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이복수
[가슬갑사에서 원광 법사 화랑정신을 전수하다]
가슬사라 불리는 가슬갑사는 운문사 일대 오갑사(五岬寺) 중 하나로서 『삼국유사』 원광서학 조(圓光西學條)에 따르면 “지금의 운문사 동쪽 구천 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현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이라고도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그것이다[今雲門寺東九千步許, 有加西峴, 或云嘉瑟峴, 峴之北洞有寺基是也)].”라고 그 흔적을 기록하고 있다. 600년(신라 진평왕 22) 중국 수나라로 갔던 원광은 왕경인 경주로 돌아오지 않고 멀리 떨어진 청도의 가슬갑사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원광이 가슬갑사에 머물게 되자 그의 덕을 사모하여 교화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특히 화랑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전수받고자 하였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열전 귀산전과 『삼국유사』의 두 곳에는 화랑의 세속 오계와 관련된 내용이 전해진다.
『삼국사기』 열전 귀산전 : 귀산은 사량부[경주 시내]의 사람인데, 아버지는 무은 아간이다. 귀산이 어렸을 때 같은 부의 추항과 친구가 되었다. …중략… 이 때 원광 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可悉寺)에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 등이 그 문하로 공손히 나아가 말하기를 ‘저희들 속사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종신토록 계명을 삼을 한 말씀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원광 법사는 ‘불교의 계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남의 신하로서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 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써 하고, 둘째는 어버이를 섬기기를 효로써 하고,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고, 넷째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고,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은 실행에 옮기어 소홀히 하지 말아라. ……’라고 하였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받들어 행하여 감히 실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원광 법사가 수에서 돌아와 가슬갑[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 하니, 모두 방언이다. 갑은 속언으로 고시라 하므로 혹은 고시사라 하니 마치 감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000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현이 있는데, 가슬현이라고도 한다. 현의 북동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그것이다.]에 머물러 있음을 들었다. 두 사람이 찾아가서 말하기를 “속사가 우매하여 지식이 없으니 원컨대 한 말씀 주시어 종신의 계를 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원광이 일러 주었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어 조항이 열이 있으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여서 아마 능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의 오계가 있으니 하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둘은 효로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요, 셋은 신의로써 서로 벗을 하는 것이요, 넷은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은 살생을 가려함이다. 너희들은 이를 실천하여 소홀히 하지 말아라.
이렇듯 기록에서 원광 법사가 가슬갑사에서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정신의 시작인 세속 오계를 전수하였다고 전해지지만, 가슬갑사에 대한 흔적은 현재 확인되지 않는 실정이다. 가슬갑사가 포함되었던 오갑사 중 현존하는 곳은 대작갑사로 알려진 운문사뿐이다. 나머지 가슬갑사를 비롯한 소작갑사(小鵲岬寺), 천문갑사(天門岬寺), 소보갑사(小寶鉀寺)는 모두 훼멸되었다. 하지만 소작갑사, 천문갑사, 소보갑사는 유물 자료의 조사를 통해 위치와 그 내용이 확인되었지만, 가슬갑사의 경우 위치마저도 추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들의 수련 도장 운문산]
원광 법사가 머물렀던 가슬갑사를 비롯하여 오갑사는 다른 목적으로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광 법사가 수나라에서 가슬갑사를 창건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위치한 오갑사로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신라는 국력 신장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교육의 장소가 필요하였으며, 가슬갑사가 위치한 운문산 일대는 백제와 고구려에서 멀리 떨어진 은밀한 지점이자 해발 1,200m가 넘는 험난한 곳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던 곳이다. 인근 억산과 가지산 등 현재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주변 1,000m가 넘는 산으로 인해 쉽게 외부에서 접근할 수 없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함께 때마침 561년(진흥왕 22) 원광 법사를 이곳으로 보내, 이미 건립된 사찰에 정주하며 세속 오계를 알렸다는 점, 일반적 법회가 아닌 점찰보를 창설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주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된 사찰 오갑사의 활동이 기도하는 장소로서 사찰의 기능보다는 교육의 목적이 더 컸음을 추정하게 한다. 그리고 이 일대가 화랑도와 더불어 수련의 장소로 활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운문산 일대는 신라 당시 군사 수련장과 병참 기지가 위치하였고, 고려 무인 정권 때 김사미 민란의 요새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활빈당의 거점이었다. 운문산 일대는 군사적 전략지임과 동시에 주변 험한 산세로 인하여 방어 및 은신의 장소로도 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청도는 경주 외곽 군부대인 6개 정 가운데 서부 담당인 두량미지정이 주둔했던 곳이었다[각남면 추정]. 또한 청도는 밀양과 창녕, 고령 등 서부 진출의 군사 요충지였다. 이런 사실들은 신라가 이곳에서 화랑을 수련하며 세속 오계를 전수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비단 청도에 화랑의 흔적이 적다고 하더라도 청도 주변에서도 화랑의 이야기는 전해진다. 화랑 죽지랑은 인근의 부산(富山)[현재의 오리산으로 추정] 창고에 군량미 보관을 위해 오갔다고 전하며, 김유신 역시 부근 단석산에서 바위를 칼로 베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도는 신라 시대 왕족과 귀족, 화랑들이 주로 찾았다고 하는 울산 천저리와 연결되는 곳으로 화랑의 훈련 장소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운문산과 경계선에 위치한 경주 장육산에 있는 10평 남짓의 쌍굴은 화랑의 수련터로 알려져 있다.
[화랑정신을 이어가다]
21세기 새로운 천년의 역사에 맞춰 현대 사회에서도 화랑정신이 계승·발전될 수 있음과 동시에, 화랑정신 세속 오계의 발상지로서 청도군은 청도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화랑정신을 발굴 및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2010년 지식 경제부로부터는 ‘우리 정신 글로벌화 교육 특구’로 지정받았으며, 이와 더불어 다양한 프로그램과 사업이 진행된다.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2013년 3월 군민 회관에서는 ‘우리 정신 아카데미’ 개강식이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는 청도 문화원장을 비롯한 민간 단체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화랑정신의 발상지 정신을 이어받고 새마을 정신과 선비 정신을 올바르게 이어 받자는 내용으로 6월까지 매주 수요일 총 11회가 운영되었다. 운문산 일대에는 ‘신 화랑 풍류 체험 벨트’ 조성을 통해 운문면 방지리 일원에 29만 7436㎡ 규모로 오는 2016년까지 총 678억 원의 사업비를 투자해 화랑정신을 이어가는 체험 시설 및 문화 시설 등이 갖춰질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화랑정신 문화원 건립을 위하여 2010년에는 대구 한의 대학교 화랑정신 문화 연구소, 국제 문화 연구소, 동양 철학 연구회 공동 주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세미나에서는 신화랑 정신의 현실적 구현방법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함께 이어졌다. 운문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가슬갑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화랑정신의 발상지 청도를 알리기 위해 2009년 조형물을 세웠다. ‘삼국 통일 초석, 화랑정신의 발상지 청도’란 안내 간판을 삼계리 입구 길가에 세우고, 안쪽 가슬갑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두 화랑이 세속 오계를 들고 있는 모습의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