(險路)는 자동적으로 폐로(廢路)가 되었다.
이 배락디미는 일명 '배리끝'이라고도 하는데, "남창 남창 배리 끝에 무정타 울 오랍아..."라는 청승맞은 모심기노래의 배리끝 전설과 애화(哀話)가 전한다.
<새마을사업> 가. 1970년 제1차 지붕개량사업으로 20동이 가구당 지원금 15,000원, 자부담 25,000원, 계 40,000원이 소요되었는데, 연인원 200명이 참여하였다.나. 1971년 제2차 지붕개량사업으로 15동이 가구당 지원금 20,000원, 자부담 40,000원, 계 60,000원이 소요되었는데, 연인원 150여명이 참여하였다.다. 1972년 간이상수도사업을 했는데, 정부(울주군)로부터 PVC파이프를 지원 받아 자부담 1,600,000원을 들여 연인원 800여명이 동원되었다.
라. 1973년 마을 진입로 확장공사를 하였는데, 길이 150m를 정부지원금 570,000원, 자부담 440,000원, 계1,010,000원이 소요되었고, 연인원 140여명이 동원되었다.
마. 1973년 마을 안길포장공사를 하였는데, 길이 250m를 정부로부터 시멘트 500포대를 지원받고 자부담 280,000원으로 연인원 100여명이 동원되었다.
바. 1975년 새마을회관(구수리 53-1번지) 1동을 건립했는데, 정부지원금 850,000원, 자부담 460,000원, 계 1,310,000원으로 연인원 150여명이 동원되어 1층 슬레이트 건물을 완공하였다.
사. 1979년 새마을 교량건설사업으로 군비 600만원지원, 자부담 200만원으로 연인원 200여명이 동원되어 무동교(武洞橋)가 건립되었다. 이로 인해 남천(南川)을 건너 범서면 사연리 방면으로 통하는 국도가 되었다.아. 1982년 남천 건너편에 새마을 건조장이 설치되었다. 행정상으로는 범서 면 사연리에 속한다. 강변에 탈곡, 퇴비 등을 축조하기 위한 160평 규모의 건조장으로 군지원금 1,394,000원, 자부담 1,538,000원, 연인원 304명이 동원되었다.
자. 1997년 옛 마을회관(구수리 53-1번지, 1975년 건립)이 노후되어 2층 새 마을회관을 증축하였다. 경로당을 겸한 슬라브건물로 1층 50.10㎡, 2층 39.69㎡, 화장실 3.0㎡를 전적 정부지원으로 수축(修築)하였다.
저가 아는데로 발체하고 했습니다 제료수집 윤희명
첫댓글 여러가지 유래라할까 전설이 많네요....
좋은 역사 정보 감사하고요 마을 태생연대가 언제즘인지 궁금하네요?
김씨는 김해가 아니고 경주김씨입니다. 수정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