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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蒙校官竺山全公墓碣銘***
헌종13년 정미에 효자 全震光의 지성으로 신명을 감동시킨 기이한 일로 童夢校官을 命贈하더니 고종18년 신사에 이르러서 5대손 有鍊 在鉉등이 내 너무늙고 글재주 없음을 마다하지않고 그일을 墓石에 실을 글을 청하거늘
대저 천인을 감동하는 이치는 쉽게할수없으나 예전 西河의 물고기와 福寧의 외는 모두 지극한 효가 나타남을 일컫는것으로 이제 임금께서 특별히 공을 포상하니 또한 어찌 표걸(表걸)함이 없겠는가,공의 자는 東滿이니 그 선은 축산인이라 상조는 축산 부원군 국파공 원발이요 증조는克秀요 조는 승업이요 고는 성원이며 비에 이천 서씨이니 창익의 女라 공은 숙종 을축생이라 온순하고 지성이 있으니
二親을 섬기는데 부모의 뜻과 몸에 알맞게 봉양하고 지성으로 힘을 다하더니 대인공이 돌아가심에 슬픔이 넘쳐 몸을 상하게하고 피눈물을 흘려 삼년동안 잇몸을 드러내어 웃은적이 없었으며 5리에 상거한 만성산에 장사하였는데 매일 반드시 성배하고 묘전에 슬피 울부짖으니 무릎이 닿는곳에 두 구덩이가 이루어졌다. 모부인이 병으로 생선을 생각할때 그때 마침 혹한이라 공이 강에 가서 통곡을 마치자 물고기를 얻어서 돌아와 供饋하고 뒤에 또 그와같이 하였다. 상을 당하여 考비同原에 장사 하니라.
공이 이미 육순에 묘측에 여막을 마련하여서 그 애모함이 前喪과 같이 하였다. 산은 높고 물이없어 삼백보 밖 개울물을 길었더니 꿈에 한 노인이 묘전 한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물이 여기에 있다 하거늘 파보니 과연 물이 솟는지라 사람이 효자정이라 이르더라. 모부인이 수박을 즐겨 함으로 일찍이 시절이 되면 끊이지 않게 올렸더니 이에 이르러 두 덩굴이 묘계절사이에 생겨서 네덩이가 열렸거늘 따서 薦新하였다. 여막을 철거한 뒤에도 매일같이 왕배하니 비바람에도 불폐하였더니 대대 이와같이 종신토록 그치지 않았다. 병자에 공이 卒하니 년이72러리.
처음에 공이 시묘를 할때 호랑이가 밤에 여막밖에 엎드린적이 여러차례엿는데 돌아가시던날 밤에도 또 그러하고 또 비내리는 어두운 밤에 정기가 뻗혀 온방이 환하게 밝거늘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고 이상하게 여기더라. 만성산 酉座原에 장사 하였다. 배는 진성있니 찰방 원길의 녀로 공보다 먼저 장사하여 공의 묘후 동향에있다.
일남 세삼을 두시고 손에 5남을 두시니 중귀,중재,중창,중채,중천하고 장에 일남 희학하고 다음에 일남 희목하고 다음에 일남 희봉하고 다음은 사남이니 희숙,희재,희운,희연이요 다음은 삼남이니 희효,희우,희인이요 현손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희학의 남 종규는 부호군이요 희효의 증손 홍교는 문과에 올라 지금 정언이다. 공의 백씨 또한 독실한 효행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시묘를 하는데 시종을 함께하니 아울러 贈童蒙校官하고 묘는 공의묘 남강에 있으니 兩孝子墓라 일컫는다.
銘曰
쌓은 정성 다함이여! 위로 상감께 알려졌더라. 임금이 백성의 아름다움을 권하여 어진 은혜 내렸더라. 만성산 푸르고 푸르르니 초목이 향기롭고나. 봉분을 대함이 천추만대에 兩孝子墳이더라.
고종신사(1881)10월 일 함양 朴周鐘 撰
정사(1977)7월에 구태산 중봉갑향의 언덕에 합폄(合폄)으로 이장하고 동 8월에 改碣하다.
족후손 炳郁 謹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