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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문학
CREATIVE LITERATURE
2020 · 봄 · 계간 · 통권 116호
창조문학사
□ 제24회 창조문학대상 시부문 수상자 이 유 작품선
이사 외 9편
이 유
휴식이 필요해
잠을 청하려는데
아래층에서 이사를 하는지
동물의 뼈 닳는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장롱이며 냉장고가
기린 목을 타고 내려간다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무게 없는 살림살이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쓸쓸히 집을 떠나고 있다
평생 셋집만 전전했다는데
또 어디로 옮겨 앉는 것일까
아니면 나 없던 사이에
영혼의 집을 마련한 것일까
노인의 모습 보이지 않아
무작정 내려가 물어보니
이삿짐센터 직원이라 모른단다
뼈대 앙상한 기린
땅에 네 무릎을 꿇고
꼿꼿한 힘을 보태고 있다
그림 같은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 속에 아버지가 산다 새로 지은 기와지붕보다 훌쩍 커버린 감나무는 지붕을 덮고 있다 헛간 위에서 홰를 치는 수탉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새벽, 마당에서 일어나 싸리비를 흔든다 아버지가 빈 지게를 지고 웃는다 납작했던 그림이 이슬을 머금고 하나의 몸이 된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웃음이 그림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그림 밖을 내다보고 있다
마주보는 눈과 마주치자 아버지 종이로 납작해진다 액자 속에서 벽에 못을 박아버린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눈빛이 유리에 부딪혀 미끄러진다 액자 속을 넘나들던 시간이 머리를 풀어헤친다
이륜차, 혹은 ∞차
창밖의 이륜차가 가로등 불빛을 밟고 간다 마주 오는 차의 불빛은 아스팔트를 핥고 교차한 불빛은 가능한 멀리 간다
겹으로 된 거실 유리창에 창밖의 풍경이 슬라이드 되고 있다 풍경은 유리창 안으로 들어온다이륜차, 혹은 무한대차
그녀가 유리창으로 들어간다 유리창의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다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다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다
유리창의 그녀가 남편 넥타이를 매어주고 있다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식탁을 차린다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병든 어머니 손을 잡고 있다
유리창의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 그녀 몸속으로 들어간다 유리창에 비친 몸속으로 들어간 그녀가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친 그녀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유리창에 비쳐 비쳐 비친 그녀 몸속으로 들어간다
유리창에 복사된 풍경이 하나로 움직인다 유리창에서 그녀가 나온다 그녀의 짐을 무한대차가 나누어 싣고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이중주
무대 위의 광대가 동그란 눈을 껌뻑껌뻑 한다 양손으로 바람의 공을 돌리고 있다 검은 공과 흰 공이 쉬지 않고 허공에 길을 낸다
어둠이 피어나자 식었던 별자리가 따뜻해진다 광대의 머리는 첫 별이 뜨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별은 듬성듬성 싹을 틔우며 땅을 향해 한 걸음씩 내려온다
광대가 저벅저벅 별의 징검다리를 건넌다 어둠에 구멍을 내던 별이 스러지는 찰나, 광대는 별을 쓸어 담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달이 지고 해가 떴다,
꿈꾸는 공터
칸칸이 맞추어 놓은 주택단지에 퍼즐 한 조각이 사라졌다 정오의 햇볕이 그림자를 뱉지 못해 끙끙 앓는다 속을 비운 봉지와 몸이 뒤틀린 종이는 세상과 소식을 끊었다 소주병은 교차로 정보지에 휘둘린다
놀이터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막대기를 휘두른다. 절룩거리는 비둘기는 기억을 쪼아 먹는다. 코가 삐뚤어진 남자가 이리저리 주억거리며 자라목을 빼고 있다
속이 궁금한 고양이가 헤집고 다닌다. 플러그를 땅에 꽂은 냉장고는 깊은 침묵에 들었다 의자가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우주를 수신하는 명품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누군가 주워든 마지막 퍼즐 한 조각, 꿈이 동그랗게 말린다.
지붕 위에, 박이
보름의 달빛이 어둠을 죄다 켰다 마당 안을 서성이다 방문을 더듬었다 문은 안으로 잠겨 있다 지붕 위에서 사부작댔다 꽃판 을 살짝 건드리자 박꽃이 만개했다 가로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별은 생똥을 쌌다 수돗가의 세숫대야가 받아냈다 대추나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비는 처마 밑에 숨었다 들 고양이가 담을 넘지 못했다 부엉이도 울지 않았다
그날 밤, 누군가 세상 소문 다 잠그고 지붕 위에서 태어났다
잉어만
어둠에 발을 디디고 서서 불을 밝히고 있다 헤엄치던 꼬리로 제 몸 가득 훈기를 품고 있다
지친 몸들이 온기를 따라 들어온다 잉어 앞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기꺼이 손을 비빈다.
지루하게 밟히던 하루가 앙꼬를 뱉어낸다. 뒤틀린 속이 어묵국물에 녹아내린다. 피어오르던 피로가 달콤한 향기에 증발한다. 검게 그을린 분노가 불빛에 사그라든다
껌처럼 달라붙은 피로를 잉어가 먹어치운다 웃을 일이 울 일을 베어 먹는다 삐걱 이던 하루가 입속에서 통, 통, 터진다
정오의 설렘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촉, 각, 촉, 각 쉬지 않는다.
가까워질수록 시선이 좁아진다.
키스를 할까 껴안을까 두, 근, 두, 근
무음으로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한 몸을 이루다가
촉, 각, 촉, 각 멀어져 간다
서로의 보폭과 눈높이가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지만
내밀한 그리움으로
심장은 항상 초, 분, 초, 분 뛰고 있다
거울의 이빨
거울이 재활용 수거함 옆에서 나무에 기대어 내장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거울의 내장 속에 고양이가 목을 넣었다가 뺀다. 거울이 고양이를 삼켰다가 뱉는다
맑은 날 고양이가 그림자를 주렁주렁 달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거울 속의 고양이가 등을 구부리고 거울 밖을 흘겨본다. 거울이 내장을 출렁인다
어둠이 깔리자 거울이 고양이를 뱉어내고 투명해진다. 눈을 잃은 고양이가 휘청 이다 두 발로 거울의 뼈를 움켜쥔다.
쨍그랑!
거울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피를 맛본다.
부화
1
떠오르는 별 하나 부화를 시작한다. 장막 속에서 점점 팽창한다. 눈동자가 별의 행방을 찾아 고개를 든다. 어둠의 벽이 점점 얇아진다 별이 막을 찢고 탄생한다. 새벽이 날개를 펼친다
수면에서 떠오르는 알 하나, 산통을 깬다.
2
구장 밖으로 물러선 어둠, 거대한 구장을 품고 있다 주심의 호각소리에 세포들이 분열을 시작한다. 구장 안에서 멈추어 선다는 건, 퇴장을 의미하므로 혈관을 따라 그물과 그물 사이들 쉴 새 없이 오간다
품속 굴린 알은 곯지 않는다. 수억만 개의 눈은 핵의 행방을 좇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분열을 끝낸 구장 부화를 시작한다. 관중석의 사람들이 일제히 알을 깨고 나온다. 과녁을 향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부화를 끝낸 구장 다시금 침묵의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 제 24회 창조문학대상 수상소감
시를 쓴지 20여년
이 유
100세 시대에서 50을 넘겼다.
2001년 등단 무렵, 문인들의 지론에 의하면 젊어서는 시를 쓰고, 중반에는 소설을 쓰고, 노년에는 수필을 쓰는 것이 좋다하여 방송원고를 접고 시를 써보자 맘먹은 것이 나에게는 형벌이었다. 원하는 시가 나오지 않을 때는 철학에 몰두해 보기도 하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싶을 때는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천성이 시인인 시인들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도 한번 시인은 영원한 시인이다라는 투쟁정신으로 창작을 포기하지 않고 창작을 원하는 사람들을 도와가며 스스로를 곷초세우고 20여년을 견뎠다.
인생에서 누군가를 만나느냐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 내가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 축복이듯 처음 나를 문단에 들이신 분도, 부족한 내 첫시집의 시평을 허락하신 분도, 제5시집 『희망의 세레나데』가 빛을 보게 해주신 분도 홍문표 박사님이시다. 뼈를 우려내는 마음으로 시를 써왔는데 이를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있어 감사하다. 평론의 대가 덕분에 시집이 완판되어 목표한 불우이웃돕기기금을 달성할 수 있어서 뿌듯하다.
큰상이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와 창작에 더 매진해야 할 것 같아 어깨가 무겁고 무섭다. 하지만 이러한 부담들이 나를 평생 시인으로 남게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시가 제일 어려워 이쯤에서 시를 접고 소설을 쓸까? 수필로 전향할까? 여러 번 꾀가 났었다.
나보다 더 좋은 시를 쓰신 분들께 죄송하다. 내 시가 좋다기보다 20년 동안 열심히 썼으므로 격려의 차원에서 주시는 상이라는 것을 안다. 원하는 시가 나오지 않더라도 오늘의 이 영광 헛되지 않도록 끝까지 시를 놓지 않을 것을, 상을 주신 분들에 대한 보답을 좋은시로 소홀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심사위원님들의 수상자를 결정하기까지의 갈등이 느껴진다. 대상자 모두에게 상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번 행운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 사임당 이 유지미영
· 본명 이순 · 전mbc방송작가(다큐멘터리)
· 2001년 ⟪한국창조문학⟫ 시부문 등단
· 시집:『부화』『발자국 속으로』『무화과』
『입속의 꽃씨』『희망의 세레나데』외 동인지
· 단편소설:「휴대폰 2001」외
· 중편소설:「경호원 경호」외
· 평론:「통합을 위한 해체」외
· 한국문인협회 · 한국창조문학가협회
· 대전문인총연합회 · ⟪꿈과 두레박⟫여성문인협회
· ⟪초록문학회⟫회장 · 현재 문예창작과 논술 지도
□ 제 24회 창조문학대상 이 유 수상 시집 평
어느 모더니즘 시인의 유쾌한 메타포
- 이 유 제 5 시집 『희망의 세레나데』창조문학 대상에 부쳐
홍 문 표
(문학박사 · 신학박사 · 전 오산대 총장)
이 유 시인이 이번에 다섯 번째 시집『희망의 세레나데』를 상재하게 되었다. 2006년 그가 첫 시집『부화』를 냈을 때 필자가 해설을 맡은 일이 있었는데 15년이 지나 다시 다섯 번째 시집을 보고 소회를 밝히게 되어 반갑고 대견하고 기쁜 마음이다.
여기서 대견하다는 말은 흐뭇하고 자랑스럽다는 말인데 이는 단지 그가 그 동안의 연륜으로 하여 다져진 그의 인생 경험이나 시적 성장에 대한 반가움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그가 일관되게 개척해 가고 있는 그의 지성적 시 세계, 당돌한 모더니스트로서의 시적 태도가 더욱 놀라운 충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를 어떻게 쓰나, 그야 기본적으로는 사물에 대한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과 리듬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사상과 감정이라는 것도 시인에 따라 다르고, 이를 상상과 리듬으로 표현하는 방법 또한 한 갈래 일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시단을 보더라도 시인들의 시작태도를 보면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서정시의 자세다. 이는 철저히 시인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품어내는 시다. 따라서 서정시는 늘 ‘나’라는 화자의 일방적인 고백이 된다. 이러한 서정시는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시인이라면 8할 이상이 이런 서정시에 몰려 있다.
둘째는 모더니즘(modernism) 계열의 시다. 지금 세상은 과거처럼 한가한 목가적 감성의 시대가 아니다. 현대문명은 사상과 감성에도 새로운 사고와 감수성을 요구한다. 시가 감동의 양식이라고 할 때 서정시의 나이브한 감성만으로는 현대의 정서적 요구를 감당하기 어렵다. 따라서 모더니즘 시는 보다 지적인 세계 인식과 비상한 시적 상상력으로 현대라는 문명에 대응하게 된다.
셋째는 시인도 사회적 역사적 존재라는 인식에서 시는 사회와 역사를 반영해야 하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진보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 있다.
여기서 서정시는 자기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양식이고 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시양식이기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적인 리얼리즘 계열의 시는 먼저 진보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념을 확고히 구축해야 하고 그러한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의 존재성에 대한 갈등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모더니즘 시는 어떤가. 모더니즘 시는 현대라는 문명적 패러다임에 익숙해야 한다. 이는 아날로그적 사고에서 디지털적 사고로 의식이 전환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에 대한 지식과 기술도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다가 디지털적 시대의 감수성에 걸 맞는 시적 메타포도 함께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비상한 상상력이 아니고는 모험하기 어려운 것이 모더니즘 시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21세기, 하이테크 정보와 시대인데도 대부분의 시인들은 목가적인 서정시의 영역에 머물러 있거나 첨단 산업과 기술 문명의 뒤안길에서 복고적 감성이나 읊조리는 형편이다. 이는 앞서 우리 시단에 8할이 서정 시인이라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이지만 특히 여성 시인들의 경우는 8할이 아니라 거의 전부가 서정 시인들이다. 이처럼 우리 시단에서 여성 시인들의 경우는 디지털 시대인데도 이 시대에 걸 맞는 지적 감수성보다 전통적인 서정적 감수성에 머무르고 있다.
이 땅에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미 1920년대 정지용이나 임화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제 1백년의 역사를 갖게 된다. 그런데도 모더니즘 시운동은 일부 남성 시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고, 여성 모더니즘 시인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즘 시운동은 그동안 금녀의 성역처럼 남성 시인들만의 잔치였다. 이러한 남성 중심의 모더니즘 시단에 이유 시인이 2006년 첫 시집『부화』에서 당돌하게 도전장을 내었고 그 동안 지속적인 활동을 해 오다가 이번에 제 5시집으로 한국모더니즘 시인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기에 감히 필자가 대견하다는 말을 한 것이다.
모더니즘 시를 이해하려면 현대라는 변혁의 제 양상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현대는 신화적 사고에서 역사적 사고로 전환하는 시대다. 신비성이나 초월성을 부정하고 인간적이며 이성적이며 이성에 의한 합리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과학주의, 실증주의, 물질주의, 기술주의가 우세한 시대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는 물질문명이나 지식의 발달에는 놀라운 변화를 주었지만 정신문화, 인간성, 희망, 가능성 등의 세계에는 오히려 불안과 위기를 안겨 주고 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하여 문명을 건설하였지만 오히려 자연과의 적대감에서 오는 소외감을 경험하게 되었고 신이나 보편성이나 영원성을 거부하면서 삶의 근원적인 절망감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산업 사회는 극단적인 이기심과 개인주의, 물신주의를 낳았고, 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갖가지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권력의 독재와 집단주가 되어 개인성을 압살한다. 이처럼 급변하는 문명의 개혁과 그 역기능의 부작용 속에서 시인은 이제 자연으로부터 버림받은 영혼을 찾아야 했고, 물질과 이성과 권력들과 기술들에 의해서 무력해진 인간의 참 모습을 찾아야 했다. 인간성이나 위대함이나 이성의 오만에서 다시금 신 앞에 겸손해야 하고 존재의 무력함에 대한 실존을 파악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현대를 솔직하게 인식하면서도 과거와는 전혀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현대 모더니즘시의 몸부림은 이러한 시대 인식과 새로운 소망을 향한 처절한 몸짓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시의 모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사실주의나 유물주의나 합리주의의 질곡을 벗어나 초월적인 신비와 꿈을 추구하는 비합리적인 세계다. 그 출발은 물론 상징주의로부터 시작되지만 보다 현대적이고 비합리적 시학은 프로이드의 잠재의식의 논리에 편승한 초현실주의 경향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절제한 낭만주의적 감정을 모더니티한 지성으로 절제하고 문명적인 소재와 감각적인 언어로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려는 주지주의적 경향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사에서 보기 드물게 용감한 여성 모더니스트 이유 시인의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모더니즘 시학은 무엇인가. 모더니즘 시는 크게 주지적인 경향의 시와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의 실험시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주지적인 경향의 시에도 우리 시사를 보면 회화적인 이미지즘의 주지시가 있고, 문명 비판적 주지시가 있다. 1930년대 김광균의 시가 전자라면 김기림은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문명 비판적 주지시는 현대의 물질문명, 도시 문명, 산업화 속에서 절대적 신념이 붕괴되고 인간성도 분열되는 전환기로 보고 물신숭배, 메카니즘, 획일주의에서 인간성 회복, 즉 휴머니즘에 집중한다. 이러한 비판적 열정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가치관, 문화적 질서, 문학양식의 관습을 타파하거나 극복하려는 데서 해체와 실험을 하게 되고 때로는 예리한 풍자와 비웃음과 넉두리로 모던의 우울한 단면을 비판한다. 이유 시에서도 이러한 정서가 강하다.
휴식이 필요해
잠을 청하려는데
아래층에서 이사를 하는지
동물의 뼈 닳는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장롱이며 냉장고가
기린 목을 타고 내려간다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무게 없는 살림살이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쓸쓸히 집을 떠나고 있다
평생 셋집만 전전했다는데
또 어디로 옮겨 앉는 것일까
아니면 나 없던 사이에
영혼의 집을 마련한 것일까
노인의 모습 보이지 않아
무작정 내려가 물어보니
이삿짐센터 직원이라 모른단다
뼈대 앙상한 기린
땅에 네 무릎을 꿇고
꼿꼿한 힘을 보태고 있다
-「이사」전문
칸칸이 맞추어 놓은 주택단지에 퍼즐 한 조각이 사라졌다 정오의 햇볕이 그림자를 뱉지 못해 끙끙 앓는다 속을 비운 봉지와 몸이 뒤틀린 종이는 세상과 소식을 끊었다 소줏병은 교차로 정보지에 휘둘린다
놀이터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막대기를 휘두른다 절룩거리는 비둘기는 기억을 쪼아 먹는다 코가 삐뚤어진 남자가 이리저리 주억거리며 자라목을 빼고 있다
속이 궁금한 고양이가 헤집고 다닌다 플러그를 땅에 꽂은 냉장고는 깊은 침묵에 들었다 의자가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우주를 수신하는 명품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누군가 주워든 마지막 퍼즐 한 조각, 꿈이 동그랗게 말린다
-「꿈꾸는 공터」전문
1
발에 밟힌 왕개미 한 마리를 일개미들이 에워쌌다 지네의 발처럼 들러붙어 안간힘을 쓴다 조금씩 움직이던 왕개미는 드디어 굴속에 안장되었다 굴속에는 애벌레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2
사람들이 상여를 떠메고 간다 상여의 양쪽에 붙어 보폭을 맞추고 있다 경전처럼 받들어진 자는 서서히 움직인다 시신은 무덤 속에 안치되었다 몸에 꼭 맞는 집을 마련해 주고 입구는 대못을 박아 놓았다
3
찐 밤을 과도로 두 쪽 냈다 밤 속에 죽은 애벌레가 있었다 무덤을 쪼갠 손이 파르르 떨렸다 시체를 토막 내고도 잠깐 경악했을 뿐 여전히 무덤덤 새끼들을 먹인다
4
포인트가 오르내리는 장세가 개미군단을 유혹한다 개미들이 푸른 잎을 상여처럼 떠메고 다닌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왕개미의 주파수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장세는 이미 기울었다 개미가 개미를 먹어치웠다
-「무덤」전문
인용한 시「이사」를 보면 도시에서 이사하는 장면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여유 있는 자의 이사가 아니고, 바람에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무게 없는 살림살이,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평생 전셋집만 전전하는 신세, 거기다가 한물간 노인의 이사 장면이다. 거기다가 이사 가는 목적지도 불확실하다. 이러한 인물의 이삿짐은 뼈대가 앙상한 기린 같은 사다리차가 나르는데 이삿짐 옮겨지는 소리조차 특이하다. “동물의 뼈 닳는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고 했다. 정말 이사치고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이사 장면이다. 사다리차를 이용할 정도면 꽤 높은 고층 건물일 것이고 그렇다면 산업화 도시화를 즐길만한 처지일 것 같은데 어째서 이 노인은 이처럼 영세한 빈민으로 유랑하는 것일까. 이는 산업화 도시화라는 현대의 빛과 그림자,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상반된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현대라는 것, 어쩌면 이는 물질적 경제적 빈곤만이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빈곤 속에 사는 모더니즘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위기는「꿈꾸는 공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먼저 칸칸이 맞추어 놓은 주택단지가 등장한다. 요즘 모두가 열망하는 아파트 단지를 지적한 것인데 칸칸이 맞추어 놓았다는 말에서 도시화, 산업화가 오히려 획일화, 자유로움 보다는 구속화라는 아이러니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곳에서는 정오의 태양조차 그림자를 뱉지 못해 끙끙 앓는다. 그처럼 숨막히는 공간에 퍼즐한 조각이 사라진 공토가 있다. 그러나 그 공터에는 비운 봉지, 뒤틀린 종이, 소줏병, 정보지로 몸살을 앓는다. 어린 아이는 막대기나 휘두르고, 비둘기는 절룩거리고, 코가 비뚤어진 남자, 고양이, 버려진 냉장고, 텔레비전들이 널브러졌다. 다량생산, 다량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현대는 모두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어 벌집처럼 뚫려 있는 아파트 구멍에서 살며 엄청난 쓰레기를 배설한다. 그리하여 겉은 화려하지만 이면은 각종 공해와 쓰레기로 피폐화된 오늘의 도시인 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화자는 마지막으로 “꿈이 동그랗게 말린다”는 비판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도시 문명의 빛과 그림자, 화려한 네온의 불빛아래 추악한 물신주의의 행렬은 레드오션이란 말처럼 피 터지는 경쟁이 있는 악순환 속에서 싸우다 싸우다 마침내는 모두가 몰락하는 부조리를 예견하면서 시인은 작품「무덤」을 통해 네 개의 각기 다른 무덤의 에피소드를 보여준다.「무덤」1은 발에 밟혀 쓸모없게 된 왕개미를 일개미들이 끌어다 굴속에 안장하는 이야기다.「무덤」2는 경전처럼 받들던 인물의 주검을 상여에 매고 무덤에 안치하고는 몸에 꼭 맞는 짐을 마련해 주고 입구를 대못으로 막아 놓았다는 이야기다.「무덤」3은 죽은 벌레가 찐 밤의 무덤을 보고도 그냥 먹이는 엄마의 무덤덤한 양육 방법을 펀(pun)의 형식으로 지적한다.「무덤」4는 장소에 따라 몰려다니는 개미군단, 그들의 끝없는 맘모니즘이 결국은 서로가 먹고 먹히는 악순환으로 제 무덤을 파고 마는 아이러니를 조소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과일은 결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 했음에도 그들은 영원한 생명나무보다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그 인간중심주의, 바로 지식 중심, 기술 중심의 모더니즘을 선택한 결과 발전과 진보라는 인간적 유혹은 마침내 피 터지는 경쟁과 갈등에서 모두가 파멸하는 바벨탑이 되고 있음을 시적 화자는 준엄하게 경고한다.
이렇게 모더니스트 시인은 문명화된 현대를 그 대상으로 삼되 그러한 물신주의가 갖는 병리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이를 경고하게 되는데 이러한 주제들을 드러내는 데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처럼 새로운 표현방법이 필요했다. 사실 근대 낭만주의 시학은 워즈워드가 말한 것처럼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over flow) 였다. 그러나 이는 목가적인 생활에서나 어울리는 한가한 자기 위안이다. 현대는 질서 정연한 선형의 시대가 아니라 모든 것이 뛰어 넘는 혁명의 시대다. 가역적 시간도 가능하고, 가상공간, 시뮬라크르도 가능하다. 그동안 상상세계라면 유사개념을 통한 동일성의 시간과 공간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는 무의식의 세계도 있고, 사이버 공간도 있다. 그래서 시가 추구하는 세계도 슈르리얼리즘이나 하이퍼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새로운 모험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는 디지털적 모더니즘에는 역시 디지털적 시법이 요구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유 시학을 주목하게 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 속에 아버지가 산다 새로 지은 기와지붕보다 훌쩍 커버린 감나무는 지붕을 덮고 있다 헛간 위에서 홰를 치는 수탉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새벽, 마당에서 일어나 싸리비를 흔든다 아버지가 빈 지게를 지고 웃는다 납작했던 그림이 이슬을 머금고 하나의 몸이 된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웃음이 그림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그림 밖을 내다보고 있다
마주보는 눈과 마주치자 아버지 종이로 납작해진다 액자 속에서 벽에 못을 박아버린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눈빛이 유리에 부딪혀 미끄러진다 액자 속을 넘나들던 시간이 머리를 풀어헤친다
-「그림 같은」전문
창밖의 이륜차가 가로등 불빛을 밟고 간다 마주 오는 차의 불빛은 아스팔트를 핥고 교차한 불빛은 가능한 멀리 간다
겹으로 된 거실 유리창에 창밖의 풍경이 슬라이드 되고 있다 풍경은 유리창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가 유리창으로 들어간다 유리창의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다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다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다
유리창의 그녀가 남편 넥타이를 매어주고 있다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식탁을 차린다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친 그녀가 병든 어머니 손을 잡고 있다
유리창의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 그녀 몸속으로 들어간다 유리창에 비친 몸속으로 들어간 그녀가 유리창에 비쳐 유리창에 비친 그녀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유리창에 비쳐 비쳐 비친 그녀 몸속으로 들어간다
유리창에 복사된 풍경이 하나로 움직인다 유리창에서 그녀가 나온다 그녀의 짐을 무한대차가 나누어 싣고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이륜차 혹은 무한대차」전문
1+1=2
1+1=1
1+1=0
무자식이 상팔자다
꿈의 메시지다
햇살과 바람의 합이다
안과 밖의 무한한 시간이다
너와 내가 사는 우주다
-「자연법」전문
작품「그림 같은」을 보면 상상력의 무한한 자유를 보게 된다. 벽에 걸린 아버지의 초상에서 먼저 나는 무한한 상상력이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넘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그림이라는 평면에 갇혀 있는 인물이 생생한 일상으로 변신하여 지붕을 덮고 있는 감나무 아래, 수탉이 홰를 치는 새벽, 싸리비로 마당을 쓴다. 빈 지게를 지고 웃는다. 아버지의 웃음이 그림 속을 드나든다. 마주 보는 눈과 마주치자 평면의 액자 속에서 정지 된다. 그리하여 한 동안 액자 속에 갇혀 있던 아버지가 현실과 과거, 의식과 잠재의식을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의 근대적 한계를 벗어난다. 우리는 그동안 표면적으로 의식된 세계만 리얼리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식의 내면에 마치 빙산처럼 잠재된 과거가 축적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나 가치나 리얼리티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맞는다. 이를 프로이드는 무의식이니 잠재의식이니 했는데 이는 근대 합리주의, 또는 표면적인 리얼리즘의 틀을 벗어나는 정말 영혼과 상상의 자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초현실의 세계다.
이러한 상상의 자유로움은「이륜차 혹은 무한대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유리창이라는 필터를 통하여 전개되는 창밖의 현실이 유리창에 복사되면서 복사된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하는 무한복제의 세계를 창출한다. 그리하여 단조롭던 이륜차가 무한대차로 확대 되는 상상의 유희가 펼쳐진다. 벤야민은 사건이 사건이 되려면 복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복제가 되면 사건이 되고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복제가 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했는데 이 작품은 그녀가 유리창에 비치면서 그녀는 남편의 넥타이를 매주고, 식탁을 차리고,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병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유리창에 그녀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녀가 유리창에 비친 그녀 몸속으로 들어간다.
슈르리얼리즘에는 데페이즈망(dėpayhement)이라는 기법이 있다. 위치 전환법이다. 주체가 객체가 되고 객체가 주체가 된다. 사물 본래의 습관적인 틀에서 끌어내어 본래 용도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또는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변용된다. 이러한 비약을 기존의 사고로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난해한 독설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시대의 세계는 이미 가상의 현실이 현실로 작용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이 되는 것처럼 이 작품도 상상의 무한 복제로 보다 넓은 시학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작품「자연법」은 일찍이 이상이 시도했던 초현실주의 기법이기도 하다. 기존의 문장법을 해체하고 기존의 질서 있는 언술의 사고를 벗어나 이질적인 것들의 병치를 통해 초현실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 작품은 숫자로 표기된 계산법도 다르다. 시행들의 공통된 질서도 없다. 모두가 제각각이다. 그리하여 무질서의 질서가 바로 자연법이라는 또 다른 시적 진실을 역설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과 초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의 시법이 분명 모더니티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더니즘 시학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는 난해하다거나 모호하다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모더니즘 시인들의 경우 지나치게 주지적이거나 분방한 자유연상의 실험으로 하여 독자와의 괴리감을 조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유 시인의 경우는 이 점에서도 매우 세련되고 유쾌한 시법을 구사하고 있다.
보름의 달빛이 어둠을 죄다 켰다 마당 안을 서성이다 방문을 더듬었다 문은 안으로 잠겨 있다 지붕 위에서 사부작댔다 꽃판을 살짝 건드리자 박꽃이 만개했다 가로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별은 생똥을 쌌다 수돗가의 세숫대야가 받아냈다 대추나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비는 처마 밑에 숨었다 들고양이가 담을 넘지 못했다 부엉이도 울지 않았다
그날 밤, 누군가 세상 소문 다 잠그고 지붕 위에서 태어났다
-「지붕 위에, 박이」전문
어둠에 발을 디디고 서서 불을 밝히고 있다 헤엄치던 꼬리로 제 몸 가득 훈기를 품고 있다
지친 몸들이 온기를 따라 들어온다 잉어 앞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기꺼이 손을 비빈다
지루하게 밟히던 하루가 앙꼬를 뱉어낸다 뒤틀린 속이 어묵국물에 녹아내린다 피어오르던 피로가 달콤한 향기에 증발한다 검게 그을린 분노가 불빛에 사그라든다
껌처럼 달라붙은 피로를 잉어가 먹어치운다 웃을 일이 울 일을 베어 먹는다 삐걱 이던 하루가 입속에서 통,통, 터진다
-「잉어빵」전문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촉, 각, 촉, 각 쉬지 않는다
가까워질수록 시선이 좁아진다
키스를 할까 껴안을까 두, 근, 두, 근
무음으로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한몸을 이루다가
촉, 각, 촉, 각 멀어져 간다
서로의 보폭과 눈높이가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지만
내밀한 그리움으로
심장은 항상 초, 분, 초, 분 뛰고 있다
-「정오의 설레임」전문
거울이 재활용 수거함 옆에서 나무에 기대어 내장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거울의 내장 속에 고양이가 목을 넣었다가 뺀다 거울이 고양이를 삼켰다가 뱉는다
맑은 날 고양이가 그림자를 주렁주렁 달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거울 속의 고양이가 등을 구부리고 거울 밖을 흘겨본다 거울이 내장을 출렁인다
어둠이 깔리자 거울이 고양이를 뱉어내고 투명해진다 눈을 잃은 고양이가 휘청 이다 두 발로 거울의 뼈를 움켜쥔다
쨍그랑!
거울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피를 맛본다
-「거울의 이빨」전문
모더니즘 시가 물신주의나 기술주의가 갖는 비인간화에 깊은 우려를 하고 이를 비판 하는 데는 시인도 역시 지적 이해가 필요하고 지적인 비판이 요구된다는 데서, 주지적 모더니즘의 시를 쓰게 되고, 현대가 프로이드 이후 의식의 확대라는 데서 무의식이니 잠재의식이니 하는 심층적, 또는 초현실적 세계를 모험해야 한다.
그러나 모더니즘 시는 지난시대의 진부한 이미지나 기계적인 리듬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제재와 내재적인 리듬을 창조하되 드라이하고 단단한(dry and hard) 이미지를 흄은 강조했고 엘리어트는 보다 선명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을 말했으며 랜섬은 형이상적 기상(metaphysical conceit)를 말한 것처럼 현대문명이라는 패러다임에 대응할 수 있는 예리하고 비상한 충격적 시법을 찾게 되는데서 아이러니, 역설, 낯설게 만들기 등의 구조가 시도되며 유사성의 비유보다 비유사성의 폭력적 결합이라는 새로운 메타포를 구사하게 된다.
이유 시인은 바로 이렇게 전환기를 맞는 모더니즘 시학의 중심에서 산업화 도시화라는 화려한 뒤안길에 숨겨진 역기능들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지적할 뿐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또는 정보화시대의 하이퍼 리얼리즘 까지 넘나들면서 상상력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시학은 모더니티 하면서도 현대에 대한 부정적 비판이나 초 현실이나 무의식이라는 낯 서른 세계를 난해한 언어의 뒤틀림으로만 일관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과 꿈이 있는 모더니즘의 미래를 그 나름의 신선하고 유쾌한 메타포로 시도하고 있다. 바로 이번 시집 제목을『희망의 세레나데』라고 한 것에서도 그 의도를 짐작케 한다.
작품「지붕 위에, 박이」를 보자. 보름 달빛이 어둠을 죄다 켜고는 마당을 서성이다. 방문을 더듬었으나 문이 안으로 잠겨 지붕 위에서 사부작대다 꽃 판을 건드리자 박꽃이 만개했다고 했다. 이 때 가로등은 눈을 감고, 별은 생 똥을 싸고 세숫대야가 이를 받아냈다고 했다. 대추나무, 제비, 들 고양이, 부엉이도 이들 달빛과 박꽃의 잉태 과정을 모른 척 했고 그래서 지붕위에 박이 태어났다는 신비한 생명탄생의 설화가 유쾌하게 서술되고 있다.
이는「잉어빵」에서도 그렇다. 비록 고단한 일상, 분노가 치미는 가난한 생활이지만 붕어빵과 어묵국물로 “껌처럼 달라붙은 피로를 잉어가 먹어치운다, 웃을 일이 울 일을 베어 먹는다 삐걱이던 하루가 입속에 통, 통, 터진다” 했다. 신선하고 낯선 메타포를 통해 오히려 유쾌하고 희망적인 세상을 꿈꾸게 한다.
「정오의 설레임」도 그렇다. 시계의 분침과 시침의 만나고 헤어짐이 연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에서 느끼는 기대와 상상의 두근거림이 오버렙되어 신선하고 유쾌한 감성을 자극한다. 「거울의 이빨」에서는 비록 도시의 재활용수거함이라는 어두운 단면이 모더니즘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거울의 메타포는 그런 부정성과 무관하게 독특한 미학을 만들고 있다. “거울이 재활용 수거함 옆에서 나무에 기대어 내장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학의 생명은 메타포(metaphor) '넘다‘와 ’옮기다‘이다. 이를 데페이즈망이라고 했다. 거울을 내장으로 변형하고, 거울 앞에서 아른대는 고양이를 거울의 내장에 들어갔다, 나왔다, 삼켰다, 뱉었다, 로 표현하는 것들은 지금까지 자연물에서 동일성을 찼던 주정주의 시학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신선한 감수성이며 이는 이유 시인만이 구사할 수 있는 유쾌한 메타포다.
이처럼 이유 시인은 한국시단에서는 보기드믄 여류 모더니즘 시인이다. 그런데도 여타의 모더니즘 시가 지나치게 지성적이고 냉소적이어서 거리감이 있고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기법의 자유로운 실험이 난해성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이유 시인의 경우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선하고 유쾌한 메타포가 오히려 친화감을 주고 있어 그의 시는 도시문명의 엘레지가 아니라 희망의 세레나데가 되고 있다
* 홍 문 표
․고려대(문학박사), 시문학(77) 시인등단 서울기독대(신학박사),
시인, 평론가․명지대학교 명예교수, 전 오산대 총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시집『나비야 청산가자』『지상의 연가』『수인과 바다』외
․평론집『에덴의 시학』『상생과 구원의 문학』외,
․수필집『지상의 선택』외
․학술저서『현대시학』외 20권
․수상: 조연현문학상, 심연수문학상, 동포문학상 외
․「창조문학」대표
․ 홍문표 문학관 운영
□ 제24회 창조문학대상 시부문 수상자 조성호 작품선
밤낚시 외 9편
조 성 호
잘 보고 있어야 한다
물속을 이어주는 안테나에는
바닥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
없던 세상이 깜빡거린다
얼마를 기다려야 당도할까
한 겹 한 겹 공들여 쌓아가는 시간 속으로
한숨처럼 밑밥을 털어 넣는다
대형스크린 한 귀퉁이가
부욱 찢어지고
그 사이로 밀려온 빛의 조각
허공을 가른 막대를 쥔 손에
번개 하나 쥐어주고 가버린다
낮 동안 그 틈을 엿보던 물새들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달관한 표정으로 날아가고
탐조등처럼 불을 켠 머릿속
고요한 평화가 헤엄친다
겨울 물왕리
차가워진 호수
좀처럼 기척을 내지 않더니
투명한 비닐 랩으로 한 겹 두 겹 켜켜이 쌓아
말문을 굳게 닫았다
잔잔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바람과 함께 세차게 전해주는 충고를
찰싹대며 두들겨 주던 격려를
들어주지 못한 탓이다
소란스러운
마음의 소요로 인해
너의 소리를 듣지 못한 탓이다
이제 출렁이는 기척은 없지만
어딘가에 잠복한 고요를 들으려
마음의 귀를
깊이 가져가야 한다
존엄사의 진실
숨을 한 번 내쉬고 사는 것
언제부터 그리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
말라비틀어진 뱃골에 달린
가느다란 숨결
산소 호흡기를 탯줄처럼 달고 있다
날마다 마주하던 해와 달
스위치 켜고 내리면 나가고 들어오는 전등처럼
쉬이 교대하는데
아직도 무엇이 남아있어
저리도 사지(四肢)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향유했던 시간은
끈이 끊어져
별똥별처럼 지려하고 있는데
삶과 죽음의 문턱은
꼬리가 끊긴 도마뱀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치열하다
오늘의 감사
오늘처럼 캄캄한 날은
고단한 작은 산새처럼
영혼의 날개 접고
그저 쉬어 갑니다
연약한 육신 제물삼아 드리는
외마디기도
따스함으로 보듬어 주시니
그저 감사합니다
어느새 천국의 뜰을 거닐게 하시고
독수리 날개 펼치게 하시니
그저 감격입니다
오늘 햇빛은
저에게만 비추는 듯하여
그저 눈물 흘립니다
오늘 예배는
생명의 강이 다함없이 넘쳐흐르니
그저 기쁩니다
1월의 사랑
불을 껐다 다시 켜듯
새롭게 연륜이 그어지고
희망으로 채울 새 꿈이 있어
1월은 늙지 않는다
억만금 보석 같은 365일
오늘과 내일
널뛰듯 발 굴러 춤추며 가야하기에
1월은 하루, 하루 은총이다
소리 없이 피어나는 꽃처럼
그 결연한 첫 마음이
12월까지 이어져야 하기에
1월은 두 손 모은 기도다
날아오르는 새처럼
우리에게 약속된 길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가야하기에
1월은 은혜로운 말씀이다
2월의 사랑
2월 중순
벌써 추운바람 떨치려 한다
얼었던 흙이 풀리는 봄이
어디 쯤 오고 있긴 하나본데
잔설(殘雪)은
쉬이 떠날 줄 모른다
용케도 겨울을 보낸 자연의 경이로움
생명싸개로 보듬는
새 창조의 손길을 보면서
2월은
서성대는 외로움마저
사랑하고
먼 길 떠나고 싶어 한다
3월의 사랑
들쑥날쑥한 불만의 겨울이 지나고
낮이 길어진다
이제 봄기운이 폴폴
기억의 저편부터 사르르
기분이 좋아진다
새내기들의 발돋움소리에
귀가 맑게 트인다
감사와 고마움으로
음습한 나를 말린다
4월의 사랑
우르르 사방에서 몰려온
봄꽃들은 알고 있다
생명의 반전소식을 전한 호외(號外)가
4월의 사랑인 것을
비 갠 날 아침 가장 잘생긴
봄 산은 알고 있다
황사 묻은 나뭇잎 닦아주고
대신 제 가슴 적신 빗물의 사랑을
푸르른 날의 격정이 솟구치는
들녘은 알고 있다
언젠가 만발했던 사연은 떠나고
무심히 세월도 지지만
열심히 사랑한 것은 남는다는 것을
5월의 사랑
오월의 눈부신 산야를
초록이 뒤덮을 때
크레용으로 꼬물꼬물 그리는 유년의 캔버스엔
약속의 무지개가
몽실 몽실 피어오른다
반갑게 날리는 바람개비 따라
아이들의 수선화 같은 웃음소리가
들판으로 퍼지면
동화(童話)들을 하나 둘 데려온다.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신 말씀처럼
그제서야 열리는 하늘나라
이 소자 하나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 지고 바다로 뛰어들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니까
6월의 사랑
반쯤 수그린 하늘 아래
중년의 사랑은
풋보리 물결처럼 출렁인다
반평생 살아온 녹음은
맑은 날도
상하기도 채이기도 했을 날도
감사하고 사랑하며
평화롭게 물들어 간다
절반의 계절은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한창 자란 나무 그늘에서
맑은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싱그러운 초록 잎 한 번 눈길 주고
쉬었다 가라고 한다
□ 제 24회 창조문학대상 수상소감
시의 쓸모를 생각하며
조 성 호
나는 비를 좋아한다. 시는 바싹 말라붙었던 대지가 촉촉해지고 공기는 더욱 청명해 지는 단비 같다. 시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팍팍할까? 시는 메마른 감성에 서정과 휴식을 준다. 이번 수상 소식은 늘 꿉꿉하던 내 시 작업에 한바탕 내린 단비와도 같다.
바람 부는 게 좋다. 바람이 불 때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이 참 좋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호흡하는 나무는 바람 따라 반응하며 제 몸을 추스른다. 내 시에 바람이란 표현이 그렇게 많은지 시평을 보고서야 알았다. 내 시의 8할은 바람의 힘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바람이다.
그동안 내가 짓는 시들이 어떤 쓸모가 있을까 고심했다. 늘 시력에 힘이 부친 나는 문학상은 먼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다. 창조문학으로 등단 후 20년 가까이 시를 써오면서도 누군가 나를 시인으로 소개하면 부담을 느낀다. 이번에 창조문학 대상을 받으면서 어깨를 조금 펼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알아줌을 받는 것 참 큰 위안이다.
* 조 성 호 · 창조문학 대상(시부문)
· 서울 출생
· 총신대 신대원 졸업
· 창조문학 시 등단
· 창조문학 운영이사
· 한국 크리스천문학 부회장
· 총신문학회 회원, 비존재 회원
· 우당문학회 회장 역임
· 한국 작은도서관협회 회장 역임
· 창조문학 대상 수상
· Beautiful World 회장
· 드림교회 담임목사
· 시집:『침묵을 노래하는 악기』
『바람에도 마음이 있다』
□ 제 24회 창조문학대상 조성호 수상 시집 평
목사시인의 서정 모더니즘 바람시학
- 조성호 시집 『바람에도 마음이 있다』대상수상시집에 부쳐
이 영 지
(문학박사 · 철학박사 · 시인 · 시조시인)
1. 성경의 2회 리듬을 따르는 바람시어
조성호 시인이 두 번째 시집『바람에도 마음이 있다』를 상재하게 되었다. 창조문학사로 2002년에 등단하고 첫 시집『침묵을 노래하는 악기』(2010)에 이어 9년 만에 다시 상재하게 된 두 번째 시집이다. 10년마다의 간격 시집출간이다. 그 만큼 조성호 시인은 시에 대한 충분한 숙고를 거쳐 이루어 내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가치는 발간한 두 시집의 제목 모두가 시가 향유하는 특유의 성역, 은유를 시의 유일한 특징 반복리듬으로 활용 한다. 시의 은유가 지닌 무한한 암시성을 제 1 시집 제목 『침묵을 노래하는 악기』에서 ‘침묵’ 관념어와 ‘악기’ 사물어로 하였다. 그리고 제 2시집 제목 『바람에도 마음이 있다』의 ‘바람’ 사물어와 ‘마음’ 관념어 로 두 번의 시집은 모두 똑 같이 사물어와 관념어 형식을 지니는 반복리듬에 서 있다. 이러한 예시성은 시집 내부의 항목에 있어서도 제 2시집『바람에도 마음이 있다』가 지닌 1부 ‘바람에도 마음이 있다’ 2부 ‘밤비 내리는 이유’ 3부 ‘방황하는 이여’ 4부 ‘그는 어디로 갔을까’ 5부 ‘열두 달을 걸으며’로 짜여 이와 비교되는 제 1시집 1부 ‘비가 되어 내리고 싶다’ 2부 ‘그의 하늘에 떠 있고 싶다’ 3부 ‘그날이 언제일까요’ 4부 ‘바람처럼 사랑하여라’ 5부 ‘그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반복 리듬으로 제 1시집의 5부 ‘그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를 제 2시집 4부 ‘그는 어디로 갔을까’로 반복하고 있다. 제 1시집의 “지금”이라는 시어가 제 2시집에서 없을 뿐 동일 반복리듬이다.
조성호 목사 시인의 제 2시집 제목『바람에도 마음이 있다』는 1부 첫 번째 작품「바람에도 마음이 있다」로 다시 반복리듬으로 한다. 이 바람은 신학 메시지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는 때의 신이 루아흐 וּר(루아흐··영, sprit, 창세기 1장 2절) 곧 바람과 밀접하다. 그만큼 하나님의 신을 사역하는 목사시인의 ‘바람’이다. 시인의 마음 중심에 있는 분에 대한 사모 메시지로 시집 제목에서 그리고 시로 다시 체계화하는 2회 리듬이다.
‘바람’시어는 이 시집에서 19회 사용되었다.
바람에게도 마음이 있다 (10) 잡초(雜草)의 쓸모바람(2)
하늘 사다리(1) 소사나무(1) 노량진에서(1) 열매는 비바람(1)
거을 사랑(1) 낙엽(1) 예배당 풍경(1)
제목과 첫 작품의 시어 메시지는 바람이다. 그러기에 시 전체 이미지를 만든다. 따라서 조성호 목사 시인이 푯대로 내세운 바람은 시적인 은유 메시지이다.
다음은 가장 많은 바람 시어가 있는『바람에도 마음이 있다』시이다.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다
흔드는 바람은 한마디하고 싶은 것이다
산비탈에서 굴러온 바람은
묵혀둔 숲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이다
칼바람은 길을 잃고 아픈 것이다
큰바람은 제 몸 뜯어 태우고 싶은 것이다
실바람은 마르고 닳도록 쓰다듬고 싶은 것이다
호수에 파랑을 일으킨 바람은
눈물 적시고 다녀간 자리다
바람 머무는 자리가
내 몸 뿐이랴
언제나 머물고 싶은 자리에 바람이 있다
바람에게 말 걸고
커피 사주고 싶다
- 「바람에도 마음이 있다」전문
시인의 바람은 산비탈에서 굴러온 바람 · 길을 잃고 아픈 칼바람 · 제 몸 뜯어 태우고 싶은 큰바람. 마르고 닳도록 쓰다듬고 싶은 실바람 · 눈물적시고 지나간 파랑을 일으킨 호수 바람 · 내 몸에 머무는 바람이 모여 있다. 각기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이 묘사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의인화법이다. 생명체를 가진 바람이다. 천지만물의 바람에게 시의 화자는 이들에게 커피를 사주는 시인의 되고 싶어 한다.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생긴다. 절대자의 사역이다. 절대로 그들 바람의 바람을 들어 줄 수 없는 시인임에도 목사시인으로서의 사역 그것은 커피사주는 일이다. 바람과 바람 곧 희망이미지인 마음의 소원이미지 바람과 사물어의 바람이 이중 은유를 지니면서 2회 은유 리듬을 탄다. 시인은 자연 존재 그 귀중한 숨소리를 듣는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을 제시, 바로 신을 불러오는 바람, 바로 큰 바람의 몫이 암시된다. 이 절묘한 시인의 묘사는 이 시에서 큰 바람이 그 무한의 영역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된다. 신에게로 바람 소리를 인도하려 한 목사로서의 소명의식이 리듬을 타면서 바람시학의 시인이 된다.
큰 바람과 대별되는 시인의 바닷바람이 있다.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별이 되어 바닷바람 쏘이며 갈대처럼 살고 싶은 바람이 있다.
바닷바람 쏘이며
갈대처럼 모여 살고 싶었다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별이 되어
잎이 작고 줄기가 작다고
고목나무 취급한 철없는 세상은
여윈 햇빛 가로 막고
오글오글 꼬인 라면발처럼 꼬았다
철새들 한 점 허무를 싣고 떠난 뒤
십리포 해안가 담장 밑에
가만히 드러누워
여인의 풀어 헤친 머릿결처럼
웃고 있다
-「소사나무」
잎이 작고 줄기가 작다고 고목나무 취급한 철없는 세상은 여윈 햇빛 가로 막고 오글오글 꼬인 라면발처럼 꼬았다. 여기에 바람이 있다. 관념어 바람, 사람의 마음이 있다. 절대자의 마음이 있다. 이러한 조성호 시인의 묘사비법은 정말로 하고 싶은 바람의 역할을 시의 은유로 숨기고 있다. 이 우수성은 곧 시「노량진에서」 살짝 들어나기 시작한다.
.
매미가 떼 지어 곡하는 7월
도로변 바람 따라 펄럭이는 깃발이
파도처럼 손짓하지만
언제쯤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노량진 골목마다
1분 1초가 아까운
여유를 포기한 청춘들
지긋지긋한 책 더미를 안고
좀 더 조금만 더 열심히
엄하게 자신을 꾸중하며
가장 열공했을 젊음의 한 페이지를 쓴다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 아래
만발한 빨간 장미
산야를 두른 초록빛이
당신들의 꿈과 사랑을 응원한다
- 「노량진에서」
노량진 그 불모의 땅이 있다. 그러나 바람의 바람 역할이 있다. 한 일은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깊어서 조용하다. 그러나 바람은 바로 만발한 빨간 장미와 산야를 두른 초록빛이 응원하는 바람이 되어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깊다
…
비가 많이 내릴 때는
흙이 흘러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고
비가 없어 건조한 날은
흙먼지 막아주니
…
세상 어디에고 떨어져
밟히는 자리마다
들불을 피워 올리니
-「잡초(雜草)의 쓸모바람」에서
쓸모 바람이다. 그러나 바람이 절대자의 영역으로 드러나면서 “비가 많이 내릴 때는/ 흙이 흘러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고/ 비가 없어 건조한 날은/ 흙먼지 막아주니”의 바람이다. 시인은「잡초(雜草)의 쓸모바람」이라고 하고 있다. 조시인 바람시학의 가치는 바닷바람 쏘이며 갈대처럼 모여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별이 되어(「소사나무」) 소망의 길을 찾아주는 사역이다. 조 시인은 큰 권능자 세계의 하늘 사다리를 탄다.
「하늘 사다리」시가 있다. 큰 바람이다.
날뛰던 꿈은 부서지고
산다는 게 아득하고
움켜진 무지개를 놓친
무쇠 빛 하늘과 들판에서 보았다
땅의 것만 알던 경제가 기울고
달도 기울어 어둠을 짊어진
고비의 길목에서
누추한 생각에 새 지평이 열린다
채 다 차오르지 못한 달 사이로
두 손은 구름을 밀고
두 발은 어둠을 밀고
가슴은 하늘 길 열고 있다
모래 바람 부는 사막도
황량한 대지도
어둠이 깃든 굴도 아닌
무한한 하늘로
- 「하늘 사다리」에서
빛 없는 밤길을 걸어가듯
방황하는 이여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들풀같이
세파(世波)에 숨죽이는 이여
어둡고 축축한 동굴에서 나와
은혜 받는 하루를
시작하시게
그늘에서 자란 이들의
옹이 박힌 마음속까지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팔에
매달리시게
- 「방황하는 이여」에서
뚜렷한 시적 이중 묘사 관념어 바람과 사물어 바람 사이에 절대자의 바람이 있다. 시적 화자가 본 하늘 사다리가 있다. “날 뛰던 꿈은 부서지고/ 산다는게 아득하고/ 움켜진 무지개를 놓친 그 때 목사시인은 방황하지 말지어다라고 다독거리면서 바람으로 사역한다. 격려한다. 경제가 기울고 달도 기울어 어둠인 고비의 길목에서 열리는 하늘 사다리를 알린다(「하늘 사다리」) “노량진 골목마다/ 1분 1초가 아까운/ 여유를 포기한 청춘들”에게 목사시인은 하늘 사다리를 알려주는 바람 시학자이다.
지긋지긋한 책 더미를 안고
좀 더 조금만 더 열심히
엄하게 자신을 꾸중하며
가장 열공했을 젊음의 한 페이지를 쓴다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 아래
만발한 빨간 장미
산야를 두른 초록빛이
당신들의 꿈과 사랑을 응원한다
- 「노량진에서」에서
차가워진 호수
좀처럼 기척을 내지 않더니
투명한 비닐 랩으로 한 겹 두 겹 켜켜이 쌓아
말문을 굳게 닫았다
잔잔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바람과 함께 세차게 전해주는 충고를
찰싹대며 두들겨 주던 격려를
들어주지 못한 탓이다
소란스러운
마음의 소요로 인해
너의 소리를 듣지 못한 탓이다
이제 출렁이는 기척은 없지만
어딘가에 잠복한 고요를 들으려
마음의 귀를
깊이 가져가야 한다
- 「겨울 물왕리」에서
조시인 바람시학은 사물어 바람보다 보이지 않는 절대 권력자의 바람 영의 세계를 더 알린다. 주님의 뜻으로 걷는「12월의 사랑」과「열두 달을 걸으며」로 하는 성경의 2회 리듬 시인이 되는 동시에 사역자로서의 목자의 길을 걷는다. 12달은 1년이며 이 1년은 이어져 일생이 된다.
제 1시집 메시지 4부 ‘바람처럼 사랑하여라’의 명령형이 있다. 절대자의 명령 메시지이다. 다만 시인의 시를 통하여 친근감으로 접목하고 알려 주는 비유 묘사 이미지 시이다. 그러기에 2회 리듬이 되는 제 2시집 제목『바람에도 마음이 있다』로 확대된 신(神) 절대자의 바람 은유다. 영성으로서의 영역 2중 은유이다.
때문에 조성호 목사시인의 아주 중요한 이 2회의 반복리듬 시사는 성경리듬이다. 이 2회 리듬은 곧장 성경의 두 개의 물, 아랫물과 윗물로 나누는 창세기 1장에서 전개되는 둘째 날을 직시한다. 성경은 예수님의 자리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많이 2회 반복리듬 묘사 언술을 한다. 첫째 아담이 아닌 두 번째 예수님 자리를 구체화하는 성경은 처음과 끝 תא 에트 · 사람과 주님 · 주님과 하나님 · 전쟁 신학의 세겜 언약갱신 · 사사 기드온의 하나님의 사사알림을 위한 두 번의 이슬 모양 · 드보라 노래와 모세의 노래 · 여리고 전쟁때 6일까지 매일 하루 한 번 씩 여리고 돌다가 7일째 7바퀴 돌며 큰 소리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두 번의 흐름 · 사사기 5장에서 2회 리듬 상하구조 배치 · 20년간 야빈의 학정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받은 드보라와 바락 · 사사기 5장에서의 2회 리듬! 등등이 있다.
* 사사기 5:1-31까지의 리듬
삿:5
원문
발음
의미
글자의미
회수
순
3절
ההי
라여호와
그를 위하여
숨쉬려고
2
1
3절
יאָ
아노히
나
배움 영원히
2
2
4절
וּפ
나트푸
dropped
지혜입술
2
3
5절
י
미프네
앞에서
입술의 은혜
2
54
5절
הה
여호와
하나님
숨쉬게 하시는 분
2
6
6절
תוֹח
아라호트
대로
머리가 인식하는
2
7
7절
ל
이스라엘
이스라엘 안
속죄하심
2
8
10
-ל
-알
-에
-번제
2
9
11
ת
지드코트
의
향기로움
2
10
12
יוּע
우리
일어나라
하나님의 눈 안에
2
11
13
-ד
-예라드
강림
하나님 가슴이 옴
2
12
19
םי
믈라킴
열왕들
가나안 왕들
2
13
19
וּמ
니르하무
싸움
전쟁(가나안)
2
14
20
וּמ
니르하무
싸움
전쟁(이스라엘)
2
15
21
ל(
나할
강
유업
2
16
21
ןוֹשׁי
기손
강
옛강
2
17
22
תוֹר
다하로트
달리다
가슴을 내밀었다
2
18
23
ת
라즈라트
돕다
와주었다(안도움)
2
19
23
הה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안도움)
2
20
24
트보라크
복을 받다
하나님 일 하다
2
21
24
םי
미나쉼
다른여인들
여자
2
22
27
ע
카라
구부러지다
굽다
3
23
27
ל
나팔
엎어지다
떨어지다
3
24
28
ד
브아드
으로, 에서
보이는
2
25
28
וּד
마두아
어찌하여 왜
가슴에 들어오는
2
26
30
ל
솰랄
노략물
부서지고,부서지는
4
27
30
םי
즈바임
채색옷
눈으로 드는 향기
3
28
30
ה
리크마
처녀
갖고싶은
2
29
성경은 바람의 이야기를 둘로 나눈다.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의 여호와 2회 리듬으로 시작한다. 명령 상하 리듬 하나님의 의로운 일을 창출하라 전하라 노래하라의 명령자와 이 명령을 전하는 자의 상하리듬 2회 · 여호와 여호와 · 매일매일 · 여섯 여섯 · 일곱씩 일곱씩 · 둘씩 둘씩 · 기는 것 기는 것와 ·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치겠고 · 모셔 모셔 · 모세 반석을 두 번 침· 가난한자의 규례 반복 · 십계명 두 번째 돌 판 · 저주와 축복 2회 리듬 저주는 순종하지 않아서이며 큰 축복은 순종 · 두 돌 판 상징, 첫째 돌판 1 - 35장 · 둘째 돌판 36 – 66장 이사야서 총 66의 예수님의 나이 33세의 2회 리듬에서이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 22:11), 달라달라아(출 2:19창 22:11), 등등!
이쯤 되면 조성호 목사 시인의 2회 리듬에 대한 놀라운 하나님 사랑을 받은 사역자로서의 목사시인의 자리가 증명된다. 조성호 목사시인은 시인으로서 바람 시어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리는 귀한 시이다. 목사는 그냥 목사가 아니다. 더구나 목사시인으로서의 가치가 여기에서 입증된다. 축복받는 시인 증거이다.
2. 서정 모더니즘 시인
홍문표 창조문학사 대표 목사시인은 조성호 목사시인을 평하여 조성호 시인 제 1시집『침묵을 노래하는 악기』해설에서 조성호 목사시인은 그의 시심의 내면을 절대자에 대한 절절한 감성을 절제하면서 그를 나타내고 있다 하였다. 바라보는 대상을 존재의 가치로 격상, 시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실천하고 싶은 사역자로서의 고민과 철학을 그리고 있다 하였다. 조성호 시인의 제 1시집『침묵을 노래하는 악기』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일을 사역하는 몸인 목회자의 시가 하나의 악기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라 하였다. 바람시학을 시로 묘사한 것이다.
조성호 목사시인은 모더니즘 계열의 김지향 추천에 의하여 계간지「창조문학 45」(2002 봄)호 제44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고등어」「가을여행」「겨우살이」「가슴을 쪼으는 새」4편으로 등단했다.
신인 시 심사위원장의 심사평을 참고할 수 있다.
조성호의「고등어」외 3편은 간결하고 투명하다. 조성호 시인은 목사다. 대체로 신앙 시는 진술위주로 직조하는 수가 많다. 조성호 목사의 경우는 진술보다 묘사위주로 짜여 진 것이 기존의 신앙시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다고 보겠다. 묘사를 통해 간결하고 투명한 이미지를 표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묘사 속에 메시지를 깔고 있어 재미를 느끼게 한다. 특히「고등어」는 빼어난 아이러니를 원용하고 있어 미소를 짓게 한다.
- 2002년 봄호 45호 44회 시 당선심사평 홍문표심사위원장의 심사평
조 목사 신앙 시 방향인「창조문학」신인 시 등단 작품이다.
철썩-
철썩-
뒤척이던 바다
푸른 물살로 받아내고
날 시퍼런 삶 앞에
휘둘려
등줄기는 멍들어 가는데
사람들은
등 푸른 생선
DHA함유량이 많다고 말하네
“어휴, 고등-교육 힘드네”
얼굴 붉혀
폴짝-
식탁에 올라 앉았다
- 「고등어」
한 계절을 넘어
담아도 담아도
채워지지 않는 바램은
늦가을 몸살
정성 아우라지
한 굽이를 돌고 돌아
낙엽송 머리 풀어 수(繡)놓고
발자국마다
서걱이는 흔적
마른 가랑잎에 찍고
공복의 시간으로부터 일탈하는
내 가슴은
흘러가는 핏물 되어
대천을 이룬다
- 「가을 여행」
나이 찬 계절
삶의 완결판을 가지 끝에 매단다
열매는 오색 옷 입고
내 가슴에 묻어나고
속살은 까맣게 타버렸다
들뜬 초점을 밀어내고
추억함의 망원경으로 꽉 꽉 채워
하얗게 수의(壽衣)로 바꾸어 입는다
떠남이 섧지가 않다
하늘에 닿기 위한 숨결은
다시 땅을 바라던 기린의 발돋움처럼
소리 없이 나를 가둔다
바람이 불면
찬 서리에 젖은 달빛처럼
내 쳐진 어깨위로 내려와
겨울 속으로 황급히 숨어든다
많은 생각을 가슴에 담아
- 「겨우 살이」
설악 오색으로 통하는 길에는
작은 창으로 날아드는
산새가 있다
피로한 날들의 지게는
힘없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파득거리는 날개 짓을 접고서야
자유로워진다
창이 나 있는 그물에는
우주가 엉켜있다
산새는 떼 지어 날아와
자근거리며
가슴을 쪼아 먹고 있다
하늘로 향하는 길에는
꿈속에서만 날아오르는
바보 새가
포충망에 꾸역꾸역
가슴 시린 날갯짓으로 안겨들고 있다
- 「가슴을 쪼는 새」
작품 네 편중에서 홍문표 비평가는 대표작으로 시「고등어」를 뽑고 심사평에서 ‘빼어난 아이러니는 고차원적인 묘사를 즐기는 시인’이라 하였다. 최대의 아이러니컬 비유를 적용 고등어를 감히 성경 이미지로 하고 있다고 했다. 조목사시인의 신앙 시로서의 시의 해설 방향이 정해지는 이 아이러니를 지닌 시적 그의 묘사는 계속 제 2시집에서도 모더니즘 시가 지닌 시의 가치를 은유의 시에 둔다. 주지적 이미지 묘사시인 조성호 목사의 제 2시집 두 번째 시집『바람에도 마음이 있다』가 계속 이어진다.
조성호 시인 등단 시 그의 당선소감이다.
자연은 문학의 창이라고 생각이 든다.
과장되지 않으며 그 속에서 부단한 사색과 탐구거리를 얻기 때문이다. 5년 전 현재 사는 곳으로 이사한 후 자연과 주변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면서 시작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풀 한 포기, 무심한 한 마디 말도 생명력이 있거든 우주와 영혼으로부터 들리는 내면의 소리는 얼마나 청아한가. 시어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성숙하게 만들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정진해 왔지만 늘 아쉽고 모자랄 뿐이었다.
이번에 너무나 귀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시의 눈을 뜨도록 지도해 주신 김지향 교수님께 그리고 용기를 주시는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자 더욱 노력하여 정진하련다.
- 44회 시 당선소감「자연은 문학의 창」(2002 봄호 45호)
자연에서 시의 소재를 찾는 조성호 목사시인은 묘사를 일차적으로 개방하면서 그 안에 숨어진 서정 모더니즘을 찾는다. 시인의 감성이 덧붙여진다. 이 근원은 모더니즘시의 대가 김지향 시인의 추천으로 창조문학 시 부문 44회 신인문학상(2002년 45호 봄호)을 수상한 문단 통로에서 찾아진다. 모더니즘 계열은 현대 시인협회 문덕수 계열에 속하고 이어 홍문표 목사시인이 이끄는 계간잡지 창조문학의 성향인 서정 모더니즘 시의 계열이다. 정지용 이상 시가 언어의 예술임을 명시했던 김기림에 류로 이어지는 계열에서 이와는 다소 다른 목사시인으로서의 홍문표 모더니즘적 서정시인의 계열 서정모더니즘 시인이 되는 것이다. 즉 김지향 홍문표 조성호로 이어진다. 직접적으로 조성호 목사시인은 김지향 교수에게 사사 받았고 창조문학사가 주관하는 창조문학 신인문학상에 응모 등단했다. 홍문표 목사 시인으로 시 계열의 서정 모더니즘 신앙시에 합류한 것이다. 제 1시집『침묵을 노래하는 악기』에 이어 제 2시집『바람에도 마음이 있다』는 조성호 시인을 모더니즘 계열의 특징인 관념적이고 주지적인 언어를 매개로 하되 신앙모티브로 묘사되는 서정 모더니즘 시인이 되게 한 것이다.
이제 제 1 시집 3부 ‘그날이 언제일까요’에서 시인은 때의 바람이미지를 묘사한다. 그 때는 제 2 시집 2부 ‘밤비 내리는 이유’의 때이다. 밤이다. 밤비이다. 어둠의 때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그분이 계시는 곳이고 그 분의 사랑바람이 내리고 있다. 영의 밤비로 내리고 있다. 어둠을 씻어 내리게 하는 그분 영의 능력이 내리는 때이다.
밤비 내리는 순간에는
유난히 ‘그대’를 생각한다
외로운 잠꼬대 같은
밤비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어렸을 때 듣던 밤비 소리는 자장가였다
아가의 옹알이 같이
세상을 쓰다듬는
이 소리는 물리지도 않는다
밤새 흠도 티도 없이 내린 이유를
이제 나는 안다
누군가 만개의 별 대신 뿌린 것이다
온기를 품은 빗소리만으로도
밤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환희의 송가가 되고
청하지 않은 깜빡 잠은
아름다운 꿈을 아로 새긴다
- 「밤비 내리는 이유」전문
조성호 시인은 그분을 그대라 지칭하고 있다. 서정 모더니즘 시인이 지칭하는 ‘그대’이다. 그대가 내리는 비다. 칠 흙 같은 어둠에서 이 어둠을 씻어내는 비 “세상을 쓰다듬는/ 이 소리는 물리지도 않는다/ 밤새 흠도 티도 없이 내린 이유를/ 이제 나는 안다”이다. ‘밤새 흠도 티도 없이’내리게 하는 그대는 흠도 티도 없다. 시인은 이 분을 그대로 한다. 이쯤 되면 목사 시인의 서정 모더니즘 시의 상상력이다.
별같이 내리면 하나님이 직접 내린 비이다. 에굽 군대를 홍수로 맞불 놓으신 비이다. 맞불로 이 세상의 칠 흙 어둠을 씻어 내리는 그대이다. 동시에 물에 빠질 위기의 놓인 당신백성을 살리는 에덴동산의 네 강의 12 물길을 통괄하는 그대다.
3. 밤낚시 시인
조성호 목사시인의 사역이 있다. 칠 흙 같은 밤에 밤낚시를 한다. 그야말로 시가 지니는 절대적 은유의 시다. 목회자가 절대자의 사랑을 시로 만드는 순간이다. 시인의 그대를 체험하는 서정적 순간이다. 그대의 절대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다.
이「밤낚시」시는 하나님 사랑에 응답 사역의 시이다.
잘 보고 있어야 한다
물속을 이어주는 안테나에는
바닥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
없던 세상이 깜빡거린다
얼마를 기다려야 당도할까
한 겹 한 겹 공들여 쌓아가는 시간 속으로
한숨처럼 밑밥을 털어 넣는다
대형스크린 한 귀퉁이가
부욱 찢어지고
그 사이로 밀려온 빛의 조각
허공을 가른 막대를 쥔 손에
번개 하나 쥐어주고 가버린다
낮 동안 그 틈을 엿보던 물새들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달관한 표정으로 날아가고
탐조등처럼 불을 켠 머릿속
고요한 평화가 헤엄친다
- 「밤낚시」전문
조성호 목사시인 서정 모더니스트는 ‘고요한 평화가 헤엄친다’의 시간을 가진다. “그 사이로 밀려온 빛의 조각/ 허공을 가른 막대를 쥔 손에/ 번개 하나 쥐어주고 가버린” 그대에게서 받은 번개 하나! 그것은 하늘로부터 얻은 빛이다. 하나님 은혜의 비밀 신호탄이다. 손 만 한 구름에서 큰 비를 본(왕상18:41-46) 뒤 내리는 큰 비의 기적이 재탄생한다. 목사시인의 신앙 승리는 “낮 동안 그 틈을 엿보던 물새들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달관한 표정으로 날아가고” 있는데서 예간 된 것이다. 비유 아니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 예수님 따라 목사시인은 밤낚시 비유 시로 체험을 알린다. 묘사로서 알린다. 번개 불을 밤낚시에서 건져 올린다. 횡재를 얻은 날은 목사시인의 날이다. 그대가 빛을 손에 쥐게 하여 주시기에 “불을 켠 머릿속/ 고요한 평화가 헤엄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창 1:2). 이 어둠에서 하나님의 신은 목사시인 손에 지어주신 빛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을 건져 올리는 밤낚시 사역이 있다. 죽음의 상황을 삶으로 바꾸시는 그대는 신자들에게 산소 호흡기를 달아주신다.
사역자에게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이 빠진 밥상에 앉는 목회자의 눈물이 있다.
한 사람이 빠진 밥상은
참혹하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영양가 없는 마른 모래만 수북하다
한 사람이 빠진 빈자리는
있으나 마나였다고
원래 없는 거라고
아무리 변명해도
수렁처럼 더욱 깊이 패인다
한 마리가 빠진 양 우리는
똥오줌 못 가린 흔적 남아도
사랑과 미움의 잔해(殘骸) 사라지고
목자의 피 발린 깨진 종소리 따라
눈물 자국만 그렁그렁하다
어느 하늘에
아픈 영혼의 상처 닦아 줄
빈자리 있을까
그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 「그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4. 수리사용의 시인
조성호 목사시인에게 세월의 시간이 있다. 그런데 시인은 1년 열 두 달 메시지를 “1월의 사랑 · 2월의 사랑 · 3월의 사랑 · 4월의 사랑 · 5월의 사랑 · 6월의 사랑 · 8월의 사랑 · 12월의 사랑”으로 한다. 8번이나 ‘‥의 사랑’ 은유로 묘사한다. ‘‥월의 사랑’ 반복리듬을 1년 12달 중에서 8개월간의 사랑을 읊고 있다. 일 년 열두 달에서 8개월간의 ‘‥월의 사랑’ 묘사를 즐긴다. 8개월의 8 숫자의 반복리듬이 만들어 진다.
다음은「8월의 사랑」 시이다.
얼마나 뜨거운 키스이기에
뜨겁게 달구어져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가
호떡 굽듯이 지그시 누르는 햇덩이에
치-지-직 달구어진 도시는
기나긴 시간 익히고 익히려
불볕에 살 붙이고
더욱 붉게 타들어간다
된 인생 만나
몸과 마음 지친 이들을 달래줄
여우비 같은 가을을 준비하면서
-「8월의 사랑」
조성호 시인의 묘사는 뜨거운 키스와 8월을 등가원리로 한다. 8월이 지닌 성장하고 일어섬 이미지 수를 제시한다.
다음 수 8의 ‘부함’ 마방진 수가 이를 뒷받침한다.
9 ☓ 9+7=88
98 ☓ 9+6=888
987 ☓ 9+5=8888
9876 ☓ 9+4=88888
98765 ☓ 9+3=888888
987654 ☓ 9+2=8888888
9876543 ☓ 9+1=88888888
98765432 ☓ 9+0=888888888
8은 하나님의 수학이다. 이 8의 리듬은 성경 1장 1절의 ‘하나님-םי(1+30+5+10+40=86)’ ‘그리고-ת(6+1+400=407)’ ‘하늘-ם(5+300+40+10+40=395)’ =888은 8 반복리듬이다. 히브리어 합수 888이다. 조 시인이 제시한 1년 12달 중 1·2·3·4·5·6·8·12월 중 8개월간의 사랑 은유 메시지의 부함 이미지이다.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8달 동안이나 사랑메지시즐 전하는 시인의 시에서의 묘사한 일 년 열 두 달 그리고 인생의 태반을 넘도록 사역하는 평생의 사역 시간을 은유한다.
수치메시지는 이미 우리의 조상 배달민족이 사용하던 생활의 지침서 천부경에서 전해진다.
一 始 無 始 一 析 三 極 無 일시무시일척삼극무
盡 本 天 一 一 地 一 二 人 진본천일일지일이인
一 三 一 積 十 鉅 無 櫃 化 일삼일적십거무궤화
三 天 二 三 地 二 三 人 二 삼천이삼지이삼인이
三 大 三 合 六 生 七 八 九 삼대삼합육생칠팔구
運 三 四 成 環 五 十 一 妙 운삼사성환오십일묘
衍 萬 往 萬 來 用 變 不 動 연만왕만래용변부동
本 本 心 本 太 陽 昻 明 人 본본심본태양앙명인
中 天 地 一 一 終 無 終 一 중천지일일종무종일
8은 삶에서 최대 성장 이미지 수이다. 한국의 색채 리듬에서 8은 백색 이미지이다. 1월도 백색이미지이다.
불을 껐다 다시 켜듯
새롭게 연륜이 그어지고
희망으로 채울 새 꿈이 있어
1월은 늙지 않는다
억만금 보석 같은 365일
오늘과 내일
널뛰듯 발 굴러 춤추며 가야하기에
1월은 하루, 하루 은총이다
소리 없이 피어나는 꽃처럼
그 결연한 첫 마음이
12월 까지 이어져야 하기에
1월은 두 손 모은 기도다
날아오르는 새처럼
우리에게 약속된 길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가야하기에
1월은 은혜로운 말씀이다
-「1월의 사랑」
반쯤 수그린 하늘 아래
중년의 사랑은
풋보리 물결처럼 출렁인다
반평생 살아온 녹음은
맑은 날도
상하기도 채이기도 했을 날도
감사하고 사랑하며
평화롭게 물들어 간다
절반의 계절은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한창 자란 나무 그늘에서
맑은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싱그러운 초록 잎 한 번 눈길 주고
쉬었다 가라고 한다
-「6월의 사랑」
조 시인의 시의「1월의 사랑」과 「6월의 사랑」과 「8월의 사랑」모두 백색이미지이다. 익히고 익히어 ‘햇덩이’ 큰 빛이 되어있다. 1과 6과 8은 색채기호 철학에서 백의의 민족 색채 이미지이다. 백색 3번 반복리듬 리듬의 큰 빛을 지칭한다. 조성호 시인의「1월의 사랑」과「6월의 사랑」과 「8월의 사랑」이 지닌 사랑의 큰 빛은 하나님의 빛 흰색 큰 바람의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이다. 조 시인은 한국인의 정서 흰 곧 빛을 소망하는 시인이다. 그러기에 시인이 사역하는 길에 하늘 사다리가 놓여진다. 절망의 늪을 빠져나오라 명령하는 바람시학 시인안내자이다.
수리사용을 즐겨하는 조성호 시인의 1월은 동적 에너지 바람시학의 근원에 근접한다. 동적 이미지의 겹침 이미지 바람 바람 은 온통 바람으로 가득한 의미지다. 바람이 겹치면서 아주 큰 변화 이미지가 된다.
1이 지닌 일어서는 이미지는 마방진 수리철학을 가진다.
1 ☓ 1=1
11 ☓ 11=121
111 ☓ 111=12321
1111 ☓ 1111=1234321
11111 ☓ 11111=123454321
111111 ☓ 111111=12345654321
1111111 ☓ 1111111=1234567654321
11111111 ☓ 11111111=123456787654321
111111111 ☓ 111111111=1234567898765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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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특수성인 1의 자리에서 진동하며 일어서는 1의 위력은 전 우주를 움직이는 에너지 자원을 만든다. 예로부터 이 1로 일어서는 이미지는 일-일어나 · 2 이별, 나누임 · 3 삶 · 4 산다 · 5 오! 감탄 · 6 살 육신 · 7 칠 · 8 팔, 판 · 9 구함 이미지를 지니면서 한글 자음 ㄱ=가, 집 · ㄴ=나 · ㄷ=닿다 · ㄹ=넓다 · ㅁ=물 · ㅂ=밥, 밟다 밝다 불, 바다 · ㅅ=살다 · ㅇ=아! 감탄, 알다 오다 · ㅈ=자다, 집 · ㅊ=찾다 · ㅋ=크다 코리아 · ㅌ=타다 · ㅍ=판 · ㅎ=해, 하다, 크다의 의미를 부여하려 하였다. 그만큼 조성호 시인에너지는 열두 달 모두 곧 생애 전부를 그 분의 길을 따르는 생애에 있게 한다. 열 두 달 모두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개혁 시인이다. 어둠을 밝고 맑고 따뜻한 백색 곧 커다란 깨끗함으로 개혁하는 시인이다.
색채 이미지 중에서 8 곧 8월 이미지는 색채 수리리듬 의미로 신의 보호리듬이다.
א(1 알레프, 황소 천 시작과 배움, 음가 아)
ב(2 뻬트, 집, 창조주 사역 장소., 음가 ㅂ)
ג(3 끼멜, 낙타, 보답, 진리 사역, 음가 ㄱ)
ד(4 달레트, 문, 종속, 매달림, 장막 문 통과, 음가 ㄷ)
ה(5 헤, 숨구멍, 호흡, 실존, 공기 구멍, 음가 약한 ㅎ)
ו(6 바브, 갈고리, 고리, 연결, 음가 ㅂ 영어의 v)
ז(7 자인, 무기, 연장, 진리 무기, 생산, 음가 ㅈ 영어의 z)
ח(8 헤트, 울타리, 보호, 음가 ㅎ-g와 ㅋ의 중간)
ט(9 테트, 뱀, 지혜, 옳고 옳지 않음의 구별, 음가 t)
י(10 요드, 하나님 손, 능력. 음가 모음 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1월을 시로 쓰면서 계속하여 8월을 시의 소재로 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잘 사역하는 목사시인이기에 하나님이 보호하는 8 이미지를 지닌 시인이다. 시인은 하나님 손의 사역을 흠모하여 조 시인이 그대라고 지칭하는 그 분의 보호아래 있다.
열두 달을 지나왔습니다
때론 느리게 기고
때론 빠르게 달려 왔습니다
‥‥
이제 저무는 한 해 앞에 섰습니다
하지만 알 것 같습니다
열두 색 발자국은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안고 업고 계신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날 힘들게 하던 이나
나에게 작은 선물로 감동을 주던 이나
낯모르는 이가 보내주던 미소는
내 주변에 나타난
주님의 여러 얼굴들이었습니다
-「열두 달을 걸으며」전문
일년의 12달을 소재로 조 시인은 12사도 시인임을 묘사한다. 조성호 목사 시인은 시의 창작 기법으로 묘사에 아이러니를 삽입하여 시적 가치를 높인다. 조성호 목사시인은 한국 서정 모더니즘 계열의 신앙시인 김지향 홍문표 시인 계열로 이어지는 서정 모더니즘 계열 시인이다.
* 이 영 지
· 문학박사․철학박사․시인․시조시인
· 저서: 『한국시조문학론』
『물에 대한 신학과 문학의 비교연구』
『물의 신학과 물의 시학』
『이상시학연구』
『한국 시조시학 연구』
『한국시조작품 창작리듬 연구』
□ 제 24회 창조문학대상 평론부문 수상자 최성침 평론작품
존재의 물음, 그 아름다운 여행 -김수영 론
최 성 침
1. 들어가는 글
김수영은 그의 시「말복末伏」에서 “자연自然은 「여행旅行」을 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여행’은 물론 문자 그대로의 여행이 아니라 어떤 물음이나 갈망, 혹은 모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그는 이 말에「 」기호를 붙여서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물음, 갈망, 모험이 그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역으로 인간은 여행을 한다는 말이 된다. 자연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어서 어떠한 문제 제기의 가능성이 없이, 말하자면 ‘즉자’적으로 존재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대자’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김수영이 말하는 ‘여행’이란 존재의 물음이며 그 물음은 실존적 모험이다. 그리고 말할 것 없이 그 물음은 실존의 한계인 죽음의 너머 현실의 저편에 있는 존재의 근원의 영역을 엿보고자 하는 집요한 시도일 것이다.
인간에게 존재를 부여하여 그를 이 세계로 현출시키고 다시 소환하는 그 존재의 근원이 되는 어떤 초월적 실체와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틈이 가로 놓여있기에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앎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지만, 보잘 것 없이 덧없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그 절대적 존재에 대한 호기심 어린 간절한 갈망은 숙명적인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 초월적 절대적 실체와 관련된 어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그 간절한 갈망은 시의 영역 중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러한 초월적 미지의 존재 또는 세계에 대한 김수영의 갈망은 그의 시 전 편을 관류한다. 그는 초기 시편들에서 존재의 근원을 표상하는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흘러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곡선曲線”(「토끼」)을 보기를 시도하거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 / 이것이 사랑이냐”(「나의 가족家族」)라며 자연의 고유의 힘을 내포하는 ‘바람과 물결’이라는 감각적 대상을 통하여 ‘사랑’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후기 시편에서도 그는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 사랑을 발견하겠다”(「사랑의 변주곡變奏曲」)라거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하늘에는 천둥” 곧 사랑이 “먼저 있는 줄 알았다”(「여름밤」)라며 역시 ‘사랑’의 본질과 초월적 실체에 대하여 천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미지의 초월적 실체를 환기하는 몇몇 이미지들이 그의 시 전 편 속에 마치 표지판처럼 놓여 있다. 그런 핵심적 이미지들이 ‘바람’, ‘물결’, ‘풀’, ‘사랑’ 등이다. 또한 이들 이미지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이들을 통해 김수영이 알기 위해 추구했던 미지의 존재의 정체는 심화되고 구체화된다.
2. 실존의 유한함과 미지의 부름
김수영은 산문「시인詩人의 정신精神은 미지未知」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이며,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시詩의 <뉴 프런티어>」라는 글에서는 ‘그(시인)가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不可能>’, 또는 ‘무한한 꿈’이라고도 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김수영에게 있어서 ‘미지’와 ‘꿈’은 단순한 미개척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으로서는 도달하기가 ‘불가능’한 영역, 즉 초월적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인에 대한 김수영의 이러한 규정은 무엇보다 김수영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그의 시세계의 본질적 성격을 드러내어 준다고 하겠다. 즉, 가시적 현실세계의 저편에 있는 초월적 존재, 기정사실이 아니고 비현실적이며 인식 불가능한 존재들이 시인 김수영이 포착하고 형상화하려 했던 주된 대상이었다.
물론 김수영에게 있어서 이러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갈망은 근본적으로 일상적 생활세계의 삶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며 ‘죽어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부조리함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시인 김수영의 좌절과 비탄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에서 보듯이 아무런 꿈도 없이 생활에 몰두한 삶 속에서 시인은 생명이 고갈되어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한다. 생활은 죽음 곧 ‘백골’로 표현되어 있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白骨이 생기었다
생활生活의 백골白骨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確實히 무서운 이야깃거리다
다리밑에 물이 마르고
나의 몸도 없어지고
나의 그림자도 달아난다
- 「애정지둔愛情遲鈍」 중에서
시인은 생활 속에서 생명이 고갈되고 존재조차 사라져 버린다.
「달나라의 장난」에서 시인은 장난처럼 낯설게 된 현실의 우스꽝스러움과 부조리함, 그리고 한편으로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인간의 서러운 숙명을 내던져져 돌아가는 팽이를 통해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현실은 마치 한 편의 장난 같은 연극처럼 허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내던져져서 돌아가는 팽이처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운명 지어진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부조리할 수밖에 없고 부조리한 현실은 서러운 곳이지만 그 서러움조차 감당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기에 힘써 일상의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자조로 귀결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유한하고 부조리한 세계 너머 존재의 근원을 엿보고자 하는 갈망이 시인 김수영에게 있어서는 제 일의 사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구름의 파수병」에서 시인은 그러한 일상적 생활에 안주한 채 시인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꿈의 추구를 망각해버린 자신에게 ‘시를 반역한 죄’를 부과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시詩와는 반역反逆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구름의 파수병」 중에서
시인의 사명은 미지의 것,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인데, 무의미한 현실 저편에 있을 어떤 참다운 것을 추구하는 시를 저버린 시인은 그 반역의 죄 값으로 유형의 땅인 메마른 산정에서 헛되이 부질없는 대상들만 바라볼 뿐이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헛되이 부질없는 대상에 집착하는 삶이란 그야말로 죽음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시인에게 있어서 이 죄 값으로 받는 형벌은 인간의 실존 자체로서 인간의 본질적 숙명일 뿐이고, 인간은 ‘쉴 사이 없이 가야하는 구슬픈 육체肉體’(「구슬픈 육체肉體」)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일상적 현실에 매몰된 삶이 본질적으로 죽음과 다름없이 무가치하고 공허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슬처럼 덧없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향해 ‘쉴 사이 없이 가야하는 구슬픈 육체’로서의 인간의 실상은 ‘비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아버지의 사진寫眞」에서 죽음은 존재의 단절이며 그러한 죽음을 운명으로 안고 있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의 사진寫眞은 이 맑고 넓은 아침에서
또하나의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비참悲慘이요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같이
시계時計의 열두시같이
재차再次는 다시 오지 않을 편력遍歷의 역사歷史...
- 「아버지의 사진寫眞」 중에서
여기서 ‘또 하나의 나의 팔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존재의 원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나는 어떤 존재의 단절을 겪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로써 시인은 인간의 비극적 숙명과 한계를 드러내 보이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재차 다시 오지 않는 야속하고도 무자비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시간은 인간을 초월하여 그 존재들을 끊임없이 무로 만드는 비정하고 절대적인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하이데거가 말한 ‘던져진 존재’로서 유한한 실존의 운명을 지고 있다.「레이판탄彈」에서 김수영은 그러한 시간의 절대성과 인간 존재의 피투성의 숙명적 조건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고 있다.
죽음이 싫으면서
너를 딛고 일어서고
시간이 싫으면서
너를 타고 가야 한다
- 「레이판탄彈」 중에서
지금까지 김수영 시에 있어서 일상적 현실세계의 무의미와 부조리, 그리고 그것의 근본적 조건이 되는 절대적 시간 속에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운명에 처해있는 인간의 본질적 유한성에 대한 회한과 절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불가능’과 ‘미지’에 대한 시인 김수영의 ‘무한한 꿈’은 그러한 것에 대한 반작용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덧없는 이 세계의 저편에 있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 갈망일 것인데, 시인은 그것을 언어에 의하여 창조된 새로운 이미지와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김수영이 갈망하는 세계는 현실세계 여기가 아닌 어떤 먼 곳, 또는 이 세계의 바깥 등의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바람과 같은 무형의 매개물은 그곳으로 이어주는 무지개가 되며, 때로는 보다 직선적인 탈출 또는 상승의 이미지가 제시되기도 한다. 꿈이 숨겨져 있을 ‘먼 곳’은 시인을 손짓하여 부른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 「먼 곳에서부터」 중에서
여기로부터 이 ‘먼 곳’으로 이어주는 것은 김수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곡선’이라고 표현한 ‘바람’ 또는 ‘흘러가는’으로 표상된 ‘물결’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김수영 시에 있어서 간헐적으로 반복하여 나타나는 표지판과도 같은 본질적인 것인데 초기 작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초기 작품인「토끼」는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몽매蒙昧와 연령年齡이 언제 그에게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에
잠시暫時 그는 별과 또 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하나의 것이란 우리의 육안肉眼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曲線같은 것일까
초부樵夫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흘러가는 흘러가는 새소리
갈대소리
- 「토끼」 중에서
별은 염원의 대상인 ‘먼 곳’을 지시하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곡선’이란 물결같이 굽이치며 흘러가는 소리들, 즉 바람소리 새소리 갈대소리 등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먼 곳, 곧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이어주는 매개물 즉 무지개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바람이 생기는 곳’ 또는 ‘별’로 상징되는 시인이 갈망하는 ‘먼 곳’은 성스럽고 위대한 곳으로서 시인은 그곳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따라서 잠시 머무는 이곳은 그에게 낯선 타향일 뿐이다.「나의 가족家族」에서 그 곳에 대한 시인의 갈망은 ‘성스러운 향수’로 표현되고 있다.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聖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宇宙의 위대감偉大感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刺戟을
나의 가족家族의 기미많은 얼굴에
비比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
차라리 위대偉大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柔順한 가족家族들이 모여서
죄罪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房안에서
나의 위대偉大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 「나의 가족家族」 중에서
그러나 이 ‘위대한 나의 소재’, 나의 고향에 대하여 ‘성스러운 향수’만을 간직한 채 이 무의미하고 고난이 가득한 낯선 타향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 불일치와 모순, 그리고 박탈감과 상실감이 시인의 설움이다. 따라서 설움이 종결되고 ‘미소’ 지을 수 있을 구원에의 도달은 시인에게 영원한 숙제이다. 곧 그의 숙제는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都會의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린 미소微笑’(「꽃」)이다. 이렇듯 도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헛되이 그리워하고 꿈꿔야 하는 이율배반의 고통이「거미」란 작품에서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거미」
거미는 하늘에는 이르지 못하고 땅과 하늘의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표상하고 있다. 또한 김수영은 거미와 동일한 이미지로서 헬리콥터를 채용한다. 시인은 하늘을 향해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헬리콥터에서 구원이 있을 영원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헛된 꿈을 꾸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구원과 자유에 대해 꿈꾸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않고 ‘비애’만 남을 뿐이다.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動物이다
- 자유自由
- 비애悲哀
- 「헬리콥터」 중에서
한편,「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란 작품에서 시인은 지상으로부터 하늘로의 상승에 이어 차라리 이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상상한다. 초현실주의적이고 한편으로는 신비주의적인 태도에 의거하여 순식간의 환상과 자극을 통하여 우주와의 어떤 합일 또는 통일성 속에서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초월을 꿈꿔보는 것이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
세계世界는 그러한 무수無數한 간단間斷
오오 사랑이 추방追放을 당하는 시간時間이 바로 이때이다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산山이 있거든 불러보라
나의 머리는 관악기管樂器처럼
우주宇宙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만다
-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모든 존재의 조건으로서의 시간의 밖으로 나가는 것, 또는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서 ‘우주의 안개’와 일체가 되어 버리는 것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무의미한 상상 또는 환각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이러한 상상력은 문제 많은 ‘여기 이곳’의 저편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존재의 근원과도 같은 참다운 세계를 향한 김수영의 강박적인 갈망을 뚜렷하게 부각시켜 주기에 더없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존재의 담지자로서의 자연
「헬리콥터」와 같은 풍자적인 작품들 곧 김수영이 ‘나의 현실現實의 메에뜨르’(「예지叡智」)라고 말하는 이른바 현실적 대상들을 소재로 하여 그것들을 시적으로 변형시키는 작품들은 세계를 심연으로 밀어 넣음을 통한 거리두기에 의존한다. 이러한 방법은 이미 거리두기에 내포되어 있듯이 일종의 도피의 시도에 속한다.「꽃」은 이러한 작품들의 시적 방법과 한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심연深淵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
손도 안 씻고
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두고
닭에는 발등을 물린 채
나의 숙제宿題는 미소微笑이다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都會의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린 미소微笑이다
- 「꽃」중에서
시인은 ‘진개와 분뇨’로 암시되는 부조리한 세계를 심연으로 밀어 넣음을 통해서 간신히 그것과 화해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하고”,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린 미소’처럼 구원은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암흑과도 같은 현실을 심연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그 현실과 거리를 두는 것은 결국 일종의 도피이거나 상상의 유희일 뿐 존재의 빛으로 나아가는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단지 대상을 멀리 띄어 놓아 희미하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 속에 은닉되어 있는 비밀과도 같은 본질을 캐내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김수영은 존재의 본질 또는 떠나버린 신의 흔적을 찾아 세계의 이면 곧 사물의 심연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말」에서 “횃불로 검은 물속을 비춰가며 고기를 잡는 배”는 심연 속의 존재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존재를 낚아 올리는 작업은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말’ 곧 시일진대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의 본질적 속성으로 인하여 시는 존재자들을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존재 자체를 모색하는 가장 탁월한 예술 양식이 된다.
「가옥찬가家屋讚歌」에서 ‘가옥’ 즉 ‘집’은 일종의 중의적 비유로서 사물로서의 집을 지시하는 데에서 나아가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를 암시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하이데거의 영향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표면적 의미로서의 집과 내면적 함축적 의미로서의 집이 있다.「가옥찬가家屋讚歌」에서 함축적 의미로서의 존재의 ‘집’은 ‘바람’이다. 폭풍은 자연의 거대한 힘을 담아 몰아오고 인간은 그 폭풍에서 모든 지각과 감각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그 힘을 감지하고 나아가 그 힘 안에 동화되어 활력을 느낄 수도 있다. 바람의 힘은 실제적인 것이다. 바람은 알 수 없는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우주의 원초적인 기운을 담지하고 있는 듯하다.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들어오는 바람에서
느끼는 투지鬪志와 애정愛情은 젊다
자연自然을 보지 않고 자연自然을 사랑하라
목가牧歌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폭풍暴風의 목가牧歌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
집이 여기 있다고 외쳐라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검은 바람이 들어온다고 외쳐라
- 「가옥찬가家屋讚歌」 중에서
시인은 비밀스런 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검은 바람’ 속에서 날것으로서의 생명력인 ‘투지와 애정’을 포착하고 느끼면서 어떤 초월적 존재와의 동일성 속에서 ‘폭풍의 목가’를 부르고 있다. 그것은 바람을 불어 보내는 근원에 대한 ‘찬가’일 것이다. 그 ‘폭풍의 목가’로서의 ‘가옥찬가’는 존재의 집으로서의 바람에 대한 찬가, 궁극적으로는 바람이 전하는 존재에 대한 찬가이다.
「토끼」와「나의 가족家族」도 존재의 집으로서의 ‘바람’과 ‘물결’에 주목하고 있다.「토끼」에서 ‘바람’은 ‘바람이 생기는 곳’ 즉 근원을 지시하고 그 본질을 전한다. 즉, ‘바람’과 물결같이 굽이쳐 흐르는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의 물결은 근원의 존재를 전달해준다. 또한「나의 가족家族」에서 ‘바람과 물결’은 존재의 본질인 ‘힘’과 ‘사랑’을 담고 있다. 김수영은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 신선新鮮한 기운氣運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 / 이것이 사랑이냐”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원초적 생명력을 담고 있는 존재의 집이다. 그 점에서 그것은 살아 있다. 역시 존재의 집으로서의 눈을 소재로 한「눈」은 자연이 전하는 원초적 생명력의 경이를 노래하고 있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 「눈」중에서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듯 하얗게 마당을 뒤덮은 눈은 오염되지 않은, 따라서 죽음의 그림자조차 내포하지 않은 순수한 생명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즉, 눈은 원초적 생명력을 담지하고 있는 존재의 전령으로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죽어 있는 줄도 모르는 채 나태와 안일 속에 빠져 있는 시인에게 그 죽음과도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일깨워 주는 동시에 다시 그 신선한 생명력을 선사한다. 눈은 죽음을 망각하고 있는 시인을 ‘위하여’ 그 죽어 있는 상태를 일깨워주고 또 마음껏 그 생명을 호흡하여 다시 살 수 있도록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담지자로서의 사물은 쇠락한 인간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준다.
「초봄의 뜰안에」서도 이와 같은 신선하고도 생동감 있는 건강한 이미지들을 확인할 수 있다.
황폐荒廢한 강변을
영혼靈魂보다도 더 새로운 해빙解氷의 파편破片이
저멀리
흐른다
보석寶石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냄새가 술취한
내 이마에 신약神藥처럼 생긋하다
- 「초봄의 뜰안에」중에서
녹는 얼음과 화롯불의 이미지는 생명을 틔워내는 힘을 지시하고, 짓이긴 파 냄새는 오염되지 않은 태초의 생명을 발산한다. 시인은 이러한 이미지와 사물들의 심연 속에 감춰져 있는 ‘신약’ 같은 태초의 생명 그 존재의 원형질을 탐색하여 쟁취한다.
「말복末伏」에서 모든 생명체는 하늘 즉 존재의 근원을 지향한다. 물, 숲, 매미, 모든 자연은 존재로 충만해 있고, 바람은 생명을 향하는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냇물소리 푸르고 희고 잔잔한 물소리
숲과 숲 사이의 하늘을 향해서
우는 매미
.........
물소리는 먼 하늘을 찢고 달아난다
바람이 바람을 쫓고 생명生命을 쫓는다
- 「말복末伏」 중에서
「동맥冬麥」에서 김수영은 더욱 분명하게 신적 생명의 전령으로서의 자연을 찬미하고 있다. 그는 떠나버린 신과 장차 도래할 신 사이의 시간인 현재 이곳에서 자연에 강림하는 신적 생명을 포착하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뒤집어진 세상의 저쪽에서는
나는 비틀거리지도 않고 타락墮落도 안했으리라
.........
그러나 이 눈망울을 휘덮는 싯퍼런
작열灼熱의 의미가 밟혀지기까지는
나는 여기에 있겠다
..............
울고 간 새와
울러 올 새의
적막寂寞 사이에서
- 「동맥冬麥」 중에서
보리밭의 ‘싯퍼런 작열의 의미’란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창조주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김수영의 시가 기독교 사상에 매우 근접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 죽음의 선취를 통한 자유의 실현과 존재의 본질로서의 ‘사랑’의 발견
김수영은「꽃」에서 “심연深淵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상실自己喪失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神이고 //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한다”며 자조적으로 고백하며 자신의 숙제는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都會의 저편에 /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린 미소微笑이다”라며 탄식하고 있다. 자신이 갈망하는 구원은 지금 여기 도회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그것은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유는 죽음까지도 각오할 때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유가 없이는 모든 행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유의 실현은 진정한 실존을 위한 절대 조건이 된다.
앞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김수영을 논함에 있어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데, 다만 그를 기독교 신자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가 기독교 사상 내지는 철학을 그의 정신적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 정신이라는 것은 자유와 사회 정의를 위해 불의에 맞서 죽음으로 희생할 수 있는 실천적 저항적 정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이라는 언급을 통해 예수의 자기희생을 암시하였고,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기독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였는데 그것은 우선적으로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마음은「대통령 각하」나 「二五時」가 격려하는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불같이 타오르면서, 이상하게도 몸은 낙천과 기독의 가르침의 대극을 향해 줄달음치는 것이 이상하다.
- 「三冬有感」중에서
「사령死靈」이란 작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 ‘반짝거리는 활자’는 성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 「사령死靈」중에서
또한 같은 맥락에서「폭포瀑布」에서는 그 이면에 배음으로 울리고 있는 자기부인과 희생의 기독교 정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 「폭포瀑布」중에서
‘무서운 기색도 없이 곧은 절벽을 떨어지는 폭포’와 「꽃」의 ‘심연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을 비교 분석해보면「폭포瀑布」가 제시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기상실에 꽃을 피우는 신’이란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이룬 기독을 가리키며, ‘무서운’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고통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폭포를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라고 함으로써 폭포를 통해 ‘고매한 정신’ 자체로서의 초월적 존재를 드러내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으며,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이라고 말함으로써 진리가 드러나는 초월적 계시의 속성을 나타내고자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표현은 단적으로 성서의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시편 42:7)의 영향을 보여주며, ‘곧은 소리’는 준엄한 신의 부르는 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준엄하고 고매한 존재인 신의 목소리는 시인으로 하여금 ‘나타와 안정’으로부터 깨어나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고매한 정신은 자유와 관계되어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육체가 곧 죄이기에 육체를 버리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육체를 버리는 일 중의 하나이다. 김수영 자신도 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김수영은 「원죄原罪」라는 산문에서 “육체가 곧 욕辱이고 죄罪”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서운 기색도 없이 곧은 절벽을 떨어지는 폭포’는 자기를 버리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죄로서의 육신을 버리는 기독의 죽음과 그를 통한 인류의 구원의 사건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신의 죽음과 자유의 실현을 보다 분명하고 강한 어조로 노래한 작품이 「푸른 하늘을」이다. 「푸른 하늘을」은 죽음을 통한 자유의 쟁취라는 모티브에 기초하고 있음을 미루어 보아 4.19의 경험으로부터 탄생한 작품으로 보인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4.19는 자신의 존재의 완전한 절멸이라는 죽음을 절박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중대 사건이었다. 그 죽음은 수동적으로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의 것이 된다. 고유의 것이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에 그 상황은 고독하다. 김수영은 일기에서 4.19 이후의 자신의 정신의 전이 혹은 발전을 ‘강인한 고독의 감득과 인식’이라고 하며「푸른 하늘을」을 그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자유自由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푸른 하늘을」 중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저항해야 하고 그 저항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대가가 수반된다. 죽음이 필요 없다면 진정한 억압이 아닐 것이다. 즉, 자유라는 절대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혁명에는 죽음 즉, 피가 요구되고, 그 죽음을 고유하게 단독적으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고유의 가능성, 즉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스스로 떠맡아야하는 최우선적인 가능성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고독한 단독자이며 그때의 고독은 실존적 고독이며 그 고독을 받아들일 때 자유가 가능해진다. 가치있는 실존을 위해서 인간은 그 자유를 떠맡아야 한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자유에 처벌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인간은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며 죽음까지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김수영은 이러한 자기 상실과 부인을 통해서 죽음의 저편에 있을지도 모를 어떤 존재의 본질 같은 것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을 간파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마치 ‘심연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 상실에 꽃을 피우는 신’처럼 시인 역시 실낱같은 참다운 존재에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김수영은「제 정신精神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라는 글에서 모름지기 지식인은 육중한 바윗돌을 밀고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가는 시지프스처럼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수영 자신이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유를 행사하였다. 그는 산문「시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이러한 자유의 행사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이 강연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자유를 외쳤다.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절박하게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을 막연하게 멀리 떨어진 미래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박하여 선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시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수반된다. 즉, 죽음을 막연히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에 속해 있다고 할 때 시간은 일련의 점처럼 인식되어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독립된 시제로 존재하게 되지만, 이미 선택되어 선취된 것이라면 그 죽음은 지금 현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있는 것이 되어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며 지속하는 단일한 시간성에 의해 파악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시간은 무수한 독립된 점들이 아닌 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로 나타난다. 역사는 말하자면 물리적 대상적 시간이 아니라 실존적 시간이다. 이제 시간에 대한 인식은 ‘눈을 깜짝이는 무수한 간단間斷’으로 보는 대상적 인식으로부터 시간의 ‘연관’을 주목하는 실존적 인식으로 바뀐다.
.......... 그 연관만이 빛난다
시간만이 빛난다. 시간의 인식만이 빛난다
- 「엔카운터 지誌」중에서
시간은 서로 단절된 수많은 점들의 연속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상호적으로 ‘연관’되어 간섭하면서 지속하는 시간성 속에서 단일한 것으로 파악되며, 그런 시간성에 의해 역사는 유의미해지며 지금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존재는 지속되며 ‘나’는 그 역사 속에 뿌리박고 있다. 김수영의 ‘환희’가 여기에 있다.
더러운 역사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追憶이
있는 한 인간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
- 제3인도교第三人道敎의 물속에 박은 철근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 「거대한 뿌리」중에서
역사를 통하여 영원을 꿈꾸는 것이 가능해진다. 무시간으로서의 영원이 아니라 변화하며 지속되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도 그 거대한 흐름의 일부를 이룬다.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은 이러한 영원히 지속하는 시간을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이
우리의 역사歷史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환희歡喜를
풀 속에서는 노란꽃이 지고 바람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보다 더 서걱거린다 - 우리는 그것을 영원永遠의
소리라고 부른다
- 「미역국」중에서
‘우리의 역사’가 영원하다는 것에 대한 발견은 시인에게 ‘환희’를 가져다주며, 그 영원 속에서 풀과 꽃들도 인간과 같이 어우러져 생성 소멸하고, 그 위를 부는 바람은 영원의 소리를 전한다. 동시에 그 영원의 소리는 이러한 통일성 속에서 기름때 찌든 빈궁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빈궁의 소리’이자 서로에게 인생의 전부를 통째 내어주어 사랑을 나누는 ‘결혼의 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자연의 존재자들 사이에 차별이 사라진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중에서
나아가「풀의 영상影像」에서 시인은 “이슬이 앉은 새봄의 낯익은 풀빛의 영상”, “푸른 풀의 가냘픈 영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소음들은 나의 푸른 풀의 가냘픈
영상影像을 꺾지 못하고
그 영상影像의 전후의 고민苦悶의 환희歡喜를 지우지 못한다
- 「풀의 영상影像」 중에서
자신이 마치 풀과도 같이 여리고 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고민은 역설적으로 환희가 된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과 풀 사이의 동일성의 발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인간과 풀은 동일한 생명의 원형질을 공유하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슬이 앉은 새봄의 낯익은 풀빛’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 풀이 인간보다 비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마치 춤을 추듯이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풀은 김수영 자신이기도 하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다가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풀」전문
바람에 나부끼며 일렁이는 풀의 율동에서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이 존재함의 환희로 녹아드는 경험을 느끼게 하는 「풀」은 김수영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이다. 이 작품을 쓰기 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그는 최하림의 말처럼 작품에서 묘사된 바 그대로 ‘풀처럼 쓰러지며’ 통곡 속에 생을 마감했다.
「풀」은 김수영 시에서 ‘풀’과 ‘바람’의 의미를 가장 단순하고도 강력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풀’은 피조물 일반 나아가 인간을 지시하며 ‘바람’은 일관되게 초월적 존재로부터 오는 ‘기운’이다. 앞서 이미 어떤 원초적 힘과 생명력을 전해주는 이미지로서의 바람에 대해 검토한 바 있다. 그러나 김수영의 후기 시에 이르면 이제 바람은 보다 근원적이고 구체적인 사유의 대상이 된다. 김수영은 산문「반시론反詩論」에서 자신이 ‘바람’을 릴케의 시 구절에 나오는 “신神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바람은 신성이 내재된 ‘신의 입김’이다. 입김은 달리 말하면 숨결이고 호흡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는 숨결, 입김, 호흡의 의미를 지닌 말로서 두 단어 모두 ‘성령’으로 번역된다.
즉, 김수영 시에서 ‘바람’은 신성 또는 존재 자체의 메타포임을 알 수 있는데, 구약성서에서 풀과 바람을 각각 피조물과 창조주의 메타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김수영 시를 기독교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조망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 「이사야 40:6-7」
인간은 풀과 같고 바람은 그 위에 부는 신의 ‘기운’이라는 점에서 성서와 김수영 시는 일치한다. 또한 그가 단적으로 “사랑은 호흡입니다”(「요즘 느끼는 일」)라고 말하고 있는데, ‘호흡’은 곧 ‘입김’이며 ‘신의 입김’이 ‘바람’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바람’, ‘힘’, ‘사랑’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김수영이 추구해온 미지의 초월적 실체의 모습은 보다 명료하게 구체화되고 심화되어 지상으로 임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그의 지각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초월적 존재를 담아 불어오는 신의 입김으로서의 ‘바람’은 ‘힘’이고 동시에 ‘사랑’이다. 결국 그가 초기에 「나의 가족家族」에서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온’ ‘바람과 물결’이 ‘사랑이냐’라고 물었던 의문은 해명되었다. ‘바람’은 ‘기운’ 즉 ‘힘’이고 동시에 ‘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그 의미의 전개 과정은 보다 명료해진다. ‘사랑’이 다시 느껴질 때 생명은 소생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운 즉 힘이기 때문이다.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파밭 가에서」중에서
그리고 사랑은 자기를 버릴 수 있을 때에만 인식 가능하다.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는 말은 이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잃는 것’, 즉 자기 희생 또는 자기 부정은 바로 사랑의 행위이다. 이 점을「꽃 잎(一)」을 통해서 살펴보자.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
- 「꽃 잎(一)」중에서
신적 생명을 담고 있는 바람이 의인화되어 있는데, 그 바람은 아마도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듯하다. 마치 바람이 자신의 움직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인은 정작 자신의 시에 대해 모르고, 바람이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는 것처럼 시인은 구원의 피안에 도달하기까지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림으로써만 가능한 혁명과도 같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革命같고
- 「꽃 잎(一)」중에서
이것이 김수영이 말하는 ‘사랑’이고 ‘힘’이다. 그 사랑과 힘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시는 바로 ‘온몸으로 동시에 그 온몸, 곧 ’사랑과 힘‘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산문「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시의 형식을 ‘사랑’으로 규정하였는데 ‘노래’라고도 할 수 있는 시의 형식이란 무엇보다도 어떤 간절한 갈망이자 즐거움이며 사모함, 즉 ‘사랑’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내부로부터 분출해 나오는 어떤 강력한 ‘힘’이 아닌가. 그러한 의미에서 김수영은 「詩여 침을 뱉어라」에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라는 부제를 달아 ‘힘’이 곧 시의 본질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김수영에게 있어서 ‘사랑’과 ‘힘’은 같은 말임이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참고로 성서에서 “인자가 권세의 우편에 앉은 것”(마가복음 14:62)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권세’란 ‘야훼’ 즉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는 바 ‘야훼’를 'power' 곧 ‘힘’, ‘권세’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과 이로써 ‘힘’이란 ‘사랑’과 함께 모든 존재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존재라는 말로써 기독교의 유일신과 같은 최 상위 존재를 가리킬 때, 사랑은 존재의 본질 중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존재에게 있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고 그것은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곧 사랑 그 자체이다. 성서에서는 단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16)라고 쓰고 있다. 사랑은 존재로부터 만유의 모든 존재자들에게 선사되는 선물로서 존재자들이 누리는 생명 즉 힘이며, 그것은 초월적인 실체이다. 이것이 김수영이 ‘발견하겠다’고 선언한 ‘사랑’의 정체이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三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 「사랑의 변주곡變奏曲」중에서
모든 욕망과 의지의 근원도 초월적 존재의 ‘힘’ 곧 ‘사랑’이며, 뭇 생명체들이 구가하는 생명들도 그 사랑으로부터 연유한다. 시인이 발견하는 그 사랑은 아주 깊은 저 먼 곳에 감춰져 있는 것으로서 만물에 깃들어 있는 내밀하고도 귀중한 실체로서 그려져 있다. 또한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四.一九에서 배운 기술
- 「사랑의 변주곡變奏曲」 중에서
에서와 같이 고독하고도 비장한 결단으로 수행되는 혁명이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의 실천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한편「여름밤」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인간의 사랑에 우선하면서 그 사랑을 가능케 하는 초월적 실체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지상地上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소음도 번쩍인다
여름은 이래서 좋고 여름밤은
이래서 더욱 좋다
.................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땅에만 소음이 있는줄만 알았더니
하늘에도 천둥이,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이 있는줄
알았다 그것이 먼저 있는줄 알았다
- 「여름밤」중에서
‘우리의 사랑’은 그보다 먼저 있는 하늘의 사랑에서 온 것이다. 귀로 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은 인간에게로 향한 존재의 부름, 사랑의 목소리일 것이다.
5. 맺는 말
김수영은 사물의 가시적 형태 뒤편에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미지의 존재 또는 어떤 모호한 기운을 응시한다. 그러한 집요한 탐색 끝에 그가 발견한 존재의 본질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 존재의 본질인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헛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아가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고독 속의 자유를 통해 진정으로 실현된다. 김수영은 버림을 통해서만 얻음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버림은 자기부인의 고독한 결단 속에서만 혁명처럼 성취된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강인한 고독 속에서 오로지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것만이 참다운 실존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우리 안에 타오르는 모든 욕심이 제거될 때 초월자로부터 사랑은 내려올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꽃 잎(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며, 참다운 존재의 의미를 찾아 산등성이를 넘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아름답기만 하다.
□ 제 24회 창조문학대상 수상소감
텅 빈 무 앞에서의 기다림
최 성 침
글쓰기는 늘 곁에 있는 무無를 새롭게 인식하고 대면하여 교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무를 혼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한 편의 글쓰기에 착수하자마자 무 앞으로 끌려나와 내동댕이쳐진다. 무는 마치 어떤 끈적끈적한 덩어리처럼 감정과 개념이 분절되지 않은 유동적인 반죽과도 같은 상태로 심연의 어둠 속에 펼쳐져 있다.
글쓰기는 언제나 이러한 거대한 무를 마주하는 두려움과 압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무는 기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지언정 항상 우리 곁에 동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글쓰기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겸허한 행위인 동시에 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야심찬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독창적이고 고유한 담론이라는 하나의 완성된 형태는 이러한 무로부터 나온다. 이 무를 거치지 않은 담론이란 기존의 것의 복제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신만의 고유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읽고 숙고하면서 캄캄한 무 속으로부터 번쩍이는 한줄기 섬광이 출현할 때까지 끈질기게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때부터 혼돈의 무 속으로부터 어떤 형태가 희미하게 나타나고 점점 뚜렷해지면서 마침내 하나의 명료한 형식이 창조된다. 비평의 경우 대상이 되는 텍스트는 무가 된다. 텍스트는 비평가 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무의 심연이다. 아마도 하나의 견고한 담론은 이 무 속에 펼쳐진 신비의 베일 속 깊이 감춰져 있을 것이고 그것이 분명한 형태로 떠오를 때까지는 많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착종과 혼돈의 어둠으로부터 하나의 아름다운 형식이 창조될 때까지 고통 속에 참고 기다리는 무조건적 사랑과 열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치열한 사랑과 열정 속에서 하나의 형식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마도 문학도에게 있어서 존재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 형식이 바로 랭보가 추구했던 ‘전대미문의 것’이자, 김수영이 말한 ‘새로운 것’이며, 그것이 포착되는 순간 존재는 개시된다.
상이란 것은 기쁜 것이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이고 이내 중압감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더욱이 상을 받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분발하라는 뜻으로 겸허히 받아들인다. 『창조문학』과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 최 성 침
· 충북 제천 출생 · 용산고 졸업
· 동국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선정고등학교, 도봉상업고등학교 교사
· 동국대, 충북대, 강원대 강사
· 『물의 모험-김수영의 시』(2000, 아세아문화사) 출간
· 『말씀과 문학』문학평론 등단
· 「윤동주, 역사적 부름과 응답」(『창조문학』 2017년 봄)
· 「존재의 물음, 그 아름다운 여행 - 김수영론」(『창조문학』 2019년 가을) · 「사무친 그리움, 사랑과 긍정에 이르기까지 – 조성 순 시론」(『창조문학』 2019년 겨울)
· 용인시 기흥구 한보라2로 168 706동 207호
· e-mail : mailto:rockies@naver.com · mobile : 010-3223-8939
□ 제 24회 창조문학 대상 최성침 수상 평론 평
최성침의 현상학적 실존비평
- 최성침 평론가『존재의 물음, 그 아름다운 여행』에 부쳐
홍 문 표
(문학박사 · 문학평론가)
독특한 개성과 야심찬 지적 모험을 담은 최성침 평론가의 평론 「존재의 물음, 그 아름다운 여행 – 김수영 론」을 창조문학대상 평론 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어 기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글을 대하는 성실성과 치밀함, 그리고 평론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기 나름의 확고한 세계관과 비평론이 두루 갖추어져 있어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 창조문학 나아가 한국 평단이 더욱 풍요로워지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최 평론가는 동국대 국문과에서 한국문학의 큰 산 조연현 선생의 문하에서 문학수업을 시작하면서 문학의 길에 들어선 이래 식지 않는 열정으로 그 길을 가고 있다. 동국대에서 소월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동국대 등 여러 대학에 출강한 바 있으며, 김수영 연구서 『물의 모험-김수영의 시』를 출간한 이후 『말씀과 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와서 지금까지 지치지 않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실로『창조문학』의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20세기 후반을 풍미하며 기승을 부리던 포스트모더니즘이 퇴조해 가면서 그 부정과 해체, 파괴의 폐해를 딛고 어떤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본래적 자아실현을 모색하는 가능적 실존으로서의 인간에 주목하여 그 실존을 문제 삼고 그것을 문학의 주요 문제로 조명하는 최 평론가의 작업은 높이 평가되고 동시에 앞으로의 도정이 크게 기대되는 것이다.
실존이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실존은 영원한 문제이지 일시적 유행에 따른 관심거리가 아니다. 또한 실존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항상 가능의 존재이며 고유의 주체로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 고유의 개성과 특질을 생명으로 하는 문학에서 실존의 문제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필자는 이러한 실존의 문제를 중심으로 삼는 비평을 실존비평이라 칭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실존비평은 필연적으로 현상학적 비평방법론을 채택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실존은 미지의 것, 가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기존의 체계와 틀을 배제하고 대상 자체에 주목하는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조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 평론가의 작업은 그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적 실존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책 『물의 모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현상학적 세계인식을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사유방식을 규정하고 통제하고 또 억압하는 어떤 제도화된 틀이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아직도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또한 알고 있다.(『물의 모험』 p.5)
또한 문학비평에 있어서 실존의 의미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진정한 비평이란 작가의 독특한 개성, 또는 독특한 존재방식이 아로새겨진 작품에 대한 순수한 공감으로부터 출발하여 작가의 바로 그 독특한 존재로서의 개성과 그 개인적 실존의 의미를 밝혀내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물의 모험』 p.5)
이러한 기본적인 비평적 입장에서 최 평론가는 김수영다운 실존의 특질을 이 세계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신 또는 존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인식과 교감에의 시도로서 파악한다.
김수영 시인에 관한 관심과 연구는 그 양과 치열성에 있어서 현대문학사상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열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작품 해설서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한계에 이른 듯하다. 그런데 그 연구 성과들을 살펴보자면, 사회역사적 관점에서의 참여비평의 관점에서의 서술, 전반적인 제재에 대한 개괄, 자유라든가 죽음과 같은 어떤 주제를 중심으로 한 작품세계에 대한 분석, 단편적인 문예사조나 어떤 철학적 개념과 주장을 통한 접근 등으로서 실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그의 시세계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현상학적 실존비평에 입각하여 김수영 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실존적 태도를 밝혀내는 최 평론가의 작업은 그런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 치밀한 작업을 통해서 그는 이제껏 드러나지 않은 김수영 시의 새로운 지평을 발견해 내고 있다.
그의「존재의 물음, 그 아름다운 여행 – 김수영 론」의 간략한 분석을 통해 그 새로운 발견들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첫째, 최 평론가는 김수영의 시 전편을 관류하는 초월적 미지의 존재 또는 세계에 대한 김수영의 갈망을 주목하고 그것을 김수영의 기본적인 실존적 지향성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미지의 초월적 실체를 환기하는 몇몇 이미지들이 김수영의 시 전 편 속에 마치 표지판처럼 놓여 있는데, 그것들은 바로 ‘바람’, ‘물결’, ‘풀’, ‘사랑’ 등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이러한 갈망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숙명임을 지적한다.
인간에게 존재를 부여하여 그를 이 세계로 현출시키고 다시 소환하는 그 존재의 근원이 되는 어떤 초월적 실체와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틈이 가로 놓여있기에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앎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지만, 보잘 것 없이 덧없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그 절대적 존재에 대한 호기심 어린 간절한 갈망은 숙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최 평론가는 이러한 존재 자체 곧 초월적 존재는 현존재 곧 존재자들을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초월자와 현존재가 사귐을 실현하는 현상학적 일원론으로서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에서 김수영의 초월적 또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추구를 추적한다.
그래서 그는 자연은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자연 속에는 초월자의 생명이 담겨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시어들을 분석한다.
‘바람과 물결’은 존재의 본질인 ‘힘’과 ‘사랑’을 담고 있다. 김수영은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 신선新鮮한 기운氣運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 / 이것이 사랑이냐”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원초적 생명력을 담고 있는 존재의 집이다.
이와 같이 최 평론가는 자연의 대상들을 초월적 존재의 생명을 담고 있는 존재자로 인식하고 사물의 내부 그 심연을 탐색하는 김수영의 시도를 추적한다.
둘째, 최 평론가는 김수영 시에서 죽음과 자유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이 긴밀히 연결되어 기독교적 구원과 같은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기를 꿈꾸는 시인의 치열한 정신을 드러낸다.
자유는 죽음까지도 각오할 때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유가 없이는 모든 행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유의 실현은 진정한 실존을 위한 절대 조건이 된다.
진정한 자유란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이어야 하므로 죽음까지도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수영의 시「폭포」를 통해 죽음과 자유가 기독교적 구원의 바탕이 됨을 분석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고매한 정신은 자유와 관계되어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육체가 곧 죄이기에 육체를 버리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육체를 버리는 일 중의 하나이다. 김수영 자신도 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김수영은 「원죄原罪」라는 산문에서 “육체가 곧 욕辱이고 죄罪”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서운 기색도 없이 곧은 절벽을 떨어지는 폭포’는 자기를 버리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죄로서의 육신을 버리는 기독의 죽음과 그를 통한 인류의 구원의 사건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최 평론가는 김수영이 우리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불사하여 모든 사악함과 죄악, 탐욕을 버림으로써 자유가 획득되는 진정한 실존을 실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초월적 존재와의 사귐이 성취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지상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셋째, 최 평론가는 김수영으로부터 실존적 시간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서 현존재에 있어서의 시간의 역사성에 대한 인식을 발견한다. 이로써 실존은 개별적 주체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단계로 확대되어 역사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는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소통하고 함께 역사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과 윤리에 대한 촉구로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절박하게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을 막연하게 멀리 떨어진 미래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박하여 선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시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수반된다. 즉, 죽음을 막연히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에 속해 있다고 할 때 시간은 일련의 점처럼 인식되어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독립된 시제로 존재하게 되지만, 이미 선택되어 선취된 것이라면 그 죽음은 지금 현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있는 것이 되어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며 지속하는 단일한 시간성에 의해 파악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시간은 무수한 독립된 점들이 아닌 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로 나타난다. 역사는 말하자면 물리적 대상적 시간이 아니라 실존적 시간이다.
그런 시간성에 의해 역사는 유의미해지며 지금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존재는 지속되며 ‘나’는 그 역사 속에 뿌리박고 있다. 김수영의 ‘환희’가 여기에 있다.
그는 김수영의「거대한 뿌리」,「미역국」등에서 이러한 실존의 역사성을 확인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역사를 통하여 영원을 꿈꾸는 것이 가능해진다. 무시간으로서의 영원이 아니라 변화하며 지속되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도 그 거대한 흐름의 일부를 이룬다.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은 이러한 영원히 지속하는 시간을 탁월하게 형상화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넷째, 최 평론가는 ‘사랑’과 ‘힘’을 김수영 시의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로서 파악하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김수영 시에 있어서 ‘사랑’과 ‘힘’은 같은 것인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의 원동력으로서 존재의 근원이 되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김수영에게 있어서 그 초월적 존재는 성경의 야훼에 가장 근접해있다.
‘사랑’과 ‘힘’이 같은 것임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인간은 풀과 같고 바람은 그 위에 부는 신의 ‘기운’이라는 점에서 성서와 김수영 시는 일치한다. 또한 그가 단적으로 “사랑은 호흡입니다”(「요즘 느끼는 일」)라고 말하고 있는데, ‘호흡’은 곧 ‘입김’이며 ‘신의 입김’이 ‘바람’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바람’, ‘힘’, ‘사랑’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수영 시에 있어서 ‘힘’은 그 자체로만 볼 때에 니체적 사유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최 평론가는 김수영이 초월적 존재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가 니체를 넘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구약 성서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음을 밝혀낸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 시는 기독교적 사유와 세계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과 ‘힘’은 같은 것이다. 결국 그것은 내부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그 무엇, 어떤 긍정적인 열정과 욕구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김수영이 말하는 ‘사랑’이고 ‘힘’이다. 그 사랑과 힘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시는 바로 ‘온몸으로 동시에 그 온몸, 곧 ’사랑과 힘‘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산문 「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시의 형식을 ‘사랑’으로 규정하였는데 ‘노래’라고도 할 수 있는 시의 형식이란 무엇보다도 어떤 간절한 갈망이자 즐거움이며 사모함, 즉 ‘사랑’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내부로부터 분출해 나오는 어떤 강력한 ‘힘’이 아닌가. 그러한 의미에서 김수영은 「詩여 침을 뱉어라」에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라는 부제를 달아 ‘힘’이 곧 시의 본질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김수영에게 있어서 ‘사랑’과 ‘힘’은 같은 말임이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참고로 성서에서 “인자가 권세의 우편에 앉은 것”(마가복음 14:62)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권세’란 ‘야훼’ 즉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는 바 ‘야훼’를 'power' 곧 ‘힘’, ‘권세’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과 이로써 ‘힘’이란 ‘사랑’과 함께 모든 존재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김수영 시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이미지인 ‘사랑’의 의미가 해명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하고도 소중한 실존적 지향성이다. 최 평론가의 글 일절로 마무리한다.
존재는 곧 사랑 그 자체이다. 성서에서는 단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16)라고 쓰고 있다. 사랑은 존재로부터 만유의 모든 존재자들에게 선사되는 선물로서 존재자들이 누리는 생명 즉 힘이며, 그것은 초월적인 실체이다. 이것이 김수영이 ‘발견하겠다’고 선언한 ‘사랑’의 정체이다.
* 홍 문 표
․고려대(문학박사), 시문학(77) 시인등단 서울기독대(신학박사),
시인, 평론가․명지대학교 명예교수, 전 오산대 총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시집『나비야 청산가자』『지상의 연가』『수인과 바다』외
․평론집『에덴의 시학』『상생과 구원의 문학』외,
․수필집『지상의 선택』외 ․학술저서『현대시학』외 20권 ․수상: 조연현문학상, 심연수문학상, 동포문학상 외
․「창조문학」대표, 한국문인교회 담임목사
․ 홍문표 문학관 운영